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9 - 서영남
십여 년 전입니다. 서른 세 살의 한창 젊은 나이인데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빨간 명찰을 가슴에 새긴 최고수(사형수) 안드레아 형제가 잠깐 만나자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최고수는 언제 자신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교도관이 찾아와서 “면회요” 하면서 감방에서 나오라고 하면 양 옆에서 붙들고 꼼짝없이 사형장으로 가서야만 형지 집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형수가 최후의 진술을 하면서 마지막 소원으로 담배 한 대 피우고 싶다고 하자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해 주었답니다. 담배를 다 피우면 죽으니까 담뱃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천천히 피웠습니다. 기다리는 것에 짜증난 집행관이 빨리 피우라고 재촉을 했다고 합니다. 담배 한 대 타 들어가는 시간조차도 기다려 줄 수 없는 인정머리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최고수 안드레아 형제를 서울구치소 교무과 상담실에서 만났습니다. 안드레아 형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언제 형이 집행될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사형이 집행되겠지요. 저는 고아라서 저의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습니다. 장례를 치러줄 가족이 없으면 교도소에서 시신을 화장해버리는데 두 번 죽는 것 같아서 싫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무덤에라도 묻히려면 묘지 값이 이백만 원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묘지라도 마련해 놓으려고 고마운 분들이 영치금을 넣어주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 같아서 그 동안 모아둔 오십만 원이 있는데 이 돈을 외롭게 감옥에 갇혀서 사는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면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 돈을 받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나누어야 잘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영치금 한 푼도 없는 형제들에게 조금씩 나눠주었습니다.
공주에서 편히 하룻밤을 보내고 공주교도소로 가는 길에 아침 겸 점심으로 바지락 칼국수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십년 전에 서울구치소에서 만났던 안드레아 형제가 이년 전에 최고수에서 감형이 되어 무기수로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공주교도소를 들어가는 길목은 가로수가 보기가 좋습니다. 지금껏 공주교도소는 대여섯 번은 찾아왔었습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습니다. 외정문을 지나서 민원실에 가서 영치금도 넣어주고 구매물도 넣어주었습니다. 공주교도소는 티셔츠도 사각팬티도 양말도 넣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칫솔과 수건도 넣을 수 있는 한도까지 넣어주었습니다.
총무과에 가서 총무계장님께 특별접견을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특별접견은 반드시 교도소 소장님의 결제를 받아야만 할 수 있습니다. 신분증을 총무계장님께 드렸습니다. 소장님의 결제를 받은 후에 담당 교도관과 함께 교도소 내정문을 들어갔습니다. 핸드백과 전화기를 내정문에 맡기고 교도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변호사 접견실은 일반 면회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소파가 있고 탁자가 중간에 놓여 있습니다. 교도관은 유리창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아 형제를 십년 만에 만났습니다. 젊은 청년은 간데없고 중년의 머리숱이 옅은 안드레아 형제와 악수를 하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얼굴이 그대로라면서 감탄을 합니다. 베로니카는 2004년 5월호 야곱의 우물 표지사진으로 봤는데 사진보다 훨씬 미인이라면서 아부도 합니다.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을 받았을 때 참으로 괴로웠다고 합니다. 혼자 감형 받았으니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난감했다고 합니다. 사른 최고수들 볼 낯도 없고, 혼자 감형되어서 미안하다고 위로할 수도 없고 그렇게 감형된 후 한 달 반을 서울구치소에서 지내다가 공주교도소로 이송되니 그때부터는 외로워서 적응하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사형수였을 때는 참으로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위로하고 도움도 주곤 했는데 무기수가 되니까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적응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고 합니다. 고아니까 세상에 친척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또 영치금을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 그저 특별할 것도 없는 무기수라는 처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는 중학교도 나오지 못했으니 공부라도 하자고 마음먹고 검정고시 공부를 해서 고입자격 시험도 쳤고, 얼마 전에 대입자격 검정고시를 쳤는데 아직 발표는 안 나왔지만 선생님과 함께 채점을 해 보니 합격권에 무난하게 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독학사로 대학공부를 하고 싶은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법자(법무부 자식) 신세인데 공부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 형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십여 년 전에 오십만 원을 모아두었다가 어려운 재소자들에게 써 달라면서 전부를 털어내어 줄 때 아깝지 않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이십만 원을, 아니 삼십만 원은 내어놓고 조금 남겨놓자고 갈등을 많이 하다가 전부를 내어놓고 나니까 마음이 무척이나 편안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안드레아 형제에게 그때 아낌없이 전부 내어주었으니 하느님께서 얼마나 안드레아 형제가 마음에 드셨을까! 이제부터는 베로니카가 누나가 되어서 공부 뒷바라지를 해 줄 테니까 열심히 공부해 보자고 했습니다.
안드레아가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희한하다”라고 합니다.
베로니카가 안드레아 형제를 의동생을 맞이했습니다. 사형수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14년을 살던 서울 구치소를 떠나 낯선 공주교도소에 온 지 2년 동안 아무도 면회 온 적도 없는데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반가운 사람도 만났고 누나도 생겼고, 하고 싶었던 대학공부도 할 수 있고... 이런 큰 선물이 또 있을까 감탄하는 안드레아 형제를 뒤로하고 내년에 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공주교도소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젠 조금이라도 집에서 푹 쉬었다가 새롭게 민들레국수집을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여름휴가 한 번 잘 보냈습니다.
첫댓글 너무 눈물이 납니다. 여름휴가 내내 전국교도소의 형제님들을 만나러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베로니카님은 또 의동생을 한분 맞이하셨군요. 지금 편지하고 도와주는 형제님들도 만만치 않을텐데.. 천사같은 두 분의 마음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