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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4 - 조비가 세운 위나라 촉한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침공하다!
후한 말기 황제를 확보한 조조가 기반을 닦고 아들 조비가 선양의 형식으로 즉위하였으나
이후 자신들도 권신 사마씨 일족에게 휘둘리다가 후한과 같은 운명을 맞는데......
국호 위(魏) 는 조조가 위공(魏公)에 봉작될 당시 자신의 본거지로 삼고 있던 업군이
속한 지명 위(魏)에서 유래하였는데 위나라는 여럿이라 '조위(曹魏)'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후한 13주 중에 9주, 특히 '중원' 인 화북 전체를 차지한 만큼 인구 수와 생산력이 촉한
과 손오와는 일대일 구도로는 압도적이었으니.... 인구는 "후한서" 에 등재된 기록을
기준으로 263년에 443만명에 달했는데, 촉의 5배, 오의 2배에 달하니 학자들 중에는
천하의 7할을 가졌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라 촉한과 손오는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조위는 중원의 알토란 같은 화북을 장악했지만 후한 말부터 이어진 수십년간의 전무후무한 난세
대혼란 끝에 자리잡은 왕조인 터라..... 태생적으로 급감한 인구수와 바닥을 친 중앙 권력의
통치력 같은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으니 조위의 중앙 권력이 확보한 인구수는 500만명
정도니 인구가 국력이고 생산력인 전근대 농경사회에서 중국사를 통틀어 하위권에 불과 합니다.
후한서 군국지 기준으로 삼국의 인구는 총 8,534,000명이고 조위의 인구는 4,932,000명
이니 58%가 조위의 지분이며 촉한은 12%, 손오는 30% 정도라고 보니...... 당대
중화권 최강국인 건 사실이지만 절대적인 패권국이라고는 보기는 힘든 수준인데
조위가 촉한이나 손오를 상대할 때 보면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부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조위가 촉한이나 손오와 일대일 경우라면 압도적으로 우위 국력일지는 몰라도 촉한과 손오가
힘을 합치고 북방 이민족이라는 변수까지 추가하면 압도할 만큼 강력한 세력이라고 보기는
힘드니 조위가 촉한보다 국력이 5배 더 강하다고 해서 대촉전에 5배의 군사력를 동원
하고 손오 보다 2배 더 강하다고 해서..... 대오전에 2배의 군사력을 투입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갈량의 북벌에서 조위는 10만 군세를 동원한 촉한과 맞서 싸우면서 촉한의 북벌군과 비슷하거나 조금
상회한 정도의 군세밖에 전선에 투입하지 못했으며..... 1차 북벌 때는 오히려 촉한의 군세가 더 많은
(20만명?) 적도 있을 정도이며 특히 위나라가 침공한 흥세 전투에서는 참패하여 20여년간 수세로
일관했으며 촉나라에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가 멸망 2년전에야 행운이 연달아 일어나 정복합니다.
흥세산 전투는 244년 위나라가 촉나라를 공격해 섬서성 한중시 흥세산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곽회가
기산로, 하후현과 조상이 당낙도, 하후패가 자오도를 통하여 3방향에서 한중을 공략했으나 전세가
불리함을 안 곽회가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자오도를 통해 가장 먼저 산길을 통과한 하후패가 촉군
왕평에게 격파되니 하후현과 조상의 본대는 오도가도 못하다가 촉나라 성도의 비의가 지원군을 끌고
한중의 왕평에게 합류해 촉군이 낙곡도를 통해 위군을 공격하자 위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후퇴합니다.
손오를 상대한 회남 전선에서는 항상 더 미약한 군세로 대적했으니 합비 공방전 항목을 보면 군사 지휘관
들인 장료, 만총, 장특 등은 손오의 북진을 상대하면서 단 한번도 군사 숫자로 우위에 선 적이 없었고
항상 극심한 열세였으며 조위와 동오의 대립구도에서 군세상 우위의 포지션에 있던 건 언제나 손오
였던 것이니 장료군 7,000명 대 손권군 10만 명, 장특군 3,000명 대 제갈각군 20만명 같은 예가 있습니다.
손오가 회남전선에서 번번이 좌절한건 손권 같은 지휘관의 역량 문제나 단합이 안 되는 손오 특유의 군사
시스템 같은 내부 문제 때문이었지 손오가 조위보다 국력이 약하고 군세가 적어서 패배한게 아니니 손오
는 조위보다 물량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했는데 예외는 제갈탄 난때 제갈탄은 둔전병까지 모아 15만
을 동원했고 사마소는 후방 병력까지 모아 26만을 동원했는데 위나라 군대 41만이 회남에 집결한 것입니다.
또한 사마의가 238년에 요동의 공손씨 정권을 정벌할 때나 246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와 싸워
추격해서는 고구려 수도 환도성(국내성)을 함락할 때도 병력은 관구검 1만에 고구려 동천왕 2만
으로 위나라 군세는 항상 상대보다 약했지만 지휘관의 뛰어난 역량으로 고구려군을 유인해 90%인
1만 8천명을 사살하고 진격해 환도성(국내성) 을 점령해서 파괴하니 고구려는 수도를 옮겨야 했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는 비류수 전투에서 위군에게 이겨 3천을 죽이고 또 양맥에서 이겨
3천을 죽였으나 3차 전투에서 대패해 수도인 환도성(국내성)을 뺏기고 강계 이남으로 도주하니
관구검이 왕기를 보내 추격하자, 강원도 황초령(또는 충청도 단양) 까지 도주하는데.... 밀우와
유유의 분전으로 살았으며 관구검은 환도성에 불내성(不耐城) 이란 멸칭을 붙이고 기공비를
세운후 철수했다니.... 1만으로는 어렵고 선비나 오환에 낙랑군 병력을 추가로 동원했지 싶습니다.
요동의 공손씨 정권이나 고구려는 조위(曹魏) 의 국력에 비하면 미약한 규모의 세력이었지만
조위는 이러한 공손씨 정권이 수성병을 제외하고 수만명의 야전병을 동원할 때 40,000
명을 겨우 모아 사마의에게 붙여줬으며, 관구검은 고작 10,000명의 군대로 고구려의 동천왕
이 이끄는 고구려 최정예 철갑기병 5,000명이 포함된 20,000명의 군대와 상대해야 했습니다.
당대 조위(曹魏) 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동(공손씨와 고구려), 서(촉한과 강족), 남(손오), 북
(오환과 흉노)등 무려 7개 적대국들이 조위를 빙 둘러 포위한 구도라 전선이 워낙 방대하고
길었으며.... 조위의 국력 또한 오랜 전란으로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인데 삼국지 시리즈 창작물의 영향 때문에 위나라 병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입입니다?
결론적으로 조위가 당대 최강국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촉한과 손오가 힘을
합쳐도 아예 극복하지 못할 만큼 압도적으로 격차가 벌어질 정도로 국력이
우위인 패권 국가였던 것은 아니었으며.... 게다가 조위는 북방과 동방의
이민족들까지 상대해야 하니 손오와 촉한과 싸울 때 병력이 열세였던 경우도 많습니다.
회남~합비 전선의 경우 손오가 무능해서 그렇지 조위의 군세 상황만 보면 위태로웠던 적이 많으며
제갈량이나 강유, 노숙 이후 비전과 능력을 겸비한 제갈각은 해볼만한 도전이라 생각해 북벌을
시도했는데 평화를 원한다며 있으면 결국은 조위에게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불가능한 목표에 집착한 게 결코 아니었으니.... 북벌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망정, 북벌에 성공하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국가가 사라진다는 것이야 말로 명약관화한 '현실' 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가 천하의 7, 8할을 차지했다' 는 것이 근거가 전무한 상태에서 나온 엉뚱한 주장
만은 아니니..... 실제로 위나라가 후한 13주 중 약 70%에 해당하는 9주를 차지했고
동오 지역이 하북지역에 비해 개발이 덜 되고 중앙의 지배가 비교적 느슨한 점
등을 감안하면 위나라의 지배력을 최대한으로 본다면 저렇게 평가할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위나라는 후한이 지배하던 9주 당시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니.... 이는
근본적으로는 서기 200년대였기 때문인데 교통이건 통신이건 현대는 물론이고 거의 천년 뒤인
고려시대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시대였으니 당시에는 어떤 지역을 점령했다는 것은 그 지역의 거점
이 되는 중심지를 지배했다는 의미이며,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지배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위는 중국 13주 중에 9주를 차지했지만 전란과 교통 등으로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으니 후한 말에
5천만명이던 인구가 70여년만에 770만명으로 7분의 1도 안되게 쪼그라든 것을 보면.... 전쟁의
참화와 전염병과 흉년등 자연재해의 무서움을 짐작하는데 13주의 인구는 사마씨의 서진이 삼국을
재통일한 직후 갑자기 1,600만명으로 불어났으니 위나라 통계에 빠진 가호를 되찾은 것인데,
조위의 인구가 490만인건 세금을 바치고 군역대장에 오르는등 통계에 잡힌 수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200년에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한 조조는 213년 위공을 거쳐 216년 위왕으로 책봉됐으며 죽은후
220년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해 위나라를 개국했고 조예가 즉위하자
227-234년 제갈량의 북벌이 있었으며 249년 고평릉 사변, 254년 조방의 쿠데타와 260년 조모의
쿠데타는 실패했으며 263년에는 촉한을 정벌했고 266년 조환이 사마염에게 선양해 위나라는 망합니다.
사마의가 공적을 세워 위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자 조진의 아들인 조상에게 실권을 주어 조씨 황실
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사마의에게 정권을 빼앗겼고, 조조와 조비 대의 공신들의 후손들이 사마씨
로 갈아타면서 황제는 허수아비가 되었으니 양자로 들인 황제 조방은 사마사가 정권을 잡자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오히려 발각되어 허무하게 실패하고 자신이 폐위당하고 맙니다.
조방을 제거한 사마사는 황족인 고귀향공 조모를 데려다가 제위에 올렸으니 조모는 사마사가
죽고 사마소가 정권을 잡자, 역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사마씨 세력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오히려 사마씨의 군대에 시해당하고 사마소는 꽤나 먼 황족 조환을 데려다가 제위에
앉혔다가 2년후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265년에 조환에게서 선양을 받아 진나라를 개국합니다.
그 전인 237년 위나라 사마의는 관구검을 앞세워 요동 군벌 공손연 정벌에 나서는데...
요동 공손씨 정권은 오나라와 끊임없이 접촉하며, 위나라 배후를 위협하는 근심거리
였으니 사마의는 직접 정벌에 나서 238년에 요동에서 4대째 이어 내려오며 세력을
떨치던 공손연 제거에 성공하는데 이 때 사마의가 공손연에게 보낸 격문이 유명합니다.
공손씨는 공손연의 할아버지 공손도 때부터 대대로 요동 일대를 점거하고 있었으니 아버지 공손강은
조조가 원소의 잔존세력을 소탕할 때 원희와 원상을 참수해 화평을 청했으며 221년에 아버지
공손강이 사망하자 나이가 어린 까닭으로 숙부 공손공이 뒤를 이었지만 공손연은 228년에
공손공을 내쫓고 스스로 요동 지방의 군주로 군림했으니 이때 조예는 그에게 거기장군을 하사합니다.
232년 오의 손권이 연(燕)왕의 작위와 구석의 지위를 내려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장미와 허안 등을 사신
으로 보내니 손권과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었기에 두 사신들을 목을 베고 보물을 빼앗았으니 이렇게
손권의 뒤통수를 후려쳤고 이때 참수한 오나라 사신들의 목을 위나라에 진상해 낙랑공이란 작위를
수여받았지만 위나라는 공손연에게 의심을 품었고 결국 237년 관구검의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합니다.
위군을 격퇴한 공손연은 연호를 소한(素漢)으로 하고 연왕을 자칭해 독립까지 선언하게 되면서 말리는
가범과 윤직을 처형했는데, 공손연의 반란 소식이 위나라 조정에 알려지자 수도인 낙양에 인질로
가 있었던 그의 형 공손황은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볼모의 서러움이라? 위나라 입장에서는 공손황
의 의도가 후계 구도를 염두에 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확실치 않으니 죽인 것 입니다.
그런데 공손연은 238년 사마의가 이끄는 위나라의 군대와 고구려 동천왕이 파견한 1천명
군대에게 참패하자 크게 두려워하며 살기 위해서 상국 왕건(王建)과 어사대부 유보
(柳甫)를 보내 포위를 풀어줄 것과 면박(面縛)하여 항복할 것을 청했지만 사마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왕건과 유보의 목숨을 빼앗고는 곧바로 공손연에게 격문을 보낸 것입니다.
옛날 초나라(楚)와 정나라(鄭)는 열국이었으나 정백은 웃통을 벗고 양(羊)을 끌고 나와 초왕을 영접
했는데 나는 왕의 신하로 상공(上公)인데 왕건 등이 내게 포위를 풀고 물러나라고 하니 어찌
초나라와 정나라의 전례에 비기겠는가! 두 사람은 늙고 혼미하여 말을 전하는데 실수가 있었을
터이므로 이미 죽였다. 만약 더 할 말이 있다면 젊고 명쾌하게 결단할 수 있는 자를 보내도록 하라.
이에 공손연은 시중 위연(衛演)을 보내 날짜를 정해 인질을 보낼 것이라고 청하니 사마의는 그 유명한
명언을 위연에게 말하며 거절합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다섯가지 원칙이 있다. 싸울 수 있을 때는
싸워야 하고, 싸울수 없을 때는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달아나야 한다. 나머지 두가지는 항복
아니면 죽음뿐이다. 너희들은 항복하려 하지 않으니 죽기로 작정한 것일 터, 인질을 보낼 필요는 없다"
이에 절망한 공손연은 남쪽의 포위를 공격하여 돌파하니 사마의는 추격하여 공손연과 그 아들 공손수를
잡아 참수했으며 그리고 사마의는 수도 양평성(襄平城)에 들어간후 두 개의 표식을 세워 젊은이와
늙은이를 구분했는데 15세 이상 남자 7,000여명을 모두 죽이고 경관(京觀)을 만들었으며 공경(公卿)
이하 관원을 주살하고 장군 필성(畢盛) 등 2,000여명을 죽이니 이때 공손씨는 멸족되는 비운을 맞습니다.
사마의에 의해 요동 공손씨 정권이 붕괴하자 그 동안 공손씨 정권과 밀접했던 낙랑군과 대방군 내부
동요가 심해지고 고구려 및 삼한으로 인구 유출이 일어나는데... 위나라는 동아시아 새로운 질서
확립을 위해 낙랑군의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통제력 회복을 시도하니 위나라는 낙랑군과
대방군에 태수를 새로 파견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삼한 국가들에 유화책을 펴 경계심을 완화시킵니다.
그러나 위나라의 전략은 결국 과거 한나라 한사군 시절 질서로의 회귀였기 때문에 고구려와 삼한 주요국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양쪽의 갈등은 고조되었으니 고구려에서 먼저 갈등이 터져 나왔는데 고구려는 위의
요동 공손씨 정벌 때 지원군 1천을 보내 도왔으나, 위는 낙랑군을 통한 국제 질서 확립이 목표로 고구려
와 직접 교역할 생각이 없었으니 불만을 가진 고구려 동천왕은 242년에 위나라의 서안평을 선제 공격합니다.
위나라는 반격에 나서 244년 비류수 전투에서 고구려군 2만중에 무려 18,000명을 사살하는
등 참패시키고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켰으며 245년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재차 공격
하고 동천왕은 남옥저로 도주했으나 위의 추격에 북옥저까지 쫓기는 처지가 되는데...
위나라는 고구려 왕을 추격하며 가는 길에 위치한 동예, 옥저 까지 가혹하게 정벌 합니다.
위나라는 고구려와 예맥을 무력 진압하는 중에 마한과 교역권 협상을 마무리 지으려 했으니 위는 그간
마한이 갖고 있던 진한 내륙 소국들에 대한 교역종주권을 낙랑군이 갖도록 하려했고..... 이에 마한은
반발하니, 백제 고이왕은 낙랑태수가 고구려 전쟁에 투입된 틈을 타 246년에 낙랑 변방을 기습했으나
백제의 몸값 올리기 전략은 효과를 보지 못했고 마한의 신분활국 등은 대방군 기리영을 기습공격합니다.
246년 전쟁 초반 마한 연합군은 대방군 태수 궁준을 전사시키는등 성과를 올리지만, 곧
이은 낙랑군과 대방군의 반격으로 신분활국은 멸망했으며 백제는 위나라의 무력을
실감하며 확전을 피하려 했으니 낙랑군 포로를 돌려주고 화친을 청해 전쟁 피해
를 수습했으며 반면에 목지국은 화친에 반발하고 낙랑군의 위협을 피해 남하 합니다.
이렇게 위나라의 동방정벌은 마무리되는 듯 싶었으나 248년 신라와 고구려의 화친 소식이 들리니
위나라는 잔불 정리를 위해 신라를 압박하는데 신라는 지리적으로 멀어 직접 군대를 파견
하지는 않고, 240년에 조공국으로 삼았던 왜의 군대를 동원했으며 마한의 패배로 인한
낙랑군의 교역독점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니 고대 국가는 무역을 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위나라의 압박 타켓은 당시 신라의 실세 석우로였으니... 석우로는 고구려 말의 연개소문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인물로 대고구려 화친의 배후로 의심되고 있었는데 당시 신라왕
첨해 이사금과 차기왕 미추 이사금의 최대정적이기도 했으니 불행하게도 결국, 석우로는
국내외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249년에 왜에 끌려가 허망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237년부터 시작한 위나라의 동방정벌은 신라 석우로의 죽음을 끝으로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는데 이후 위나라는 사마의가 249년에 고평릉의 변으로 불리는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니 여기에 반발한 왕릉, 관구검, 제갈탄의 내란(15만)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내부 혼란이 가중된 결과 낙랑군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축이 되지
못하고 동아시아 국가들은 권력의 공백 속에서 도약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게 됩니다.
위나라와 고구려는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건 아니니 요동에 공손씨 세력이 남아있었을 때 고구려
와 위나라는 협력관계였으며 오나라 사신이 고구려에 왔을때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고, 위나라가 공손연을 칠 때 고구려도 1,000명의 병력을 보내 도왔으나 순망치한
이라고 공손연 세력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고구려가 국경을 맞닿게 되자 급격히 사이가 나빠집니다.
1145년에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보면, 242년 동천왕이 병력을 보내 서안평을 침공했다.
246년 8월 관구검이 10,000명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니 비류수 전투에서 2만의 동천왕을
쳐부수고 수도인 환도성(국내성)까지 불태워 버리는 대승을 거뒀다. 259년 12월 울지해가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양맥 전투에서 중천왕에게 패해 물러가는데.... 정사 진수
의 삼국지 위서에는 "고구려(高句驪) 가 수차례 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라고 나옵니다.
위나라는 한사군등 한반도 이북도 지배하에 두었으니 낙랑군이 소멸한 시기는 훗날인 304년 서진
이 망하고 오호십육국시대 혼란이 시작되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은 중국 본토와 끈이 떨어져
고립되어 외로운 신세가 되니... 군현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군벌 장통(張統)의 지배를 받습니다.
313년 10월에 미천왕이 낙랑군을 공격하여 2천의 남녀를 포로로 잡아가고 이후 낙랑군
이 망하니 장통은 민호 1천여호(5천명)을 이끌고 요동의 선비족 모용씨(摹容氏)
가 세운 전연에게 투항하니... 모용외는 요서에 낙랑군을 설치해 장통을 태수로,
왕준을 참군사로 임명하니 전연과 후연을 거쳐 북연 까지 100여년간 존속합니다.
위나라 말기에 사마씨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은 관구검과 문흠, 제갈탄, 이풍 등으로 적지않지만
이런 '반 사마씨 세력' 이 통일성이나 연결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규모로 일어나지는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단독으로 거병하거나 음모를 꾸미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이들의 역량도 사마씨에
크게 못 미쳐서 반격은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리니 이를 명분으로 사마씨는 반대 세력을 숙청합니다.
265년 조위가 망한후, 선양을 받은 사마씨는 이전에 받은 작위에 따라 나라 이름을
진(晉)이라고 했는데 역사속 다른 진(晉)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서진이라 부르며
서진의 황제들은 고립된 위나라의 전례를 밟지 않기위해 같은 사마씨 일족
들에게 지역에 왕으로 분봉해서 힘을 키워주었으나 8왕의 난 내란으로 멸망합니다.
위나라는 황제들이 재위 기간이 끝날 때의 나이가 갈수록 더 어려지니 문제 조비 41세 붕어,
명제 조예 35세 붕어, 소제 조방 23세 폐위, 폐제 조모 20세 붕어, 원제 조환 20세
폐위 등..... 사실상의 초대 군주인 무제 조조 역시 66세에 붕어했다는 것을 감안
하면 이렇게 점점 단명하는 황제들이 조위의 황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위나라의 정치제도를 보자면 진군(陳羣)이 주창한 구품관인법이 만들어졌으니 위나라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이니 세계사 교과시간에 후한 말기나 중국 삼국시대에
넘겨짚고 가는 것도 사실상 이 제도 뿐으로, 위나라는 강력한 군벌인 조조
가 연주, 영천, 여남 일대의 호족들을 포섭하고 지지를 받아내어 건국한 나라입니다.
조인, 조홍과 조휴를 배출한 조조의 고향 초와 패의 조씨 집안 부터가 호족 집안이며... 하후돈 등을
필두로 하는 하후씨 일족이나 순욱을 필두로 하는 순씨 일족. 뒷날 위를 무너뜨리는 서진 정권
의 기반을 구축하는 사마의의 사마씨 역시 호족이니 구품관인법의 정비로 관료제가 발달하여
관리 서열의 상하관계가 명확하지만 부작용으로 호족의 귀족화가 나타나 '문벌귀족' 이 출현합니다.
위의 가장 큰 약점은 황통으로 뒤늦은 후계자 책봉과 바로 조조의 사망 때문에 조비는 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아우들을 의심하여 직계 황족들을 시골의 봉지에 연금시켜 감금 상태로
만들어놓았는데 이후 조예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황실의 혈통이 위기를 겪었으며 황제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가져왔으니 때문에 사마씨가 정권을 탈취하는 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권력 쟁탈 과정에서 한나라의 모순과 타협해 호족들과 계속 타협하다보니, 모순의 해결은 안되고,
결국 이것을 계엄등 비상한 방식으로 누를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서주대학살'
이나 관도대전 후 '원소군 학살', 그 외 동귀비 처형 등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이라고 봅니다.
후한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인 환관과 외척을 척결하려는 시도도 진행되었으니 조조는 권력자로
등극하면서 이들을 다잡았고 외척은 오히려 천한 출신으로 삼았으니 조비는 이를 이어받으며
제도면에서 환관의 직책을 제한하고 태후에게 정치를 아뢰지 말라는 법을 비롯해 외척세력
의 발흥을 막으려고 했으니 본인들 뿐만아니라 한나라 황제의 외척들을 상대로도 숙청을 합니다.
후일 환관이 등장해 국정을 농단한 촉한 정도는 아니었어도 환관문제를 시스템적으로 잘라냈다고 하는
위나라에서도 조상 일파와 밀접히 결합해 연락하면서 국정을 주무른 장당이라는 환관이 있었으며
또 사마사가 하후현과 이풍을 주살할 때 하후현전에서 종육이 상주하길 이풍과 그 일당이 환관과
결탁했다는 얘기가 나오며 이후 조방이 폐위된걸 보면 환관이 권력에서 아예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외척의 경우 조방이 사마사를 죽이려고 장인 장집과 조예의 딸 제장공주의 시아버지 이풍과 모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위는 스스로의 제도를 어기고 황실의 권력을 위해 외척과 손을 잡으려 했다는게
드러나니 권력이 강성할 때는 외척과 환관 배척의 원칙도 강하게 내세우겠지만 불안정해지면 어쩔
수 없는데 사마씨는 태후가 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는 법에도 조위의 태후를 협박해 황제를 갈아치웁니다.
후한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둔전제와 세병제가 실시되었으며 조조의 강병 정책이
성과를 거두어 위나라는 매우 강력한 군대를 갖추었으니 군법이 매우 엄격하여 군사적
인 배신자는 가족까지 연좌제에 걸어서 벌을 줄 정도로 강력하게 처벌하였는데.....
다른 나라에 항복한 자가 나오더라도 그 가족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던 촉한과는 다릅니다.
내지 둔전은 조위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니.... 도겸은 진등을 전농 교위로 삼아 서주 경내에 둔전을
실행해 효과를 거두었고, 유주의 공손찬도 역경에서 둔전을 실시해 군량을 비축했지만 대규모로
둔전을 운용한 것은 조조 정권이 처음으로 조조는 이들을 참고삼아 대규모로 내지 둔전을 실시했습니다.
민둔과 군둔으로 구분하지만 둘을 명확하게 구분짓기는 어려운데 공통점은 군량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고 군사 편제를 따랐다는 것이니 유사시에는 민둔의 노역자들도 무기를 들고 전투
에 참여했고 오와 촉의 변경 지대 둔전객들은 방위의 임무도 겸했으며 내지 둔전객들은 반란
등이 일어날 경우 징집되어 참전하니 경제가 회복되며 군역과 요역에 동원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조위의 갑옷 제작기술 역시 뛰어났으니 조식은 '선제사실개표' 에서 흑광개, 명광개, 양당개, 환쇄개,
매개 등 다양한 갑옷의 명칭을 들고 있는데.... 이런 갑옷은 당시에는 매우 진귀한 고급품
이었으나 후에는 군대의 장비로 발전했으며 그 중에서 마개는 전투마를 보호하는 갑옷을 말힙니다.
위나라는 양주, 옹주, 병주, 유주 지역에 대한 통치력이 약했고 요동과 요서 및 한반도 북부 지역도
분쟁지역에 가까웠는데 후한 말부터 수십년간 이어진 미증유의 난세 때문에 삼국시대는 너나
할 것 없이 중앙 권력의 지방 통제력이 급전직하할 수 밖에 없었으니 후한 기준으로 5천만이
넘던 중원의 인구는 삼국시대 기준으로 통계에 잡힌 숫자는 850만 명 정도로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조위는 동한말의 혼란기에 황폐해진 경제를 다시 복구하는데 여념이 없었으니 양회(兩淮)지역
은 "수춘에서 도성에 이르기까지 둔전을 일구니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나고 천맥이 서로
종횡으로 이어졌으며 돈과 식량이 비축되고 수해가 없다" 등의 모습으로 번창했으며
좌사의 《위도부(魏都賦)》에 "면수(비단의 일종)는 양읍이요, 나기(무늬 있는 비단)는
조가며, 면광(솜)은 방자요, 겸백(명주비단)은 청하다" 라니 방직산업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황폐한 폐도였던 낙양은 조위의 수도가 되면서 번창하여 조방 시기(240~253)에 "백성이 사방에 섞여
살고 대 호족이 많이 기거하며 상인과 이민족등 천하 모든 곳에서 이익을 좇아 모여들었다" 라고
할 만큼 국제도시로 발전했으며 산둥성 북해는 소금 산지, 서량, 병주, 유주는 기병에 필수적인 말의
산지였으며 한나라 시절엔 동전으로 인두세를 냈지만 조비 때에 호구 기준의 현물납으로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