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1952년 7월 15일 경남 동래 범어사에서 동양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
1962년 3월 서울 성북구 돈암동 적조암 주지
1962년 5월 - 1965년 11월 육군 보안부대 인사과 근무
1965년 12월 대한불교 청소년 교화연합회 교화위원장
1971년 3월 - 1974년 8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재무국장, 사회국장 역임
1975년 11월 L.A 관음사 주지 취임 후 현재에 봉직함
1987년 11월 America Buddhist Congress 공동의장 피선
1992년 12월 조국평화통일 추진 불교협회 미주본부 회장 피선
1992년 10월 The World Fellowship Buddhists 미국 서부 지부장 피선
1992년 12월 남가주 사원연합회 회장 피선
1994년 10월 L.A 한인회 고문 및 자문위원추대
1991년 - 1997년까지 5차례 걸쳐 북한 방문(종교교류 협력목적)
1998년, 1999년 8.15 통일축전 참가 (금강국수공장 설립)
본지에서는 20세기를 마감하고 새해가 시작됨에 따라 절의 크기, 활동폭, 그 지역에 불교포교에 공헌도 등을 참고로 하여 미국속에 활동하는 대표적인 한국불교 지도자들을 동부, 중부, 서부 등 각 지역별로 선정하여 그간의 행적을 소개하고 또 인터뷰를 통하여 앞으로의 포교방향, 계획, 포교활동을 하면서 겪는 어려운 점등을 집중적으로 보도할 계획이다. 이 보도를 통하여 스님들이 포교하면서 겪는 어려운 점을 불교인들에게 설명하고 또 스님들의 계획을 공개하여 주먹구구식이고 즉흥적인 불사를 지양하고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불사를 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주-
도안스님은 현재 미주한국불교계 최대사찰 중의 하나인 L.A 관음사 주지로 복무하며선 L.A 한국 불교계 나아가 미주한국불교계를 선도하고 있다. 옥스퍼드와 3가가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관음사는 아마도 미주한국불교계 사찰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건물가격도 높을 것이다. 절 규모에 걸맞게 관음사에서는 하는 프로그램도 많다. 일주일에 30분 방영하는 한미불교방송, 로메리카 불교대학, 한미불교봉사회, 묘지분양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또 스님은 대외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미주평불협 회장으로서 황해도 사리원에 국수공장을 설립하여 이를 후원하고 있고 평양에도 몇 차례 다니면서 남북불교교류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도안스님의 그간 행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안스님은 1952년 범어사에서 동암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한후 한국의 여러 유명 선원에서 수행을 마친 후 조계종단에서 부산 대각사 경우스님, 뉴욕 원각사 법안스님 등과 함께 일을 하였다. 스님이 한국에서 조계종 재정국장 직책을 맡고 있을 때 한국불교계로서는 중요한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4월 8일 “부처님 오신날”을 용태영 변호사등이 국경일로 제정하는 운동을 할 때 조계종 재정국장이란 직책으로 막후에서 이 사업을 적극 후원한 것이다. 그 결과 1975년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이 일을 마치고 도안스님은 미국으로 오려고 조계종총무원을 나왔다. 그러나 이 ‘부처님 오신날’ 국경일 제정은 불교계로서는 아주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조선시대부터 중단된 연등축제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 연등축제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때 국민축제로 행해지던 행사였다. 이러한 중요한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도안스님은 이를 기념하는 ‘부처님 오신날 공휴일 제정 4. 8 연등회 기념행사’를 개인적으로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행사를 추진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도안스님은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한국불교가 약해지고 이와 비례하여 전통적인 한국의 얼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다니면서 민속학자 임동권 박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전통문화, 전통예술 여기에다 종교적인 예술문화에 대한 것을 재발굴해야 한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부처님 오신 날’ 국경일 제정을 계기로 이를 한번 시도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행사에는 국토통일원, 문화공보부 등이 후원을 맡았고 준비에는 도안스님을 정점으로 홍익대학교 이준만 교수, 김안수 법사, 그리고 청소년관련 단체 몇 사람이 참여하였다. 행사내용은 임동권 박사의 ‘4. 8 민속의 전래역사’, 시 낭송, 기능보유자 급의 국악인 등이 대거 참여하여 다채롭게 꾸며졌다. 이 행사에는 스웨덴, 독일 덴마크, wqpsp주엘라 등 세계 여러나라의 주한 대사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언론에서는 ‘고려시대 민속 연등회 재현’이라고 하여 대서특필하였다.
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후 주위 분들과 스님의 미국행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지금이야 한국에서 스님들이 한 해에 몇 백명이 오고 가지만 당시에는 미국을 방문하는 불교계 스님들은 극소수였다. 강석주 스님, 이서옹 스님, 서경보 스님 등이 도안스님에게 특별 당부하시면서 “꼭 미국에 가서 한국불교 포교에 힘쓰라”고 특별당부를 하였다. 이 분들은 ‘미국에 가서 한국불교를 문화적인 측면에서 널리 알리고 이 방향에서 활동하라고’ 조언을 하였다. 그래서 도안스님은 한국에서 이미 나름대로 탄탄한 기반을 다진 상태였지만 ‘외국에 가서 견문도 넓히고 한국불교를 펴보자’라고 속으로 결심을 하고 L.A 관음사 주지로 취임하러 1975년 11월에 L.A에 도착하였다. 당시 서부 한국불교계의 상황은 L.A에 달마사와 관음사가 있었고 북가주지역에는 카멜에 삼보사 이렇게 단 세 곳만 절이 있을 때였다.[계속]
첫댓글 이렇게 곳곳에 좋은 선지식이 계셔서 우린 참 행복한 사람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