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독립운동은 헛발질, (1) 오키나와에 살아 있는 조선의 흔적
오키나와 독립운동은 헛발질, (2) 조선에는 조공, 일본에는 공납
오키나와 독립운동은 헛발질, (3) 독립의 염원을 간직할 불씨 [계속]
조선에는 조공, 일본에는 공납
심의섭(명지대 명예교수)
고려조의 류큐와의 무역은 창왕 원년(1369) 8月에 류큐국 중산왕 삿도(察度)가 사람을 보내어 피로인(被虜人)과 방물을 헌상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15년(1415), 류큐가 처음으로 조선에 사신 파견한 이후 조선은 류큐를 ‘해동의 예를 아는 나라’로 인식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조선–류큐 관계는 명나라 중심의 질서 안에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조의 외교정책의 근간은 사대교린 정책이었으므로 대명정책은 사대정책이었고, 대류큐정책은 교린정책이었다. 그리고 조선은 왜, 야인 및 남만에 대해서는 교린정책을 추구하여 이러한 나라들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복속을 요구한 반면 왜인들은 이를 통하여 경제적인 실리추구를 우선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대외무역은 조선의 쇄국정책의 영향으로 고려시대에 비하여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조공무역은 외교와 무역의 결합이다. 명목상 조공(朝貢)이지만, 실제로는 국가 공인 무역이다. 류큐 사신은 ‘조공 사절’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하였고, 조선은 이에 대해 책봉국에 준하는 예우를 제공하였다. 대체로 2~3년에 한번 오갔으며 조선은 횟수와 인원을 엄격히 제한하여 사신 수가 많을 경우 감축 요구하였다. 류큐의 조선에 대한 조공품은 류큐의 해양·열대적 특성이 반영된 물품들로서 유황, 조개류, 진주, 향료, 해산물 가공품, 남방계 직물로서 류큐는 자체 생산품과 중개무역품을 함께 조공하였다. 조선의 류큐에 대한 회답·하사품으로는 받은 조공보다 훨씬 큰 가치의 물품을 지급하였다. 면포, 비단, 종이, 철기, 서적, 도자기, 의약품, 예복, 악기 같은 것으로 조선은 이를 ‘은혜의 하사’ 형식으로 제공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 주도의 무역 수익 구조이었다.
류큐는 조공 외교를 활용해 무역 통로 확보하여 조선과 일본 사이의 중개자 역할도 하였고, 명나라에서 받은 책봉 권위를 외교 자산으로 활용하여 작지만 외교적으로 고급화된 해상국가로 기능하였다. 1609년 사쓰마번(薩摩藩)의 류큐 침공으로 조공무역의 쇠퇴했어도 류큐는 일본에 공납을 하고 지배를 받으면서도 명·조선과의 조공은 유지하여 이중적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국제정세변화로 일본의 영향력 확대되면서 17세기 이후 조선–류큐 조공무역은 점차 중단되었다.
* 이글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沈義燮,“朝鮮初對琉球經濟と貿易に關する硏究(1392-1494)”, 韓國沖繩學會 第1次 國際學術大會, 大宇財團 ビル3層, 1998.11.16, ソウル, 韓國;
“심의섭 교수 발표 요지 및 종합토론 답변요지”, 우리대학 개교 50주년기념 오키나와 국제학술대회 참관기, 명대신문, 1998. 11. 23
한국측의 연구(요체)
'조선의 정사 '실록'을 바탕으로 명(明)・선(鮮)과 류큐의 조공무역을 했다. 심의섭 명지대 교수는 중산왕(中山王) 시대에 처음으로 사자를 고려에 파견한 것은 1369년으로 보았다. 명・선측은 조공의 일환으로 류큐의 사자를 예우하였고, 무역의 이윤을 찾아 하카타(博多) 등지에서 가짜 류큐왕국의 사자가 왔었다는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류큐 측은 조선의 표류민, 왜구 등에 붙잡혀 류큐에 팔려온 조선인들을 송환했고, 그 일이 양국 간 교류를 심화시켰다고 한다. 반면, 산남왕(山南王)의 아들 온사도(溫沙道)가 중산왕을 따라 15명의 사신과 함께왔다는(1398년) 기록도 있다고 하였다.
당시 조선기술이 이웃 나라에 비해 다소 뒤 떨어져 있던 조선은 기술을 취득하기 위해 해양국 류큐로부터 조선공들을 받아들였고(1433년), 오보야코(吾甫也古)와 삼보라(三甫羅)가 전함을 만드는 등 기술향상에 공헌하였으나, 병선을 비교하면 중국이 1위, 류큐가 2위가 확실하였다.
무역에서 류큐측이 향목과 사탕, 서각, 천축 등을 선물하고, 조선측은 목화와 삼베 외에 불교 경전류를 답례품으로 삼았다. 조선은 류큐측에 요구한 후추씨앗(こしょうの種, 胡椒種子)을 받았지만 재배되지 않았다. 이러한 무역은 규모가 커지면 진귀한 물건부터 일상용 물건으로 변화하고, 물건도 다양화되고 상담의 트러블도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 이 글은 필자가 ‘조선과 오끼나와의 심포지움(朝鮮ど沖繩シンポ)’에서 발표한 아래와 같은 기사를 요약한다.
“朝鮮ど沖繩シンポ”、沖繩タイムズ、1998.12.11. p.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