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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와 함께 살라 – 맥스 루케이도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
당신은 그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서 등을 돌리셨다면, 하나님께서 폭풍으로 사탄을 쓸어버리셨다면, 그 금요일의 여섯 시간은 비극적인 승리로 가득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이가 하나님이라면 해골이라 불리는 그 언덕은 당신이 닻을 내릴 수 있는 단단한 기반
암이 될 것이다.
그 여섯 시간은 여느 때의 평범한 여섯 시간이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그 금요일의 여섯 시간 동안 하나님은 지상에 닻을 내릴 지점 세 곳을 단단히 박아 두셨다. 어떤 허리케인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말이다.
닻을 내릴 지점 1. 인생은 허무하지 않다. 이 바위는 '당신의 마음'이라는 선체를 지켜 준다. 이 바위의 주된 기능은 허무와 상대주의의 물결에 맞닥뜨렸을 때 당신이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관하시며, 당신의 삶에는 목적이 있다.
닻을 내릴 지점 2. 실수는 치명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이 한 일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신다. 당신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당신을 벌할 권리가 있는 분이 당신에게 용서받을 길을 열어 주셨다. 당신은 실수하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그런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드셨다.
닻을 내릴 지점 3. 죽음은 끝이 아니다. 당신이 닻을 내려야 할 또 하나의 바위가 있다. 그것은 널따랗고 둥글고 무겁다. 그것은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었지만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 바위가 막고 있던 무덤은 일시적인 것들의 무덤이었다. 예수님은 거기서 나올 수 있음을 입증하시기 위해 그 안에 들어가셨을 뿐이다. 그분은 무덤을 나오시면서 입구의 바위를 가져다가 닻을 내릴 지점으로 만드셨다. 그러고는 그것을 '죽음'이라는 미지의 해역 깊숙이 던지셨다.
그곳에 닻을 내리면 무덤의 태풍이 부활절 주일의 미풍이 된다. 여기 그 세 개의 바위가 있다. 닻을 내릴 지점 세 곳이 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그 많은 사마리아인들 중에 왜 하필 여인이
었을까?
하나님을 갈망하는 그 많은 여인들 중에 왜 하필 다섯 번이나 이
혼한 여자였을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아무도 상종하려 들지 않는 사람이
었을까?
왜 그 지역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을까?
놀라울 뿐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비밀을 헤롯왕에게 밝히지 않으셨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밝히지 않으셨다. 로마 황궁의 주랑에서 밝히지 않으셨다.
그분이 자신의 정체를 밝힌 사람은 인적 없는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온 어느 보잘것없는 여인이었다. 속삭이듯 비밀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눈동자는 춤을 추었을 것이 틀림없다.
"내가 바로 메시아요."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구절이다. "그 여자가 물통을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다들 와서 좀 보세요! 나의 과거를 모두 말해 준 사람이 있어요!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하자..." (요 4:28-29 참조).
이 순간의 드라마를 놓치지 말라. 놀라서 동그래진 여인의 눈을 보라. 그녀가 가까스로 입 밖에 낸 말을 들어보라. "다다다다 당신이 메메메메메시아!" 허둥대며 일어나 이 싱긋 웃는 나사렛 사람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다부진 체격의 베드로와 정통으로 부딪히는 것을 보라. 그녀는 넘어지다시피 하며 서둘러 마을로 향했다.
그녀가 무엇을 잊고 있는지 알아차렸는가? 그녀는 물동이를 잊었 다. 그녀의 어깨를 휘게 한 물동이를 두고 갔다. 그녀가 지고 온 짐을 두고 갔다.
그 순간, 여러 남자를 전전하며 살아 온 삶의 수치가 사라졌다. 그 순간의 중요성이 그녀 인생의 보잘것없음을 삼켰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하나님이 오셨다! 하나님이 내게 마음을 쓰신다!"
이것이 그녀가 물동이를 잊은 이유다. 동네로 달려간 이유다.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을 붙잡고 자기가 알게 된 사실을 말한 이유다.
"방금 내가 한 일을 모두 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내 과거가 어떻든 그분은 나를 사랑하신답니다!“
*그 수업 시간에 조이는 하나님을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 눈과 죽음 없는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바버라는 그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조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갈급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손을 들었다.
"조이 선생님!"
조이는 깜짝 놀랐다. 바버라가 한 번도 질문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바버라, 말해 보렴."
"천국은 저 같은 아이들을 위한 곳인가요?"
이번에도 나는 이 작은 기도가 주님의 보좌에 닿을 때의 예수님의 표정을 볼 수만 있다면 저녁노을이 지는 광경을 천 번이라도 양보하겠다. 진정 그것은 기도였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어느 잊혀진 영혼을 기억하시기를 간구하는 진지한 기도.
교회에서 미처 돌보지 못한 가엾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구하는 기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 생명을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사용하시기를 희구하는 기도.
설교단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요양원 침대에서 드리는 기도.
검은 성직 가운을 입은 사제의 확신에 찬 기도가 아니라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되어 가는 사람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드리는 기
도.
하나님께서 가장 잘하시는 것, 즉 평범한 것을 취하여 그것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를 구하는 기도.
다시 한 번 지팡이를 들어 바다를 가르시기를 구하는 기도.
돌팔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해 달라는 기도.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는 기도.
어느 시골 소년의 도시락으로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게 해 달라는 기도.
진흙으로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 달라는 기도.
세 개의 못과 하나의 나무 기둥으로 인류의 희망을 만들어 달라는 기도.
거부당한 여인을 선교사로 만들어 달라는 기도.
*그에게 속지 말라. 그는 신출내기가 아니다. 그가 처음으로 의심의 씨앗을 뿌린 상대는 에덴동산의 하와다.
하와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 했다. 그의 반짝이는 두 눈이 수풀 속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뒤 그는 하와와 태양 사이에 앉아서 최초의 의심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1)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피켓을 들고 시위하지 않았다. “신은 죽었다"고 열변을 토하지도 않았다. 그냥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최근에 이 불청객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는가?
만약 구원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가는 게 아니라 구원받으려고 교회에 가는 당신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또다시 그 일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을지 의심한다면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께 신실한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냉소적이라면 당신의 저녁식탁에 누가 와서 앉아 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나는 당신에게 문을 걸어 잠글 것을 제안한다. 대문에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의심을 일삼는 변덕스러운 인간과 신실하신 하나님의 만남을 지켜볼 것을 제안한다.
아브라함, 아니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닭 뼈만큼이나 삼키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아브람의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이었다.
문제는 아브람에게 아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은 잠옷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채 보행보조기에 의지하여 걷는 그의 아내 사라를 건너다보았다. 잠시 닭 뼈가 목에 걸렸지만 이윽고 목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브람이 사라를 촛불이 켜진 저녁식탁에 초대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번째 약속을 들었다.
"아브람아!"
"네, 주님."
"이 모든 땅이 네 자손의 소유가 될 것이다." …
'말한 분이 진짜 하나님인지 어떻게 안담?'
아브람에게 의심의 짙은 어둠이 임한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당신이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조사를 들을 때 당신을 삼키는 것과 같은 어둠.
"악성 종양입니다. 수술해야 해요."라는 말을 들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어둠.
당신이 또다시 분노를 터뜨렸음을 깨달았을 때 당신을 휘감는 것과 같은 어둠.
마지막까지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이혼이 기정사실화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어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 속에 스며 있는 것과 같은 어둠.
우리가 의심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아주 멀게 느껴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가까이 다가오기로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종종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다. 그분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 땅은 마침내 그들의 것이 되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로 던져졌을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모세가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 대신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원했을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동안 아론이 우상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정탐꾼 열두 명 중 단 두 명만 창조주가 그들을 구원하실 만큼 강하시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삼손이 들릴라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때, 사울이 다윗을 뒤쫓을 때, 다윗이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넣으려 할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포기하실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등을 돌리실 수 있었다. 그들을 떠나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성육신하신 후 두 돌이 되기 전에 살해당할 뻔하셨을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고향 사람들이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뜨리려 했을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형제들이 조롱할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으실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베드로가 저녁식사 시간에는 주님을 경배하고 불 앞에서는 주님을 모른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침을 뱉지 않으셨다.
구경꾼들이 예수님을 쳤을 때 그분은 그들을 치지 않으셨다.
채찍이 예수님의 옆구리에 파고들 때 그분은 대기하고 있던 천사들에게 그 채찍을 휘두른 병사를 벌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손이 예수님의 손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흔들리지 않도록 그분의 손을 붙잡고 있던 것은 병사의 손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있던 것은 하나님의 손이었다. 그 상처 입은 손은 아브람 앞에서 화로와 횃불을 옮긴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아브람의 짙은 어둠에 빛을 가져다준 바로 그 손이었다. 그 손이 또다시 같은 일을 하러 온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번에 '의심'이라는 불쾌한 이웃이 나타나거든 그를 바깥으로 인도하라. 골고다 언덕으로 인도하라. 갈보리산으로 인도하라.
횃불을 옮긴 손이 거룩한 피로 '하나님은 당신을 포기하기 전에 독생자를 포기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쓴 장소인 십자가로 인도하라.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그것은 사도들이 결코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결코 말하기를 그치지 않을 이야기였다. 무덤 입구의 바위도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가시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다락방의 벽도 예수님께서 방에 들어오시는 것을 막지 못했다.
배반을 당하신 분이 배반한 사람들을 찾아오셨다. 그분이 그들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그분은 "이런 한심한 놈들!"이라고 말씀하시지않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내가 너희들을 필요로 할 때 너희들은 어디 있었느냐?"라는 식으로 설교를 늘어놓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없었던 바로 그것, 평강을 주셨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일이었다. 예수님이 나타나신 게 너무도 놀라워서,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도 "나 좀 꼬집어 보게.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라고 말할 정도였다(마 28:17 참조). 그들이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눅 24:52)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눅 24:53)
몇 주 뒤, 변화된 베드로가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말할 때 그의 옆에는 변화된 사람들이 서있었다. 베드로의 말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약 3,000명의 사람이 그의 메시지를 듣고 믿었다.
이와 같이 사도들은 신앙 운동에 불을 지폈다. 많은 사람이 죽음을 이기신 분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무리 많이 말하고 들어도 지칠 줄 몰랐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모범이 되시고 메시지가 되셨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못 박히심'에 대해 설교했다. 다른 주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아무리 많이 이야기해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마음문을 연 것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들의 죄가 그들의 구원자와 충돌했고, 구원자가 승리하셨다! 사도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은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셨어야 할 분이 그들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며, 여기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다시 오셨다는 확신이었다.
그 후 몇십년 동안 그들에게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수많은 밤을 한데에서 자고, 굶주림에 속이 쓰리고, 뼛속까지 비에 젖고, 돌에 맞아 몸이 으스러질 지경이 된다. 또한 난파를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순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억 속에는 그들로 하여금 결코 뒤돌아보지 않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바로 배반을 당하신 분이 배반한 자들을 찾아오신 장면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그들을 질책하려 하심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로 보내려 하심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그분을 잊었다고 꾸짖으려 하심이 아니라 그분을 기억하라고 명하려 하심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죄인들이 용서받은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죄의 삯은 울적함"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죄의 삯은 힘
든 하루"라고 말하지 않았다. "죄의 삯은 영적 침체"라고 말하지 않았다. 바울의 말을 다시 읽어 보자. 그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죄는 치명적이다.
그렇다면 이미 저지른 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리치료사는 죄를 털어놓으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 당신은 가방을 질질 끌고 심리치료사 사무실을 찾아가서 사무실 바닥에 돌멩이를 쏟아붓고 그 하나하나를 분석한다.
금은 도움이 된다. 심리치료사는 친절하고, 말을 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러나 상담이 끝나면 당신은 다시 가방을 끌고 가야 한다.
구들은 당신에게 우울해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은 "사람은 누구나 힘들 때가 있기 마련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면 당신은 "그리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네."라고 대답한다.
천주의자들은 모든 걸 잊어버리고 즐겁게 살라고 말한다. 효과가 있는 말 같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닦아 내고 당신의 얼굴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까지는 말이다.
지만 거울을 들여다볼 때 당신은 여전히 죄가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율법주의자들은 죄의 짐을 줄이라고 말한다. 돌멩이의 개수만큼 촛불을 켜고, 모든 돌멩이에 대해 기도하라고 말한다. 합리적인 말같지만, 나에게 시간이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혹은 내가 돌멩이의 개수를 잘못 셌다면? 결국 당신은 패닉에 빠진다.
당신은 이와 같은 죄의 짐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큰딸 제나가 네 살이 안 되었을 때 나에게 와서 고백했다.
“아빠, 크레용으로 벽에 그림을 그렸어요" (어린아이들의 솔직함은 정말놀랍다).
나는 제나를 무릎에 앉히고 어떻게 대답하는 게 현명할지 생각한 뒤 물었다.
"그게 잘한 일일까?"
"아니요."
"네가 벽에 그림을 그리면 아빠가 어떻게 하지?"
"맴매해요."
"이번에는 어떻게 할 것 같아?"
"사랑해 줘요.“
우리 모두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가?
비록 벽 전체가 우리의 실수로 도배되어 있어도 우리를 사랑해 줄 아버지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계시다. 우리가 최악일 때에도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가 계시다.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 가장 큰 은혜를 부어 주시는 아버지가 계시다.
당신의 가방이 크고 무겁다면 더욱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잘못이 치명적이지 않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은 완벽한 색을 찾아 붓으로 팔레트의 물감들을 섞는 화가이시고
가장 적합한 화음을 찾아 건반을 두드리는 작곡가이시며
펜을 들고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시인이시다.
영혼을 직조하는 장인이시고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의 예술작품은 모두 다르다. 어느 누구도 똑같지 않고, 저
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지상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그린 그림들로 가득한 화랑 속의 화가였다. 자신의 음악을 해석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작곡가였다. 자신의 시가 낭송되는 것을 듣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예술작품들은 훼손되었다. 창조되고 훼손되고 다시 창조되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만드셨지만, 사람들은 범속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빚으셨지만, 사람들은 미움과 증오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으로 사탄이 준 탐욕을 채우는 사업가를 보
았을 때, 서로를 격려하라고 주신 혀가 비수가 되어 상대방을 찌르는 것을 보았을 때,
마주 잡으라고 주신 손이 무기가 되어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것을 보았을 때,
기쁨을 흩뿌려 놓으신 눈이 증오로 불타는 것을 보았을 때..
더럽혀지고 버려지기까지 한 마음들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피로하셨을까?
이 여인에게서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보신다. 여인은 맨발에 흙 투성이다. 팔로 가슴을 가리고 두손을 절망적으로 쥐어짠다. 그런 그녀의 마음은 그녀 자신의 죄와 사람들의 분노로 누덕누덕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볼 수 있는 온유함으로 맺힌 곳을 풀고 구멍 난 곳을 메우신다.
먼저 무리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으로 시작하신다. 땅에 뭔가를 쓰신다. 모두가 그 모습을 바라본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자 여인은 안도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요하다. "말해 보시오, 선생! 우리가 이 여인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예수님은 왜 상대 남자는 데려오지 않았느냐고 물으실 수 있었다. 율법에 의하면 남자도 함께 처벌받아야 했다. 또한 예수님은 왜 수 세기 동안 서고에 처박혀 있던 율법서를 이제 와서 꺼내 드느냐고 물으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시지 않는다. 다만 고개를 들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 중에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만이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이오.” 그러고는 다시 땅에 뭔가를 쓰신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헛기침을 하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발이 질질 끌리고, 눈이 아래로 향한다. 쿵...쿵... 쿵... 돌멩이가 땅에 떨어진다.
조금씩 사람들이 물러간다. 머리카락이 희끗한 사람부터 가장 검은 사람까지 모두 그곳을 떠난다. 그들은 한꺼번에 몰려왔지만, 이제 하나둘씩 그곳을 떠난다.
잠시 후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고개를 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미소 띤 얼굴로 물으신다.
"여기 당신을 정죄할 사람이 있나요?"
여인이 고개를 들어 보니 아무도 없고 돌멩이들만 남아 있다. 그 하나하나가 오만이 묻힌 무덤을 나타내는 자그마한 묘비인 돌멩이들이다.
"여기 당신을 정죄할 사람이 있나요?"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여인은 '정죄할 수 있는 분이 한 분 계시지요.'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한다. '이분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무얼 하시려는 걸까?'
어쩌면 예수님께서 꾸짖으실 것이라고 예상했을 수 있다. 그녀를 떠나실 것이라고 예상했을 수도 있다.
둘 다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을 받았으리라는 것만은 알 수 있다. 그녀는 약속과 권고를 받았다. 바로 "나도 당신을 정죄하지 않습니다."라는 약속과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마십시오."라는 권고다.
여인은 뒤돌아서서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후 그녀를 보았거나 그녀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바로 그날 아침 예루살렘에서 그녀는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은 그녀를 보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녀를 리우데자네이루의 구세주 그리스도 상 아래에 데려다 놓을 수 있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건 내가 본 예수님이 아니에요."
그녀의 말이 맞다. 그녀가 본 예수님은 딱딱하게 굳은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본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를 갈보리 십자가 아래에 데려다 놓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분이 그분이에요. 저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녀는 분명 예수님의 손을 알아볼 것이다. 그날 돌멩이를 쥐고 있지 않았던 유일한 손, 그리고 지금도 돌멩이를 쥐고 있지 않은 그 손을 말이다.
또한 그녀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분간할 것이다. 그때보다 좀 더 쉬어 있고 좀 더 약하지만 여전히 용서를 말씀하시는 그분의 목소리,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의 눈을 알아볼 것이다. 어떻게 그 눈을 잊을 수 있겠는가? 눈물 고인 그 투명한 눈, 그녀를 당시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계획 안에서 원래 의도되었던 모습으로 보시던 그 눈을.
*첫 번째 죄수는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아마도 두 번째 죄수는 자신의 말을 신호로 첫 번째 죄수도 예수님을 비난
하는 데 동참해 주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첫 번째 죄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비난한 죄수가 들은 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옹호하는 말이었다.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냐?"
불과 몇 분 전에 예수님을 저주한 사람이 이제 예수님을 옹호하
고 있었다. 언덕 위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이 도둑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모든 천사가 눈물을 흘렸고, 모든 악마가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이 도둑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늘 사람들을 괴롭히고 돈을 빼앗던 자였다. 그가 남을 도운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인생의 모래시계에서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질 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동을 했다. 바로 하나님을 옹호한 것이다.
예수님을 옹호해야 할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 도둑보다 훨씬 더 영적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버렸다.
훨씬 더 교육을 많이 받은 빌라도는 손을 씻었다.
훨씬 더 충성스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했다.
훨씬 더 신실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가 등을 돌린 것처럼 보일 때 한 죄수가 예수님과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옹호했다.
"너는 똑같이 사형 선고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눅 23:40. 현대인의성경)
군병들이 위를 쳐다보았고, 제사장들이 잡담을 그쳤다. 마리아가 눈물을 닦고 눈을 들었다. 그 전까지는 아무도 그 죄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예수님도 그를 보셨을지 모른다. 모두가 침묵할 때 입을 연 그 죄수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셨을지 모른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마지막으로 그분께 사랑을 표현한 사람과 눈을 맞추려고 애쓰셨을지 모른다.
길을 잃고 헤매던 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온 그 순간에 예수님은 미소를 지으셨을까?
그 죄수는 문이 막 닫히려 할 때 간신히 들어왔다. 그가 한 말에는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들어 있다. 그가 한 말을 다시 살펴보라.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아도 싸지만 이분은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눅 23:41. 현대인의성경).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
우리는 더럽지만 예수님은 순결하시다.
우리는 틀렸지만 예수님은 옳으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로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 점을 이해한 도둑이 예수님께 요청을 드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희망인 예수님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이 한 것과 똑같은 요청을 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겉으로 꾸민 겸손의 말 따위는 없었다. 변명도 없었다. 오직 간절한 도움의 요청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예수님은 십자가의 가장 위대한 기적을 행하셨다. 지진보다 더 위대한 기적, 성전 휘장이 둘로 갈라진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 날이 어두워진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 부활한 성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이다.
그것은 바로 용서의 기적이었다. 죄에 찌든 범죄자가 피에 젖은 구세주에게 받아들여졌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우와!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 도둑은 왕이 빵 부스러기라도 조금 주시지 않을까 하고 성문 앞에서 모자를 쥐어짜던 걸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빵 저장실 전체를 갖게 되었다.
은혜란 이런 것이다!
*그는 일어나서 주변의 낙석과 어두워진 하늘을 쳐다보았다. 놀라서 얼어붙은 얼굴로 예수님을 응시하는 병사들을 보았다. 눈을 들어 본향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바싹 마른 입술과 부어오른 혀가 하는 마지막 말을 들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백부장이 고백하지 않았다면 병사들이 고백했을 것이다. 백부장이 고백하지 않았다면 주변의 돌들이 고백했을 것이다. 천사들과 별들, 심지어 마귀들이 고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백을 한 사람은 백부장이었다. 그들 모두가 아는 사실을 고백하는 임무는 무명의 이방인에게 떨어졌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
사막 한가운데의 에베레스트처럼 인류 역사의 지평에 우뚝 선 여섯 시간.
2,000년 동안 해독되고 분석되고 토론되어 온 그 여섯 시간.
이 여섯 시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여섯 시간은 영원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온 시간의 문이다. 이 여섯시간은위대한 항해자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닻을 내릴 지점을 알려 주려고 깊은 물속에 들어간 순간이다.
그 금요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수로 캄캄해진 인생에게 그 금요일은 용서를 의미한다.
인생의 허무함으로 좌절한 가슴에게 그 금요일은 목적을 의미한다. 그리고 죽음의 터널을 들여다보는 영혼에게 그 금요일은 구원을 의미한다.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
당신에게는 그 금요일의 여섯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