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5장에 들어가면 베데스다 못 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 그대로 자비의 집에 있는 병명이 38년 된 환자입니다.
그 병자에게 말씀이신 주께서 다가가십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6)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이 환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씀하신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내용이나 의도를 분석하는 다른 대답이 필요 없습니다.
낫고 싶으면 ‘예,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낫고 싶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물음에는 첫째 네가 병 낫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이 있느냐는 것과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네게 일하시길 원하느냐는 두 가지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이와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요.
시107:20절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짖을 때에
말씀을 보내시고 그 말씀으로 위경에서 건지신다고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수리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깥에서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고치십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예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하고 응답하는 믿음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말씀이 내 속에 임하여 나를 고치는 원리를 모르고 바깥에서
주님이 나를 고치신다고 믿고 주여 나를 고쳐주소서 하고 부르짖습니다.
아뇨.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 일 같이 여겼더라(창49:20)고
할 때 이건 원래부터 갖고 있던 야곱의 이기적인 체질이 아닙니다.
야곱이 딴 사람을 사랑할 때에 나타나는 새로운 창조적인 체질입니다.
이와 같이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에 새로운 자아로 수리되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아 키워보므로 그 사랑으로 인해 인격이 완성이 된다고 말합니다.
야곱에게 말씀이 인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이 되어 가듯 말씀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전혀 다른 존재로 치료해 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얘야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면
“예 주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나를 고쳐주세요” 바로 대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38년 환자의 반응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게 말씀이신 그리스도 앞에 모든 인간의 반응이기도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호 로고스”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없는 것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며 만물을 다스리는 그 말씀이십니다.
풍랑에게 그쳐 하고 말씀하시니 잔잔해 지는 건 바로 만물의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으로 다가옴에도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들의 불신의 요소이며 아담 안에 있는 죄의 본질입니다.
물이 끓을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요(요5:7)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못난 인간의 본성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은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낫고는 싶은데 아무도 못에 넣어 주지 않는다,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 자신은 들어가고자 하지만 언제나 남이 먼저 들어간다는
식으로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 많지 않아요?
언제나 불신은 표적을 원합니다. 물이 끓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꼭 못에 들어가야 낫는다는 고정관념에 잡혀 있습니다.
지금도 병 낫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믿음이 강한 사람이 그를 위해 기도하는 건 옳은 일입니다.
그런데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시는 주님과 그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환자는 무려 38년 동안 물이 동할 때
누군가가 자기를 그 못에 넣어줘야만 낫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무언가 보여야하고 그 못에 들어가는 실제적인 행동이 있어야 된다는
관념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로 아멘하고 수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 범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롬4:25) 그 말씀이 자신 속에
임하신 믿음을 가지면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믿음과 동격이 됨을 알지 못하고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은 신앙의 행위를 따라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께서 행하신 일을 그대로 수용하면 의가 되고
그 다음에 생명이 되고 치료가 됨에도 신앙의 고정관념이 세월을 갉아 먹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제자리를 돌듯이 이 환자에게도 38년간이나
드러누워서 시간을 허비하도록 하고 있는 겁니다. 많은 이들이 말씀,
말씀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기도하고 은사 받고 능력을 받아야 돼 라고 말합니다.
보너스는 고맙게 받고 본봉은 받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월급쟁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기만 하면 그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의가 있고 구원이 있고 치유가 있고 영광이 있고 능력과 권세가 다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악함과 고집이 있어서
사람에 따라서 금식도 필요하고 기도 또한 필요한 것이긴 합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 날인 오늘 날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아담 안에 죽었던
자들이 다 살아나는데 중요한 건 아멘하고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요5장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초점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시며 모든 만물의 흥망성쇠의
주권자이심에도 인간의 육신의 생각은 다른 처방을 기다리더라는 것입니다.
요5: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실제로 물이 끓을 필요도 없고 누구의 도움으로
그 못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 믿어져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38년을 드러누웠던 환자가 말씀을 믿고 붙잡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니(요5:8)
그 말씀에 의하여 지긋지긋한 38년 된 병이 나아 일어나 걸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요한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그대로 된다는 간단한 공식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공식을 38년 된 환자를 통해 먼저 제시하고 난 다음 요5:24절 말씀이 나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하고 말씀하십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표적이 일어난다거나 몸을 제어하며 거룩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바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은 후부터는 그 말씀이 나를 통해서 하나씩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받는 것이지만 진리는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 은혜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원리인 것입니다. 한참 걸리는 공정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홍해는 자다가 일어나 엉겁결에 건넜지만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부터는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훈련을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한 걸음도 건너 뛰는 법이 없습니다.
만나는 반드시 아침에 하루분만 거두게 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반드시 따르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말씀을 순종하도록 하는 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말씀이 임한 이후부터 비로소 하나님의 일 곧 말씀을 이루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경건의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주는 강력한 메시지는 말씀(호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실 때에 수용하기만 하면 그대로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의해 내가 설득되어 가고
그 말씀에 의해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설득시키는 섬김(곧 다스림)의
권세와 능력이 말씀을 받은 누구에게나 나타난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한규진 입니다 핸드폰이 잘못 되어 신경쓰게 하셨네요 승인을 바로 안해 주셔서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하루도 빠지지 안았습니다.
대단히 반갑습니다
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며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주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