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전당집 제11권 / 묘표(墓表)
선부군 영의정 문정공 묘표〔先府君領議政文貞公墓表. - 신익성(申翊聖) 찬(撰)
우리 동양(東陽)의 평산 신씨(平山 申氏)는 시조가 태사를 지낸 숭겸(崇謙)이며, 대대로 벼슬을 이어내려 왔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효(曉)는 정언을 지내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휘 자계(自繼)는 주부를 지내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휘 세경(世卿)은 사직서 영(社稷署令)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판서는 영(瑛)을 낳았는데, 우참찬으로 시호(諡號)는 이간공(夷簡公)이며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니, 이 분이 부군에게는 조부가 된다. 부친 휘 승서(承緖)는 개성부 도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모친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21) 정월 28일 경신일에 부군을 낳았다. 부군은 15세에 전의 이씨(全義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증 영의정 청강(淸江) 선생 제신(濟臣)의 따님으로, 뒤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부군은 16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20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21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34세에 승조관(陞朝官)이 되었고, 36세에 아경(亞卿)의 반열에 올랐으며, 40세에 정경(正卿)의 반열에 올랐으며, 45세에 숭정(崇政)의 품계에 올랐다.
처음에 성균관 권지에 보임되어 몇 해 동안 승진을 하지 못하다가 천거를 받아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고, 낭관 벼슬을 하며 이조와 병조, 사헌부, 홍문관, 세자시강원, 승정원, 의정부, 여러 시(寺)를 거쳤다. 승지에 발탁되어 동부승지에서 시작해서 도승지에 이르렀고, 이조 참의, 이조 판서, 병조 참지, 형조 참의, 대사간,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대사성)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한성부 판윤,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병조 판서와 이조 판서에 올랐다.
항상 경연관, 춘추관, 예문관 제학, 세자빈객을 겸임하였으니, 이것이 임자년(1612, 광해군4) 이전까지 역임한 관직이다.
계축옥사(癸丑獄事)에 4년 동안 방귀전리(放歸田里) 형에 처해졌고, 그 후 5년 동안은 춘천(春川)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1)에 금상(今上 인조(仁祖))이 반정하여 이조 판서와 대제학에 임명하였으며, 얼마 후에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정묘년(1627) 봄에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며, 가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무진년(1628), 6월 29일 무오일에 현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나니, 향년 63세이다. 9월 13일 경신일에 광주(廣州) 치소 동쪽 사부촌(莎阜村) 신좌(辛坐)의 언덕에 예법대로 장사 지냈다. 모친은 부군과 동년 생으로, 3월 신해일에 태어났는데, 부군보다 5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통진(通津)에 무덤을 썼다가 부친의 묘 좌측으로 옮겨 부장(祔葬)하였는데, 동당이실(同堂異室)로 만들었다.
슬하에 7명의 자식을 두었다. 장남 익성(翊聖)은 동양위(東陽尉)로, 5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면(冕), 변(昪), 경(炅), 최(最), 향(曏)이고, 딸은 홍명하(洪命夏)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차남 익전(翊全)은 아들 한 명을 낳았는데 어리다.
장녀는 현감 박호(朴濠)에게 출가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세모(世模)와 세해(世楷)이고, 딸은 이수인(李壽仁), 임일유(林一儒)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차녀는 문과 출신 조계원(趙啓遠)에게 출가하여 3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석(晉錫), 귀석(龜錫), 희석(禧錫)이고, 딸은 어리다.
삼녀는 박의(朴漪)에게 출가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는데, 어리다. 사녀는 시직(侍直) 강문성(姜文星)에게 출가하여 딸 세 명을 낳았다. 오녀는 이욱(李旭)에게 출가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어리다. 부군은 태사가 순절한 때로부터 641년 뒤에 태어났다.
18대를 지나는 동안 모두 현달하였으나, 의정부를 맡아 사류(士類)의 으뜸이 되어 국가의 안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던 인물은 오직 부군 한 분 뿐이다. 아! 부군은 일찍부터 세상에 쓰여 영욕을 두루 겪었으니, 세상에서 부군을 안다고 말하는 자들이 적지 않지만, 또한 어찌 부군을 잘 아는 자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유고(遺稿)를 열람하다가 부군이 지은 자서(自敍)를 보고는 손에 쥐고 울면서 말하기를,
“부군의 평생을 대략 볼 수 있으니, 알지 못하는 것을 거짓으로 지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글을 써서 돌에 새겨 무덤에 묘표(墓表)를 세워 후세 사람들이 진실을 상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행적, 작위, 문장, 정치와 같은 일들은 국사(國史), 봉상시의 시장(諡狀), 무덤의 묘지, 신도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註解]
[주01] 선부군 …… 묘표 : 이 글은 작자의 부친인 신흠(申欽, 1566~1628)에 대한 묘표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ㆍ상촌(象村)ㆍ현옹(玄翁)ㆍ방옹(放翁)이다.
[주02] 승조관(陞朝官) : 조회(朝會)에 상참(常參)하는 관원을 가리키는데, 신흠은 이때에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주03] 계축옥사(癸丑獄事) : 광해군 5년(1613)에 대북파(大北派)가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박응서의 옥사
라고도 한다. 이해에 조령(鳥嶺)에서 잡힌 도둑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 일당을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등이 꾀어 그들
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역모하였다고 무고하여 화옥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강화도(江華島)에 유폐(幽閉)되었다가 죽었다. 《燃藜室記述 卷20 廢
主光海君故事本末 朴應犀之獄》
[주04] 동당이실(同堂異室) : 종묘와 사당의 제도 가운데 하나로, 방 한 칸에 여러 개의 칸을 막고 여러 신위(神位)를 모시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무덤을 두 개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덤 안에 공간만 두 군데로 나누어 안장한 것을 말한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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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先府君領議政文貞公墓表。
惟我東陽之申。肇自太師崇謙。代襲簪組。入本朝有諱曉。正言。贈都承旨。諱自繼。主簿。贈戶曹參判。諱世卿。令。贈吏曹判書。判書生諱瑛。右參贊諡夷簡公。贈左贊成。寔府君祖考也。考諱承緖。開城府都事。贈領議政。妣恩津宋氏。贈貞敬夫人。以嘉靖丙寅正月庚申生府君。十五聘全義李氏。贈領議政淸江先生濟臣女。後贈貞敬夫人。府君十六發解。二十上庠。二十一文科。三十四陞朝。三十六秩亞卿。四十躋正卿。四十五而位崇班。初補成均權知。挫閼數載。薦授內翰。轉郞署,東西銓,憲府,玉堂,春坊,祕書,中書,列寺。擢承旨。自同副至都。小宰,小宗伯,小司馬,小司寇,都諫,都憲。屢長西掖。以祭酒敎胄子。尹京兆。按畿輔。陟大司馬大宗伯。常帶經筵史局提學藝文館世子賓客。此壬子以前宦歷也。癸丑禍。歸田廬四年。謫春川五年。癸亥今上反正。拜冢宰太學士。俄晉右揆。丁卯春。拜左揆。秋領三事。戊辰六月二十九日戊午。卒于位。壽六十有三。用九月十三日庚申。禮葬于廣州治東莎阜村負辛原。夫人與府君同年生。以三月辛亥降。先府君五年而逝。啓通津墳。移祔府君左。同堂異室。凡有七子。男長翊聖東陽尉。生五男四女。男冕,昪,炅,最,晑。女洪命夏。餘幼。次翊全。生一男。幼。女長朴濠縣監。生二男二女。男世模,世楷,女李壽仁,林一儒。次趙啓遠文科。生三男三女。男晉錫,龜錫,禧錫。女幼。次朴漪。生一男。幼。次姜文星侍直。生三女。次李旭。生二男。幼。府君生於太師殉節之六百四十有一祀。歷世十八俱顯矣。而都相府爲士流冠冕。繫國家安危者。唯府君一人爾。噫。府君早爲時需。備嘗榮辱。世號知府君者。蓋不少。亦豈可謂有能知府君者也。不肖孤閱遺稿。得府君所著自敍。執以泣曰。府君平生。槩可見矣。而可假不能知而辭爲。遂手書入石表于墓。俾後之攷信焉。若履行爵命。文章政事。其詳紀之國史。副在太常。誌諸幽堂。碑于神道。<끝>
낙전당집 제11권 / 묘표(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