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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표적의 의미
▪사도행전 3:1-10▪
1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행 3:1-10)
설교작성 노트
한국교회는 기사와 이적을 좋아한다. 성도들이 좋아하다 보니까 설교자는 이에 영합하여 강조한다. 그러나 기사와 이적은 인간의 뜻이나 필요에 의하여 아무 때나 덮어놓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구약시대에도 출애굽 당시와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와 바벨론 포수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공생애와 교회창설 당시에 집중되어 있음을 본다.
기사 이적을 가리켜 하나님의 비상섭리라고 말한다. 비상섭리란 말 그대로 비상사태에서 섭리하시는 방편이시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일반섭리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기사이적이라는 비상섭리를 행하시는 것은 비상한 뜻과 목적이 있을 때에 행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공생애에 행하신 이적과 (복음서)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이적(사도행전)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봄으로써 기사, 이적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받고자 한다.
성령님의 사명
주어진 본문에 바르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맥을 더듬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1장에서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분부를 남기시고 승천하십니다. 2장에서는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강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고 올라가셨으며 성령께서는 새로운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사명이 무엇일까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어떤 방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을 들어 증거하심
성령감림 후에 나타난 첫 표적은 2장 다음인 3장에서 나타났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2장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2장의 전반부는 성령강림의 내용이고 후반부는 베드로가 행한 첫 번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베드로의 말로 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이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베드로 위에 강림하사 그를 사용하셔서 행하신 성령님의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행한 첫 사역은 표적이 아니라 “말씀” 즉 설교였습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시어 행케 하신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2:23 -24)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성령님이 행하시는 일을 예의 주시해야만 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證明)하시는데 있어서 어떤 증거를 제시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성경을 들어 증거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위하여 구약 성경에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미리 말씀하여 두셨다가 때가 되매 이를(구약성경) 증거로 제시하여 예수가 바로 구약에서 약속하셨던 메시야, 즉 그리스도시다 라고 증명하신다.
구약성경의 기록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구약시대에 다윗을 들어서 시편을 기록케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눅 24:44)이라고 시편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이제 베드로를 통하여 시편 두 편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상합니까? 얼마나 용의주도하십니까? 얼마나 빈틈이 없습니까?
먼저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한 시편 16:10을 증거로 제시합니다.(27).
“형제들아 내가 조상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날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2:29)고 말합니다. 왜 다윗의 묘를 거론하고 있느냐하면 다윗은 죽어서 썩음을 당하였다(13:36)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한 말씀이 다윗 자신에 대한 말이 아니라 그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썩지 아니하고 부활하실 것에 대한 명백한 예언이요 증거임을 확신시켜 나갑니다.(31-32)
기록된 성경을 증거로 제시함은 부인하거나 변명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최종적인 증거요, 권위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왜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경험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확증(確證)할 수 있는 최상의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요구하는 증거로써는 불충분한 것입니다. 또한 주관적인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변화산상의 경험을 간증하면서도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구약성경을 가리킴)이 있어”(벧후 1:19)하고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임을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그는(다윗)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 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이 점에서도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가 자기 자손으로 오실 것을 미리 보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하기를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30-31)고 먼저 성경을 들어 증명하고 나서 하나님의 예언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자신들이 목격한 증인임을 내세웁니다.
대언의 영
이 말씀을 대하게 될 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은 베드로가 언제부터 이처럼 성경에 능통하고 변증가가 되었는가, 그는 어부가 아니었던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자가 아니던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안으로 문을 잠그고 있던 그가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앞에서 성경은 성령님의 저작이라는 것과 성령의 주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데 미리 기록케 하신 성경을 들어서 증명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이 사역을 어떤 방도로 수행하시는가 입니다. 이 점을 성경은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계 19:10)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대언의 영”으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사역자들의 임무입니다. 또 하나 성령께서 증거로 제시하신 성구는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는 시편 110:1입니다.
이 성구를 인용하면서도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34)하고 이 말씀이 다윗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인 말씀임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부활하였고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이 성경적인 증거로 증명(證明)(9:22 17:3)이 되었다면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36)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하신 첫 사역은 (베드로의 입을 의탁하사) 성경 말씀을 증거로 제시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명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의 내용입니다.
표적을 통하여 증거함
이제 3장의내용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3장의 전반부는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내용이고 후반부는 이를 계기로 행한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입니다.
40년 간이나 앉은뱅이로 구걸하던 그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고 군중들은 베드로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치유를 표적으로 삼아서 설교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2-16)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낫게 해 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베드로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오직 성령께서 베드로를 의의 병기로 사용하셔서 행하신 성령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표적을 통하여 나타내기를 원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에 대한 답변이 15-16입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믿음이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셨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증거하기 위한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2장에서는 성경을 들어서 증거하고 3장에서는 표적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전함을 싫어하여”(4:2) 사도들을 체포한 제사장들이라 하여도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를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4:16)하고 난감해 했던 것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차이
사도행전을 상고해보면 사도 베드로는 이 밖에도 다른 이적들을 행하였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이적은 나타났습니다. 또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많은 이적을 행하셨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행한 기사 이적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사 이적의 의미 다시 말씀드리면 그 표적을 통하여 증거하시고자 한 목적은 다른 것입니다. 이 점이 본 설교의 주안점입니다.
먼저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무엇에 대한 표적이었을까요? 그것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0:30-31은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고 이 점을 명백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가지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예수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하여 언약하시고 예언하셨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기 위한 표적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을 통하여 행케 하신 이적들은 무엇을 증거하기 위한 표적이었을까요? 그것은 분명합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2:24)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3:15)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시기 위한 “비상섭리”였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2장에서는 성경을 근거로 제시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시고 3장에서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의 치유를 근거로 제시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1:22)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들을 다룰 때에 주님께서도 이적을 행하셨고 사도들도 행하였으니 우리도 행할 수 있다고 직선적으로 적용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계시록에서 완성되는 구속사역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신 시대와 사도들이 사역한 시대와 우리에게 맡겨진 이 시대는 같은 시대가 아니며 임무도 섭리하심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기사이적을 행했으니 우리도 행할 수 있고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하였으니 우리도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아니할 뿐더러 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도들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우리나라 성도들은 잘 가르치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보다 기사와 이적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체험했다는 간증들을 좋아하고 자신도 그러한 기적을 체험하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마와 같은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는 도마를 똑똑하다고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고 책망어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보고 믿는 믿음은 믿음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것이 주님께서 복되다고 칭찬하신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덮어놓고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천지는 변하고 없어질지라도 영원히 변치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표적만 행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로 전하였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졌습니다. 기록된 성경 안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한 말씀과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제시된 표적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더 첨부할 것이 없는 충족(充足)된 계시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모자람이 없습니다. 믿기에 충분합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뜻은 이 충족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켜주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확실’합니다. ‘정직’하며 ‘순결’합니다.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시 19:7-11). 자상하시고 모자람이 없고 진실하신 충족된 계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무리들이 성경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사와 이적을 찾아 헤맨다면 그것은 말씀을 맡은 자들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한 번 하신 언약은 반드시 지켜 주셨음을 성경을 들어서 증명해 보여 주는데 소홀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씀을 맡은 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세워드리지 못한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기사와 이적의 권위보다 못하게 취급해서는 아니 됩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적들을 설교할 때에 현재에도 일어 날 수 있고 나도 행할 수 있고 우리도 경험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그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음을 증거하는 것이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옳게 사용하는 것이요 바르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중심의 믿음이 가장 바른 믿음입니다. 건강한 믿음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확신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표적의 의미입니다.
첫댓글 목사님,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오직 예수께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성경을 통해 증거하는 일꾼되길 소원합니다.
성경을 이처럼 완벽하게 해석하신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이 시대에 유도순 목사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