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의 종교와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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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우리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 하고자 할 때 항상 자료의 빈약함을 느끼곤 한다. 종교와 제사도 역시 마찬가지로 자료가 빈약하기 짝이 없다. 한국의 고대사에 관한 사서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꼽을 수가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제사는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이 되어 있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제사에 대해서는 중국의 고기 및 사서의 기록을 참고하여 기술 하고 있고, 삼국유사에는 삼국의 건국에 관한 신화 또는 설화가 있다. 때문에 한국고대의 종교와 제사를 이야기 할 때는 중국의 사서를 인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료 없는 설움이라 할 것이다.
중국의 사서 중에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삼국지』는 진나라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사서이다. 때문에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내용을 보면 우리의 고대국가들을 무시 하는 듯 한 내용의 글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번 ‘한국고대의 종교와 제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내용을 가지고 전개해 보고자 한다.
2. 제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부여(扶餘), 고구려(高句麗), 옥저(沃沮), 읍루(揖婁), 예(濊),한(韓), 왜(倭) 의 기록이 있으나, 본 연구에서는 부여, 고구려, 한의 기록을 보고자 한다.
1) 부여
殷正月① 祭天國中大會② 連日飮食歌舞名曰迎鼓③ 於時斷刑獄解囚
殺牛觀蹄以占吉凶④ 蹄解者爲凶合者爲吉 (『삼국지』권 30 동이전 부여)
“은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에서 큰 대회를 열어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 기를 여러 날 동안 계속하였는데 이름 하여 영고라 하였다 이 때 형벌을 중단하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풀었다. 소를 죽여 그 굽으로 점을 쳐 길흉을 가리는데 굽이 벌어지면 흉 하고 굽이 합해지면 길하다.”
위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알 수 있는 내용은 ①‘은 정월’은 지금으로 보았을 때, 12월에 해당 하므로 추수감사제의 성격이 아니라 기마민족으로서 일 년간의 목축과 사냥을 기원 하는 행사였음을 알 수 있으며, ②는 제사의 대상이 하늘이었음을 말하고 있고, ③은 그 이름을 영고라 하였는데 迎은 맞이한다는 뜻이고, 鼓는 북을 말하는 것이다. 즉 북으로 천신을 맞이한다는 말이다.1) 북은 북방 샤먼들과 우리나라의 무당들에게는 중요한 무구 (巫具)이다. 당시에 북의 중요성은 대단한 것이어서 고구려의 주몽이 비류국의 송양과 경 쟁을 할 때 송양은 고구려의 사신을 고각위의로 영접하였으나, 주몽은 고각위의를 갖추지 못하여 비류의 사신을 고각위의로 영접하지 못함에 열등감을 가졌다고 한다.2) 고각이란 북과 뿔피리를 말하는데, 북은 그 상징성이 더욱 강하다. ④는 지금도 황해도의 ‘만구대탁 굿’에서 행하고 있는 제례의식이다.
2) 고구려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其公會 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 大加主簿頭著幘 如瓔而 無餘 其小加著折風 形如弁 其國東有大穴① 名隧穴② 十月國中大會 迎隧神 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③于神坐. (『삼국지』권 30 동이전 고구려)
“10월에 하늘에 제사한다. 국중대회로 이름을 동맹이라 한다. 그들의 공식모임에서는 모 두 수놓은 비단옷을 입으며, 금과 은으로 자신을 꾸민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幘: 머 리수건)을 쓰고, 소가들은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굴이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 10월의 국중대회 때 수신을 맞이하여 나라의 동쪽 위로 돌 아와 제사하며 목수를 신좌에 안치했다.”
고구려도 부여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그 기록을 살펴보면 많은 학 자들이 ①의 大穴을 큰 동굴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옥편을 찾아보면 大穴 은 神이라고 했다. 즉, 大穴=神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高句麗國左有大穴曰神)3) 따라서 대 혈은 큰 동굴이 아니라 굴의 형태 또는 여성을 상징하는 어떤 ‘神體’일 것이다.
②의 수혈(隧穴)의 隧(무덤길, 길, 구멍)도 역시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할 단어이다. 『위 략』에서는 이 수를 穟로 표기하고 있는데, 穟는 ‘벼의 싹’(생명의 씨앗을 뜻한다고 생각 됨)을 뜻하는 단어이다. 양주동은 이에 대해서 수를 ‘수컷’으로 설명하고 있다.4) 수는 의역 을 한 것이 아니라 음역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에게 이 ‘수컷’이라는 의미는 매우 중 요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桓雄)의 웅자도 ‘수컷’을 가리킨다.5) 환웅도 옛날에는 ‘환수’ 또는 ‘환숫’으로 불리어 졌을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대혈’은 여성을 상징하는 어떤 신체이고, ‘대혈’을 가리켜서 ‘수혈’이라 한 것은 ‘수의 혈’ 즉, ‘수의 것인 혈’이란 말 이다. ③따라서 ‘목수’는 나무로 만들어 진 ‘남근’일 것이고 ‘대혈’은 ‘여성’이며, 평소에는 ‘합궁’ 또는 ‘잉태’를 이루고 있다가 천제를 지낼 때는 분리하여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3) 마한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塋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椱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①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삼국지』권 30 동이전 마한)
“항상 5월에 하종이 끝나면 혼신을 제사 지내는데 무리지어 가무하고 음주하면서 주야로 쉬지 않는다. 그 춤은 수십인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땅을 밟으면서 몸을 굽혔다가 하 는데 손발이 상응하여 절주(節奏: 가락으로 아뢰다=노래 또는 박자)하는 모습이 탁무(鐸舞: 방울춤)와 비슷하다. 10월 농사를 마치면 다시 되풀이 한다. 귀신을 믿어 국읍에서는 각기 한 사람을 세워 천신을 주제 하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 제국(諸國: 모든 나라)은 각기 별읍을 갖고 있는데 이를 소도(蘇塗)라 부르며 대목(大木)을 세워 방울과 북을 걸어 놓고 귀신을 섬긴다. 여러 도망자가 소도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잡아내지 못하므로 도적질 하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 붓다, 부처)를 세운 뜻과 비슷하나 그것으로 인해 행해지는 선악에는 차이가 있다.”
역시 마한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사를 마치면 마치 축제와 같은 행사가 벌어 지는데 주야로 계속된다 하였다. 이 모습은 우리의 농악을 연상케 하며, 동시에 굿을 연상 케 한다. ①의 소도는 일종의 성역인 셈인데, 범죄자들도 소도 안으로 들어가면 잡지를 않 았다 하니, 마치 서울의 명동성당을 연상 시킨다. 소도의 성격에 대해선 소도에 세워진 대 목이라거나6) 소도는 별읍이라 하거나7) 소도는 단순히 성역만을 지칭 하는 것이 아니라 신 간을 세운 성역에서 행하여지는 신앙행위 자체까지 포함한 개념8) 등의 의견들이 나오고 있으나 양주동은 역시 소도의 蘇 역시 수컷의 ‘수’로 보고 塗는 터로 보아서 소도는 ‘수터’ 로 이야기 하고 있다.9) 양주동의 해석대로 ‘수터’로 보았을 때 『삼국지』의 기록이 자연 스럽게 연결 지워진다. “소도는 별읍”이란 주장은 같은 명칭의 중복이며, “소도는 성역을 포함한 대목을 비롯한 모든 신앙행위”라는 주장은 너무 광범위 하다. 그러나 양주동의 해 석대로 “별읍은 ‘수터’이며, 그 수터에서는 대목을 세우고 방울과 북을 걸어 놓고 귀신을 섬긴다.”는 문장은 자연스럽다. 또한 蘇塗의 중국 발음은 ‘su tu’이다. 이 역시 ‘수터’를 음 역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4) 신라
신라의 국가제사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제사지」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살펴보건대 新羅(신라) 宗廟(종묘:祖上神(조상신)을 위하는 곳)의 제도는, 제2대 南解王[남해왕:南解次次雄(남해차차웅)] 3년에 비로소 始祖(시조) 赫居世(혁거세)의 사당을 세워 四時[사시:春夏秋冬(춘하추동)]로 제사하고, (王(왕)의) 친누이 阿老(아로)로써 제사를 맡게 하였으며, 제22대 智證王(지증왕) 때에는 始祖[시조:赫居世(혁거세)] 誕降(탄강)의 땅인 奈乙[내을:蘿井(나정)]에 神宮(신궁)을 창립하고 祭享(제향)하였다. 제36대 惠恭王(혜공왕)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5廟(묘)의 制(제)를 정하였다. 味鄒王(미추왕)은 김씨 성의 始祖(시조)가 됨으로 해서, 또 太宗大王[태종대왕:武烈王(무열왕)]·文武大王[문무대왕:武烈王子(무열왕자)]은 百濟(백제)와 高句麗(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으므로 해서, 모두 [3王(왕)을] 世世不遷(세세불천)의 (不動(부동)의) 神位(신위)로 삼고, 거기에 親廟[친묘:祖(조)와 父(부)] 2位(위)를 합해 5廟(묘)로 하였다. 제37대 宣德王(선덕왕)에 이르러는 社稷壇(사직단:土地神(토지신)을 위하는 곳)을 세웠으며, 또 그 [新羅(신라)] 祀典(사전)에 나타난 것이 모두 國內(국내)의 山川(산천)뿐이요 天神(천신)·地祇(지지)에는 미치지 아니했으니, (그것은) 대개 王制[왕제:禮記(예기) 篇名(편명)]에 "天子(천자)는 7廟(묘)요 諸侯(제후)는 5廟(묘)니, 2昭(소)·2穆(목)과 太祖(태조)의 廟(묘)를 합하여 5가 된다" 하고, 또 (王制(왕제)에) "天子(천자)는 天[천:神(신)]·地[지:祇(기)]와 천하의 명산대천을 제사하되, 諸侯(제후)는 社稷(사직)과 자기 領地(영지)에 있는 명산대천만을 제사한다" 하였으므로, [新羅(신라)는] 감히 (諸侯(제후)의) 禮(예)를 벗어나지 않고 실행한 것인가 한다. 그러나 그 壇堂(단당)의 고하라든지 壝門(유문)의 內外(내외)라든지, 位次(위차)의 尊卑(존비)라든지, (祭祀(제사)의) 陳設(진설)·昇降(승강)의 節次(절차)라든지, 尊爵[존작:酒器(주기)]·籩豆[변두:籩(변)은 竹器(죽기), 豆(두)는 木器(목기)]·牲牢[생뢰:犧牲(희생)]·冊祝[책축:祝文(축문)]의 禮式(예식)에 관하여는 推知(추지)할 수 없고 다만 그 대략만을 약간 적는 것이다.
○ 1년(매년)에 5廟(묘)는 여섯 번 제사드리니, 즉 정월의 2일과 5일, 5월 5일, 7월 上旬(상순), 8월의 1일과 15일이었다. 12월 寅日(인일)에는 新城(신성) 北門(북문)에서 8착[棤(석)]을 제사하되 풍년에는 大牢[대뢰:牲牛(생우)]를 쓰고 흉년에는 小牢[소뢰:牲羊(생양)]를 썼다. 立春(입춘) 후 亥日(해일)에는 明活城[명활성:慶州(경주) 東(동)] 남쪽 熊殺谷(웅살곡)에서 先農[선농:田祖(전조) 즉 神農(신농)]을 제사하고, 立夏(입하) 후 亥日(해일)에는 新城(신성) 北門(북문)에서 中農(중농)을 제사하고, 立秋(입추) 후 亥日(해일)에는 蒜園(산원:위치 미상)에서 後農(후농)을 제사하고, (또) 입춘 후 丑日(축일)에는 犬首谷門(견수곡문:위치 미상)에서 風伯[풍백:風神(풍신)]을 제사하고, 입하 후 申日(신일)에는 卓渚(탁저:위치 미상)에서 雨師[우사:雨神(우신)]를 제사하고, 입추 후 辰日(진일)에는 本彼部(본피부) 遊村[유촌:林(임) ?]에서 靈星(영성)을 제사하였다[禮典(예전)을 조사하여 보면 오직 先農祭(선농제)만 있고, 中農(중농)이니 後農(후농)이니 하는 것은 없다]. 3山(산)·5岳(악) 이하 명산대천을 나누어 大祀(대사)·中祀(중사)·小祀(소사)로 한다.10)
위 신라의 종묘제도에 대해서는 “종묘제도는 조상뿐 아니라 하늘과 땅에 즉 천지에 대한 제사 였다.”는 주장11)과 “그렇지 않고 조상과 사직에 대한 제사일 뿐이다.12)”는 주장이 팽 팽히 맞서고 있다. 제사의 성격은 그 사회의 종교와도 연관 되는 것이므로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다.
5) 백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제사부분은 『冊府元龜(책부원귀)』와 『古記(고기)』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 『冊府元龜(책부원귀)』에 이르기를 "百濟(백제)는 매년 四仲月(4중월:2, 5, 8, 11)에 왕이 하늘과 5帝(제)의 神(신)을 제사한다. 그 始祖(시조) 仇台(구이)의 廟(묘)를 나라 都城(도성)에 세우고 4계절로 제사 한다"고 하였다[생각건대 『海東古記(해동고기)』에는 혹은 始祖(시조) 東明(王)[동명(왕)]이라 하고, 혹은 始祖(시조) 優台(우이)라 하였으며, 『北史(북사)』 및 『隋書(수서)』에는 모두 東明[동명:王(왕)]의 후손으로 仇台(구이)라는 이가 있어 나라를 帶方(대방)에 세웠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始祖(시조)를 仇台(구이)라 하였다. 그러나 東明(동명)이 始祖(시조)인 것은 사적이 명백한데, 기타의 것은 믿을 수 없다].
○ 『古記(고기)』에 "溫祚王(온조왕) 20년 2월에 壇(단)을 베풀고 天地(천지)에 제사 드렸다"고 하였다. 38년 10월과 多婁王(다루왕) 2년 2월, 古尒王(고이왕) 5년 정월, 10년 정월, 14년 정월, 近肖古王(근초고왕) 2년 정월, 阿莘王(아신왕) 2년 정월, 腆支王(전지왕) 2년 정월, 牟大(東城)王(모대(동성)왕) 11년 10월에 모두 위와 같이 거행하였다. 多婁王(다루왕) 2년 정월에 始祖(시조) 東明廟(동명묘)에 拜謁(배알)하고, 責稽王(책계왕) 2년 정월, 汾西王(분서왕) 2년 정월, 契王(계왕) 2년 4월, 阿莘王(아신왕) 2년 정월, 腆支王(전지왕) 2년 정월에도 모두 위와 같이 거행하였다.13)
위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알 수 있는 사실은 백제도 천지에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과 시조 를 동명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다. 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라고 하였으나, 마 한을 백제로 보는 학자들도 상당수 있다.14) 위 기록을 보았을 때 마한은 고구려의 영토 이 었을 것이나, 같은 동명을 시조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또한 마한의 한 부분에서 건국 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 종교
고대사회를 통일신라 말까지로 보았을 때 고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종교는 크게 나누어서 무교(巫敎)와 불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진흥왕 37년조에 나오는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의하면 풍류를 가리켜서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 하였다. 삼교란 유교, 도교, 불교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에 무교와 불교를 비롯하여 유교와 도교 역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 판단되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종교로는 역시 무교와 불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종 사서에는 巫에 대한 설명이 극히 빈약하여서 이를 巫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하는 학자들이 많은 실정이다. 그러나 각종 사서에는 고대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종교가 巫임을 암시하는 대목이 많으므로 그에 맞추어서 무와 불교에 대해서 기술해보도록 하겠다.
1) 巫로서의 고대 군장, 왕들에 대한 논의
위에서 살펴 본 『삼국지 위지』권 30 동이전의 부여, 고구려, 마한조를 보면 천제를 지 내는 모습에서 巫에서의 굿을 연상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최남선은 고조선 시대의 단 군(檀君)이란 명칭은 무당을 지칭하는 당굴과 같은 말로 보았으며, 이 말은 하늘, 천령이란 뜻을 나타내는 몽고어의 텡그리(Tengri)와 연결되며 마한의 천군도 이와 같은 선상에서 보 고 있다.15) 조흥윤은 고대의 제천의례를 오늘날의 나라굿으로 보고 있고16) 고대제천 의례 담당자들은 巫라고 주장 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시조왕인 주몽 또한 무당이며17) 신라 의 시조왕 혁거세와 석탈해 역시 무당이 이었고18) 탈해를 구해서 키워준 혁거왕(赫居王)의 해척지모(海尺之母)나 알영을 발견해서 키운 노구(老嫗) 역시 巫로 파악되고 있다.”19)
한편 위의 주장과는 약간 다르게 천군이란 巫에서 일층 발전된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 는 공적인 인물이라거나20) 천군인 샤먼이 공수형이냐 비공수형이냐의 방법론도 제기 되고 있다.21)
2) 신라 화랑의 종교적 성격
신라사를 가장 화려하게 수놓고 있는 이름은 바로 화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화랑에 대해서 ‘세속오계’의 계율로 심신을 수련하고, 전쟁 때는 앞을 다투어 나아가는 청소년 수 련 단체로 이야기 하고 있다. 화랑은 신라의 꽃이며, 신라의 정신을 알 수 있는 척도이기 도 하다. 이러한 화랑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신라의 종교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1) 화랑제도
원화는 화랑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진흥왕 37년조에는 닫음과 같이 기록 되어있다.
○ 37년 봄에 비로소 源花(원화)를 받들게 되었다. 처음에 君臣(군신)이 人材(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겨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 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擧用(거용)하려 하여 드디어 미녀 두 사람을 가렸[擇(택)]다. 하나는 南毛(남모)라 하고 하나는 俊貞(준정)이라 하여 徒衆(도중) 300여 명을 모아 두 여자가 서로 어여쁨을 다투며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후, 이를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준정도 (이로 인해) 사형에 처하게 되니 徒衆(도중)은 화목을 잃어 해산되었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원화의 성격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가 없다. 다만 군신들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여서 끼리끼리 떼 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서 두 사람을 뽑았다고 했다. 인재를 알아보기 위하여 떼 지어서 놀게 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옛날에 논다고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특성상 노래하면서 춤을 추는 가무였을 것이란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 할 수가 있다. 나라의 인재를 뽑는데 노래와 춤을 잘하는 사람이 필요한 이유는 단 하나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무교의 굿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원화가 해산 되고 난 뒤에 이번엔 남자로 해서 화랑을 뽑게 된다.
그 후 (나라에서는) 다시 외양이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花郎(화랑)이라 하여 받들게 하니 徒衆(도중)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서로 道義(도의)를 닦고 혹은 서로 歌樂(가락)으로 즐거이 놀며 名山(명산)과 大川(대천)을 돌아다니어 멀리 가 보지 아니한 곳이 없었으니,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려 朝廷(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金大問(김대문)의 『花郎世記(화랑세기)』에 말하기를, "賢佐[현좌:賢相(현상)]와 忠臣(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良將(양장)과 勇卒(용졸)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 하였고,
그 후 다시 외양이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서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고 했다 한 다. 우리가 교육 받아온 화랑의 이미지라면 힘이 세고 무술에 능하며 날랜 사내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외양이 아름답고 곱게 단장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는 화랑이 신 에 봉신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박수(남자무당)들 중에는 곱 게 화장을 하고 여자의 옷을 입고 굿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들을 가리켜서 화랭이라 부른다.
다음은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의 내용이다.
崔致遠(최치원)의 鸞郎碑序(난랑비서)에는, "우리 나라에 玄妙(현묘)한 道(도)가 있으니 (이를) 風流(풍류)라 이른다. 그 敎(교)의 起源(기원)은 仙史(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三敎[삼교:佛(불)·仙(선)·孔(공)]를 포함하고 衆生(중생)을 교화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아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魯司寇[노사구:孔子(공자)]의 主旨(주지) 그대로며, 또 그 함이 없는 일에 처하고 말없는 敎(교)를 행하는 것은 周柱史[주주사:老子(노자)]의 宗旨(종지) 그대로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만을 행함은 竺乾太子[축건태자:釋迦(석가)]의 교화 그대로라"고 하였고, 唐(당)의 令狐澄(영호징)의 『新羅國記(신라국기)』에는 "貴人(귀인) 子弟(자제) 중의 어여쁜 자를 뽑아 粉(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花郎(화랑)이라 하여 나라 사람이 다 높이 섬긴다"고 하였다.
위의 글을 보면 현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하고 있으며, 그 근원은 선사에 기록이 되 어 있다고 했으니 ‘유교, 불교, 도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리고 있으며, ‘유 교, 불교, 도교’가 포함되어 있다 했으니 ‘풍류’는 종교적인 의미로서의 ‘풍류’를 말하고 있다. 또한 선의 역사는 우리민족 신앙인 ‘단군신앙’에서 찾을 수 있는데 단군의 檀자는 박달나무 단자이다. 옥편을 찾아보면 단자는 선으로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당간절(唐干 切: 단으로 읽음)과 함께 시전절(時戰切: 선으로 읽음)로 표기 되어있다. 그러므로 선사란 단군사를 의미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능화의 ‘조선도교사’를 보면, 조여적(이조 선조 때 사람)이 지은 ‘청학집’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 도류총서(道流叢書)에 이르기를 환인진인(桓因眞人)이 동방선파의 조종이고 환웅천왕(桓雄天王)은 환인의 아들이다. 아버 지의 뜻을 이어 풍우(風雨)와 오곡 등 360여 가지의 일을 주재하여 동방백성을 교화시키 더니 단군이 또한 그 업을 이어받아 교화를 편지 1000년에 구이(九夷)가 함께 받들어 단 군을 천황으로 모셨다. -중략- 그 후 문박씨란 분이 있는데 아사달에 살며 얼굴이 아름 답고 눈이 모난 분으로 단군의 도를 잘 전하였다. 영랑은 향미산 사람으로 나이가 90이 되어도 안색이 어린아이 같았으며 노우관(鷺羽冠)을 쓰고 철죽장(鐵竹杖)을 짚고 산수에 소요하며 마침내 문박의 업을 전하였다. 마한시대에 신녀 보덕이 바람을 타고 다니며 거 문고를 안고 노래를 부르니 그 모습은 가을물의 부용과 같이 아름다웠다. 이 이가 영랑의 도를 이어 받은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조’ 에 보면 단군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21년 2월에 왕이 (앞서) 丸都城(환도성)이 난리를 치러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平壤城(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宗廟社稷(종묘사직)을 거기로 옮겼다. 平壤(평양)은 본시 仙人(선인) 王儉(왕검)의 택지였다. 혹은 [王之都 王險(왕지도 왕험)]이라 한다.
위 기록을 보면 선인왕검이 나온다. 이는 단군을 가리켜서 ‘선인’ 또는 ‘선군’이라고도 불렀음을 의미한다.
다음은 ‘풍류’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하자. 우리는 보통 우리 고유의 멋을 이야기 할 때 풍류를 이야기 한다. 물론 풍류에는 그러한 멋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멋은 풍류가 지닌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최남선은 풍류를 ‘부루교단’의 부루에서 찾고 있다. 즉 부 루를 음역한 것이 풍류라는 말이다. 부루란 단군의 아들 이름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집 안에 조상항아리라고 불리 우는 항아리를 본 적이 있다. 이 항아리를 ‘조상단지’ 또는 ‘부 루단지’라고 부른다. 풍류란 단어 역시 단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화랑세기』에 나오는 구절을 잠시 인용해보고 자 한다. 최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서 한참 진위 논쟁에 휩싸여 있던 필사본 『화랑세 기』 서문(최근에는 많은 학자들이 진본을 필사한 것으로 인정을 하고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화랑은 선도(仙徒)다. 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의 대제를 행하는 것은 마 치 연(燕)나라의 동산에서, 노(魯)나라의 태산에서 한 것과 같다. -중략- 옛날에 선도는 신을 받드는 것(봉신)을 위주로 했는데, 국공들이 이것(봉신)을 행한 후에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 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이에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않된다.”
위의 글을 읽어보면 화랑은 ‘선도’이며, 선도는 신궁을 받들고 하늘의 대제를 지내는 것 을 첫째 목표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시대의 화랑 집단은 巫였으며, 당 시의 巫들은 숭고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난랑비(鸞郞碑)
화랑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80%이상 난랑비 서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 만큼 난랑비 서문은 화랑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난랑비에 대해서 언급한 글은 읽어 본 적이 없다. 도데체 이 난랑비는 무엇일까? 도데체 무엇이기에 당대의 석학이라 할 수 있는 최치원은 난랑비 서문을 남겼을까? 지금은 남아 있지 않기에 정확한 실체는 알 길이 없지만 추정은 해 볼 수가 있겠다. 백과사전을 보면 난랑비에 대해 서 ‘화랑도인 난랑을 기념하기 위한 비’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이 직접 적은 비라고 보았을 때 난랑이라는 화랑은 무척이나 유명한 화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랑사 어디에 도 난랑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는 난랑이 화랑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하면 난랑(鸞郞)이라 는 글을 해석해 보자. 먼저 鸞자는 난새 난자이다. 사전을 보면 난새란 중국의 상상 속의 새로 나온다. 또 다른 뜻으로는 방울을 뜻하는 글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방울에 대한 이 야기는 접고 난새로만 이야기 해보기로 하겠다. 먼저 이 난자가 주로 쓰인 것을 보면 다음 과 같다.
鸞車(난거) 임금이 탄 수레
鸞旗(난기) 천자(天子)의 기(旗). 난령(鸞鈴)으로 장식(裝飾)되어 있음
鸞鈴(난령) 옛날 중국(中國)에서 임금이 탄 수레에 달던 방울. 난조(鸞鳥)의 울음소리에 비긴 것이라 함.
鸞輅(난로) 임금이 타는 수레
鸞鳳(난봉) ①상상(想像)의 신령(神靈)스러운 새인 난새와 봉황(鳳凰) ②덕이 높은 군자(君子)의 비유 (比喩) ③부부(夫婦)의 인연(因緣)의 비유(比喩)
鸞鳳扇(난봉선) 부채처럼 생긴 의장기(儀仗旗)의 하나. 깃발 복판 양쪽에 난조(鸞鳥)와 봉황(鳳凰)을 그려 만듦. 주(主)로 궁중(宮中) 의식(儀式) 때 씀
鸞輿(난여) 난조(鸞鳥)라는 새의 울음소리를 모방한 방울이 달렸다 하여, 임금이 타는 연(輦)을 이르는 말
위의 내용으로 보면 鸞자는 주로 임금, 천자, 왕을 상징하는 기구 앞에 사용되는 단어 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난랑은 ‘임금인 郞’인 것이다. 그럼 도데체 ‘임금인 랑’은 누구일까? 그 답은 ‘난랑비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난랑비 서문은 선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선사란 단군사임을 증명하였다. 그렇다면 난랑은 단군 또는 환웅을 이 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실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 면 다름 아닌 바로 랑(郞)의 정체이다. 주몽의 아버지로 알려진 ‘해모수’와 ‘환웅’을 가리 켜서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한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서 주몽의 어머니를 하백녀랑(河伯 女郞)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강화도에 가면 ‘정족산성’이 있는데 이 산성의 축조를 단군이 그의 세 아들에게 지시하여 쌓은 산성이라고 전하는데 ‘삼랑산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또 하나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바로 환웅이다 위에서 환웅의 雄자는 수컷을 뜻한 다고 하였다. 해모수 역시 수이다. 郞역시 수컷을 뜻하는 사내이다. 여기서 추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가설’이 세워지게 되는데, 郞은 천손의 핏줄을 이어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천손의 핏줄을 이어 받은 사람의 임무는 봉신에 있으며, 바로 그 사람들이 무당 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郞자가 붙은 사람들 치고 봉신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3) 불교
고구려, 백제, 신라는 시기는 다르지만 삼국 모두 불교를 수용한다. 삼국의 불교수용은 여러 부족 또는 귀족으로 나뉘어 있던 권력을 왕권으로 일원화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홍윤식은 다음과 같은 도표를 제시한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논문을 작성하신 것 같습니다. ^(^
소태양님,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이 수고하셨겠네요. 감사 드립니다. 고대 종교에 대해서 많은 정보 얻었습니다. 차후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논문도 기대 합니다. 거듭 감사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논문이 아니고 국사과목의 레포트 입니다..^^ 전에 해놓은 것인데, 이제야 올리게 되었네요.
좋은점수 받으셨겠내요.^^ 잘 읽었습니다...
화랑의 대해 다시한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다시한번 읽어봐야 할것같습니다..잘 읽었습니다
좋은자료로 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_()_
얼마전 독일에 있을 때 한 분의 안내로 한 축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시골 동네였는데 갑자기 부근에서 풍악소리가 들리기에 따라가 보았더니 고적대가 마을을 돌고 있었다. 이윽고 마을의 중심에 도달하니 거기엔 한 나무가 준비되었고 뿌리가 잘린 그 나무를 마을유지들(경찰서장? 면장?등)이 그 나무를 세우고 그 나무엔 색색의 많은 종이들이 걸려있었다. 고적대와 이미 설치된 피아노 등으로 연주가 끝나니 간단한 요리잔치가 벌어졌고 모두가 돈으로 티켓을 산 것들이었다. 이날은 마이 바움이라 하여 직역하면 5월 나무이고 이것을 보고 우리나라의 당산굿이 생각났다. 풍악(농악?)을 울리고 마을을 돌며 당산나무에 굿을 하고
음식을 나누는 장면이 비록 장소가 달라 모양이 달라졌지만 영낙없이 당산굿이 아니겠는가? 그 전에 난 '혼자서 하는 오페라'란 하나의 발표를 보았는데 한 가수가 노래와 대사와 행동으로 이끌어나가고 한 피아노 연주자가 반주를 하는데 계속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가수와 함께 간단한 대꾸를 하면서 독자적으로 연주를 하기도 하여 판소리의 독일판이 아닌가 생각들었다. 한 문화의 줄기가 동유럽과 중유럽을 거쳐 서유럽으로 건너갔다고 하는 부분을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좋은글 감사합니다.
다른 카페의 글을 보니 불교가 들어오기 전을 전불시대, 불교가 들어온 후불시대를 말하는데. 그 전불시대를 부도의 시대라 말하고 풍류역시 언급하더군요. 거기선 부도와 풍류를 선도로 말하는데 선도가 결국은 무에서 나왔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