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악인인가? 애꾸눈 왕, 과대망상증에 걸린 정신병자, 폭군. 이는 궁예를 이야기할 때 붙는 수식어다. 사실 궁예는 우리에게 역대 왕 가운데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는 한 사람이다. 역사에는 아내와 두 아들까지 무참하게 죽이고, 걸핏하면 신하들을 잔인하게 죽인 왕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랬을까.
궁예는 맨주먹으로 일어나 서서히 한반도의 중심을 차지하며 세력을 키운 왕이었고, 혈연 중심의 신라 골품제를 업무 위주의 관직 제도로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궁예의 부정적인 부분만이 부각된 것일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궁예의 또 다른 얼굴은 없을까. 이런 의문에서부터 프로그램은 시작된다.
철원에서 궁예를 만나다
최근 비무장 지대에 남아 있는 문화재를 남북한 공동으로 조사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 계획이 성사될 경우, 남북한 공동 조사 1번지로 떠오를 곳이 바로 비무장 지대에 있는 궁예성터다.
현재 궁예성터가 남아 있는 곳은 유엔(UN)사 관할로, 일체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궁예의 꿈이 서려 있는 성터 한가운데로 남북 군사 분계선이 지나고 있다. 지뢰밭이나 다름없는 이곳에는 총둘레 12.7km에 이르는 성터가 드문드문 남아 있다. 청주 사람들 1천 가구가 이주해서 살았을 정도로 상당히 넓다. 외성 안에는 내성이 있는데 흙으로 쌓은 성이었다. 그 바람에 성은 허물어지고, 잡초와 나무만이 무성하다.
해방 전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여기서 논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유일한 생존자인 최점석(80세. 포천군 관인면 거주) 옹의 증언에 의하면 성 안에 궁궐동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돌로 쌓은 석축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궁예의 궁궐이 있던 곳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비무장 지대가 아니더라도 철원에서는 궁예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궁예와 부하들이 왕건에게 쫓겨난 것이 서러워 통곡했다는 '명성산'(일명 '울음산'이라고도 한다),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가 한숨 돌리고 잠깐 쉬어 간 골짜기라는 '한잔모텡이', 궁예의 최후 격전지인 '보개산성' 등 철원의 자연이나 지명에는 이렇게 궁예와 관계가 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부분이 왕건에게 쫓겨 도망가는 궁예의 최후를 이야기하고 있다.
기록과 엇갈리는 궁예의 전설
918년 여름, 보리 이삭이 막 패기 시작할 무렵 평강의 한 농가.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 농민들에게 들켜 처참하게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다. 역사는 그가 바로 궁예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성들의 몰매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궁예의 치욕스러운 종말. 그러나 철원에 전해지는 전설은 이 대목에서도 사료와 다르다. 대부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민중들은 궁예를 그렇게 나쁜 왕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궁예의 출생에 대해 역사는 신라 헌안왕의 서손이거나 경문왕의 서손, 즉 후궁의 아들이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죽이라는 왕의 명을 받은 내시에 의해 궐 밖으로 던져졌는데, 다행히 궁녀가 궁예를 받아서 몰래 키웠다고 한다. 바로 이때 궁녀가 실수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을 잃게 됐다고 한다. 이렇게 출생은 물론 그 후 성장까지 궁예는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열 살 무렵, 궁예는 '세달사'라는 사찰로 들어가면서 불교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당시 사회는 부패한 신라 사회에 대한 불만이 고조돼 있던 시기. 궁예는 양길의 휘하로 들어가면서 장수로서의 역량을 발휘한다. 특히 지금의 강릉 지방을 점령하면서 세력을 떨친다. 신라에 반대하는 호족 세력이 궁예의 지지 세력이었다. 궁예에 대해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 삼국사기에서도 궁예의 모습을 전장에서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궁예는 장군으로 추대된 인물이었다. 영토 정복에 나선 지 3년 만인 896년 궁예는 '고려'라는 국호로 나라를 세우고, 중국의 연호가 아닌 자주적인 연호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궁예는 18년의 재위 기간 동안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으로, 마진에서 태봉으로 다시 바꾸고, 연호를 네 번이나 바꾼 변덕스런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서로 다른 지방 호족 세력을 규합해 나라를 세운 궁예의 정치적 고뇌가 숨어 있었다고 학자들은 해석한다.
궁예의 후손
궁예의 인격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사건은 단연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죽였다는 역사의 기록이다. 아내가 부정한 짓을 했다는 이유로 아내는 물론 아들까지 죽인 비정한 아버지, 궁예.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학계에서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아내와 아들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원인은 다른 데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번에도 역사적인 기록과 전설은 그 원인이 다르다. 궁예의 부인이 구미호라서 왕건의 사주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왕건과 정을 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궁예는 정치적인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왕건 세력과의 대립이었다. 그렇다고 볼 때, 궁예는 부인 강씨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학계에서는 지배적이다.
기록을 보면, 궁예에게는 후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궁예의 후손이라는 이들이 있다. 순천 김씨와 광산 이씨가 그들이다. 궁예가 폭군으로 알려지면서 한때는 족보에서 궁예의 이름이 지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와는 다른 궁예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궁예의 후손으로 살아가고 있다. 역사의 승자, 왕건의 눈으로 본 궁예의 역사 기록된 역사는 대부분 승자의 것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주인공은 궁예의 호족 세력이었던 왕건이었다. 그래서 역사는 왕건의 눈으로 본 궁예만을 후대에 남겼다.
그러나 궁예에게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나라를 세우고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하며 신권과 정권을 모두 가진 전제 군주가 된 궁예와, 현실 개혁을 원하는 호족 세력을 규합하면서 지도력을 과시했던 또 다른 궁예가 그것이다. 지금 우리가 궁예를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첫댓글 자료줌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