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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국역문첨록
■ 통제사(統制使) 유공(柳公) 신도비명
경오년(1690, 숙종 16) / 남구만(南九萬) 지음
우리 인조(仁祖)께서 재위하실 때에 훌륭한 무신이 있었으니, 통제사 유공(柳公)이다. 별세하신 지가 지금 거의 50년이 되었으나 묘소에 신도비가 없고, 공의 작은아드님인 승선군(承宣君)이 또한 노쇠하였으므로 속히 완성할 것을 생각해서 가장(家狀)을 만들어 나에게 글을 요청하였기에 내 공경히 승낙하였다.
그 뒤로 지금 5, 6년이 지났고 편지를 보내어 독촉한 것이 6, 7차례에 이르렀으나 아직도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감히 늦추려 해서가 아니요 실로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병자년(丙子年, 인조 14)과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적에 공은 서쪽 병영에서 명령을 받고 동쪽 산중에서 공을 세웠는데, 세월이 이미 많이 흘러 전하는 소문이 각기 다르다.
지금 군대를 다스린 방법과 승리로 이끈 책략을 비록 공의 자제와 당시의 빈객과 아전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으나 또한 몇몇은 몸소 가서 직접 본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공이 깃발을 꽂았던 곳을 발로 직접 밟아 보고 휘하에서 따르던 병졸들을 찾아가 물어보아서 반드시 믿을 만한지를 징험하려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마침 내가 명령을 받고 연경(燕京)에 가느라 두 번 안주(安州)를 지났고, 또 북쪽 변방으로 귀양 갈 적에 길이 김화(金化)를 경유하였다. 그리하여 이 두 지역 사람들이 입으로 말한 것과 붓으로 기록한 것을 자세히 얻었다. 또 직접 싸움터에 올라가서 배회하고 돌아보며 당시의 일을 상상해 보니 눈에 선하였다.
이에 비로소 감히 들은 대로 사실을 기록해서 후세에 보이니, 이는 비단 산 모양을 한 공의 무덤에 사사로이 새길 뿐만 아니라 또한 사관이 빠뜨린 기록을 보충하려는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丙子年 , 1636, 인조 14)에 서쪽 변방의 우려가 매우 심하여, 조정에서는 공을 부원수로 임명하였는데, 부월(斧鉞)을 주기 전에 말하기를 “함께 해야 하는 원수의 자리가 단독으로 처리하는 병사(兵使)만 못하다.” 하여 공을 평안도 병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공은 이전에 일찍이 두 번 이곳에 부임하여 이때는 세 번째가 되었으므로 군사와 백성들이 이미 신임하여 공을 이루기가 쉬웠다.
안주의 성이 막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에 함락된 뒤여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였는데, 공은 장병들을 거느리고 독려하여 전투하고 수비하는 도구를 닦았다. 성첩(城堞)을 더 높이 쌓고 참호를 깊이 파며 밖에는 흙으로 담장을 쌓고 담장 안팎에는 품자(品字) 모양의 구덩이를 파서 서로 연결되게 하여 적의 병졸과 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부근에 새로 성을 쌓고 흐르는 강물을 끌어 들여서 식수가 부족할 경우에 대비하였으며, 쌀과 곡식을 저축하여 몇 년 동안 충분히 지탱할 수 있게 하고 날마다 군사들을 잘 먹이며 대비하였다. 경보가 이르자 막하(幕下)의 비장(裨將)들이 권솔을 내보낼 것을 청했으나 공은 말씀하기를 “군사와 백성들의 부모 처자들과 사생을 함께해야 한다.” 하였다.
청 나라 군대가 성 아래를 지나갔으나 기병이 적어 나가서 요격하지 못하고 오직 엄하게 수비하였다. 청 나라 군주가 직접 큰 낙타를 타고 성 위를 엿보았는데, 한 조각의 깃발도 없고 한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자 말하기를 “대군이 성에 임하였는데도 이와 같이 조용하니, 이 성을 지키는 장수는 반드시 지략이 있을 것이다. 공격해서는 안 된다.” 하고, 성 밖에 풀을 쌓아 놓고 바람결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연기가 나가는 곳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으니, 이는 공이 추격할까 두려워해서였다.
이때 도성과 오랫동안 소식이 끊기니 공은 날마다 성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고 통곡하였으며 근왕(勤王)할 계책을 하였다. 영변 부사(寧邊府使) 이준(李浚)을 군영(軍營)에 남아 있게 하고 당부하기를 “삼가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는 군대를 정돈하여 5000여 명을 얻어서 순찰사 홍공 명구(洪公命耈)와 함께 서로 모였다.
정축년 정월 26일 김화에 주둔하였다가 지나가며 노략질하는 수십 명의 적을 만났는데, 정예병을 보내어 이들을 공격해서 10여 명의 수급을 베고 사람과 가축을 빼앗아서 장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음 날 정탐하는 관리가 말하기를 “적이 10리 밖에 주둔해 있다.”고 하였다.
공은 홍공(洪公)과 함께 현(縣)의 북쪽 산성에 들어가 점거하려 하였으나 홍공이 듣지 않았다. 공이 또 “적군은 많고 우리 병력은 적으니,
반드시 두 군대를 합쳐야 거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홍공은 또다시 듣지 않고는 병력을 이끌고 먼저 성의 남쪽 탑곡(塔谷)에 주둔하였다.
공은 “이곳은 지형이 평탄하고 낮아서 적의 공격을 받기 쉬우니, 높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 낫다.” 하였으나 홍공은 또 듣지 않고 다만 진영 뒤의 행렬이 엉성한 것만을 우려하였다. 이에 공은 휘하의 병력 200명을 나누어 보내서 진영의 결함을 보완하고는 스스로 그 왼쪽 백전(栢田)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 언덕은 삼면이 두절되고 한 면만 산과 연결되었으며 또한 가운데가 끊겨 벌의 허리와 같았다. 공은 숲에 의지하여 병력을 배치하고 목책을 설치하여 견고하게 수비하였다.
다음 날 날이 밝을 무렵에 적이 먼저 오른쪽 진영의 앞을 침범하여, 전진과 후퇴를 두세 차례 하였다. 얼마 후 수천 명의 오랑캐 기병이 뒷산에서 내려와 압도해서 폭풍우처럼 빠르게 두 진영의 사이를 차단하여 서로 구원해 주지 못하게 하니, 눈 깜짝할 사이에 오른쪽 진영이 이미 무너져서 홍공이 전사하였다.
적이 승세를 타고 공의 진영을 향해 달려오자 오른쪽 진영의 패잔병이 적과 함께 서로 밟히면서 들어왔다. 전영(前營)의 장수 구현준(具賢俊)이 전사하였으며 진영 안이 놀라고 소요하여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였다. 공이 높은 곳에다 말을 세우고 큰소리로 호령하기를 “내 이곳에 있으니, 동요하지 말라.” 하니, 장병들이 비로소 늘어서서 사력을 다해 싸웠다.
이곳은 지형이 아군은 굽어보고 저들은 우러러보며, 또 잣나무 숲이 빽빽하여 오랑캐 기병들이 돌격할 수가 없었고, 화살도 대부분 나무에
맞아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 우리 군대가 이를 이용하여 틈을 타서 포(砲)를 쏘았는데 탄환 한 발을 쏠 때마다 두세 명의 적을 관통하니 적이 조금 후퇴하였다.
공이 다시 부대를 정돈하고 진영을 가지런히 한 다음 군중에 명령하기를 “화살과 탄환이 많지 않으니, 낭비해서는 안 된다. 적이 우리 진영을 향해 수십 보 이내로 접근하면 내가 깃발을 휘두를 것이니, 너희들은 내가 깃발 휘두르는 것을 보고 일제히 발사하라. 이를 어기는 자는 반드시 참형에 처할 것이다.” 하였다.
명령이 내리자, 적이 군대를 나누어 번갈아 진격하였으나 그때마다 모두 죽이니 시체가 성책(城柵)에 가득히 쌓였다. 해가 저물 무렵 적이 온 진영의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진격하였는데, 백마 탄 장수가 상하로 달리면서 지휘하였다. 공은 10명의 병졸을 뽑아서 몰래 목책 밖에 넘어가 있다가 일제히 포를 발사하게 하여 그를 죽이니, 그는 과연 신분이 높은 적의 장수였다.
그러나 종일토록 고전하여 병졸들이 매우 지쳤으므로 혹 후미에서 도망가는 자도 있었다. 공은 이에 명하여 풍악을 울려 승전을 알리는 소리를 내어 병졸들을 격려하니 사기가 다시 진작되었다. 적은 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비로소 물러갔다. 정탐 나갔던 자가 돌아와서 적의 진영에서는 곡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구원군이 계속하여 와서 끝을 알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공은 말씀하기를 “오늘의 전투는 요행으로 승리하였으나 화살과 탄환이 이미 다 떨어져 다시 싸울 수가 없으니, 승세를 타고 진영을 옮겨 샛길로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공은 군중에 명하여 부서진 총을 거두어 탄약을 장전하고 화승줄을 매달되 그 길이를 들쭉날쭉하게 한 다음 그 끝에 불을 질러서 잣나무 숲 속에 여기저기 걸어 놓고 떠나가게 하니, 포성이 연속하여 울려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날이 밝은 다음 적들이 대거 몰려왔는데, 진영은 이미 비었으나 적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추격하지 못하였다. 공은 군대를 온전히 보전하고 낭천(狼川)으로 달려가 다시 병기를 정돈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는데, 적과 화친하는 일이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도성 밖에 나아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니, 조정에서는 본래의 직임으로 진영에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김화 사람들은 공을 위하여 진영의 터 앞에 비석을 세워 전공을 기렸다.
아, 우리나라는 쇠약함이 누적된 지가 이미 오래였다. 그런데 갑자기 세력이 하늘을 뒤덮는 적을 만나니, 팔도에 근왕병(勤王兵)이 곳곳마다 무너져 달아나서 한 사람도 적의 칼날에 맞서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공만은 홀로 한쪽이 무너진 위태로운 군대를 담당하고 분열된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서, 강한 적으로 하여금 죽는 자를 구원하고 부상한 자를 부축하기에 겨를이 없게 만들어서 끝내 적의 높은 장수를 잡는 공을 이룩하였으니, 이 어찌 거룩하지 않겠는가.
공은 휘가 림(琳)이고 자가 여온(汝溫)이니, 고려 때 대승(大丞)을 지낸 차달(車達)의 후손이다. 처음에는 유주(儒州)를 관향(貫鄕)으로 하였다가 뒤에 진주(晉州)로 옮겼다. 증조 휘 한평(漢平)은 성균관 진사로 좌참찬에 추증되었고, 조고 휘 진동(辰仝)은 공조 판서로 호가 죽당(竹堂)인데 세상에서는 장상(將相)의 재질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선고 휘 회(淮)는 청하 현감(淸河縣監)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선비 음성 박씨(陰城朴氏)는 사평(司評) 염(恬)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 신사년(辛巳年, 1581, 선조 14)에 출생하였는데 계묘년(癸卯年, 1603, 선조 36) 무과에 올라 훈련원 초관(訓鍊院哨官)으로 6품에 올랐다. 신해년(辛亥年, 1611, 광해 3) 이성 현감(利城縣監)이 되고, 을묘년(乙卯年, 1615, 광해 7) 성적이 뛰어나 이산 군수(理山郡守)로 발탁되었으며, 칭찬을 받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618, 광해 10) 충청도 수사(忠淸道水使)에 제수되고 또 특별한 장려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때 황주(黃州)에 성을 쌓는 일이 있어 본도(本道 황해도 )의 병사(兵使)로 옮겼는데 체직되어 북병사(北兵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과 갑자년(甲子年, 1624, 인조 2) 연달아 장흥(長興)과 남양(南陽)의 부사로 나갔는데, 이때 광주(廣州)에 성 쌓는 일이 있어 본주[本州: 광주(廣州)]의 목사로 옮겼다. 피로가 쌓여 병으로 체직되었다. 병인년(丙寅年, 1626, 인조 4) 서산 군수(瑞山郡守)가 되고 충청 병사에 제수되었으며, 체직되어 전라도 우수사(全羅道右水使)에 제수되었는데, 또다시 공로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경오년(庚午年, 1630, 인조 8) 조정에서는 가도(椵島)에 있는 유흥치(劉興治)가 장수를 살해한 죄를 물으려 하였는데, 공이 본래의 직책을 간직한 채 양서 도방어사(兩西都防禦使)를 겸하고 주사(舟師)를 거느리고서 삼화(三和)에 이르렀다. 이때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잔약하여 오랑캐 사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해서 군중(軍中)에 나아가 공을 평안 병사로 대신 임명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631, 인조 9)에 사건에 연좌되어 선천(宣川)으로 유배 갔다가 얼마 후 석방되고 계유년 영변 부사(寧邊府使)에 제수되었다. 갑술년(甲戌年, 1634, 인조 12) 다시 본도의 병사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조사(詔使)가 동쪽으로 왔다. 용골대(龍骨大)와 마골대(馬骨大) 두 오랑캐 장수가 정예 기병을 인솔하고 곧바로 안주(安州)에 이르러서 명 나라 사신을 가로막아 사로잡아 가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공이 이들에게 맹약을 저버렸음을 꾸짖어 범할 수 없는 형세를 보이자 오랑캐 장수들은 부끄러워하며 굴복하고는 병력을 이끌고 돌아갔다.
얼마 후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을해년(乙亥年, 1635, 인조 13) 부총관 겸 포도대장(副摠管兼捕盜大將)에 임명되었으며,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 경상도 좌병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체직되고 서추(西樞)에 제수되었으며, 인하여 서곤(西閫)을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이 김화(金化)에서 승전하고 돌아온 뒤에도 청 나라 군대가 그대로 안주에 머물러 있었다. 구왕(九王)은 공의 위엄과 명성을 흠모하여 성에 들어와 서로 만나 보고 전마(戰馬) 두 필을 보내 주었다. 장병들이 즉시 가서 사례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일부러 늦추다가 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갔다.
이때 공은 수행하는 자 수백 명에게 명하여 각각 전립(氈笠) 하나씩을 품속에 간직하게 하고 약속하기를 “내가 구왕과 말을 나누거든 너희들도 쇠고기와 술을 따라온 오랑캐들에게 권해서 기어이 흠뻑 취하게 하라. 그러다가 우리가 돌아올 때에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들을 불러다가 가지고 간 전립을 씌워 데리고 오라.” 하였다. 오랑캐들은 술이 깬 다음 크게 놀랐으나 또한 감히 힐문(詰問)하지 못하였다.
청 나라 사람들은 가도(椵島)를 공격할 것을 의논하고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공을 장수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공은 철산(鐵山)에 이르러 청 나라 장수에게 이르기를 “내 비록 병이 들었으나 마땅히 군대를 인도하여 선봉에 설 것이니, 싸워서 만약 승리한다면 노획하여 얻은 자녀와 옥과 비단을 내 마땅히 독점하겠다.” 하였다.
청 나라 장수는 이를 곤란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공은 병들어서 바다를 건너기 어려우며, 임경업(林慶業)도 공을 대신하여 장수가 될 만하다. 공은 마땅히 이곳에 머물러 병을 치료하라.” 하였다. 공은 이 때문에 전쟁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명 나라 조정에서는 첩자를 시켜서 이 사실을 알고 공을 표창하여 총병(摠兵)의 직첩을 내리되 바다로 오는 선박을 통하여 와서 전해 주었다.
가을에 청 나라 사람들은 심양(瀋陽)에서 공과 임경업을 초청하였는데, 공은 말씀하기를 “이 초청은 가도의 전공 때문이니, 나는 상관이 없다.” 하고는 병을 핑계 삼아 가지 않았다. 청 나라 사람들이 크게 노해서 우리로 하여금 공을 처벌하여 백마성(白馬城)에 안치(安置)하게 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638, 인조 16) 석방되어 돌아와서 또다시 평안 병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청 나라 사람들은 장차 금주위(金州衛)를 공격하려 하여 우리나라에 군대를 보낼 것을 요구하고 또다시 공을 장수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공은 일부러 걸음을 지체하여 전쟁하는 시기에 미치지 않았다. 청 나라 사람들이 노여워하자, 조정에서는 공을 체포하여 문죄하고 파직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639, 인조 17) 통제사(統制使)에 제수되었는데 경진년(庚辰年, 1640, 인조 18) 청음(淸陰) 김공(金公 김상헌(金尙憲) ) 등 여러 재상과 함께 용만(龍灣)으로 붙잡혀 갔으나 일이 마침 해결되었다. 신사년(辛巳年, 1641, 인조 19) 서추(西樞)로 있으면서 비국(備局)의 당상을 겸하였는데, 청 나라 사람들은 또다시 군대를 보낼 것을 요구하였으며, 공이 여러 번 회피함을 노여워하여 반드시 협박해서 한번 장수로 삼고자 하였다.
공이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조정에 죄를 내려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여 마침내 길을 떠났다. 김화 전투에서 전사한 오랑캐의 귀한 장수는 바로 청 나라 군주의 매부였다. 그 누이가 울면서 원수를 갚아 줄 것을 청하였으나 청 나라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군중에 있으면서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대고 꼼짝 않고 누워서는 군사를 부장(副將)에게 맡겼으며, 또 은밀히 군중에 명령하여 포를 발사할 적에 탄환을 제거하게 하였다. 청 나라 사람들이 처음에는 알지 못하다가 얼마 후 일이 탄로 났으나 하급 병졸 한 사람을 처형하고 또한 공에게 문책하지 않았다.
공이 이로 인하여 병이 더욱 심하다고 핑계대니, 청 나라 사람들이 다른 장수로 대신하게 할 것을 허락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상은 인견하여 위로하여 타이르고 초피(貂皮) 모자를 하사하고 총융사(摠戎使)에 제수하였으며,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켰다.
임오년(壬午年, 1642, 인조 20) 또다시 통제사에 제수되었는데, 전 통제사가 권력이 있는 귀인에게 많은 뇌물을 보낸 일이 있었다. 사헌부에서 공으로 잘못 알고 탄핵하였는데, 공이 변론하여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공이 군대에 있으면서 병이 심해져 계미년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병부(兵符)를 받기 전에 별세하였다.
두 번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이후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추증되었으며 고양(高陽)의 도정리(陶井里) 축좌(丑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나는 공과 내외종의 친척이 된다. 내가 기억하건대 어릴 적에 대왕부(大王父)를 모시고 있다가 공이 서도(西道)의 절도사가 되어 하직하는 것을 보니, 신체와 얼굴이 크고 장대(壯大)하였으며 기운과 도량이 엄중해서 바라보매 엄숙하였다.
공은 일곱 번 고을을 맡고 열 번 병영을 통제하였는데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며, 돌아오면 번번이 지방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공은 부모가 일찍 별세하여 녹봉으로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제사할 적에 제물을 골고루 갖추었으며, 사령(使令)들이 아무리 많아도 반드시 몸소 그 일을 감독하였다.
매씨(妹氏)가 일찍 과부가 되어 시골에 있었는데 언제나 봄가을의 의복과 조석의 공양을 종신토록 대주고 끊지 않았다. 초배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선전관(宣傳官) 기빙(起聘)의 따님이고, 후배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참봉 흔(昕)의 따님이다. 모두 부덕(婦德)이 있다고 칭해졌으며,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학생 원걸(元傑)과 현감 강원희(姜元禧)의 아내는 윤씨 부인의 소생이요, 목사 지방(之芳)과 승지 지발(之發)과 판서 이익상(李翊相)의 부인은 김씨 부인의 소생이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이 30여 명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저 옛날 병자년과 정축년에 / 昔在丙丁
큰 오랑캐가 동쪽을 침범하니 / 巨寇東猘
병사들은 약하고 장수는 겁을 먹어 / 兵孱將怯
소리만 듣고도 도망쳤네 / 望風逃潰
씩씩한 유공이 / 桓桓柳公
이때 서쪽 변방의 장수가 되었는데 / 時帥西邊
군대를 규합하여 근왕해서 / 糾旅勤王
백전에 이르렀네 / 及于柏田
오른쪽 진영 함락되었으나 / 右陣旣沒
공의 성벽 홀로 우뚝하였네 / 公壁獨屹
패전을 승리로 바꾸어 / 轉敗爲勝
적을 구릉처럼 많이 죽였네 / 殺賊如陵
적의 귀인을 효시하니 / 梟其貴人
위엄이 오랑캐들을 두렵게 하였네 / 威讋醜類
저 모든 패한 장수들 / 凡彼賁將
어찌 공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 胡不愧死
이미 절월(節鉞)을 잡고 / 旣杖戎節
또한 중추부에서 계책을 도왔도다 / 亦贊樞謨
공로가 이미 많으니 / 勞績旣多
은총과 영광 또한 특별하였다오 / 寵榮亦殊
악의(樂毅)가 조 나라 장수가 되어 / 毅爲趙役
위협하여 연 나라를 공격하게 하니 / 脅以向燕
처음에는 병으로 도중에 뒤처졌고 / 初病道落
중간에는 일부러 시기를 늦췄으며 / 中遲期愆
끝내는 탄환을 제거할 것 명하였으니 / 終命去丸
뜻은 수레바퀴에 화살촉을 두드린 것과 같다오 / 意同扣輪
총병의 직첩을 내려 표창하니 / 摠兵之褒
이 사실 동쪽 사람에게 빛나네 / 事光東人
큰 나무가 쓰러진 지 / 大樹之零
이제 반백년이 되었으나 / 今半百齡
진영과 전장에는 / 營墟戰場
남은 칭송이 어제와 같다오 / 遺頌如昨
한단의 관졸들 / 邯鄲官卒
염파의 일 알고 / 識廉頗事
빈령(邠嶺)의 퇴역(退役)한 장교들 / 邠嶺退校
아직까지 태위를 칭송하네 / 猶稱太尉
내 채집하여 시를 지어서 / 我採爲詩
영원히 새겨 후세에 전하노니 / 永垂顯刻
뒤에서 상고하여 신빙하려 한다면 / 後欲考信
거의 이것을 보면 틀리지 않으리라 / 庶此不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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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산 …… 무덤 :
당 나라 고종(高宗) 때에 대장군으로 큰 공을 세운 이적(李勣)이 죽자, 그의 무덤을 만들 적에 음산(陰山), 철산(鐵山), 오덕건산(烏
德鞬山)을 형상하여 그가 돌궐(突厥)과 설연타(薛延陀)를 격파한 공로를 표시하였다.
[주02] 서곤(西閫) :
곤(閫)은 곤수(閫帥)로 서도(西道) 곧 평안도의 병사(兵使)를 이른다.
[주03] 구왕(九王) :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열두째 아들인 섭정왕(攝政王) 다이곤(多爾袞)으로 병자호란 때에 강화도를 함락시킨 자이다. 우리나라에
서 그를 아홉째 아들로 잘못 알아 구왕이라 칭한 것이다.
[주04] 대왕부(大王父) :
증조부 또는 조부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조부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05] 악의(樂毅)가 …… 하니 :
악의는 전국(戰國) 시대 연(燕) 나라 소왕(昭王)에게 대장군(大將軍)으로 등용되어 제(齊) 나라에 복수전을 전개해서 70여 개 성을
함락하는 전공을 이룩하였다. 소왕이 죽고 태자인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악의를 의심하여 직위를 박탈하였다.
악의는 할 수 없이 조(趙) 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조 나라에서는 악의를 등용하여 연 나라를 공격하게 하려 하였으나 악의는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史記 卷80 樂毅列傳》 여기서는 이 사실을 들어 청 나라 사람들이 명 나라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유림(柳琳)이 끝
까지 명 나라를 배반하지 않았음을 비유한 것이다.
[주06] 끝내는 …… 같다오 :
《맹자(孟子)》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자탁유자(子濯孺子)와 유공지사(庾公之斯)의 일화를 인용한 것으로 여기서는 탄환을 제
거하고 명군(明軍)을 향하여 쏘게 한 일이 이와 비슷하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07] 한단(邯鄲)의 …… 알고 :
한단은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도성이며, 염파(廉頗)는 조 나라의 명장으로 진(秦) 나라의 공격을 막아 조 나라를 구원하였다.
[주08] 빈령(邠嶺)의 …… 칭송하네 :
빈령은 빈주(邠州)와 마령(馬嶺)이며, 태위(太尉)는 벼슬 이름으로 당 나라 덕종(德宗) 때 태위에 추증된 단수실(段秀實)을 가리킨
다. 경원 절도사(涇原節度使) 요영언(姚令言)이 반란을 일으키고 주자(朱泚)를 추대하자, 주자는 실직하고 있던 단수실을 불러 함
께 일할 것을 당부하였다.
단수실이 다시 덕종을 맞이할 것을 권하였으나 주자는 듣지 않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 하였다. 이에 단수실은 주자를 역적이라며 홀
(笏)로 주자의 면상을 쳐서 부상을 입히고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舊唐書 卷128 段秀實傳》당 나라의 문장가인 유종원(柳宗元)
은 단태위일사장(段太尉逸事狀)에 “내 일찍이 기(岐), 주(周), 빈(邠) 지역을 출입하고 진정(眞定)을 지나다가 북쪽으로 마령에 올
라가서 늙은 장교와 퇴임한 병졸들에게 물어보니, 그 일을 자세히 말했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백효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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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昔我仁祖臨御, 有虎臣曰統制使柳公, 下世今將五十年, 而墓道無文。 公之少胤承宣君亦已老矣, 思速其成, 具狀屬筆於余, 敬諾。 年過五六, 來徵書至六七, 而猶未有報也, 非敢緩, 實有待也。 蓋當丙、丁之際, 公受命於西閫, 建功於東峽, 而歲月已遙, 傳聞錯出。 今其治兵之方、決勝之略, 雖有子弟、賓吏之所記, 亦或非身履而親見者也。 思得足及乎樹羽之地, 面訪乎隨麾之卒, 以徵其必信, 而未有路耳。 適余受命赴燕, 再過安州, 又遷北邊, 道經金化, 備得兩地人口談與筆錄, 又身登戰場, 徘徊顧眄, 想像當日事, 如在矚焉。 於是始敢隨聞記實, 以示來許, 非但爲公象山之私刻, 亦擬夫補史之闕文也。
崇禎丙子, 西憂孔棘, 朝廷拜公副元帥, 未授鉞, 曰: “元帥之咸不若兵使之專。” 移拜平安兵使。 前曾再莅, 及是三矣, 兵民已信, 功緖有因。 州城纔經丁卯之陷, 人心凜凜。 而公率勵將士, 修戰守之具, 增堞浚壕, 外築土墻, 墻內外掘坑如品字形, 綿絡相接, 使人馬不得近附。 築新城引入江流, 以備泉渴, 積偫米粟, 足支數千, 日饗士以待之。 驚報至, 幕裨請出眷于外, 公曰: “當與軍民父母妻子同死生耳。” 淸兵過城下, 以騎少不得出要, 唯嚴爲守備。 淸主自乘大橐駝, 覘望城上, 無一片旗, 無一人聲, 曰: “大軍臨城, 安靜如此, 守城之將, 必有智略, 不可攻。” 積草城外, 因風縱火, 從煙外引去, 蓋懼其追躡也。
時京都消息隔絶, 公日登陴, 南望痛哭, 爲勤王計, 使寧邊府使李浚留營, 戒之曰: “謹守無動。” 勒兵得五千餘人, 與巡察使洪公命耉相會, 丁丑正月二十六日, 次于金化, 遇賊過掠者數十人, 送銳卒擊斬十餘級, 奪人畜分將士。 翌日, 候吏言: “賊陣于十里外。” 與洪公計, 欲同入據縣北山城, 洪公不可。 又曰: “賊衆我寡, 必合兩軍, 庶可當也。” 洪公又不可, 引其兵, 先陣于縣南塔谷。 公曰: “地勢夷下, 易於受敵, 不若移高。” 洪公又不可, 但憂其陣後行疎。 公分送麾下二百人, 以補其缺, 自陣于其左柏田之阜。 阜三面陡絶, 一面連山, 亦中斷如蜂腰, 依林木布兵設柵爲固。 翌日質明, 賊先犯右陣之前, 進退者數三。 俄而數千騎自後山馳下而壓之, 疾若風雨, 衝截兩陣之間, 使不得相救。 一瞥之頃, 右陣已潰, 洪公死之。 賊乘勝向公陣, 右陣敗卒與賊相蹂躪而入, 前營將具賢俊死之。 陣中驚擾離次, 公立馬高處, 大呼曰: “我在此, 無動!” 將士始迾立致死力。 地形旣我俯彼仰, 而柏林且密, 虜騎不得突, 矢亦多著樹不及人。 我兵馮之, 從其隙發砲, 一丸輒貫數三人, 賊少退。 公復娖隊整陣, 令軍中曰: “矢丸無多, 不可浪費。 賊到陣前數十步之近, 我當颭旗, 汝等觀我旗齊發。 違者必斬!” 令旣下, 賊分兵迭進, 輒盡斃之, 積屍齊柵。 日晡時, 賊傾陣而進, 有白馬將馳上下指揮, 公擇十卒, 使潛踰柵外, 竝發砲殺之, 果貴將也。 然終日苦戰, 士卒疲極, 或有從後亡去者。 公命作樂爲戰捷聲, 以激厲之, 士氣復振。 昏後, 賊始退。 偵者告“虜陣中哭聲
沸天, 而援軍繼來, 不知其際”。 公曰: “今日之戰, 幸而得勝, 而矢、丸已盡, 不可復戰, 不若乘勝勢移陣, 間趨南漢。” 命收軍中破銃藏藥, 繫繩參差其長短, 而爇其端, 散挂柏林而去。 砲聲續發, 竟夜賊不敢逼。 旣明, 大擧而來, 陣已空矣, 駭懾不敢追。 公全軍趨狼川, 復整器械, 向南漢, 聞和事成, 詣京城外待朝命, 命以本任還營。 金化人爲公立碑于陣墟之前, 以旌戰功。 嗚呼! 我國積衰累弱者已久, 而猝當滔天之賊, 八路勤王之師在處奔潰, 無一人嬰鋒者。 公獨當偏敗之危, 用疈裂之餘, 使强虜救死扶傷不暇, 終辦得雋之功, 不其
偉歟!
公諱琳, 字汝溫, 高麗大丞車達之後。 初籍儒州, 後移晉州。 曾祖諱漢平, 成均進士、贈左參贊。 祖諱辰仝, 工曹判書, 號竹堂, 世稱有將相材。 考諱淮, 淸河縣監、贈吏曹參判。 妣陰城朴氏, 司評恬之女也。 公生於萬曆辛巳。 癸卯, 登武科, 以訓鍊哨官陞六品。 辛亥, 監利城縣。 乙卯, 以最擢守理山郡, 以褒陞通政。 戊午, 拜忠淸水使, 又以特奬陞嘉善。 時有黃州城役, 移本道兵使, 遞拜北兵使, 不赴。 癸亥、甲子, 連出長興、南陽府使。 時有廣州城役, 移牧本州, 積勞病遞。 丙寅, 守瑞山郡, 拜忠淸兵使, 遞拜全羅右水使, 又以勞陞嘉
義。 庚午, 朝廷將問椵島劉興治戕帥之罪, 公以本職兼兩西都防禦使, 領舟師到三和, 以平安兵使孱不能制虜差, 卽軍中拜公代之。 辛未, 坐事謫宣川, 俄得釋。 癸酉, 除寧邊府使。 甲戌, 復拜本道兵使。 時詔使東來, 龍、馬二虜率輕騎, 經到安州, 聲言要明差虜去。 公責之以渝約, 示之以不可犯之形, 虜愧屈引還。 俄病遞。 乙亥, 拜副摠管、兼捕盜大將。 丙子, 拜慶尙左兵使, 未赴遞, 拜西樞, 仍承西閫之命焉。自金化戰勝還, 淸兵猶在安州。 九王慕公威名, 入城相見, 遺二戰馬。 將士請卽往謝, 故遲之, 昏後乃往, 命從行者數百人各懷一氈笠, 約曰: “吾與九王言, 汝等亦以牛、酒勸其從虜, 期以霑醉。 及還, 招我人爲虜者, 加笠而率來。” 虜旣醒大驚, 亦不敢詰。 淸人議攻椵島徵兵, 請得公爲將。 到鐵山, 謂淸將曰: “我雖病, 當以導在先, 戰若勝, 則子女、玉帛, 我當專之。” 淸將難之曰: “公病難涉海, 林慶業亦可代公將, 公宜留此治病。” 以此不與戰事。 皇朝諜知之, 褒授公以摠兵帖, 因海舶來宣。 秋, 淸人自瀋招公及慶業, 公曰: “是招也, 爲椵島戰功, 吾無與焉。” 稱病不赴。 淸人大怒, 使我罪之, 安置于白馬城。 戊寅放還, 又拜平安兵使。 時淸人將攻金州衛徵兵, 復請公爲將。 故遲其行不及師期。 淸人怒, 朝廷拿問罷職。 己卯, 拜統制使。 庚辰, 與淸陰金公諸宰同被執灣上, 事適解。 辛巳, 以西樞兼備局堂上。 淸人復徵兵, 怒公之屢避, 必欲迫脅一得爲將。 公囚首請罪於朝, 不得命, 遂行。 金化之戰, 貴將死者卽淸主之妹婿也。 妹泣請報仇, 淸主不許。 公在軍稱病篤, 堅臥委軍事於副將, 且密令軍中發砲去丸。 淸人初不之覺, 俄而事露, 戮下卒一人, 而亦不以責公。 公因稱病轉甚, 淸人許以他將代還。 上引見慰諭, 賜貂帽, 拜摠戎使, 特陞資憲。 壬午, 又拜統制使。 前統
制有厚遺權貴事, 臺章誤及, 公辨得白。 公在兵間積疾。 癸未, 拜捕盜大將, 未受符卒。 以再錄原從勳,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葬于高陽陶井里負丑之原。
余於公有中表之戚, 記幼小時, 侍大王父, 見公受西節過辭, 體貌豐偉, 氣度嚴重, 望之儼然。 公七宰邑, 十制閫, 皆著聲績, 歸輒立石以頌。 公以祿不及養爲至恨, 祭獻備物, 使令雖足, 必躬莅其事。 有妹早寡在鄕, 凡春秋之服、朝夕之供, 終身繼之不乏。 初配咸安尹氏, 宣傳官起聘之女; 後配安東金氏, 參奉昕之女。 皆以婦德稱, 葬祔公。 公有二男三女: 學生元傑、縣監姜元禧室, 尹出也。 牧使之芳、承旨之發、判書李翊相夫人, 金出也。 內外孫曾三十餘人。 銘曰:
昔在丙、丁, 巨寇東猘。 兵孱將怯, 望風逃潰。 桓桓柳公, 時帥西邊。 糾旅勤王, 及于柏田。 右陣旣沒, 公壁獨屹。 轉敗爲勝, 殺賊如陵。 梟其貴人, 威讋醜類。 凡被賁將, 胡不愧死 旣杖戎節, 亦贊樞謨。 勞績旣多, 寵榮亦殊。 毅爲趙役, 脅以向燕。 初病道落, 中遲期愆。 終命去丸, 意同扣輪。 摠兵之褒, 事光東人。 大樹之零, 今半百齡。 營墟、戰場, 遺頌如昨。 邯鄲官卒, 識廉頗事。 邠嶺退校, 猶稱太尉。 我採爲詩, 永垂顯刻。 後欲考信, 庶此不忒。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