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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저주받은 혁명가 - 카를 마르크스(3)
게다가 마르크스는 산업현장의 노동 환경을 직접 조사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런 경험을 가진 노동자 지식인으로부터 그에 대해 배루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그는 헤겔 변증법을 활용하여 1840년대 후반에 이미 그가 내린 결론에 도달했다. 남은 것은 결론을 입증할 자료들을 찾아내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런 자료들은 신문 보도, 정부의 청서, 초창기 저자들이 수집해 놓은 증거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문헌들은 모두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더 찾아 볼 이유는 없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문제는 적절한 종류의 사실들, 그러니까 이론에 부합하는 사실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철학자 카알 야스퍼스는 마르크스가 쓴 방법을 잘 요약했다.
마르크스의 집필 스타일은 연구자의 그것이 아니다…..그는 자신의 이론과 배치되는 사례나 사실은 인용하지 않고, 그가 궁극적 진리로 간주하는 것을 지지하거나 확증하는 사실만 끌어댄다. 그의 접근 방식은 해명을 위한 것이지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해명이라는 것도 과학자의 확신이 아닌 종교적 신봉자의 확신에 의해 완벽한 진리라 선언된 것을 해명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은 마르크스의 저작에서는 중요치 않다. 사실은 이미 그것과 무관하게 도달된 결론을 지지하는 부수적인 요소다. 따라서 학자로서의 마르크스의 삶이 나은 기념비적인 <자본론>은 책이 주장하는 바처럼 경제 발전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작품이 아니라, 칼라일이나 러스킨류의 도덕 철학으로 봐야 한다. 자본론이 논리적이지 못한 점이 많은 거창한 훈계이며, 산업 발전과 소유권의 원칙에 대한 공격이다. 공격을 감행한 남자는 자신의 공격 대상에 대해 강렬하지만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증오를 품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자본론>에는 조직화된 원칙으로 작동할 만한 핵심 주장이 없다는 것이다. 원래 마르크스는 1857년에 각각 자본, 토지, 임금과 노동, 국가, 교역과 세계 시장 및 위기를 다룬 여섯 권의 책을 구상했다. 그런데 그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으로 판명된 그런 계획을 수행하려면 규칙적인 자기 절제가 필요했다. 그가 실제로 완성한 유일한 책(헛갈리게도 두 권이다)에는 사실상 논리적인 형식이 없다. <자본론>은 임의의 순서대로 배열된 일련의 개별적 설명들이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자본론>의 구조가 너무 혼란스럽기 때문에 독자들은 1부를 무시하고 2부 4장부터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마르크스주의 주석가들은 이런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사실, 알튀세르의 접근법 역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엥겔스가 직접 작성한 <자본론>의 개요는 구조의 취약함이나, 구조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는 1,500페이지에 달하는 마르크스의 노트에서 <자본론> 2권을 구성해 냈는데, 그중 4분의 1은 그가 다시 쓴 것이다. 그 결과는 주로 1860년대의 경제학 이론의 관점에서 자본의 순환을 다룬, 단조롭고 정신없는 600페이지의 책이었다. 엥겔스가 1885년부터 1893년까지 작업한 3권은 고리대금업에 대한 1,000페이지의 책인데, 앞서 다루었던 주제들을 제외한 자본의 모든 측면을 개관하지만, 대부분 마르크스가 써 놓은 메모와 노트에 불과하다. 그 내용은 모두 마르크스가 1권을 작업하던 1860년대 초반부터 나온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가 책을 완성하지 못한 것은, 에너지의 부족과 체계적인 지식의 결여 때문이었다.
2권과 3권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집필 작업을 15년이나 중단한 것으로 볼 때, 마르크스가 이런 형태로 책을 집필하려고 의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집필한 1권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두 장 뿐이다. 8장 “노동일수”와, 유명한 7절 “자본주의 축적의 역사적 경향”이 포함된 2부 24장 “본원적 축적.” 자본주의 축적의 경향에 대한 분석은 어떤 의미로 보더라도 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단순한 예언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1) “자본가의 총 수가 계속해서 감소”할 것이고 (2) “그에 대응하여 빈곤층의 규모, 탄압, 노예화, 퇴폐와 착쥐가 증가”할 것이며, (3) “노동계급의 분노는 꾸준히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세 가지 힘은 한데 어우러지면서 헤겔적인 위기, 이면 그가 10대 시절 상상했던 시적 대재앙의 정치, 경제적 버전을 창출한다. “생산 수단의 집중화와 노동의 사회화는 자본주의의 외피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의 외피는 산산이 찢길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러퍼진다. 착취자들은 착취당한다.” 피가 쩔쩔 끓는 이 문장은 수 세대에 걸쳐 열성 사회주의자들에게 기쁨을 줬다. 그러나 이것이 점성가의 만세력 수준을 뛰어넘는 과학적 예측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대조적으로, 8장 “노동일수”는 영국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자본주의가 끼친 영향애 대한 사실적 분석임을 표방한다. 사실, 이 장이야말로 마르크스 철학 전체의 허울뿐인 주제인 노동자를 실제로 다룬 유일한 부분이다. 따라서 이 장의 “과학적” 가치는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미 알게 됐듯이, 마르크스는 자신의 예견에 적합한 사실만을 찾아왔다. 그런데 이런 접근은 과학적 방법의 원칙과는 반대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 장은 처음부터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사실을 편향적으로 선택하는 것 외에도 그 사실을 잘못 전달하거나 왜곡했을까? 이제 우리는 그 문제를 고려해 봐야만 한다.
8장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마르크스의 도덕적 주장의 핵심이기도 한데,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노동자에 대한 점증하는 착취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많은 자본이 사용될수록, 노동자들은 더 많이 착취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종적인 위기를 낳을 커다란 도덕적 죄악이다. 자신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마르크스는 (1) 전자본주의 작업장의 환경도 열악했지만 산업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환경이 더욱 열악해졌다. (2) 자본의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본질을 가정한다면,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최고도로 자본화된 산업에 점점 강도가 세어진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마르크스는 (1)을 입증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대규모 산업의 초창기부터 1845년까지의 기간에 대한 문제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영국 노동 계습의 상태>(라이프니츠, 1845)에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거론하겠다”고 밝혔다. 마르크스는 그 뒤에 정부 간행물, 특히 공장 검사관의 보고서를 덧붙이면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본질에 대한 엥겔스의 통찰력”을 확증했고, “그가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는 데 얼마나 성실했는지를 보여줬다”고 기술했다.
요약하자면, 1860년대 중반의 자본주의 노동환경에 대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검증의 첫 부분은 20년 전에 출판된 엥겔스의 <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 단 한 권에만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단일한 출처에 어느 정도의 과학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1820년생인 엥겔스는 라인란트 바르멘의 부유한 목화 제조업자의 아들로, 1837년에 가업에 뛰어들었다. 1842년에 멘체스터 지사로 파견된 그는 영국에서 20개월을 보냈다. 그동안, 그는 맨체스터뿐 아니라 런던, 올덤, 로치데 일, 애슈턴, 리즈, 브래드퍼드, 허더즈필드 등도 방문했다. 따라서 그는 섬유 교역은 직접 경험했지만, 그 외의 영국의 노동 환경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예를 들어, 그는 광업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탄광에 가본 적도 없었다. 농촌 마을이나 농업 노동자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책에서 “광부들”과 “토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개의 장을 할애했다. 엄격한 학자인 W. O. 핸더슨과 W. H. 챌로너는 1958년에 엥겔스의 책을 재번역하고 편집하면서, 엥겔스가 사용한 자료의 출처와 그가 인용한 문구들이 나오는 원래 문헌을 검토했다. 그들의 분석 결과는 책의 객관적인 역사적 가치를 거의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엥겔스의 저작은 전혀 의심의 여지없는 정치 논객의 작품, 팸플릿, 공격적 연설에 불과한 것이었다. 엥겔스는 책을 집필하는 동안 마르크스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세계 여론의 공개 법정에서 대량 살상, 대대적인 노략질, 그리고 공판 예정표에 있는 다른 모든 죄목으로 영국의 중산층을 고발하네.”
이 문구는 책의 모든 것을 요약한다. 이 책은 형사 사건의 고발장이다. 전자본주의 시대와 산업화 초기 단계에 대한 모든 조사를 포함한 책의 상당 부분은 1차적 자료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가치가 모호한 몇 건의 2차적 자료에 기초한 것이다. 피터 개스켈의 <영국 제조업 종사 인구>(1833)가 2차적 자료 중 하나였는데, 이 책은 18세기가 영국 자작농과 기능공의 황금기였음을 보여 주려는 낭만적 신화를 담은 시도였다. 1842년에 결성된 “아동 고용에 관한 왕립위원회”가 결론적으로 보여 줬듯이, 사실 소규모 전자본주의적 작업장의 작업 환경과 거주 주택의 환경은 랭커셔의 신식 대규모 방적 공장에 비해 형편없이 열악했다. 엥겔스가 1차적 자료로 채택한 출판물들은 5년, 10년, 20년, 25년, 심지어는 40년이나 된 것들이었다. 그런데 엥겔스는 그 자료들을 당대의 자료인양 제시한다. 야간 근무 탓으로 돌린 사생아 출생과 관련한 수치를 내세우면서, 그는 이 수치가 1801년에 나온 것임을 기입하지 않았다. 그는 에든버러의 공증위생 시설에 대한 논문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에게 그 논문이 1818년에 쓰인 것임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자신의 증거들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사실과 사건을 언급 하지 않았다.
엥겔스의 허위 진술이 독자들을 고의로 속인 것인지, 이면 자기 기만에 빠진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몇몇 행각은 명백히 의도적이다. 그는 1833년에 발족한 공장조사위원회가 밝혀낸 열악한 환경에 대한 증거들을 활용하면서도, 알소프 경이 발의한 공장 법이 1833년에 통과됐으며, 법률이 오랜 동안 시행되면서 보고서가 기술했던 작업 환경을 개선시켰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그는 주요 자료인 J. P. 케이 박사의 <맨체스터 면화 공장에 고용된 노동 계급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1832)를 다루면서도 똑같은 기만을 저질렀다. 이 책은 지방 정부가 공중 위생 시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데 도움을 줬는데, 엥겔스는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범죄 통계를 잘못 해석했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을 때는 그런 통계를 무시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는 사실들과 그가 폭로하고자 하는 특별한 “죄악”들에 대한 해명을 꾸준히, 그리고 고의로 은폐했다. 2차적 자료에 대한 엥겔스의 인용을 세심하게 확인해 보면 생략과 축약, 윤색과 왜곡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직접 인용된 것처럼 따옴표가 첨가됐다. 핸더슨과 챌로너의 책은 본문과 각주를 통들어 엥겔스의 왜곡과 부정직함을 정리한 목록이다. 7장 “프롤레타리아”만 놓고 보더라도, 왜곡과 잘못된 인용은 152, 155, 157, 159, 160, 163, 165, 167, 168, 170, 172, 174, 178, 179, 182, 185, 186, 188 , 189, 190, 191, 194, 203페이지에 나타난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의 책이 가진 부정직함이라는 약점을 모를 리 없었다. 독일 경제학자 브루노 힐데브란트가 1848년에 그중 상당 부분을 폭로했는데, 마르크스도 그 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도 엥겔스의 책이 출판된 이후 공장법과 다른 개혁적 법률의 시행으로 인해 많은 개선이 이뤄졌고, 개선으로 인해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작업 환경의 유형이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밝히지 않고 건너뛰면서, 엥겔스의 그릇된 설명을 더욱 악화시켰다. 어찌 됐든, 마르크스가 1차적, 2차적 자료를 제시할 때 보여 준 태도는 엥겔스의 저작을 특징지은 지독한 부주의, 편향적인 왜곡과 노골적인 부정직성과 동일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사기 행각을 벌인 적도 종종 있었다. 마르크스가 더 대담한 거짓말쟁이이긴 했지만 말이다. 마르크스는 특히 악명 높은 한 가지 사례에서는 자기 자신까지도 속여 넘겼다. 그 사례는 1864년 9월에 창립된 국제노동자협회의 소위 “개회사”다. 무관심한 영국 노동 계급을 선동할 목적으로, 그리고 생활 수준이 점차 저하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마르크스는 W. E. 글래드스턴 수상의 1863년 예산 관련 연설을 일부러 왜곡했다. 글래드스턴이 국부의 증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 말은 이랬다. “국부와 국력의 증대가 안락한 여건에서 살아가는 계급에만 국한된 일이라면, 저는 우리를 도취시키는 국부와 국력의 증대를 우려와 고통의 눈길로 바라봐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영국 노동자의 평균 생활 수준이 엄청나게 향상됐다는 것, 그것도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수준이라고 선언해도 무방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행복합니다.” 개회사에서 마르크스는 글래드스턴이 이렇게 말했다고 밝혔다. “우리를 도취시키는 국부와 국력의 증대는 전적으로 유산 계급에 국한된 것입니다.” 글래드스턴이 원래 했던 말이 옳았다는 사실은 많은 통계 증거가 입증하고 있다. 또한 글래드스턴은 국부가 가급적 광범위하게 분배될 수 있도록 고민한 것으로 유멍하다. 따라서 글래드스턴의 연설 의도를 180도 뒤집어 아주 엉뚱하게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마르크스는 연설문 자료로 일간지 <모닝스타>를 지목했다. 그러나 다른 신문이나 국회의사록과 마찬가지로 <모닝스타>는 글래드스턴의 연살을 정확하게 옮겨 실었다. 마르크스의 인용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본론>에서 다른 잘못된 인용들과 함께 그 연설을 다시 인용했다. 변조 사실이 다시 지적되고 비난이 잇따르자, 마르크스는 논점을 흐리기 위해 엄청난 양의 잉크를 흩뿌려댔다. 그와 엥겔스, 나중에는 마르크스의 딸 엘리노어까지 옹호할 수 없는 것을 옹호하기 위해 20년 동안 분쟁에 휘말렸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최초의 분명한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따라서 논쟁의 결과로 몇몇 독자들은 마르크스가 의도했던 것처럼, 그렇지도 않았는데도 이 논쟁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르크스는 글래드스턴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기만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마르크스에게 이러한 일은 특별한 사례가 아니었다. 그는 비슷한 의도에서 애덤 스미스를 잘못 인용했다.
마르크스의 체계적인 자료 오용은 1880년대에 두 케임브리지 학자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자본론>의 프랑스어 개정판(1872-1875)을 활용하여 케임브리지 경제클럽에 제출할 보고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15장의 청서 활용에 대한 논평>을 작성했다. 그들은 먼저 “몇 가지 주장에 대한 세밀한 정보를 도출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인용 문헌들을 조사했는데, “수많은 오류”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존재하는 오류의 범위와 중요도”를 검토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청서의 텍스트와 마르크스의 인용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결과를 왜곡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인용문에서 발견한 “마르크스가 입증하려고 노력하는 결론에 배치되는 구절들을 생략해서 본인의 편리에 맞도록 축약”된 경우들을 왜곡의 한 범주로 분류했다. 또 다른 범주는 “청서의 다른 부분에 있는 별개의 문장을 하나로 이어붙여 가공의 인용문을 창작”해 낸 것이다. “그리고는 청서에서 직접 인용한 것처럼 인용 부호 안에 집어넣어서 독자들을 속였다.” 일례로 재봉틀을 소재로 한 경우,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청서를 활용한다….청서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인용했는데 그런 인용에는 소름이 끼친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사실이 “고의적인 왜곡의 증거로 충분”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정부 당국의 권위를 범죄 수준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로 무모하게 활용”했다는 것은 확실하므로, “마르크스의 다른 저작들도 의혹을 품고”대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르크스가 증거들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기만 해도, 그가 집필할 때 의존했던 모든 사실 자료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는 결코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자본론>의 핵심적 주장인 8장 전체는 객관적으로 검증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논제들을 증명하기 위해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실 정보를 변조했다. 진실과 관련한 마르크스의 죄목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그는 오래된 자료들을 사용했다. 최신 자료들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작업 환경이 특히 열악한 산업들을 자본주의의 전형적 산업으로 선택했다. 이 속임수는 마르크스에게 특히 중요한데, 그런 속임수가 없었다면 8장을 결코 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논점은 자본주의의 작업 환경이 계속 나빠지리라는 것이다. 더 많은 자본이 사용될수록, 적절한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더욱 열악한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가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장황하게 인용한 증거들은 전적으로 요업, 여성복 제조업, 대장간, 제빵업, 성냥 제조업, 벽지 제조업, 레이스 제조업처럼, 대부분 전자본주의적 단계에 있는 소규모의 비능률적이고 자본화가 덜된 구식 공장들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인용하는 특정 사례(예를 들어 제빵업)의 작업 환경은 상당히 열악했다. 해당 기업은 자본의 부족으로 기계를 들여 놓을 만한 형편이 안 됐다. 결국 마르크스는 전자본주의적 작업 환경을 다루면서 눈앞의 진실을 무시해 버렸다. 자본이 늘어날수록 노동자의 고통은 줄어든다는 진실을. 그는 근대화되고 고도로 자본화된 산업을 다룰 때면 증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는 철강 산업을 다룰 때는 자기 의견을 삽입하는 데에 의존했다(“정말 냉소적일 정도로 솔직하다!” “놀라운 입담이다!”). 그는 철도 산업을 다루면ㅅ 케케묵은 사건에 대한 선정적 기사를 활용했다(“새로 등장한 철도의 대재앙들”). 그의 주장이 부합하려면 마일당 여행승객 사고율은 필연적으로 증가해야 했다. 그런데 사고율은 급격하게 감소했고, <자본론>이 출판될 즈음에 철도는 이미 역사상 가장 안전한 대량 수송 방식이 되었다.
셋째, 마르크스는 공장 검사관의 보고서를 활용하면서 노동자의 열악한 작업 환경과 부당한 대우가 마치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불가피한 성격처럼 인용했다. 그런데 부당 행위는 검사관들이 “부정한 공장주”라고 부른 사람들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그런 공장주를 적발하고 기소하는 검사관들 덕에 그런 행위는 점점 자취를 감춰 가는 중이었다.
넷째, 마르크스가 원용한 주요 증거가 검사관들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기만을 입증한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구제 불능이고, 부르주아지 국가는 자본주의의 공범으로서 노동자에게 고난을 부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국가는 “전체 계급을 다스릴 때 벌어지는 일들을 관리하는 집행 위원회”라고 썼다. 그런데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국회는 공장법을 결코 통과시키지 않았을 것이고 국가도 그 법을 시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택적으로 배치(되고 때로는 변조)되기는 했지만, 마르크스가 활용한 거의 모든 사실 자료는 작업 환경을 개선하려는 국가(검사관, 법원, 치안 판사)의 노력에서 얻은 것으로, 열악한 작업 환경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적발하고 징벌하는 일과 관련된 필수적인 자료였다. 만약 사회 체제가 개혁 과정에 스스로 들어서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불가능하다고 추론한 것인데-<자본론>은 쓰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현장에 직접 나가 조사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그가 “지배 계급”이라고 일컬었던 사람들이 내놓은 증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지배 계급은 상황을 바로잡으려 노력했고 그들의 노력이 성공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났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중요한 증거의 출처를 왜곡하거나, 그의 주장을 폐기해야 하는 기로에 섰던 것이다. <자본론>은 구조적으로 부정직한 책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