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한 산을 깎아 만든 종합운동장인지라 출발선을 떠나자마자 코스가 곧장 완만한 내리막으로 시작된다. 하늘에는 구름이 한점도 없지만 안개가 조금 남아 있고 아지랑이가 하늘거려서 먼 곳이 희끄무레하다. 아스팔트길에는 조금 전 10시에 출발한 수많은 선수가 달리는 발자국소리와 가쁘게 쉬는 날숨들숨 소리만이 요란스럽다. 제 2회 음성품바마라톤대회(05년 4월 24일)는 각설이패가 다른 사람에게 장타령과 우스개 거리를 보이고 끼니를 얻어먹던 모습을 재조명하고 음성지방에 꽃동네가 들어서도록 단초를 제공한 거지 성자(聖者) 최귀동님의 숭고한 박애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열리므로 '품바'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이 다른 대회와 특이하게 다르다.
"이 코스는 오르내리막이 심해요. 꽤 높은 재를 넘어갔다가 오는 코스입니다. 하프코스종목이지만 천천히 달리세요."하고 말하면서 두 명의 선수가 따라 붙는다. "아저씨, 지금 1시간 40분 이내에 결승선을 밟는 속도로 달리고 있어요. 오늘처럼 나른한 봄 날씨에 그렇게 달리면 이내 지쳐요. 무리하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나는 산에서 자주 달리므로 괜찮아요." "코스를 잘 모르시는군요. 작년에 참가한 선수 중 코스가 힘들어서 혀를 내두른 사람이 많아요." "잘 알겠습니다." "돌아올 때는 가파른 오르막이라서 걷는 선수가 많아요." "달리다가 힘에 부치면 함께 걷지요. 우리는 길벗이니까요." "아, 그렇군요. 먼저 갑니다." "예, 좋은 기록 세우세요." 냅다 내달리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시원스럽다.
완만한 내리막코스를 몸이 하자는 대로 사뿐사뿐 달린다.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봄바람이 시원하다. 2㎞지점에서 기울기가 바뀌면서 오르막 코스가 시작된다. 길옆 논에서 못자리를 마련하는 농부들의 일손이 바쁘다. 젊은이는 보이지 않고 나이 많은 분들만 굼지럭거리는 모습에서 노인들만 남아서 농토를 지키는 오늘의 농촌현실이 보인다. 다시 기울기가 바뀌어서 5㎞지점까지 완만한 오르막코스가 이어지더니 내리막 코스가 시작된다. 살랑살랑 부는 명지바람1)을 맞으며 달리고 있는데 옆을 지나가는 선수가 말을 건넨다. "천천히 달리세요. 이제부터 반환지점까지 6㎞쯤은 계속 내리막이에요. 오늘코스는 반환코스(out-and-back course)예요. 지치면 되돌아올 때 오르막이 가팔라서 못 달려요. 즐런(즐겁게 러닝)하세요." "예, 젊은이도 즐런해요."
옷에 씌어진 글자가 충청북도에 소재한 관청이나 회사에서 근무하는 마라톤 동호회원이 많이 달리고 있다고 알려준다. 예나 이제나 이 곳은 젊은이가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변함없는 고장이라고 생각하면서 달린다. 길옆 공원에 터 잡고 사는 무궁화나무들은 아직 갓난아기 손톱 끝보다도 작고 여린 잎눈만 달고 있어서 한겨울처럼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그 아래에 연초록 풀방석을 깔고 앉은 민들레꽃과 제비꽃이 앙증스럽다.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는 어려서 참꽃이라고 부르며 따먹던 진달래꽃이 벌써 지기 시작한다. 참꽃이 진 빈 자리에 개꽃이라고 부르면서 먹지 않던 철쭉이 앞을 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곱디고운 분홍빛 물감을 마구 쏟아낼 참이다.
코스에서 보이는 산마다 '우리나라 산에 벚나무가 매우 많구나.'할 만큼 빼곡히 들어선 나무 틈으로 하얀 벚꽃이 흰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 하늘로 뻗쳐오른 산에 핀 벚꽃과 도심(都心)에서 찻길을 가까스로 비끼어 숱한 사람이 다니는 길에 겨우 걸터앉아 뿌리를 내리고 얼기설기 엉킨 전선을 늘 머리에 이고 수많은 자동차가 내뿜는 시커먼 연기를 들이키면서 피어 있는 벚꽃을 견주어본다. 얼핏 보면 때깔은 비슷하지만, 산 속에 핀 벚꽃이 가로수의 벚꽃보다 왕성하게 생기를 내뿜고 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공기가 맑고 햇발이 좋은 시골을 떠나 온갖 배출가스로 오염된 도심에서 모여 살까?
넓은 저수지에서 덕2)을 타고 낚시 찌3)의 움직임을 보면서 물고기와 승부를 겨루는 낚시꾼들이 선수들이 달려가는 모습도 보랴, 미끼에 입질하는 물고기도 보랴 부산하다. 그냥 앉아서 끈기와 지구력을 기르는 정적(靜的)인 운동과 먼 길을 오랫동안 달음질치면서 정신력과 체력을 기르는 동적(動的)인 운동이 물과 뭍에서 한꺼번에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몸을 쓰지 않아서 녹스는 쪽보다 많이 움직여서 윤기가 흐르는 쪽을 선택해서 날마다 달리고 있으므로 가만히 앉아서 건강을 낚는 낚시질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지며리4) 공부해야 성적이 좋은 것처럼 십여 년을 한결같이 공기가 상쾌한 산이나 들판을 달리면서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가꾸며 지낸다.
반환점을 돌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면서 숨이 한층 더 가빠진다. 오르막 코스를 달릴수록 걷는 선수가 점점 늘어난다. 내리막코스에서 나를 제치며 내달리던 많은 선수를 되제치며 힘차게 달린다. "아자, 아자, 와, 다리짱! 타고난 마라토너이시군요." "'타고난'이 아니라 '잘 훈련한' 마라토너입니다. 날마다 산길에서 달리거든요." "힘차게 달리시니 부럽습니다." "그래요? 그저 열심히 달리면서 지내렵니다. 누울수록 죽음이나 성인병에 가깝고 걷거나 달릴수록 젊어지거든요. 육체적·정신적 활동이 왕성할수록 행복지수가 높겠지요." "좋은 말씀입니다.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선두그룹과 큰 차이가 없이 결승선을 넘으니, 아내가 깜짝 놀라면서 손을 흔들어 반긴다. 오르내리막이 심한 하프코스를 1시간 37분대에 달리고 받은 완주기념 메달을 목에 걸고 마라토너 옷만 입은 채, 주최측에서 주는 잔치국수·찐 고구마·막걸리·돼지고기 안주를 푸짐하게 늘어놓고 먹으면서 '품바공연'을 본다. 땀으로 얼룩진 꾀죄죄한 몰골에 짧은 옷만 달랑 입은 '진짜 품바의 가련한 꼬락서니'로 앉아서 화려하게 꾸민 '가짜 품바의 우스개 연출'을 구경한다. 우스꽝스럽게 색칠한 얼굴에 누더기 옷차림새로 꾸미고 익살을 떠는 품바는 정녕코 내가 어릴 때 보던 각설이 모습은 아니지만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하고 읊어대는 장타령꾼의 목소리는 그대로 구성지다.
지난 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떠돌아다니며 울음을 삼키고 뭇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동냥하던 품바의 처절한 몸부림이 지금은 많은 사람 앞에서 추억의 볼거리로 재현되고 있다. 오늘날 물질문명이 크게 발달하였지만 한 쪽 구석에는 가난의 멍에를 그대로 눌러 쓰고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 품바의 공연을 한낱 구경거리로만 삼지 말고 이 시간 빈곤으로 고통 받는 이웃사람의 처지를 살펴보고, 어루만지고, 보듬는 계기로 승화시켜서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아침에 부옇게 낀 안개도 말끔히 걷히고 아지랑이도 사라져서, 새파란 하늘에서 맑은 햇발이 우르르 쏟아져 내려와 온 누리에 봄의 생명을 한껏 기르고 있다.
1) 명지바람 : 부드럽고 화창한 바람.
2) 덕 : 물위에서 낚시를 할 수 있도록 설치한 자리. 좌대(座臺).
3) 찌 : [물고기가 낚시를 물면 곧 알 수 있도록] 낚싯줄에 매어 물위에 뜨게 만든 가벼운 물건. 부표(浮標). 부이(buoy).
4) 지며리 : 차분하고 꾸준히.
첫댓글 교수님 내년 1월에 61km는....... 회갑에 61km로 달리면 멋진 추억이 되실 것 같은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