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 문화가 사라지고 산업화와 도시화 물결에 따라, 물질 문명이 발달하며 삼대가 같이 사는 대가족 제도가 핵가족으로 변천하며, 가족과 이웃간의 인정이 삭막한 시멘트 장막에 의하여 인정이 각박해지며, 애완 동물들이 극성을 부리고 잇다.
명마나 명견도 혈통의 족보가 있어야 대접을 받는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돈이면 최고이라, 가문의 전통이나 족보가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도 방구 꽤나 뀐다는 상류층들은 지금도 좁보와 문벌타령을 하고 있다.
삼국 시대에는 성이 없고 단지 이름만 있었다. 고려 시대에 들어 와서 왕이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고을과 성을 하사하였고, 백가지 성을 내려, 국민을 백성(百姓)이라 일컬었다.
족보가 일반에게 만들어진 것은 이조 시대에 들어 와서, 왕족의 계보를 본따서 조상의 혈통을 나타내는 족보를 양반들 사이에서 만들게 되었다.
족보는 성씨의 본관을 나타내고, 문중에서 큰 벼슬 정승을 지내면 파를 분리했다. 족보의 항렬은 목화토금수의 오행을 중심으로 하여, 나무 목변이 이름에 들어 가면, 1대나 6대이고, 불 화변이 들어 가면, 2대나 7대이며, 삼 수변이 들어 가면, 5대나 10대이다. 족보는 고려 말 몽고 침략으로 혈통이 복잡해지자, 조선 왕조부터 만들어 지금 현존하는 족보는 대개 26대부터 30대 전반이며, 경주 김씨라며 60대니 하는 양반들은 가짜 족보이며, 오행의 항렬이 엉터리인 족보도 마찬가지이다.
족보는 문중이 모두 포함되는 대동보와 파의 시조를 중심으로 한 파보가 있고, 족보는 종친회에서 30년마다 종친들의 변동된 인적 사항을 정리하여 만들었다. 사정이 생기면 50년에 한번도 만들었지만, 일반적으로 30년 한 세대를 중심으로 만들었고, 족보를 만들려면, 집안 육친(六親; 부모 형제 처자)의 생년월일의 사주 단자와 망인의 기일과 묘지 위치와 벼슬 내역을 등재하였고, 족보를 만들 비용을 계를 조직해 족보계도 있었다.
족보를 만드는 돈을 낼 형편이 안되거나, 3대 동안에 한번도 벼슬을 못하면 양반 족보에서 삭제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가 친척중에서 머리 좋은 사람에게 돈과 양식을 대 주며 과거에 급제하도록 노력했다.
조선 초기에는 양성이 평등하였고, 여자들도 족보에 오르고 재산도 상속받았다. 양반이 십퍼센트밖에 안 되었으나, 조선 중기 여인 천하의 정 난정과 문정왕후의 수렴첨정시 벼슬을 팔아 졸지에 감투를 쓴 양반들이 출현하였다. 임진과 병자 호란 이후 전쟁에서 공을 세운 천민들이 벼슬을 받아 양반으로 신분이 상승하며, 남녀칠세 부동석 같은 남존여비 사상이 만연하게 되었다. 조선 말기 순조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외척들이 벼슬을 팔아 사리사욕을 채우며 양반들이 7할이 넘게 되어 국고가 빈궁하게 되었다.
벼슬을 돈 주고 산 지방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1894년 동학 민중 혁명이 일어 나며, 양반과 상논의 신분 차별이 철폐되는 갑오 경장이 발생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호적 제도가 생기며, 성들이 없던 천민들이 흔한 경주 김가와 전주 이가와 박가를 성으로 등록하여 우리 나라의 성씨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김가 아니면 이가가 맞는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다.
핵가족과 전자 문명이 발달하며, 가족간의 사랑이 쇠퇴하며, 애완 동물 천만 시대가 돌래하며 예전에 새장이나 어항에서 기르던 관상용 동물들과 마당에서 키우던 개가 방 안으로 들어 와 살며 어른을 대신하여 애지중지 사랑을 받으며 군림하고 있다.
사각의 브라운관은 동물 천하가 판치고, 집집마다 개를 중심으로 고슴도치 같은 희귀 동물과 파충류까지 애완 동물로 둔갑하고 있다.
계(dog)가 신(god)으로 둔갑하고, 천감일(天減一)에 점을 치면 개(犬)가 되는 개와 신이다. 개(犬)가 왕(王) 대접을 받으면 미칠 광(狂)이다. 회색 도시의 아파트와 집안은 개판 천지고, 거리는 첨탑의 크로스가 야단법석(野壇法席)이다.
제사란 조상을 모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예전에 먹을 거리가 곤궁하던 시절에 제사를 핑계삼아 일가 친척들이 모여 화기애애하게 음식을 장만하여 모처럼 배부를게 먹는 풍습이었다. 안동에는 먹기 위하여 헛제사를 드릴 정도엿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