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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타저널에서 시를 실어달라고 연락이 왔다.
감사한 일이다. 멀리 이국에 와서 모국의 글을 동토의 이 땅에 동포들을 위하여
시 한줄을 실을 수 있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2월부터 2주로 글을 싣게 되었다.
첫 시는 "이민의 땅에서"로 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일년 간 원고 목록>
이민(移民)의 땅에서
추정강 숙 려
언뜻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 듯
스쳐 지나가는 달빛 같다 서울은,
태평양 시퍼런 물길을 건너 어언 십 년
아직도 향수에 젖게 하는
내 젊음의 칠월이 석류 알처럼 익던 곳
그 곱던 단풍들 낙엽 되어 떨어져 호젓하던 덕수궁 돌담 길은
무고한지, 곧 어디론가 긴 칼을 찬 체 떠나야 할 것만 같았던
장군님은 여전히 광화문을 잘 사수하고 계시는지, 늘 안부가
궁금한 나는 서울을 사랑하는 탓인가
멀리 서 보라 국력이 얼마나 이민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지를
강력한 국력이 있어야 빛나지는 이민의 자리
아름다운 내 나라 무궁한 횃불을 기도하는 동토의 땅 여기
뜨거운 눈물이 있다 애착과 사무침이 있다
분투 사랑하라 붉은 정열의 그대들이여!
햇살 따스한 가을이 오면 가 보리라
내 청춘이 남겨 둔 거리들을 걸으며 추억을 주워 보리라
아직도 선운사 동백꽃은 온 몸을 던져 붉게붉게 지고 있는지도
눈물 없이도 바라 볼 수 있는 곳들을 찾을 수 있을진
알 순 없지만 나는 가서 보리라
그것들 비록 사랑을 잃었다 하더라도
두고 온 내 사랑의 힘으로 힘껏 보덤어 보리라.
춘몽(春夢)에 젖어
추정/ 강 숙 려
막무가내로 달려와서
목마른 내 목 긴 울대를
꿀꺽, 넘어갔어요
단지, 나는
그냥 바라만 보았을 뿐인데
봄은 나를
두근두근한 바람으로 만들었어요
아련하고 따끈하여 단내 나는 봄이 된 나
꿈꾸고 싶어요.
노랑노랑 파릇파릇 봄이 되어
열아홉 팔랑이던 꽃길에 서서
노스탈지어에 잠겨요
허벅지 버얼겋게 꽃이 피던 미니스커트에
날렵한 긴 부츠 한번 신고 뽀득뽀득 걷고 싶고요
긴 생머리 팔락이며 엄청 도도해져 보고도 싶고요
밤새워 쓰고 지운 애틋한 사랑 편지도 받고 싶고요
눈물겨운 구애도 튕기던 그 시절
한없이 값나가던 그 시절로
딱 한 번 만 가 보고 싶은 봄이
노랑노랑 익고 있어요
저 아래 희수(稀壽)의 언덕이 누워
껌벅껌벅 쳐다보는 한나절
그래도 나는 아직 봄이길 고집하고 싶은
청춘의 열정은 어제나 거제나
가슴에 있는 것
빠알갛게 꽃이 되어
춘몽(春夢)에 젖는 어여쁜 나는
아직 봄이고 싶어요.
머무는 곳
추정 강 숙 려
나는 잠들고 잠들어
깊이 일어남 없는 잠 속에서
하염없는 꿈으로 살리
아픈 마음 하나 없어도 열매가 되는
내 사랑 익어서 꽃이 되는 날이여
하나둘 꺾이어 바람이 되고
다섯 여섯 슬픔으로 남는 오늘이 우네
돌아갈 수 없는 먼 강물은 흘러가
어디에서 모이나
숨죽여 울음 우는 가슴은
마른 대궁처럼 서걱거리네
보듬어 포개어지는 날은
정녕 꽃이 될까
아픈 것들 많아 버얼겋게 물드는 산
산.
꽃 속에 나비가 있듯이
추정강 숙 려
꽃 속에 나비가 있듯이
빛 속에 무지개가 들었듯이
내 속엔 당신이 들었어요
떨어져도 고운 꽃잎 눈물처럼 아린 밤
나는 눈을 뜨고도 꿈을 꾸어요
씨알 속에 꽃이 있듯이
꽃 속에 향기가 있듯이
향기 속에 당신이 있어요
그 향기에 취하여
나는 눈을 감고도 당신을 보아요.
나는 꽃 처녀
추정강 숙 려
4월은
내 처녀가 화알짝 피어나던 계절
붉디붉은 첫사랑이 피어나고
눈물도 아름답던 스무 살 꽃시절
자운영 꽃밭에 나비인 냥
봄바람 가득 벌렁이든 시절
내게도 있었던 봄날의 향기
아직도 가슴은 그 시절 꽃물이 들고
노랑노랑 물들어 설레는 4월인데
머리에 찬 이슬이 소복히 쌓이네
빠알갛게 부끄럼 타는 나는
아직 꽃처녀
마알간 하늘이 다가와 입맞춤하는
사알작 이는 봄바람.
<5월 원고로 써 주십시오.>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이신 어머니
추정 강 숙 려
어머니,
당신의 섬에는
언제나 눈물꽃 보다 더 짙은
가슴꽃 향기가 납니다.
멀리 돌아돌아 언제 와 서더라도
그 향기 가슴으로 젖어와
오늘도 당신의 섬에 엎드립니다.
지치고 힘들어 넘어지는 날에도
말없이 싸매고 덮어주시는 어머니의 사랑
고희(古稀) 앞에서야 철(喆)이 드는 이 못난 여식을
오늘도 품에 안고 놓지 못하시는 지순지고(至純至高)의
어머니 사랑 갚지 못하니 한없는 불효(不孝)입니다.
다 퍼내고 퍼 주시고 이제
마른가지처럼 말라 한 줌이나 될까 우리 어머니
오직 희생(犧牲)의 세월 올해 아흔 하고도 넷이신 어머니
이제 하나님 불러주시면 언제고 편히 눈 감겠다
기도하시는 고요한 어머니 모습
그런 어머니 가신 후엔
이 불효의 눈물 어디에 둘까요.
영원한 생명이시고 나의 근본(根本)이신 어머니
당신의 가슴꽃 피는 어머니 섬에
당신의 향기 닮은 라일락 한 아름 올리옵니다.
오월의 신록 아래 조용히
성경 읽으시고 기도하실 어머니 모습
한없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
(2013)
태평양 넘어 눈부처
추정 강 숙 려
사는 일
그리 만만한 일 아니기에 숨죽여 울던 날도 있었니라
들국화 아름 피어 시냇물에 얼비치던 날
가을비 촉촉이 내려 등성이가 오소소 추워져
햇살 한 줌이 그리 그리운 날도 있었니라
일찍 떠나 아무 기억도 사라진 아버지 잊은 지 오랜
등꽃 피던 날 아침처럼 휭 하던 기억도 이제
세월을 이고 한 줌이나 될까 모를 울 엄니
가는 허리에서 후루루 흘러내린다.
자식들 자라 줄줄이 떠난 자리엔 하얀 모란이 피어도
꿈으로도 잊으면 안 되는 새끼들의 모습 붙들고
그것만이 생의전부로 남은 아흔일곱의 어머니
자는 듯이 가야 할 터인데 기도 제목으로
일 번을 두시지만 그래도
자식들 곁에 머물고 싶은 정이야.
개명세상(開明世上)에 좋은 것 보고하고 싶은 것이야
사람의 욕망이니 너거 아부지 색(色) 보는 일은
당연한 일이니 못 본 척하거라
산들산들 기생첩 앞세우고 헛기침하시던
세상 활량이시던 아버지 가신지도 옛 얘기처럼 아득고
그런 엄니 오늘도 내 가슴에 별처럼 자리하신다.
한밤중엔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
시퍼런 태평양 물길을 넘어 마음이 먼저 달려감은
그곳에 연로하신 내 엄니가 헐떡이는 숨가품으로도
눈을 감지 못하실 것이기에,
“널 보고 가려면 나흘은 견뎌야 할 터인데,
비행기가 더 빨리는 못 오재?“
아흔일곱의 어머니
고관절을 다치신 채 침상에 뉘이셨다
생전에 널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으려나
늙어가는 딸자식을 눈에라도 넣으시려는지
태평양을 날아 엄니의 눈부처가 되어
훨훨 나비춤이라도 추어드릴 수만 있다면
이 불효가 조금은 감해지려는지요.
(201909)
*2019년 10월 7일 향년 97세로 어머니 소천하시다.
봄날의 오수(午睡)
추정강 숙 려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
안개 속으로 걸어 나오면
아 나는 한 아름 안개꽃이여라
저리도 화창한 날에 환장하게 햇빛도
찰랑거리는데 비록 나 장자가 아니더라도
나는 나비가 되어 이리로 저리로
꽃들 만발한 화창함 속에서
내가 나빈가 나비가 나인가 꽃술을 핥으며
나비 꿈이 펄럭이더라
굴러가는 소똥만 보고도 허리를 잡던
단발머리 소녀에서
긴 머리 펄럭이며 수줍음 타던 스물 더불어
연애 삼매경의 내 젊음이 펄펄 끓던 그 시절로
꿈은 펄럭이고 펄럭이고 펄펄 철럭이더라
오라
그 푸른 청무우 같이 싱싱하던 내 젊음의 날이여
땅속 깊이 겨우내 키운 꿈 확 지피어 올리듯이
수선화 옥잠화 튜립 쑤욱 솟아오르듯 그렇게
햇살 깔고 오시려므나
분홍빛 봄이 치마폭 넓게 따사히 따사히
스며드는 사월의 오수.
봄날의 반란
추정 강 숙 려
파랑 내음이 물씬 봄이란 이름으로
지천으로 피어난 민들레가 간지러움으로
빗물을 털어 꽃잎을 열어요
말할 수 없는 간절함이 하염없이 비로 내릴까
하늘도 애틋이 차오르는 아픔으로
저렇게 비를 내릴까
잠들었던 안의 것들이 쏟아져 나와
소리를 질러요
내 안에 있었던 노도의 소리 같은 것
흙 속에 묻었다 꼭꼭 묻었다 내밀어 솟는
절규 같은 것
내게도 있었던 내 안의 소리가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소리가
봄이란 이름으로 소리를 내고 싶은 것
저 봐라
강물이 되어 내 안의 것들
툭툭 꽃술을 열어요
봄비란 이름으로 흐드러지게 내려요
소리가 되어 그것들 출렁출렁 흘러서 가요.
저만치서
추정 강 숙 려
세월은 꼭 기나긴 기찻길 같지만
때론 잠깐 스쳐 간 안개 같기도 하고
또랑물 하나 첨벙 건너온 것 같기도 하니
내게도 노랑 파랑 무지개 떴던 날도 있었던 일
이제 고희에 앉아서 꽃동네 꿈쯤은 꾸어도 되리
누가와 말하면
나는 꽃처녀라 향기라 사월의 푸른 잎새라 하리
누가와 책責하면
용서하라 나도 참 너 같았느니라 하리
저만치서 앞서가는 노을에
촘촘히 꽃 편지 띄운다.
사랑놀이 그 짓은
추정 강 숙 려
눈으로 본 당신을
오늘 내 가슴이 이리도 아린 것은
멈출 수 없어 잊을 수도 없는
눈물이 되는 까닭입니다
눈을 감아도 가슴에 젖는 당신은
속으로 파고드는 아픔인 까닭입니다
눈으로 보았는데 아픈 것은 가슴이라니요
그것은 죽기 살기로 잊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사랑놀이 그 짓은
언제나 이유 없었노라 멀리서는
이율배반의 꽃그늘입니다.
그리하지 아니할지니
추정 강 숙 려
처음처럼
첫 마음으로 시작하고자 하는 순수다
첫 사람을 만나고
첫 경험을 나눌 때 빛났던 태양
흠 하나 없이 하얀 날은 순수의 첫날이었다
영원을 꿈꾸던 순수는 말간 물거품으로 날아갔다 해도
그늘을 두지 말거라 그늘이 없는 하늘은 어지럽다
봄날은 늘 그러했듯이 바람 부는 곳으로 가고
가고 보면 오는 것이 쓰다 할지라도
그리하지 아니할지니
사람은 원래 외로운 것이다
별은 왜 눈물을 흘릴까
첫눈 내리는 강변에서 피리를 불자
순수를 말하던 입술이 그리하지 아니할지라도
나는 눈물을 흘리는 별이 되리
첫눈 내리는 강변에서
첫 사람 못내 버리지 못해
필릴리 필릴리 피리를 불리라.
부부란 2
추정 강 숙 려
놓지 못하는 끈이다
그렇게 좋던 날엔 입의 것도 나누고는
알량한 말본새로 시작하여
플리지 않는 매듭으로 싸늘하다
누군들 어여뻐라 고와라 탐하지 않았으랴 마는
오늘 멀리 서서 바라보는 저 눈빛 사나운 마음이라니
천리나 만리 쯤 더 멀리 서고 싶음은
보아라
간밤에 봄바람이 불었던 가
엄동설한 얼어붙은 골짜기 어느새
만발하는구나
치마 끝 살랑살랑 흔들고 지나가면
괜스레 큰기침해 보이는 뿌듯한 가슴
잡아보는 손길이 따스하여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아웅다웅 세월을 엮어가는 길
화롯불 불씨 같은 아낌으로 걷는 길
하염없이 붙들고 가는 그대와 나
놓을 수 없는 끈이다.
조국의 한 뼘 지적도
추정 강 숙 려
가방 밑바닥에 용케 깔아온 한 줄기 고국 내음
세월의 줄을 이어 갑니다
미나리 쑥 내음이 가득하고
두릅까지 한가득 밥상에 오르고 보니
어머니 밥상이 되어 이웃과 정도 나누고 살만해요
어머니 이제 맘 놓으세요
여기도 거기 못지않게 봄도 왔어요
철 되면 민들레 진달래 개나리도 피고요
태평양 시퍼런 물길을 건너 불모의 땅
이 동토의 땅에 뿌리 내린 지도 오랜 이웃들
떠나 보면 무언가 잡힐 것 있으리란 믿음으로 허둥지둥
달려 온 세월 앞에 아이들은 자라서 이방의 짝들과 떠나고
둘씩만 남아 헬로 오케이 아직도 서툰 발음에 매여서
등짝이 오소소 춥기만 하지만
앞뒤로 내달리는 내 조국 차들이 이민의 외로운 가슴에 불을 지펴요
아직도 우리는 대한의 자손이라 말하고 있음에 목이 매여요
이방의 땅에서도 새싹은 돋네요
눈물 없이 살 수 없었던 세월은 실뿌리를 내리고
여기 조국의 내음 가득한 미나리 쑥들이 자라올라
조국의 지적도 한 뼘 그려 갑니다.
(202003)
올해 몇인고
추정 강 숙 려
부끄러버라
나이는 왜 물어예!
꺼꺼러우면 답 되신 되묻는 대답
내게도 지학지년地學之年의 소녀기도 있었고
꿈꾸던 이팔청춘二八靑春도 있었느니
이립而立 전에 낳은 너희가 자라 어른이 되었거늘
나를 어찌 늙는다 하느냐
당연한 순리를 가지고
내 지천명地天命엔 그래도 어여뻤느니
이순耳順인들 내가 무릎을 굵을까 보냐
아직도 창창한 꿈이 있고
마음은 꽃띠에 팔랑이는데
저 봐라 저 봐라
얼마나 아름다우냐
눈가에 잔주름 자글거려도 가슴이 맑아
활짝 웃는 저 웃음을
세월을 포개어 이고도 무거워 않는
저 웃음을
아직도 갈매기의 꿈을 꾸는 저 눈빛을
아이야 기억해 다오
기억해 다오.
(200601)
.
돌이켜 보면
추정 강 숙 려
돌이켜보면 언제나 꽃띠에 머물지만
금방 쉰 되고 예슨 되는 것을
그래도 붉은 장미라 외치는 일은
아직도 가슴에 불타는 열정이 남은 탓일세
세월은 길고도 긴 기찻길 같지만
또랑물 하나 첨벙 건너온 것만 같으니
내게도 은구슬 같은 추억들
그리워 잠잠이 가슴에 어린다
발자국이 짧던 유년의 날엔
높게만 보이던 고향 언덕이나
앵두 빛 꿈이 익던 사춘思春의 가슴이나
첫사랑 꽃잎 같던 부끄러움도
내게도 있었던 그림 같은 일
안개 속에 젖은 나는 불이 되어
세월도 꿈도 태워 가는 오늘
등 뜨거운 햇살이 마냥 곱기만 하다.
(20051020)
바람 속에 귀를 열면
추정 강 숙 려
흔들리는 달빛 속에 마음을 열어 씻는다
그리움 하나 아픔 하나
부질없이 붙들고 있음이 허虛인 것을
눈 감으면 다 영空이 되는 무無의 것들을
바람 속에 귀를 열면
들린다
무無의 소리가
내 것이라 탐했던 그것들
모두 보내고
내 것이라 붙들던 그것들
모두 버리고
가부좌하고 들어라
바람 속에 귀를 열면 들린다
무無의 소리가.
(2008)
마음의 문으로 들어 온 풍경소리
추정 강 숙 려
창밖에 풍경 하나 달고 싶다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뎅그랑 거리게.
내 가슴은 탔느니,
열정에 타고 그리움에 타고 모든 환희에 타고
노을보다 더 붉게 암흑보다 더 짙게 타고 탔느니,
이제는 재가 되어 아침 이슬에 지노라
안개에 젖고 이슬로 묻노라.
타다 남은 한 자락 연민이 있다면
오, 그대여 울어다오
붙들지 못해 놓지도 못했노라
목 놓아 울어다오.
시간은 세월이 되어
우리 곁을 유유히 흘러갔지만
놓지 못해 아린 가슴으로 하얗게 꽃이 피던 우리
여기 작은 묘비 하나 세우자.
ㅡ 붙들 수 없어 놓지 못한
서러운 들꽃 여기 지다. ㅡ
등 굽은 나무 그늘 아래 기대어
마음의 문으로 들어 온 풍경소리
가만히 듣고 싶다.
(20051010)
아 고마워요 감사해요
추정 강 숙 려
너무 기뻐도 너무 감사해도 눈물부터 나게 됨은
인생이 익어 가는 징조든가
저 찬란한 햇살 눈부신 창공
코끝을 간질이는 상큼한 솔바람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낄 수 있는 이 감사
내 부모 형제 자녀들로 맺어진 혈연의 감사
이웃들과 나누는 소소한 사랑 감사
오늘도 무사한 하루 주신 것에 감사
꽃피는 봄날 열매 키우는 여름날의 감사
결실의 가을 눈꽃 피는 겨울에 감사
아름다운 사철 주심에 감사
외로운 날 그대 내 곁에 주심에 감사
때때로 너무 감사해서 울고 수시로 웃어진다
시나브로 우는 속울음은 지난 아픔으로 이어져도
다독여 주시는 은혜 앞에 한없는 사랑으로 덮여진다
어제의 아픔도
좋은 오늘 주시고자 필요악必要惡이였든 날들
감사하자 내 힘으로 되는 일 아무것도 없나니
선 그 자리가 너에게 가장 선한 선택의 자리가 되어
양심을 주신 이가 아름답게 바라보시는 곳이
너의 자리가 되어 많이 감사하자
아, 고마워요 감사해요.
(2016)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추정 강 숙 려
호 올로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있어
노을 진 들녘에 나와 휘파람 불구나
기다리면 오려나
첫사랑 연분홍 꽃물 들던 시절
하그리 부끄럼 타던 그 시절
오늘 내 그대 그리워
잠들지 못한다면
흔들흔들 한세상 섬으로 뜨겠네
온몸 바쳐 부끄럼 타는 나는
가물가물 흐려지는 세상에 자맥질하는
한 마리 작은 새 이련가
후르르 세월은 흐르고
우리들 아쉬움 자라 부풀어지는 나이테
어둠이 내리는 들녘 여기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있어
사랑 짐 하나 무겁게 지고 섰다네.
(2009)
정지된 시간의 헌책방
추정 강 숙 려
희미한 그림자가 후르르 지나가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흔적 같다 꼭
그곳은.
지나간 시간에 집착하고
그 흔적을 열망하는 그곳엔 간간이
누군가의 추억이 담겨진 연필로 쓴
희미한 고백이 그려져 있기도 한다
때론 노스탤지어의 아득한 독백이
연기처럼 흘러나온다.
옛 시간의 흔적이 엉겨 붙은 나만의 추억을 찾고자
외로운 시간의 정점에서 만난
읽다 만 책갈피에 꽂힌 꽃잎의 애잔함 같이
금방이라도 가다 만 여행길을 찾으러 들어올 것 같은
기다림의 시간으로 세월을 죽이는 곳이다
기억 멀리 잊혀진 책
이미 절판되어 애태우든 책
그림 같이 서가의 한 모퉁이를 장식하든 책들이
흘러나와 쌓여있는
거미 함께 시간의 줄을 치는 곳이다
겹겹이 쌓인 먼지만큼이나 무심함이 풀풀 묻어나는
종이시간의 세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충만해지는 공간이기에
오늘 내 영혼을 깜짝 빛나게 할 등불을 찾게 된다면
벗이여 황홀한 이 기분을 나누고 싶네 그려
비도 오시어 날도 궂은데
우리 묵어 쾌쾌한 옛 시간 여행이나
떠나 보지 않으시려나?
그대,
곁에 있는 그대 참 고맙다.
추정 강 숙 려
호롱불 홀홀 타는 저녁
둘이, 쓰다듬고 바라보는
이 고즈넉한 노을
산 갈피마다 어둠이 젖어 들고
휘돌아 흐르는 개울 물소리
한없이 그리운 시간
우리 그리운 우리
하루가 천 날인 우리
살날이 한 뼘이나 남았든가
등 맞대고 누우면 지척도 그리운 얘기
도란도란 먼 얘기 끌어오면 부끄럼타던 그 시절
그립다 누구도 만져보지 못할 물새알 같은
그대 나 우리 얘기
아이들 자라 훌훌 떠나 빈껍데기 빈집에
누덕누덕 기운 자리 주름진 손마디
눈물 없이도 서러운 시간 들
이 순간 내 눈앞에 있는 그대
바라볼 수 있는 그대 있음에
따뜻한 체온 서로가 고맙다
참 고맙다
내 사랑.
(2015)
저무는 임인년壬寅年을 뒤돌아보며
추정 강 숙 려
찬란히 다가오는 계묘년을 바라보며
저물어 가는 송년의 밤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또다시 아쉬움의 가슴으로 서야 한다
더러는 웃음으로
더러는 깊은 안타까움으로 보내야 하는
임인년 검은 호랑이여
달큰한 흥분으로 걸었던 달력은
열두 장 365일이 가득찬 하늘이었다
하루하루를 보내며 우리는 다짐했었다
좀 더 희망적인 내일이 되자고
좀 더 지향적인 우리가 되자고
꽃을 피우듯 그렇게 기도했었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시간은 세월이 되어 우리 곁을 하염없이 날아가지만
찰나의 순간을 위하여 인생은 길고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은 세월이 알아서 한다는 것을
우리가 조금씩 알아갈 때 멀리 종소리는 울리고
몸도 마음도 아직은 추운 송년의 밤은 이렇게 온다
오늘 우리가 어제의 나를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희망의 사람일 것이다
결코 어둠이 아닌 미래지향의 꽃으로 활짝 피울 수 있는
태양 빛 꽃다발일 것이다
환히 불을 밝히자
우리의 내일을 위하여 흔들 수 있는 모든 종을 흔들자
계묘년癸卯年 순전한 토끼를 상기하며 깃발을 흔들자
보라,
붉은 해는 내일도 힘차게 솟아오른다는 것을.
(2022년 임인년壬寅年송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