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0월 20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위로’ - 3. 위로 시선을 향하는 존재(ANTHROPOS)
본문 : 시편 123편 1절(1~4절)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 내가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새번역>
혹시 서영은이라는 가수를 알고 계십니까? 이 가수는 2003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눈사람’의 OST를 불렀는데 그 곡이 아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자신의 정규앨범 4집의 수록곡이기도 했지만 드라마 OST로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 노래는 제목 또한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혼자가 아닌 나’입니다. 그 때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입니다. 특히 이 곡의 가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는데, 그 가사 중 한 구절을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 욕심이 많아서 울어야 했는지 몰라 행복은 늘 멀리 있을 때 커 보이는 걸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 와도 모진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을 비추니까’
이 가사 때문일까요? 이 곡 이 후로 많은 사람들이 힘이 들 땐 하늘을 봐야 한다고 마치 하나의 공식이 되어 버렸고, 이 노래 뒤로도 많은 가수들이 힘이 들 땐 하늘을 보라고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듯 노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노래 전에도 하늘을 바라보라는 수많은 노래들이 존재했었지만 이 혼자가 아닌 나를 기점으로 그 공식이 더욱 더 확고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노래뿐 아니라 드라마, 영화, 뮤지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들면 하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힘이 드는 순간과 하늘을 연결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면 왜 힘이 들면 하늘을 바라보라는 말이 이렇게 이질감 없이 편안하게 받아 들여 지는 것일까요? ‘힘이 들 땐 일단 먹어! 힘이 들 땐 일단 자! 힘이 들 땐 쇼핑을 해! 힘이 들 땐 바다를 봐! 힘이 들 땐 무엇을 해!’ 라고 하는 것 중에 가장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심지어 힘이 들 때 하늘을 보면 이상하게 위로를 받게 되고,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마치 다시 힘을 얻은 듯 툭툭 털고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에 대한 하나의 답을 인간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헬라어로 인간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안드로포스(Anthropos)라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오스, 그 다음이 주란 뜻의 퀴리오스 순입니다. 하나님이나 주님보다 신약 성경에서 훨씬 더 많이 사용된 이 단어는 과연 어떤 뜻을 가진 단어일까요?
안드로포스(ανθρωπος)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위로’라는 뜻의 ‘아나’와 ‘얼굴’이라는 뜻의 ‘프로소포스’가 합성된 말로 ‘위를 쳐다보는 자’,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 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 보통 사용됩니다. 대체적으로 이 의미는 동물과의 구별을 나타내면서, 인간은 위를 쳐다보며 사는 존재이고, 짐승은 땅을 내려다보고 사는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성경적으로 표현하면서 사람은 하늘에 속한 존재고, 짐승은 땅에 속한 피조물이라고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힘이 들 땐 하늘을 보는 이유가 우리는 원래 하늘을 보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 존재가 사람,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삶과 시선은 아주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은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살아지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를 바라보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선이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위를 향하는 존재로, 즉 위로 시선을 향하는 존재로, ‘안드로포스’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을 헬라어는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이 되도록 처음부터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왔고, 하늘로 돌아가야 하기에, 하늘을 바라보면, 절망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얻게 되고, 하늘의 음성을 듣고, 하늘의 위로를 얻어 다시 힘을 얻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CCM 가수이자 오륜교회에서 찬양을 담당하고 있는 김명선목사가 만든 찬양 ‘시선’이라는 곡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애창하고 은혜를 받는 곡입니다. 왜냐하면 시선의 가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식에 대해서 너무도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는 순간, 그 가사로 인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 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시선이라는 찬양에서는 하늘을 보자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자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자고 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선은 위를 향하고, 하늘을 향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시선을 드린다는 것은 하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우리의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한다는 가사가 진짜 우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노아가 알아서 방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어떻게 방주를 만들지 방법을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방주의 크기를 알려 주십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알려 주신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방주 3층의 천장에서 아래쪽으로 약 45센티미터 되는 부분에 창문을 만들라고 하신 내용이었습니다.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창세기 6장 15~16절, 개역개정>
그리고 사실상 방주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신 전부이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노아가 알아서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크기를 알려주셨고, 창문의 위치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약 135미터의 길이, 넓이는 약 23미터, 약 14미터 높이를 가진 방주로 세 개의 축구장이 삼층으로 이루어진 배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 큰 배에 창문은 딱 45cm짜리 하나라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그 창문을 통해 햇빛과 공기가 공급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3층에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약 370일이란 시간이 지나고 그 창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내 보기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 한 명이 겨우 빠져 나갈만한 이 45cm짜리 창문 하나만을 만들라고 하셨을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오직 그 창문 하나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빗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빗소리가 그치게 되면 바로 그 창을 열어 비가 그친 하늘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 창문을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가 그치고 더 이상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때, 노아와 가족들은 그 창문을 열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렇게 창문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은 계속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가 그치고 창문을 열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와 가족들은 1년 가까이 보지 못했던 하늘을 마음껏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45cm짜리 창문을 통하여 햇빛을 내려주시는 하나님께 마음껏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유일한 창문을 통하여 유일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은 처음부터 배의 크기와 넓이 높이 후에 창문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홍수와 노아의 방주를 통하여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말씀하시면서, 간절한 하늘의 메시지를 던지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며 시선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이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안타깝게도 너무도 빠르게 시선을 세상에 빼앗깁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시선을 자주 빼앗기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쉽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만 바라보기에는, 하늘만 바라보며 살기에는, 이 땅에 너무도 좋아 보이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는지, 아니 사실 우리를 재밌게 하는지 좀처럼 하늘을 볼 시간조차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스마트폰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의 시선은 스마트폰을 향하고 있지만 사실상 땅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버스를 타면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풍경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때론 위험해 보일 정도로 스마트폰만 보면서 걷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버스 안으로 시선을 돌려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향해 전부 시선이 아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사실 스마트폰은 단지 하나의 형태일 뿐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이미 땅에, 세상에, 하늘이 아닌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쁘고 빡빡한 세상을 살면서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휴식과 평안을 얻을 시간에, 잠시라도 땅을 바라보며 쾌락을 향유할 수 있으면 만족하는 인생으로 사람의 존재는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또 다시 노아의 방주는 만들지 않겠노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도대체 이 시선을 바꿀 수 있을까요?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간절히 소망하기는 오늘 우리의 시선이 다시 원래 향해야 하는 곳으로 향하기를 원합니다. 하늘을 향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향하기 원합니다. 히스기야왕의 이 외침이 오늘 우리 모두의 외침이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제비처럼 학처럼 애타게 소리 지르고, 비둘기처럼 구슬피 울었다. 나는 눈이 멀도록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주님, 저는 괴롭습니다. 이 고통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 <이사야 38장 14절, 새번역>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 보시던 예수님의 시선을 우리가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오병이어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임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왔을 때도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기도할 때 마다도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복음 17장 1절, 새번역>
성경에 등장하는 성령이 충만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믿음이 더욱 깊어질수록, 신앙이 더 성숙할수록 그들의 시선은 이 땅이 아닌 하늘을 향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사도행전 7장 55절, 새번역>
좋은 신앙의 모범이 되어 주는 바울도 오늘 우리에게 강력하게 이런 시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골로새서 3장 1~2절, 새번역>
그래서 우리 인간은 ‘안드로포스’ 답게! 위를 바라보면서! 그 위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예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리기에 땅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고, 아래로부터 위를 향하는 거꾸로 신앙생활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하는데 누구든지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기를 "사람이 늙어서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자기 어머니 뱃속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내가 네게 '너희는 위로부터 나야만 한다.' 라고 말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그러나 너는 그 소리만 들을 뿐 그것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난 자도 다 이와 같다." <요한복음 3장 3~8절, 새번역>
위로부터 나기 위하여, 당연히 먼저 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위를 바라보지 않는데, 위로부터 나는 그 신비를 어떻게 알 수나 있겠습니까? 왜 굳이 성경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이란 단어로 수식하고 있습니까?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신앙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땅에 있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되니 그 신앙의 생명력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하늘이기에 끊임없이 하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마치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만 같아 하늘 처소에 대한 소망을 잃고 하늘을 바라볼 필요조차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시 하늘을 보는 시선을 회복해야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하늘 처소를 향한 소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나은 곳을 사모하고 있으니 그곳은 하늘에 있다. <히브리서 11장 16절A, 새번역>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서 3장 20절A, 개역개정>
다니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비록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더 이상 이스라엘에 살지 못했지만, 비록 다른 나라의 총리였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위협에도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충분히 현지에 시선을 두고 살아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의 시선은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으로 가서 자기 집 다락방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들을 열고 이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다니엘 6장 10절, 새번역>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역시 타국에서 성공해서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 되었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감히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을 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왕과 자신의 환경에 시선을 두지 않았기에 기회가 왔을 때 기도할 수 있었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런 대단한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모든 이들, 즉 예배를 드리러 오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요구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권면입니다. 그 권면이 바로 시편 123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며 성전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다짐이고, 기도였고, 결단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이시여, 내가 주님을 향해 눈을 듭니다. 종들의 눈이 상전의 손을 바라고 여종의 눈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듯,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주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시편 123편 1~2절, 새번역>
매일의 삶이 예배인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권면입니다. 성전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고백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께 시선을 향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눈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자의 삶입니다. 삶의 예배든, 다함께 드리는 예배든, 예배자로 살아가는 순간의 모든 시선은 하나님께로 향해야 하는 ‘안드로포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위로 시선을 향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서두에 이 ‘안드로포스’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이런 이유가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많이 등장하고 반복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안드로포스입니다. 그러니 안드로포스로 살아가야 합니다. 시선을 위로 향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힘이 들 때만 하늘을 쳐다보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하늘을 향하고, 하늘을 구하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온갖 은혜를 경험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노아의 방주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 매일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간절히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안드로포스들이여! 이름 그대로 반드시 안드로포스가 되기를! 위를 바라봅시다!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결단 찬양 - 하늘 보좌 + 시선 후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