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지는 그 숲 속에 - 수도산 등산기
산행일시 : 2002년 11월 17일
참석자 : 권영한, 이영미, 류병하, 서영란, 이충호, 김형태, 김형철, 류영희
산행장소 : 거창군 가북면 심방리 수도산(1,310m)
컴컴한 새벽(4시 40분)에 삐리릭, 삐리릭 하는 자명종 소리에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이런 열성으로 다른 일을 하면... 무엇 한가지라도 뚫어내지 않겠느냐! 하면서. 산행 간사님이 며칠 전부터 인터넷으로 참석여부를 물어 왔다. 그 투철한 직업의식(?)이 돋보인다.
새벽 5시 30분 약속 장소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대원들이 씩씩하게 서 있다. 일기예보에는 눈·비 소식이 있다던데.. 그래도 용감하게 우리가 가보지 못한 그 산으로 가 보는 거다.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산청 휴게소에 도착하니 7시가 좀 넘었다. 쇠고기 국밥, 산채비빔밥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고속도로를 달렸다. 실력있는 기사들이(YH, CH) 운전하는 차 2대에 부부들이 나누어 타고
날이 밝아오면서 바깥 풍경들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추수를 마치고, 고요히 누워있는 들판과, 단풍이 스쳐간 야트막한 산들...
수도산은 거창군 가북면 심방리 쪽으로 갈 수도 있고, 김천쪽으로 갈 수도 있단다. 우리는 산청을 거쳐 거창 가북 방향으로 왔다.
심방에 도착하니 8시 40분이다. 심방에서 출발하여 수재리에서 어느 할머니에게 수도산 가는 방향을 물으니 "거기는 말라꼬 가노?" 하더란다. 글쎄, 이렇게 추운날 따뜻한 방에나 있지...
길 옆 임시건물에 "개곡 입구, 개곡 갈리소"라고 적혀 있어서 쳐다보고 웃었다.
임도(林道)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산길을 콘크리트로 포장하여 닦은 길이다. 산의 관리를 위해 만들었다지만, 너무 과잉으로 손을 대었지 않나 싶다. 등산을 하는 것인지, 포장길 따라 걷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임도를 따라 한참을 가도 산꼭대기가 어느 방향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지난해 수해가 스쳐간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길 자체가 무너져 내린 곳이 나타났다. 망설이다 무너진 길을 어렵게 우회해 통과했는데.... 그 길은 얼마가지 않아 산중턱에 막혀버렸다(임도를 개설하다가 중지한 듯함).
"이리갈까? 저리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유행가 가사처럼 헷갈리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는 위쪽으로 쳐다보면서 자꾸 걸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한참을 헤매어도, 이산에는 우리 일행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산을 우리가 통째로 전세를 낸 것 같다. 돌아와서 원점에서 본래의 등산길을 찾기로 했다.
드디어 수도산 이정표를 찾았다. 그 시각이 11시 30분 결국 2시간 가량 방황한 셈이다. 모두들 어린아이처럼 환호하며 이정표 앞에서 기념 촬영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신속한 행동, 빠른 판단력' CH씨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다시 힘을 내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발길을 옮긴다. 얼마가지 않아 군데군데 산사태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몰골사납게 파헤쳐진 계곡, 넘어져 흉칙하게 엉켜져 있는 나무들... 수해 당시의 처참한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기에 망정이지... 비가 내린 것이 아니고 동이채로 퍼부은 것 같았다.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저쪽으로 김천쪽에서 올라오는 산길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 쪽에서 올라왔으면 좀더 수월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등성이 오른쪽으로 난 길에 리본이 유난히 많이 달려있다. 단자봉가는 길이리라 생각하고 왼쪽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양각산 ↔ 심방리"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 길이 과연 수도산으로 가는 길이 맞는지 또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어렵게 한 걸음 한걸음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아래쪽에는 포근하고 화창했었는데 갑자기 눈발이 날린다. 예식장에서 신랑 신부를 위해 뿌려주는 하얀 가루가 연상된다. 체감 온도도 엄청 낮아졌다. 뒤돌아보면 흐릿함 속에서도 들어나는 웅장한 산세들... 날씨가 조그만 맑았더라도 얼마나 좋았을까....
정상에 도착하니 13시가 다 되었다. 거기에는 산행온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 1327m의 수도산이 거기에 있었다. 물안개가 발아래로 깔려있어서, 산아래 풍경은 하얗게 가려져 있었다. 우리는 신선이 된 느낌이다. 시장하던 차에 양주까지 곁들이면서, 점심을 먹으니 꿀맛이다. 뜨거운 커피맛이 더욱 일품이다.
식사를 마치자 마자 바로 정상에 올랐다(13시 30분). 눈보라로 인한 추위와 시계불량 때문에 정상에서는 산세를 둘러볼 여유를 가지지 못한 체, 몇 컷의 사진으로 만족하고 바로 하신길을 서둘렀다.
"눈은 내리지요, 바람은 세차게 불지요, 길은 미끄럽지요, 경사는 급하지요."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이심전심으로 천천히 밀어주고, 끌어주고 하면서 한참을 내려와서 휴식을 취하였다. 이제 정신이 좀 차려졌다. 여기가 삼거리인데, 약간 오른쪽으로 직진하는 길이 있는데 이 길로 가면 오른쪽은 김천시 대덕면 왼쪽은 거창군 웅양면이라 짐작되었다. 왼쪽으로 난 길을 양각산 가는 길이라 확신하고 그 길로 접어들었다.(너무 빨리 왼쪽으로 들어섰음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날씨가 흐려 양각산이 어디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곳까지 갈지는 새로 생각해보자고 한다. 산봉우리 2개를 하루에 오를 수 있을지. 낙엽이 숲길을 덮어서 지금부터는 길이 어디인지 애매해진다. 우리가 등산을 하던 여느 곳보다, 돌이 적고 낙엽이 많아서, 길을 밟는 발의 감촉이 아주 폭신하지만... CH씨는 앞장서서 이리저리로 길을 찾아본다.
14시가 좀 넘으니 길이 또 낙엽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CH씨는 앞장서서 가면서, '심봤다'를 외친다. 사람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누군가 버린 휴지조각을 보고 심봤단다.(한참후에 오래전에 버린 음료수 캔을 하나 더 발견했다). CH씨에게 호르라기를 맡겨야겠다고 목에 걸어준다.
낙엽이 발목까지 쌓여 있어서, 스틱을 세게 짚으며, 그이의 손을 잡으며 길을 찾는다. 이때부터는 낙옆에 뭍혀 길이 안 보인다. 아마 길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야가 흐려 멀리는 보이지도 않는다.
한참 내려오다가 숲속 한가운데서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를 방향을 결정해야 했다. 아니면 수도산으로 다시 올라가 왔던길로 가자는 의견도 나온다. 모두들 침묵 가운데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쳐지지도 않고 잘들 협조를 한다.
수도산으로 돌아가기는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하다. 깊은 산속에서 길 판단이 잘 안서면 아래쪽으로 내려가라, 물흐르는 계곡을 찾아라라는 말이 있단다.
아무래도 왼쪽으로 가야 우리가 주차한 쪽으로 내려가겠다고 한다. "우리네 인생살이처럼 한치 앞이 잘 안보인다"고 철학적인 말도 나온다. 그러나, 서로의 친밀감과 그 동안 다져진 등산실력을 믿으며 한 발자국씩 아래로 내디디었다.
15시가 다 되어서 회장님이 산아래에서 위쪽까지 올라온 하얀색 줄(고로쇠 수액 채취용인 듯)을 발견했다고 외친다. 그것을 기준 삼아 낭만적(?)으로 내려오다가 착실히 계곡 옆으로 해서 내려온다.
그때부터는 딱딱한 계곡의 바위를 내디디며 옆으로 누운 나무를 넘으며 아래쪽으로 향한다. 16시가 거의 다 되어서, 아침에 보고 지났던 그 '갈리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아침에는 그냥 웃고 지나쳤는데, 지금 다시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차에 오르니(16 : 45) 무사히 내려온 것이 꿈만 같다. 길을 잃어도 불평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내려온 우리 대원들이 대견하기만 하다.
오는길에 가조면의 온천탕에서 심신의 피로를 말끔히 풀었다. 가조에서 88고속도로를 접어들려고 하니 차량행렬이 줄을 지어 밀려 있다. 묘사 갔다오는 차량들이란다. 거창 휴게소 부근에서 차량을 돌려 다시 거창쪽으로 달렸다.(오늘은 하루종일 왜 이렇게 둘러가야만 되는 일이 많은지...).
거창에서 합천땜, 합천, 초계, 창녕을 거쳐왔다. 꼬불꼬불한 국도는 밤 운전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막히지 않고 올 수 있다는 점을 위안 삼을 수 밖에 없었다.
20시 40분 영산 휴게소에 도착해서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었다. 오면서 "배 길들였다"라고 한다. 우리는 차에서 절편으로 허기를 떼웠는데.... 나누어 먹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웠다.
21시 20분에 휴게소를 출발하여 22시 가까이에 집에 도착했다. 창원에 들어서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수도산은 안내 표지가 적어 우리가 산행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도 리본을 준비해 달아 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어 본다. 집에 오니 우리 아이가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한다. 산에서 헤매던 이야기를 해 주니 "개구리 부부가 될 뻔했네"라고 한다. 무사히 귀환했음을 진짜로 감사하면서.... 두 기사님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