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선교로 돌아온 코미디언 이순주씨
“5원짜리 동전 하나면 오후내내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실컷 보고, 그러다 저녁 방송시간에 맞춰 만화방 한켠에 보물처럼 모셔진 흑백 ‘테레비’앞에 모여 앉던 시절, 그때를 아십니까"
즐길거리래야 고작 텔레비젼 보는 일 말고는 없던 그 때, 14인치짜리 브라운관이 펼쳐내는 인생의 히로애락에 울고 웃던 우리들은 ‘웃으면 복이 와요’를 기억한다.
69년 MBC 개국과 함께 시작된 이후 장장 16년간 장수한 이 프로에서 막둥이 구봉서, 비실이 배삼룡, 살살이 서영춘, 땅딸이 이기동씨와 더불어 여성으로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대한민국을 웃겼던 코미디언 이순주, 그녀가 이제는 희끗희끗한 흰머리에 세월의 연륜이 녹아든 ‘누님’의 얼굴로 LA로 돌아왔다. 미주기독교방송 방송위원으로 예전의 기지와 재담으로 방송선교의 일선에 섰다.
‘웃으면 복이 와요’ ‘백만인의 무대’와 더불어 라디오에서 송해와 함께 진행한 ‘싱글벙글쇼’ 등 국내 유일의 여성MC이자 코미디언으로서 방송3사를 오가며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인기를 구가하던 80년, 방송차 들른 LA에서부터 시작된 미국생활이 어느덧 20년을 훌쩍 넘겼다. 그동안 버지니아, 뉴욕, 시카고, 애틀란타 등지를 떠돌며 나이트클럽, 레스토랑운영 실패를 거쳐 그야말로 다 늦게 하나님을 영접하고 신학대학을 거쳐 전도사가 됐다.
“악극단 무용수의 춤사위에 반해 다니던 대학(서라벌예대 문창과)도 팽개치고 ‘제일소녀가극단’에 들어간게 인생의 첫단추였던 셈이죠, 그땐 배를 곯아도 좋고, 그저 무대에 설 수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굴곡많았던 인생길을 헤쳐오느라 시련도 많았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인생의 정점에서 청소, 세탁업, 식당종업원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한결 편안해진 ‘큰 누님’의 얼굴로 다시금 우리들 앞에 섰다.
지난 해까지 머물렀던 애틀란타 시절 하나님을 영접하고 내친 김에 신학대학을 마쳐 전도사가 됐다. 애틀란타에서부터 시작한 방송선교가 그의 마지막 사명이다.
동료 방송인인 권태산 목사에게 방송조언을 구하는 이씨, ‘싱글이 송해’와 진행했던 ‘벙글이 이순주’의 싱글벙글쇼는 초대 MC로서 8년여동안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73년(오른쪽)과 지금, 34년의 세월이 그 얼굴을 스쳤지만 해맑은 그 웃음은 여전하다.
모처럼 왕년의 흑백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위키 리, 이순주, 이근찬, 배연정, 김영남
잘 나가던 시절에 녹음한 코미디음반, 단짝 콤비였던 송해와 같이 녹음한 레코드가 몇 장인지도 모를 만큼 많았고, ‘말죽거리에서 온 사나이’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다수의 코미디영화도 찍었다.
(2007.3.21 미주중앙일보)
코미디언 서영춘씨와 취입한 코믹 음반 '웃음따라 요절복통'
이순주
1960년대와 1970년대 안방극장에서 사랑을 받은 여성 MC이자 코미디언 이순주(65)씨가 현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방송인이자 전도사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 씨는 미주기독교방송에서 생방송 토크쇼 ‘아름다운 만남’과 시사 프로그램 ‘오후의 데이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씨는 1960년대 극장의 쇼 무대를 쫓아다니며 대역으로 출연해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어 1970년 아시아가요제 당시 함께 사회를 보기로 한 배삼룡 씨가 앓아누우면서 혼자 가요제를 진행한 것이 계기가 돼 전성기를 맞았다. ‘싱글벙글 쇼’ ‘웃으면 복이 와요’ ‘유머 1번지’ 등에서 MC를 맡았다. 잠시 방송 일을 쉬다가 벌인 사업 실패로 고생하던 그는 1980년 미국공연팀을 따라 미국에 갔다가 눌러앉았다.
그는 한때 건강 악화와 사업 실패 등으로 좌절했으나 1995년 애틀랜타신학대에 입학해 전도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말했다. 이 씨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밑바닥 인생까지 경험해 봤으니 이제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도사로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이순주 씨가 미주기독교방송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내가 쓰일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죠. 재산도, 명성도 다 잃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온 국민이 가난을 떨쳐버리기 위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힘겹게 살아야 했던 지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최초의 여성 MC이자 코미디언으로 맹활약하며 웃음을 선사했던 이순주(65)씨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전도사로 새 삶을 펼치고 있다.
현재 코리아타운내 미주기독교방송(AM 1650KHZ)에서 방송위원으로 재직하며 오전 8시 뉴스와 10시의 생방송 토크쇼 '아름다운 만남', 오후 3시의 대담 및 시사프로 '오후의 데이트'를 진행하고 있는 이씨는 수시로 간증을 다니며 좌절의 끝에서 거듭난 삶을 풀어놓고 있다.
서라벌예대 1학년 재학중 제일소녀가극단 단원 50명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응시해 뽑혔으나 6개월만에 흥행 실패로 가극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숨겨진 '끼'를 발견한 이씨는 이후 송해-박시명,구봉서-후라이보이,서영춘-백금녀,명진-박응수 등 코미디언들이 콤비를 이뤄 활동하던 극장 쇼무대를 쫓아다녔고 가끔 대역으로 출연하면서도 그들의 대사를 그대로 재연, '똑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중 1968년 월남 공연은 그의 인생을 스타덤에 올려놓는 계기가 됐다. 사회를 보면서 노래와 무용, 코미디를 선보이자 군인 팬들이 뜨기 시작했고 1970년 시민회관에서 열린 아시아가요제 때 함께 사회를 보기로 했던 배삼룡씨가 앓아누으면서 혼자 가요제를 진행, 첫 여성 MC로 기록됐다.
당시 가요제를 지켜보던 TBC방송의 김경태 위원은 이씨를 발탁, 라디오 프로그램인 '웃음의 파노라마'를 신설했고 이씨는 송해씨와 호흡을 맞춰 단숨에 인기를 독차지했으며 이후 8년간 방송된 '싱글 벙글쇼'를 비롯 '웃으면 복이 와요' '유머 극장' '유머 1번지' 등 거의 모든 공개방송 프로에 출연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높아가는 인기 만큼 연평균 3차례 입원해야 할 정도로 위장병은 깊어졌고 1978년에는 1년간 절에서 요양하기도 했다. 연예계를 떠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이씨는 1980년 미국공연팀에 합류, 미국을 방문하면서 그대로 눌러앉았고 1981년에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한동안 몸과 마음이 편안했으나 몸속에 꿈틀대던 '끼'는 그를 다시 한국으로 내몰았다. 1985년 KBS 라디오에서 'LA에서 온 이여사'라는 프로그램을 맡았고 이후 출국과 재입국을 반복하다 1991년 아예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한국에서 여러 사업을 시작하다 결국 부도가 나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도피 과정에서 여동생의 권유로 교회를 찾았다가 기독교인이 된 그는 우여곡절끝에 1994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정착, 나이트클럽을 열었지만 얼마 가지않아 쫄딱 망했고 절망의 바닥에서 종교적 구원으로 새로운 빛을 발견했다.
1995년 애틀랜타신학대에 입학, 2년을 수료한 그는 다시 4년제인 임마누엘신학대를 다닌 그는 마침내 과거의 영욕을 모두 털어낼 수 있었고 전도사로서 새출발한뒤 올 2월 LA로 자리를 옮겼다.
오전 6시30분 방송국에 출근해 퇴근할 때까지 하루 평균 12시간씩 근무하고 있는 이씨는 3차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질곡의 삶에서 얻은 지혜를 구수한 언변으로 풀어놓아 청취자들의 반응은 뜨겁기 만하다.
그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밑바닥 인생까지 경험했기에 더 이상 좌절할 게 없다는 이씨는 "나를 쓰고자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것"이라며 "하느님 앞에서 교만을 떨칠 수 있었기에 행복을 되찾았으며 이달 말에는 버지니아주에서 간증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첫댓글 오랫만에 보는 이 순주씨이군요....세월에 무상함을 엿볼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