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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 9. 2. 17:11
■ 25世 이항복(李恒福)
[생졸년]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문과] 선조(宣祖) 13년(1580) 경진(庚辰)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4위/합격연령 25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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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자상(子常), 호(號)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이고, 고려 검교정승(檢校政承) 세기(世基)의 후손으로 참찬 몽량(夢亮)의 아들이다.
1. 가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었기 때문에 이항복(李恒福)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고, 특히 죽마고우인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허다한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에 영향을 받고 학업에 열중하였다.
1571년(선조 4)에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다.
2. 출사와 관직
1575년에 진사초시에 오르고 1580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正九品)이 되었을 때 마침 선조의 《강목 綱目》 강연(講筵)이 있었는데, 고문을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이이(李珥)에 의하여 이덕형 등과 함께 5명이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 내장고(內藏庫)의 《강목》 한질씩을 하사받고 옥당(玉堂)에 들어갔으며,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었다.
그뒤 옥당(玉堂)의 정자(正字-正九品)· 저작(著作-正八品)· 박사(博士-正七品),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正七品)· 성균관 전적(典籍-正六品)과 사간원(司諫院) 의 정언(正言-正六品) 겸 지제교(知製敎-국왕의 敎書를 담당하는 관직)· 수찬(修撰-正六品)· 이조좌랑(吏曹佐郞-正六品)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에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역모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친국에 참여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신료 사이에 비난이나 분쟁이 있을 때 삼사에 출입하여 이를 중재하고 시비를 공평히 판단, 무마하였기 때문에 그의 덕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대사간 이발(李潑)이 파당을 만들려 함을 공박하였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에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그 이듬해 정철(鄭澈)의 논죄가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그를 찾아가 담화를 계속하여 정철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이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3. 임진왜란중의 활동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동안 그는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으며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동안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남도지방에 사신을 보내 근왕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여 윤승훈(尹承勳)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어 근왕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황응양(黃應暘)을 조사차 보냈는데, 그가 일본이 보내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 마침내 구원병의 파견을 보았다.
그리하여 만주 주둔군 조승훈(祖承訓)·사유(史儒)의 3천병력이 파견되어왔으나 패전하자 그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대병력으로 구원해줄 것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다.그리하여 이여송(李如松)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을 탈환, 환도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세자를 남쪽에 보내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보게 하였는데 그는 대사마(大司馬)로서 세자를 받들어 보필하였다.1594년 봄에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상소하여 이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곧 진압시켰다.
4. 중립적 국사처리
그는 병조판서· 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과 양호(楊鎬) 등도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능란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1598년에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올랐는데, 이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같은 사신인 경략(經略)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들어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뒤 문홍도(文弘道)가 휴전을 주장했다고 하여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자 그도 함께 휴전에 동조하였다 하여 자진하여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조정에서 그를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 수습하고 안민방해책(安民防海策) 16조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600년에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 예문관· 춘추관사,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 문경호(文景虎) 등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 했다는 장본인이 성혼(成渾)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는 성혼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하였다.
1608년에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해에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음모를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뒤 정인홍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배향을 반대한바 있어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유생들이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져 권당(捲堂 : 동맹휴학)이 일어났는데 그의 주장으로 겨우 광해군을 설득, 무마하여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으며, 곧이어 북인세력에 의하여 자행된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의 멸문지환,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 등 북인파당의 흉계가 속출하였고,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하여 북인파당의 원망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에 인재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와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는데,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하였다.
1617년에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에 유폐되고, 이어 왕비에서 폐위하여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해 8월에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그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을 뿐만 아니라 1659년(효종 10)에는 화산서원(花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며, 1746년(영조 22)에는 승지 이종적(李宗廸)을 보내 영당(影堂)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에 등용하게 하는 은전이 있었으며, 1832년(순조 32)에는 임진왜란 발발 네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년(헌종 4)에는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의 요청으로 봉사손(奉祀孫)의 관 등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5. 평가
이정구는 그를 평하기를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완전에 가까운 그의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 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 奏疏啓議》 각 2권, 《노사영언 魯史零言》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李舜臣) 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백사 이항복선생 화상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李恒福―외로운 賢臣―(車文燮, 人物韓國史 3, 博友社, 1965)
◇李恒福―李朝의 機智―(金聲均, 韓國의 人間像 1, 新丘文化社, 1965)
◇白沙 李恒福의 人間性―壬辰亂 때 殊勳한 逸話―(李道光, 佛敎 2―3, 佛敎社,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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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항복(李恒福)
이항복(李恒福. 명종 11년(서기 1556년)~광해 10년(서기 1618년)은 서울 출신으로 조선 선조 때의 대신이다.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청화진인(靑華眞人)·동강(東岡)·백사(白沙)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공의 아버지 몽량(夢亮)은 3조판서를 지냈고 당대의 명경(名卿)으로 칭송되던 인물이었다.
어려서는 악동(惡童)으로 골목대장이었으나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학문에 열중하더니 뒤에 학궁(學宮)에 들어가 더욱 정진하여 이름을 떨치니 당시의 재상 권철(權轍)이 듣고 만나보고서 손녀사위를 삼았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이 때에 만나 평생의 지기(知己)가 되었다.
선조 13년(서기 1580년) 문과에 급제한 다음 호당(湖堂)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호조참의에 이르렀을 이때에 왕명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공평하게 다스려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당시 사화(士禍)가 일어나 대신 정철(鄭澈)이 수괴(首魁)로 몰리어 찾아가는 이가 없었으나 공은 거리낌 없이 방문했으며 승지 때에 정철의 죄를 태만하게 처리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의 신분으로 임금을 모시고 천신만고 끝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開城)에 이르렀으며 이 때에 이조참판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두 왕자를 호위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호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때에 조정(朝廷) 대신들의 공론은 임금이 함흥(咸興)으로 피란해야한다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공은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寧邊)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여 초저녁에서 새벽까지 임금의 장전을 한음과 교대로 찾아가서 간청한 끝에 새벽녘에야 윤허(允許)를 받았다.
그러자 함흥으로 가자고 주장하던 대신들이 부모의 병이나 자신의 노구(老軀)를 이유로 호종(扈從)하기를 꺼리므로 공이 분연히 나서서 임금의 수레를 붙들고 진두지휘를 하였다.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가서 명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고 명나라의 대병(大兵)을 조선에 이르게 하였다.
임진∼정유의 전쟁 중에 병조판서를 5번이나 맡으면서 침략자를 소탕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선조 31년(서기 1598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부원군을 받고 정응태(丁應泰)가 명나라에 무고(誣告)한 사건을 바로잡기 위하여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특유의 해박한 문장으로 해명하니 명나라 황제가 오해를 풀고 정응태를 파면하였다.
이어서 영의정에 오르고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이때에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무고하므로 그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鄭澈)의 당(黨)”이라는 혐의를 받으니 자진하여 영의정을 그만두었는데,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거듭 불렀으나 ‘성만(盛滿. 벼슬과 명예가 가득함)’이 되었으니 물러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 하였다.
선조는 거듭 부르고 공은 응하지 않으니 조정이 이 일로 어수선하여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이때에 한 벼슬아치가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싫다는 사람을 왜 그렇게 자꾸 부르시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이 선조의 귀에 들어갔다. 선조가 진노하여 “대신(大臣)을 능멸하는 자를 어떻게 처벌하는지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찾아보라”고 나무라시고 그 자는 그 길로 청풍군수로 내쳤다.
이 뒤에도 공은 끝내 복직하지 않았으나 예우는 예전과 같이 했고 큰 일이 있을 때에는 공의 자문을 받았다. 광해군(光海君)이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하려 하므로 변호하다가 정인홍 등의 탄핵을 받았고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자 극력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에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후에 관작이 환급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포천(抱川)에 예장했고 북청과 포천의 선비들이 각각 사당을 세워 모셨으며 효종 때에 사액(賜額)되었다. 공은 천성이 효우돈목(孝友敦睦)하고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는 40여년 동안 당쟁(黨爭)에서 초연하였다. 저서는 『백사집(白沙集)』2권 · 『북천일록(北遷日錄)』2권 · 『주소계의(奏疏啓議)』2권 · 『사례훈몽(四禮訓蒙)』1권 · 『노사영언(魯史零言)』15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