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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6;1-26 때마다 감사하십니까요? 2015.11.15.
오늘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대단한 일과 사건을 통해서 갈리기도 합니다만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갈립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은 그 기준이 대단한 것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으로 구분이 되기도 합니다. 그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 로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 뒤 다 자르고 우리의 마음과 입에서 감사라는 말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삶은 하향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감사라는 말을 가슴과 입에 자주 올리면 올릴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윤택해지고 우리의 지경 또한 넓어집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136편은 26절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알파와 오메가가 26자입니다. 삶의 범사가 다 이 안에 있습니다.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다 감사로 시작을 하고 감사로 매듭을 짓습니다. 이 것이 시136편입니다.
일본의 다께다라는 분이 계십니다. 다케다씨는 일본 제일의 투자가로서 100개가 넘는 상장기업의 대주주이며 ‘다마고 보로’로 유명한 회사의 경영자입니다. 그는 최고의 품질을 위하여 창업초기부터 보통 달걀보다 적어도 3배 이상 비싼 유정란 만을 사용하여 고객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시장을 석권한 데는 유정란을 사용하는 일 외에 특별한 비법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입니다. 그는 과자를 만드는 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생산 공정마다 “감사합니다.”라는 녹음테이프를 24시간 틀어 놓게 했습니다. 제품이 출하될 때까지 과자에는 거의 100만 번 정도 “감사”라는 말이 들려집니다. 다케다 사장의 감사 전략은 사람이 화를 낼 때 내뱉은 숨을 봉지에 담고 그 안에 모기를 넣으면 몇 분 안에 죽지만, 반대로 웃을 때 뱉은 숨에서는 훨씬 오래 산다는 한 실험 결과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는 “감사는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앞으로는 제품을 만드는 사람의 행복 도를 따지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만드는 사람의 심리적 파동이 물건으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3천 번씩 감사합니다. 라고 말해 보십시오.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질 좋은 재료도 중요하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직원들의 감사의 표현이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시장 점유율 60%를 넘어서자 그대로 가다간 경쟁상대가 없어질 거라 생각하여 오히려 역으로 애를 썼다고 합니다. 사업의 현장에서 감사를 했습니다. 여러분, 왜 1년의 한 주일을 정해서 감사절을 지킬까요? 왜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고통가운데 살아남은 것도 기적 같은 일인데 조그마한 수확 앞에 감사를 드렸을까요? 여러분, 청교도로 시작한 신앙의 삶은 언제나 감사입니다. 그래서 감사 때문에 미국이 세계 속에 열강이 되고, 감사 때문에 위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 것이 청교도 신앙입니다. 매일의 감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감사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1. 하나님의 말씀에서의 감사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생각을 하고 감사할 것을 말씀합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살 전5: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입니다. 주의 피로 구속받은 저와 여러분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감사”라는 단어의 원어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샘 줄기”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한다” 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하면 마음의 샘 줄기에서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하면 조금만 더 심도가 있으면 감사할 일인데,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감사가 없습니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샘 줄기가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습니다. 사실 지난 2015년, 지나간 세월, 지난 일주일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감사할 조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샘 줄기가 말라서 감사가 없습니다. 다윗은 시116:12-14절에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다윗은 주의 은혜가 너무나 크다고 합니다. 너무나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갚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는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하면 마음의 샘 줄기가 열리고, 샘 줄기가 열리면, 감사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더 깊은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감사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을까요?
1-1. 감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절기들 중에 3가지는 반드시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3대 절기는 무교절, 맥추절(초실절, 칠칠절, 오순절), 초막절(수장절) 입니다. 출34:23절에 보면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3차에 걸쳐서 의무적으로 지키는 이 절기의 특징은 모두가 감사 절기입니다. 이 절기가 되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며, 생활의 전반에 걸쳐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절기를 백성들에게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기억을 할 뿐 만아니라, “절기”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신앙을 자손대대로 물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드시 감사를 잊지 말라는, 지키라는 명령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위대한 영광의 수단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구속하신 성도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말씀을 하셨고, 당신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명령입니다. 삶에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1-2.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의 가치를 감사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신성을 나타납니다. 롬1:20절에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증거 하는데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대하여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제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는 큰 사건이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습니다. 과격한 이슬람 세력이 파리 중심부에서 무차별 총격과 폭탄테러로 150여명이 사망했습니다. 지난 10월31일, 이집트에서 출발한 러시아 항공기가 폭탄테러로 224명 전원이 사망한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아 또 대형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이미 정치나 경제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렀습니다. 1990년대, 20세기말에 대부분의 미래 예측가나, 미래 통계전문가, 사람들이 21세기는 지구촌이 평화롭고, 더불어 더 잘살 것이라고 예측을 했습니다. 물론 식량문제와 연료문제로 불 확실함을 이야기를 했지만, 현실은 점점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중류층의 몰락으로 인한 빈곤의 문제, 경제적 차별의 문제, 환경의 문제 등, 어느 것 하나라도 사람의 힘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그러면 극단 이슬람 세력인, IS의 배후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치나 종교나 문화는 일종의 구실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문제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상실감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특히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폭력과 살상이라는 잘못된 돌파구를 찾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경제적 차별로 인하여 진행되고 있는 계급사회에 대한 저항입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여러분, 존재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오늘 있음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창조에 의한 존재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일련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현대의 추수감사절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신천지 미국대륙으로 건너간 퓨리턴에 의해 만들어진 절기입니다, 1년 동안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입니다. 존재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시편136편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을 합니다. 왜 감사를 하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자연 만물과 지금 나를 있게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입니다. 오늘 내가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먼저 존재에 대한 감사가 늘 입술의 열매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3.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입니다. 감사는 깊은 웅덩이와 구렁텅이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 구원해 줍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감사가 주님이 나의 구원이시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무교절, 부림절, 수전절은 예외없이 선민 이스라엘이 죽음의 자리에 놓였을 때, 하나님이 저들의 생명과 민족을 구원해 주신 일을 잊지 않고, 그러한 사실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이 넘도록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종살이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하여 구원해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맥추감사절을 처음으로 드리게 된 것은,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늦가을에 보리와 밀의 씨앗을 뿌린 후 그 이듬해 초여름에 첫 추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자손 대대에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절기입니다. 부림절은 에스더와 모르드게의 간청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절기입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입니다.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신대륙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당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기술은 매우 취약했습니다. 준비된 메이플라워호는 146명의 가족을 태우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파도의 위험, 추위와 기아, 질병의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어렵게 신대륙에 도착한 계절이 겨울입니다. 그 해 겨울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인하여 영양실조, 그리고 풍토병이 온 가족을 괴롭혔습니다. 무려 44명의 가족이 죽었고, 그 나마 다음해 농사를 지었는데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영국에서 가져온 씨앗도 농사기술도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인디언 원주민들을 만나서 농사기술을 배웠고, 인디언 원주민들이 나누어 준 씨앗으로 농사를 지어 그 해 가을 얼마의 옥수수와 호박 그리고 감자를 거두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자기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인디언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 최대명절인 추수감사절입니다. 여러분, 전광목사님이 쓴 “평생 감사”라는 책에 보면 이 청교도 분들이 드렸던 7가지 감사가 나옵니다. 비록 작지만 배를 주셔서 항해를 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한없이 느리지만 끝까지 항해를 할 수 있었으니 감사합니다. 항해 중에 사람이 죽었지만 한 아기가 태어났으니 감사합니다. 항해 중에 큰 돛이 부러졌지만 파선하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여인들이 파도에 휩쓸렸지만 한 사람도 떠내려가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원주민들의 호의가 감사합니다. 그 어려운 항해 여정 속에서도 돌아가자고 하는 가족이 한명도 없었으니 감사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향한 신앙에서 구원하시고, 망망대해 바다에서 구원하시고, 신대륙에서 구원하시고, 추위에서 구원하시고, 삶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골4:2절에서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땅히 감사해야 할 사실에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도리요,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주님은 한량없는 은혜로 채워주시고 이로 인하여 드리는 영광과 감사로 주님께서는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시50: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네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금년에도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되는데 감사를 잊은 사실은 없습니까? 여러분, 생각을 바꾸는 개혁과 혁신이 필요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지고 삶이 복되게 변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가정이 행복하고, 생각을 바꾸면 신앙생활이 즐겁고, 생각을 바꾸면 나를 도와주려는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오면서 체면 때문에 하기 싫으면서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했던 것들이 있으면 꼭 그렇게 했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뇌 회로를 바꾸고 생각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충격을 받고 도전을 받을 때 생각이 바뀌고, 그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고 살 때 삶이 변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어디서 왔습니까? 지금의 서 있음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감사로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구원을 보이십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2. 최고의 가치로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감사는 무엇과 연결이 됩니까요? 역대 하 20장을 보면 “감사”로 기적을 경험한 사건이 있습니다. “모압”, “암몬”, “마온”(세일산족=에돔) 사람들이 연합하여 유다를 치러왔습니다. 연합군이 유다를 칩니다. 원래 유다는 모압 하나도 상대하기가 버거운 상대입니다. 그런데 3나라가 유다를 공격합니다. 그 소식을 접한 여호사밧은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수적으로나 전투 장비나, 용사에 있어서 현저한 열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간절히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12절에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 만 바라보나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능력도 없고 어찌할 방법도 대안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 때가 있지요? 사방팔방 우쌈을 당하고 있는데, 여건과 환경은 막혀 있는데, 능력이 없을 때 얼마나 비참합니까? 방법이 없고 대안이 없을 때 얼마나 막막합니까? 그래서 여호사밧은 모든 사람들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세웠습니다. 그때에 스가랴의 아들 야하시엘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합니다. 여러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15절에 야하시엘은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선포를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고 예언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21절에 여호사밧은 백성들과 의논하여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라는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전쟁터 맨 앞에서 찬송을 합니다. 전쟁이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성경22절은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라고 합니다. 유다백성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감사 찬송을 부름으로 위기를 면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하신 것처럼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는 위대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왜 그럴까요? 감사와 함께 사용되는 단어는 주님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연관 된 표현입니다. 그래서 시편 오늘 말씀은 감사와 영원함을 함께 사용합니다. 그런데 감사는 찬송과 연결이 됩니다. 감사는 구원과 연결을 합니다. 감사는 예배와 연결이 됩니다. 감사는 믿음과 연결이 됩니다. 여러분, “감사”라는 단어는 “찬송”이라는 말과 함께 쓰입니다. 시30;4절에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69;30절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시32;2절에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시35;18절에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은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시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라는 말은 “예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시100;4절에 감사함(토다)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테힐라)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야다)하며 그 이름을 송축(바라크)할지어다. 라고 노래를 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찬송이란 말로 가장 많이 쓰이는 대표적인 단어 세 가지인데, “야다”, “테힐라”, “바라크”가 있습니다. “야다”란 단어는 문자적으로 “손을 사용하다”라는 뜻으로 손을 펴서 “예배하다”, “경배하다”, “인정하다”(고백하다), “찬양하다”, “감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토다”란 단어는 “야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손을 펼침”, “자복”, “숭배”, “경배자들의 합창”(고백,찬송,감사의 제물)이란 뜻입니다. 즉 손을 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두 번째로 “테힐라”라는 단어는 “찬미”, “찬송”(찬양)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바라크”라는 단어는 “무릎꿇다”, 하나님을 “송축하다”, “축복하다”, “축하하다”, “찬양하다”, “경배하다”, “감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은 믿음과 함께 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송이안 되십니까? 믿음이 나약합니까? 예배가 흔들립니까?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까? 감사를 하십시오. 그러면 신앙과 관계된 모든 것이 회복이 됩니다. 2015년은 우리 모두 “감사”(야다)로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드리는 한 해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주신 삶의 현장에서 열정과 수고가 감사의 최고 가치입니다. 한국의 감리교의 첫 선교사가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 - 1902)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당시 제물포)에 내려 드린 기도가 우리의 심금을 깊이 울려 줍니다. 우리는 부활 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그런데 아펜젤러 선교사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아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902년 6월 첫 주일에 성서 번역 회의가 목포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펜젤러 선교사가 그 무렵에 경부선 철도 공사를 하던 일본인 노무자들과 문제가 생겨서 한 주일 늦게 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배에 승선합니다. 그런데 이 배는 짙은 안개로 군산 앞 바다에서 다른 배와 충돌을 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같이 가던 한국인 조사를 구하기 위해 애쓰다가 물에 빠져 사라졌습니다. 지금 아펜젤러 선교사의 후손들은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 선교사는 바다에 묻혔습니다. 목포 제일 감리교회가 바로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교회입니다. 아펜젤러는 죽기까지 주신 현장에서 열정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선교를 위하여 순교를 했던 그 사역에 대하여 감사를 합니다. 아펜젤러는 맡겨진 사역에서 가장 값진 가치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장 가치 있는 감사, 주신 삶의 영역에서 신실함과 수고함의 열정으로 감사를 드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3. 인생 끝 날 그 시간까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젊은 시절에 왕성했던 열정이 말년에 나뭇잎처럼 부스러지는 것을 봅니다. 이 시기에는 의욕도 별로 없고 영적인 열심도 엷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에게 갈렙은 노년의 가능성을 증명해 줍니다. 그는 85세였지만 산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취를 위해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수14;11절에 “나의 힘이 싸움에 감당할 수 있사오니” 갈렙은 가나안의 거인들을 밥이라고 했고 그 거인들을 완전히 좇아냈습니다. 그 나이에 헤브론을 점령합니다. 그의 추진력의 비밀은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를 쫓았더라”입니다. 여러분,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전심으로 좇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육신적인 나이가 우리의 영적인 열정을 묶어둘 수 없습니다. 잠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합니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최고의 가치로 감사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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