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천사처럼
2025.2.9. 주일오전예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비밀을 보여주실 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비밀은 또 무엇입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줄 압니다.
요한계시록 1장 20절에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주님의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였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설명해 주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일곱 교회의 사자를 영어로 말하면 'Angel' 천사였습니다. 단순한 천사라고 말하면 비밀이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일곱 별의 비밀은 오늘 천사처럼 살아가는 주님의 일꾼이 바로 그 주인공이라 말씀할 수 있겠습니다. 일곱 교회, 바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주신 주님의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세대에 걸친 주님의 몸 된 교회들에게 주신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는 성도들, 이기는 자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6장과 7장 말씀을 보면, 그 예루살렘 교회에 주님이 내세우신 별과 같은 일꾼은 사도들이 아니라 스데반 집사님이셨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서 당시의 그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때 따르는 표적도 대단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고 특별히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질투하는 마음으로 산헤드린 공회에 스데반 집사님을 고발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는 우리 한국으로 치면 국회와 대법원의 권위가 합친 것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공회 중에 불려온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담대했고 평강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 말씀에 기록된 것을 보면 “그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을 어떻게든 책잡아서 죽이려는 그 무리들이 볼 때에도 스데반 집사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천사가 있다면 그 얼굴이 저분과 같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성령께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게 가르쳐 주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데반을 풀어준 것도 아니고 그들은 더 악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 집사님을 예루살렘 성 밖에 끌고 가서 돌로 치게 됩니다. 돌에 맞아 쓰러지는 가운데에서도 스데반 집사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거기에 우리 하나님의 영광과 보좌 우편에 예수님이 서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주님, 내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얼굴만 천사 같은 것이 아니라 스데반의 중심과 그 원함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했는지요. 우리도 오늘, 살아도 주님의 사람 죽어도 주님의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정오 때에 자기 장막 앞을 지나가는 세 사람을 영접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냥 지나가는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마음에는 감지가 되었습니다. ‘저 분들은 예사로운 분들이 아니다.’ 붙잡고 자기 장막으로 모셔다가 음식을 따뜻하게 대접합니다. 그 때 주님은 두 천사를 데리고 그곳을 찾아 온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이 행동에 감복하셔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길 수 있겠느냐.”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받을 복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이야기해 주십니다. 그리고 두 천사는 소돔으로 향해서 그 성을 멸하려고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서서 호소하며 기도하듯이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 소돔성에 의인 50이 있다면 저들의 멸망과 함께 의인들도 멸하시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의인 50이 있다면 그들 때문에 소돔성을 용서하겠다.” 아브라함이 생각해보니까 50명이 안 될 것 같았어요. 45명, 40명, 30명이라도.... 계속해서 주님께 여쭈어 볼 때 주님은 “그래, 30명만 있다면 용서하겠다.” 아브라함이 생각해보까 안 되겠어요. ‘20명...’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의인 10명만 있어도 성을 멸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10명만 있어도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열 명도 안 되는 의인이 없는 소돔성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이 땅의 죄인들을 끌어안고서 주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는 아브라함은 그 당시에 천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주님을 가까이하고 주님의 마음을 믿어드리고 섬기려는 그 중심 때문에 이사야 41장에는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주님은 표현하셨습니다. 나의 벗 아브라함!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하룻밤을 지낼 때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죠. 꿈에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자세히 살펴본즉,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가 하늘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전 벧엘이구나.”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야곱에게 천사의 꿈을 보여주신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이 이 땅에 살지만 주님의 심부름을 하는 오늘의 천사처럼 살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속에 주님의 마음을 알아드리고 이 땅을 위해 기도하면서 주님을 돕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천사는 날개가 있어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만 사닥다리가 왜 있을까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천사라도 그 길에는 주의 법을 따른다는 겁니다. 사닥다리 그 좁은 길을 통해서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했다는 겁니다. “야곱아! 너도 천사처럼 마음으로 주의 법을 따르고, 주님의 길에 서 있기를 원한다. 네 중심과 욕심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이사야 41장의 말씀에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 종 야곱아”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렇게 살지 못했죠. 그래서 들은 말씀이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주님은 우리가 오늘의 천사처럼 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이 땅의 것에 얽매이고 환경과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면서 지렁이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사야 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주님은 이사야를 주의 종으로 부르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그 고백이 있기 전에 주님은 천사의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본 즉 주께서 높게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고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주님의 보좌 앞에 모셔 섰다는 천사의 중심처럼 우리도 주님을 소중히 모시며 서 있는 종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리우신 예수님. 역시 주님의 마음을 품고 나의 부끄러움을 가리우고 그 빛나는 영광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날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천사처럼 말입니다.
우리 몸 된 교회는 항공모함 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항공모함 그것도 맞지만 천국을 향해서 비행하며 섬기는 항공모함 그 생각을 저는 해봅니다. 우주선처럼 말입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날면서 깨어 움직이는 천사처럼 그렇게 주님을 민첩하게 섬기며 자신은 주님의 뒤로 숨고 겸손히 섬겨가는 이와 같은 참된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넘치기를 원합니다.
조금 전에 창세기 18장에서 죄악 된 그 소돔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아브라함을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에서 두 천사는 심판의 길에 갔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살지라도 아브라함과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용서를 구하며 긍휼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사가 그 뜻을 전할 뿐이지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까지 해주진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힘이 떨어져 가고 계셨습니다. 그 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서 힘을 도왔습니다. 힘을 도울 뿐이지 천사가 대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힘들지라도 천장에다가 노끈을 매고 붙잡으면서 끝까지 기도했던 믿음의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곤 했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버티면서, 서 있기 힘들면 무릎 꿇고, 무릎 꿇기 힘들면 누워서라도 마음은 일어서서 기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오른손으로 붙잡는 분은 천사가 아니라 신실한 종으로 살길 원하고 오늘의 천사처럼 살고자 하는 저와 여러분을 주님은 붙잡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유다서 말씀을 보니까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타락한 천사, 자기 지위를 지키지 못하고 교만했던 천사는 마귀가 되는 거죠. 이 말씀이 기록된 의미는 우리도 주님께 속해서 주님의 종이라는 이 영광을 놓쳐버리면 지렁이 같은 야곱처럼 어둠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빛이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빛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와서 반사하게 됩니다. 주님의 생명이 주님께 접붙여 있는 우리에게 나타나서 생명의 열매, 생명수의 통로로 사용될 줄 압니다. 스스로 걸어가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 사랑으로 매이고 사로잡혀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오늘의 천사처럼 우리 몸 된 교회 식구님들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