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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왕씨* 연안차씨* 문화류씨의 황제연원설과 류*차동원론의 유전(遺傳) 탐색
① 참고 : 유전 heredity, 遺傳 (두산백과)
모든 생물은 생식을 통해서 자손을 남긴다. 이렇게 생식을 통해 자손을 남길 때 부모가 가지고 있는 특성, 예를 들어 인간의 머리 색깔이라거나, 피부 색깔이라거나, 얼굴 형태 등은 그 자식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 사이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어서 고대부터 남아 있는 신화나 설화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현상이 어떠한 방식을 통해서 일어나는지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양한 연구를 통해 과학적으로 밝혀지게 되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유전이라는 단어는 과학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② 과거의 개념
일반적으로 과거 사람들이 유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개념은 혼합 가설이었다. 특히 몸 속의 액체를 통한 혼합이 유전의 원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이 생식을 할 때에도 남성의 정액이 여성의 몸 속으로 섞여 들어가서 유전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이 정액은 피와 그 본질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재에도 순수혈통, 혼혈 같은 단어 속에 '피'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여긴 것을 엿볼 수 있다.이러한 개념을 좀 더 발전시킨 것이 판게네시스(pangenesis)라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원자론으로 유명한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처음 만들었는데, 원자와 같은 입자의 존재를 믿은 데모크리토스는 동물의 혈액 속에도 이러한 입자가 있다고 생각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혈액 속에 들어 있는 입자가 섞여서 자식의 특성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이 발상은 진화론을 창시한 찰스 다윈(C. Darwin)에게도 그대로 이어져서, 다윈은 이러한 입자를 제뮬(gemmule)이라고 하고, 이 입자들이 신체 각 기관에서 만들어져서 혈액을 통해 흩어진다고 생각했다.
③ 차원부설원기 위서시의 시대적 배경
1) 문화류씨 최초족보 영락보 1423년, 가정보 1565년, 기사보 1689년 (차원부설원기 처음 등재 됨)
2) 연안차씨 최초족보 무자보, 1708년 (차원부 1320~1398), 차원부설원기 등장 1580년경
3) 개성왕씨족보 성원록 1798년, 임진왜란 1789년
4) 차천로(1556(명종11)~1615(괭해군7)
[안차씨약사]
1세 車無一 (AD 69 박혁거세)⇨38세 차달 (AD 887 왕건) BC 2704년 전 중국 황제로부터 고조선, 위만조선, 고구려, 신라, 고려에 이르는 개성왕씨 연안차씨 문화류씨 유전자는 同源에서 유전되었는지 탐구합니다.
① 사건 사고 기록이 역사와 인류사와 정사에 부합하는가?
② 개성왕씨 연안차씨 문화류씨는 중국황제 유전자와 같은 동원(同源)인가?
③ 각 姓씨의 離合集散은 정상적인 유전(遺傳) 과정을 거쳤는가?
④ 설화인가? 전설인가? 소설인가?
⑤ [차원부설원기]는 류씨와 차씨는 동원이라고 왜 조작 하였을까?
1. 차씨의 연원(淵源)
차씨(車氏)의 근원(根源) 원파록(源派錄)과 역대(歷代) 문헌(文獻)에 의거(依據) 정리하여 다음과 같다 살펴보기로 하자.
① 지금으로부터 약4700년 전 BC 2704년에 중국에서는 헌원(軒轅)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황제(帝)로 즉위(卽位)를 하셨는데 황제(黃帝)의 본성(本姓)은 공손씨(公孫氏)이시며 이름은 탄생하신 지명(地名)에 따라 헌원(軒轅)이라 한 것이다.
이 시대(時代)는 모계(母系)의 사회(社會)였으므로 황제(黃帝)께서는 모후(母后)에게 성(姓)을 지어 드렸는데 본래 모후(母后)께서 희수(姬水)의 강변(江邊)에 살았으므로 희씨(姬氏)라는 성(姓)을 지어 받치고 황제(黃帝)도 모후(母后)의 성(姓)을 따라 성(姓)을 희씨(嬉氏)로 바꾸었고 토덕(土德)으로 제위(帝位)하여 황제(黃帝)라 부르도록 하였다.
* 황제本姓은 ⇨ 公孫씨 인데 모후에게 姬씨 ⇨ 성을 지어 바침 황제는 嬉희씨로 성을 ⇨ 바꿈 남녀의 교접(交接) 없어 姓이 바뀌지 않음
황제(黃帝)께서는 희씨(姬氏)로 계승(繼承)하여 맏아들 소호(小昊), 둘째아들 창의(昌意)를 두시었고. 소호(小昊)는 아들 교현(橋玄)을 두시었고, 교현(橋玄)은 아들 제곡(帝嚳을 두시었고, 제곡(帝嚳)은 아들 4형제를 낳으시니 페제지(廢帝址), 당제요(唐帝堯), 상조계(商祖契), 주조기(周祖棄)이시며, 황제(黃帝)의 둘째 아들 창의(昌意)는 아들 전욱(全旭)을 두시고, 전욱(顓旭)은 아들 4형제를 낳으시니 궁선(窮蟬), 곤(鯀), 숭백(崇伯), 백익(伯益)이시며, 궁선(窮蟬)은 아들 구망(句望)을 두시었고, 구망(句望)은 아들 교우(橋牛)를 두시었고, 교우(橋牛)는 아들 고수(瞽>瞍를 두시었고, 고수(瞽瞍)는 아들 우제순(虞帝舜)을 두시었는데 이분이 순(舜)임금이시며, 전욱(顓頊)의 둘째 아들 곤(鯀)은 아들 하후씨우(夏后氏禹)를 낳으셨다. 순(舜)임금은 하후씨우(夏后氏禹)에게 선위(禪位)를 하시고 성(姓)을 사씨(姒氏)로 사성(賜姓)을 하시었고, 하후씨우(夏后氏禹)는 즉위(卽位)를 하시고 하(夏)나라를 세우시고 홍수(洪水)를 다스리는 치수사업(治水事業)을 성공적(成功的)으로 이루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씨(姒>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게 되었다.
* 황제 ⇨ 姬씨로 계승 ⇨ 虞帝舜 순 임금은 ⇨ 夏后氏禹에게 姒씨 사성 (遺傳 없음)
하후씨우(夏后氏禹)는 아들 계(啓)를 두시었고, 계(啓)는 아들 두 형제를 낳으시니 태강(太康), 중강(仲康)이시며, 계(啓)의 둘째 아들 중강(仲康)은 아들 상(相)을 두시었고, 상(相)은 아들 소강(少康)을 두시었고, 소강(少康)은 아들 저(杼)를 두시었고, 저(杼)는 아들 망(芒)을 두시었고, 망(芒)은 아들 설(泄)을 두시었고, 설(泄)은 아들 불강(不降)을 두시었고, 불강(不降)은 아들 3형제를 낳으시니 경(扃, 공갑(孔甲), 신갑(辛甲)이시며 이 3형제는 하후씨우(夏后氏禹)의 11세의 손자이며, 공갑(孔甲)께서는 왕이 되시었고 귀신(鬼神)을 섬기기를 지극히 좋아 하시었다.
이때에 하(夏)나라의 국운(國運)이 점점 기울어져 가는 어느 날 난데없는 용(龍) 한 쌍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공갑(孔甲)왕께서 매우 기이하게 여기시고 도당(陶唐)의 후손인 유루(劉累)라 하는 신하에게 어용(御龍)이란 성을 하사(下賜)하시고 그 한 쌍의 용을 잘 기르도록 명(命)을 내리시었다.
유루(劉累)는 왕명(王命)을 받들고 정성껏 용을 기르는데 왕제(王弟)이신 사신갑(姒辛甲)께서 이를 신기하게 여겨 힘과 정성을 다하여 유루(劉累)와 함께 용을 길 드려서 사육을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암 용이 우연히 죽어 버렸다.
유루(劉累)와 신갑(辛甲)은 용을 죽인 죄로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이를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죽은 용으로 젓갈을 담구어서 왕의 수랏상에 올리었더니 왕(王)은 그 젓갈의 맛이 좋아서 맛있게잡수었으며, 그 젓갈을 다 잡수신 왕께서는 더 젓갈을 원하여 찾으시니 유루(劉累)와 신갑(辛甲)은 더 구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왕께서 용의 젓갈인 사실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유루(劉累)는 노(魯)나라로 도주(逃走)해 버리자 신갑(辛甲)께서는 혼자 중벌(重罰)을 받으실까 더욱 두려운 나머지 요수(遼水)를 건너 동국(東國)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亡命)하시니 이때가 BC.1878년이었다.
② 사신갑(姒辛甲)께서는 고조선(古朝鮮)의 평양(平壤)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정착(定着)하여 사시면서 산의 이름 일토(一土)를 합하여 왕자(王字)를 만들어 성(姓)으로 정(定)하여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으로 개명(改名)하시었다.
왕조명(王祖明)께서는 근원(根源)의 조상(祖上)이 중국(中國) 황제(黃帝)임으로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뛰어 나시어 당시(當時)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조정에서는 공(公)을 흠모(欽慕)하여 치민장(治民長)으로 추대(推戴)하시니 이에 단군조(檀君朝)를 도와 치민치정(治民治政)에 힘쓰시게 되었다.
* 사신갑(姒辛甲) ⇨王자로 왕씨 성을 만듬 유전사실 없음 왕조명으로 개명
백성들로 하여금 띠를 베어 지붕을 덮게 하고 땅을 갈아 오곡(五穀)을 재배하며 방아를 찧어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 보급하였고 남녀를 구별하여 차례와 예(禮)의 범절(凡節)을 가르치시며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백성을 교화선도(敎化善導)를 하시었고, 그 후손인 왕수긍(王受兢)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원년(元年) 기묘(己卯)에 기자(箕子)가 동쪽 땅에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 :일설(一說)에는 한씨조선(韓氏朝鮮))을 세우고 팔조교(八條敎)를 만들고자 하니 풍토(風土)가 달라 국내(國內)에서 현존자(賢尊者)를 얻고자 하니 백성들이 왕수긍(王受兢)을 천거(薦擧)하여 기자(箕子)는 왕수긍(王受兢)을 교민사사(敎民士師)로 명(命)하게 되었고 공(公)은 팔조교(八條敎)를 만들어 예락(禮樂), 문물(文物), 의관(衣冠), 법도(法道)로 백성을 교화(敎化)하고 풍속(風俗)을 이루니 기자(箕子)가 기뻐하였다.
왕조명(王祖明)의 58세 휘 몽(諱 蒙)에 이르렀을 때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말엽(末葉)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왕검성(王儉城 : 지금의 평양성)을 버리고 남천(南遷)하여 마한(馬韓)의 도읍지(都邑地)인 금마(金馬 : 지금 전라북도 익산군)에 숨게 되었는데 이무렵「일토초가자위왕(一土草家者爲王)」이란 참언(讖言)이 있었는데 이 말은 일토초가(一土草家)는 몽자(蒙字)의 파자(破字)임으로 즉(卽) 왕몽(王蒙)이 왕이 된다는 뜻이며 이러 한 참언(讖言)이 동요(童謠)로 세상에 떠도니 기자준왕(箕子準王)이 이를 두려워하여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살고 있는 왕씨(王氏)들을 모두 잡아 죽이라는 어명(御命)을 내림으로 왕몽(王蒙)께서는 다급한 나머지 팔형제 아들 중에 일곱째 아드님이신 왕림(王琳)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避身)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 가 자취를 감추고. 은거(隱居)하여 10여 년의 피신(避身)의 고난(苦難)에 어느 날 신인(神人)이 감응(感應)하시어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큰 소리로 외치며 가로대 ③ “너의 성(姓)인 왕자(王字)를 세 번 글자를 고쳐 세 번째 글로 성(姓)으로 정(定)하면 이 고난(苦難)을 모면(謀免)하고 자손(子孫)이 크게 번영(繁榮)할 것이다.고 예시(豫示)함으로 왕몽(王蒙)께서 즉시(卽時) 왕자(王字)에 동서(東西)를 막아 전자(田字)로 또 다시 전자(田字)에 중획(中劃)을 상하(上下)로 이어 신자(申字)로 또 다시 신자(申字)에 천지양획(天地兩劃)을 가(加)하여 차자(車字)로 하고 이에 차자(車字)로 성(姓)으로 정(定)한 후 무(無)의 허공(許空)에서 다시 하나로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무일(無一)로 개명(改名)하시고 아들 왕림(王琳)은 신인(神人)이 예시(豫示)할 때 두 번째라 하여 이름을 신을(神乙)이라 개명(改名)하신 후 지리산(智異山)에서 은둔(隱遁)의 피신생활(避身生活)을 탈피(脫皮)하고 지리산(智異山)에서 떠나 교남(嶠南)의 계림(鷄林 :지금 慶州)으로 이거(移居)를 하였다.
* 王蒙은 王씨를⇨田씨로⇨申씨로⇨車씨로 성을 네 번 바꾸어 유전의 법칙을 무시하니 조작 이 드러남. 이렇게 성씨가 쉽게 변할 수 있을까? 한 세대를 30년으로 가정 할 때 120여 년 만에 성씨가 네 번을 바뀌고 바꾸니 이를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주석(註釋)
위만(衛滿) : 중국 진(秦). 한(漢)의 교체기에 연(燕)나라 사람으로 무리를 거느리고 기자조선 준왕에게 투항하였다가 그 뒤 준왕을 쫓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웠으며 우거왕(右渠王) 때 3대의 88년 만에 한(漢)나라 무제(武帝)에게 망하였다.
④ BC.59년경에 부족(部族)의 6촌 촌장(村長)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王)으로 추대(推戴)함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임금으로 즉위(卽位)하시어 계림(鷄林)으로 도읍(都邑)을 천도(遷都)하시어 신라(新羅)를 개국(開國)하실 때 차무일(車無一)께서 신라 태조(太祖)이신박혁거세(朴赫居世)에게 지리산(智異山)의 영주권(領主權)을 내어 주시고 임금으로 섬기어 큰 공훈(功勳)을 세우시니 신라 태조께서 벼슬 시중(侍中)을 제수(除授)하시고 차씨(車氏)로 사성(賜姓)하시어 차문(車門)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고 BC59년 아들 차신을(車神乙)이 또한 신라조(新羅朝)에 승상(丞相) 벼슬을 하였다.
賜姓 : 남녀 교접(交接) 없이 유전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왕이 내리는 성씨라고 조작. 삼국사기 본기 : 차씨는 등장하지 않음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의 17세 손자 차제능(車濟能)은 신라 미추왕조(味鄒王朝)에 벼슬 승상(丞相)이시며 득성시조(得姓始祖)의 21세 손자 차휘만(車徽曼)은 신라 19대 눌지왕조(訥祗王朝)에 벼슬이 승상(丞相)으로 눌지왕(訥祗王)의 부왕(父王)이신 내물왕(內勿王)의 동생인 실성왕(實聖王)이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는 내물왕(內勿王)의 장자(長子) 눌지(訥祗)는 도외시(度外示)하고 내물왕의 둘째아들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人質)로 보내고 ⑤ 셋째 아들 미사흔(米斯欣)은 왜국(倭國)으로 인질(人質)로 보내버렸다. 이에 박제상(朴提上)이 주축(主軸)이 되어 신자천(申自天). 차휘만(車徽曼). 배중량(裵仲良) 등이 실성왕(實聖王)의 부당(不當)한 처사(處事)를 거론(擧論)하여 실성왕(實聖王)은 내물왕(內勿王)의 장자(長子) 눌지(訥祗)에게 선위(禪位)를 하였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卽位)하신 뒤에 일본(日本)에 억류(抑留)된 아우를 그리워하며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귀환(歸還)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하였다. 이에 승상(丞相) 차휘만(車徽曼)이 박제상(朴提上)과 함께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으로 건너가시어 왜왕(倭王)에게 신라조(新羅朝)의 왕제(王弟)인 미사흔(米斯欣)을 신라로 귀환(歸還)을 청(請)하였으나 왜왕(倭王)이 거절(拒絶)을 하였다.
이에 승상 차휘만(車徽曼)은 ⑤승상 박제상(朴提上) 등의 사신(使臣)은 논의(論議)하고 어느 날 밤에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의 숙소(宿所)를 지키는 왜인(倭人)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은밀히 도해구출(渡海救出)을 시킨 뒤에 무사히 신라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승상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은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이 감금(監禁)된 숙소(宿所)의 방문(房門) 앞을 지키고 앉아 있으면서 감금(監禁)의 왜인(倭人)들에게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이 아직 취침(就寢)하고 있다 속이며 무사히 신라로 귀환(歸還)을 시키었는데 이 사실이 밝혀져서 일본의 왜왕(倭王)이 진노(震怒)하여 문책(問責)하니 승상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은 왜왕(倭王)에게 굴복(屈服)하지 않으시고 일본(日本)에서 순절(殉節)하시었다. 이 사실은 동사(東史)에 기록 되어 있다.
* 류차달과 동계사 구글사이트 : 검색어 동계사 https://www.google.co.kr/?gws_rd=ssl 검색
* ⇨ 신라 19대 눌지왕 때에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출하고 일본에서 순절한 박제상을 936년 류차달이 초혼하여 제사하고 왕명으로 동계사를 건립하였다. 철향되었다가 1956년 사림의 정성으로 중건되고 아사 류차달을 추배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柳車達의 史蹟을 車達 事蹟으로 조작함
득성시조(得姓始祖)의 32세 손자 차건갑(車建甲)께서는 신라 39대 소성와조(昭聖王祖)에 원로승상(元老丞相)으로 소성왕(昭聖王)은 친(親)이 공(公)에게 중국의 주(周)나라 주공(周公 :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 무왕(武王)의 아들이며 어린 조카인 성왕(成王)을 등에 업고 제후(諸侯)들과 조회(朝會)를 하는 그림 족자(簇子)를 내리시면서 어린 태자(太子)를 잘 보필(輔弼)할 것을 부탁을 하였는데 이것은 종실(宗室)의 왕족(王族)이 강세(强勢)하고 12세에 어린 세자(世子)에게 선위(禪位)하는 것이 몹시 불안하여 원로 승상(元老丞相)에게 유언(遺言)을 남긴 것이다.
서기800년 경진(庚辰)에 소성왕(昭聖王)이 서거(逝去)하시고 세자(世子)는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卽位)하시니 신라 40대 애장왕(哀莊王)이시며 승상(丞相) 차건갑(車建甲)은 애장왕(哀莊王)의 보상(輔相)이 되시어 애장왕(哀莊王)을 극진(極盡)이 보필(輔弼)하시고 나라의 정사(政事)를 섭정(攝政)을 하시며 나라에 번영(繁榮)의 대훈공(大勳功)을 세우시었다.
득성시조(得丞始祖)의 33세 손자이시고 승상 ⑥차건갑(車建甲)의 아드님 차승색(車承穡) 신라조(新羅朝)에 출사(出仕)하시니 승상공(丞相公)은 아드님에게 극진(極盡)히 애장왕(哀莊王)에 충성(忠誠)으로 보필(輔弼)할 것을 부탁하시고 어느 날 드디어 별세(別世)하시니 애장왕(哀莊王)은 만조백관(滿朝百官)에 하명(下命)하시어 승상공(丞相公)의 장례(葬禮)는 왕례(王禮)를 갖추어 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 측면(側面)의 산록(山錄) 자좌원(子坐原)에 장례(葬禮)를 거행(擧行)케 하였다.
왕례(王禮)에 따라 석관(石棺)과 석봉분(石封墳)을 쌓고 석의(石儀=石物)를 갖추어 세웠으며 신주(神主=位牌)는 소성왕묘(昭聖王廟)에 배향(配享)함으로 세인(世人)들이 승상공(丞相公)의 이 묘역(墓域)을 차능(車陵)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차능(車陵)으로 전(傳)하고 있다.
* 차승색에 대한 질의 ⇨ 국사편찬위원회 답변:2008.11.27. 신라시대 승상 차승색은 찾을 수 없 음이라고 함
승상공(丞相公)의 아들이신 차승색(車承穡)은 선고(先考)이신 승상공(丞相公)의 유언(遺言)에 따라 애장왕(哀莊王)을 극진(極盡)히 보필(輔弼)하시었고 이에 따라 서기 809년 애장왕(哀莊王) 10년에 좌승상(左丞相)으로 승진(昇進)하였으며, 이때에 병부령(兵部令: 군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 병부의 우두머리)으로 있던 애장왕(哀莊王)의 숙부(叔父)인 김언승(金彦昇)이 섭정(攝政)함을 기화(奇貨)로 마침내 애장왕(哀莊王) 10년 서기 809년에 반역(返逆)을 도모(圖謀)하여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로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고 스스로 즉위(卽位). 헌덕왕(憲德王)이라 칭(稱)하니 이 분이 신라 41대 왕이 된 것이다.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은 헌덕왕(憲德王)을 임금으로 보지 않고 종자(從子 :조카)를 죽인 패륜아(悖倫兒)로 생각하고 애장왕(哀莊王)을 죽인 원한(怨恨)의 격분(激憤)을 참지 못하고 충의지심(忠義之心)으로 김언승(金彦昇)을 죽이고 애장왕(哀莊王)의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정통적(正統的) 질서(秩序)를 이어 나라의 기강(紀綱)을 바로잡아 세우기 위하여 굳은 결심으로 좌승상(左丞相)의 큰 아들 신라벼슬 사공(司空)이신 차공숙(車恭叔)과 함께 모책(謀策)을 논의(論議)하고 옛날에 예양(豫讓)의 모책(謀策)을 본받아 헌덕왕(憲德王)이 수렵(獸獵)하로 나감을 틈타서 다리 밑에 궁수(弓手)의 복병(伏兵)으로 시해(弑害)하고자 하였으나 이 음모(陰謀)를 아는 자가 있어 헌덕왕(憲德王)에게 밀고(密告)함으로 모책(謀策)의 계획(計劃)이 누설(漏泄)되어 헌덕왕(憲德王)의 시해음모(弑害陰謀)는 실패(失敗)하였다.
밀고(密告)로 음모사실(陰謀事實)을 안 헌덕왕(憲德王)인 김언승(金彦昇)은 군병(軍兵)에 체포령(逮捕令)을 내려 차승색(車承穡)과 차공숙(車恭叔)의 부자(父子)를 좇으니 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는 국운(國運)이 따르지 못함을 한탄하시며 요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아들 김생(金生)의 집으로 도주(逃走)하여 은닉(隱匿)하였다.
⑦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지 못한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은 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여 현상(懸賞)으로 금(金) 천근(千斤)과 식읍만호(食邑萬戶)를 걸어놓고 전국에 수색(搜索)하여 찾으니 차승색(車承穡)의 생질(甥姪)인 김생(金生)이 현상(懸賞)을 탐하여 외숙(外叔)과 외종(外從)을 밀고(密告)하고자 하니 김생(金生)의 충복(忠僕)은 이 사실을 차승색(車承穡)에게 긴밀히 알려서 그날 밤 찰신도주(脫身逃走)하여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아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둔적은거(遁跡隱居) 차승색(車承穡)께서 본성(本姓)을 감추고 조모(祖母)님의 성(姓)인 양씨(楊氏)를 모칭(冒稱)하시며 이름은 백(栢)으로 개명(改名)하고 피신(避身)으로 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한 것이다.
⑧헌덕왕(憲德王) 원년(元年) 서기 810년에 구월산(구월산 유주(儒州)묵방동(墨坊洞)에 둔적(遁跡)하여 조모(祖母)의 성(姓)인 양씨(楊氏)로 모성(冒姓)한 양자(楊字)를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가성류씨(假姓柳氏)로 하고 이름은 잣나무 숲에 몸을 깊이 감춘다는 뜻으로 백(栢)으로 개명(改名)한 후 유주(儒州)의 부두가(富荳家)에 고용살이를 하시면서 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하였다
* 차승색⇨차씨와 류씨를 동원으로 만들기 위해 조작한 인물 (삼국사기엔 차씨 등장하지 않음)
* 조선시대 세조가 조카 단종 왕위 찬탈을 본보기로 삼음
* 조모의 성 楊(버들 양)씨로 모칭하여, 양자(楊字)를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가성 류씨 (假姓柳氏)로(류승색) 하였다 하니 당시의 모든 차씨는 류씨로 유전자가 바뀌었을까?
주해(註解)
유주(儒州) : 고려8대 현종(顯宗)이 1010년에 즉위한 후 유주(儒州)를 풍주(豊州)에 예속(隸屬)하여 유주는 없어졌고 고려23대 고종왕(高宗王) 45년 1258년에 류경(柳璥)이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됨으로 그에 고향인 옛 유주(儒州) 땅을 승격(陞格)하여 문화현(文化縣)을 만들었던 것이다.
모칭(冒稱) : 모성(冒姓)과 같음, 즉 남의 성(姓)을 가칭(假稱)함.
⑨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丞穡)의 차자(次子) 차공도(車恭道)는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님의 34세 차손(次孫)인데 아버지와 형을 따라 피란을 가지 못하고 혼자서 강남(江南)으로 도주하여 본성(本姓)을 감추고 옛 조상의 구성(舊姓)인 왕씨(王氏)로 복성(復姓)하여 성명(姓名)을 왕공도(王恭道)라 개칭(改稱)하고 피신(避身)하게 되었는데 이 분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증조(曾祖)이시며 고려개국(高麗開國)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숭(追崇)하시고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이시다. (開城王氏 族譜 參照)
* 차공도는 차씨 본성을 감추고 왕씨로 復姓하여 왕공도⇨개성왕씨 시조가 되었다.
* 차씨와 왕씨의 유전자는 같을까?
⑩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으로부터 류씨(柳氏)로 모성(冒姓)하고 이름 백(栢)으로 개명(改名)하여 가성명(假姓名) 류백(柳栢)으로 칭(稱)한 것이 가성류씨(假姓柳氏)의 시초(始初)로 그의 아들 차공숙(車恭叔)은 가성명(假姓名) 류숙(柳淑)으로 개명(改名), 그의 아들 휘 진부(諱振阜), 그의 아들 휘 무선(諱茂先), 그의 아들 휘 보림(諱 普林) 그의 아들 휘 해(諱海)까지 109년간 가성류씨(假姓柳氏)를 전(傳)하면서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시다.
* 당시 왕건 AD 900년 경 차씨 인구수를 3,000명 (2011년 연안 차씨 인구 수161,325명) 으로 추정 할 때 3,000명이 일시에 성을 바꾸어 109년 간 류씨로 유전자가 바뀌었을까?
서기 1456년 세조(世祖) 2년(경태(景泰) 7년에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선생께서 조선조(朝鮮朝)의 왕명(王命)에 의(依)하여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이 기술(記述)한 기문(記文)에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 등제현(諸賢)들이 주석(註釋)을 붙이고 유신석학(儒臣碩學)의 48인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서문(序文)을 찬(撰)하여 엮은⑪차운암선생 설원기(車雲巖先生 雪寃記)를 살펴보면 고려조(高麗朝)에 내사(內史)를 역임(歷任)하신 서희(徐熙)께서 찬집(撰集)한 가사(家史)와 고려 16대 예종(睿宗) 9년(서기1127년)에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이 왕명(王命)을 받아 고려왕실(高麗王室)에서 신라(新羅)의 본계(本系)를 찬술한 서경잡기(西京雜記), 또는 서경야사(西京野史) 및 고려조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기술(記述)한 초당일기(草堂日記) 등의 기록을 성삼문(成三問)과 최항(崔恒)이 입증(入證)하였다
⑪ 차운암선생설원기=차원부설원기에 등장하는 서희의 찬집가사, 정지상의 서경잡기, 김방경의 초당일기 등을 이수건 교수는 실체가 없는 조작이라고 지적함
주해(註解)
강남(江南) : 개성왕씨(開城王氏)의 보첩(譜牒)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고려 6대 성종왕(成宗王) 14년 서기955년 7월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10도로 나누면서 대동강의 남쪽(지금의 평안남도)을 강남도(江南道) 하였다. 여기에 기록된 강남은 중국의 강남이 아니고 대동강 남쪽 강남도를 말한 것이다.
이 글의 원문(原文)은『謹司諫院左正言車原頫文城人車達第一子大匡之伯孝全之後也達之於丁麗室輸勤之日孝全之於當王事靡盬之時輿興原賑貸之粟樹顯陵定社之勞國以爲辦出車乘繼粮道運米征南特贈其父以車爲達世績之號別賜車氏以表孝全首功之姓而食邑千戶之封仍宗籍延安之地. 正言者康獻大王命起特拜之意今此發現而使聞문意也 臣崔恒臣成三問等奉敎註顯陵者高麗始祖墓號也定社者開國而定宗社之功也 臣崔恒奉敎註食邑千戶者麗太祖之於孝全之爲王室入宗籍之後塩州之地下賜也 崔恒臣成三問奉敎註』
주해(註解)
판출(辦出) : 변통하여 갖추어 냄
계량(繼粮) : 한 해 농사지은 곡식으로 일 년 양식을 이어감이 글에 고려태조 왕건(王建)께서 나라를 개국(開國)하여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정(定)하고 남쪽 후백제(後百濟)를 정벌(征伐)할 때 가성명(假姓名) 류해(柳海)는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로 장정(壯丁)을 모집하여 고려조정에 수송하여 도우시고 그의 큰아들 휘 효전(諱 孝全)은 왕사(王事)에 미고(靡盬를 당하였을 때 흥원(興原)에 많은 속곡(粟穀)을 진대(賑貸)하였고, 현능(顯陵)과 종사(宗社)를 정할 때 공훈을 세웠고, 나라를 위하여 수레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싫어 남쪽 정벌(征伐)에 미곡(米穀) 운반(運搬)을 행 하였으니 특별히 그의 아버지에게 차씨(車氏)로 내려서 세(世)를 계승(繼承)케 하여 달(達)로 이름 하였다고 계통(系統) 차씨(車氏)로 분부하여 나타낸 것은 효전(孝全)의 수공(首功)에 성(姓)이며 식읍천호(食邑千戶)를 봉(封)하니 곧 종적(宗籍)은 연안(延安의 땅으로 봉(封)한 것이다.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의 38세 손자(孫子)인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의 ⑫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를 살펴보면 그 원문(原文)에『公之配新羅王閼智之孫金김稛之女也生二男長曰孝全次曰孝金際其承蔭授封之日麗祖特命曰念昔車氏之弘烈旣不可忘也這間柳氏之冒稱又不可廢也長子孝全爲上祖之弘烈承襲而車氏也次子孝金爲柳氏之命賜姓也』이 글의 뜻은(公)의 아내는 신라왕 알지(閼智)의 손자 김균(金稛>의 딸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효전(孝全) 둘째는 효금(孝金)이다. 그 음사(蔭仕)로 봉(封)하여 이어 주는 날에 고려 태조는 특별히 명(命)하여 가로대 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본래의 홍렬(弘烈)을 가히 잊을 수 없고, 저간(這間 :이 때까지)에 류씨(柳氏)로 사칭(詐稱)하여 부른 것을 또 버리는 것도 옳이 아니하다. 장자(長子) 효전(孝全)은 윗 할아버지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하여 차씨(車氏)가 되고,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류씨(柳氏)로 사성(賜姓)을 명(命)한 것이다. 이에 형제분(兄弟分)이 차씨(車氏)와 류씨(柳氏)로 ⑬분성(分姓)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양문(兩門)으로 계승(繼承)하고 있다.
33세 * 차승색 ⇨ 38세 모성류씨 류차달로 만들어 : 큰 아들 효전을 차씨 1세로 만듬 둘째 아들 효금은 류씨1세, 류씨와 차씨로 분성하였으니 류씨와 차씨는 유전자가 같은 동원(同源)이 이라고 함.
* 38세 차달과 김균의 딸이 교접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하니 비로소 유전이 이루어짐 류*차는 동원이라는 말이 성립됨
* 삼국사기에는 차씨가 등장하지 않음으로 차승색도 존재하지 않으니 조작임
* (류차달 삭제하고 류차달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 조작 함)
* 이수건 교수 지적 : 문화류씨 柳차달과 연안 車씨 車자를 교합하여 車達을 조작
* 류씨와 차씨로 분성하였으니 류씨와 차씨는 유전자가 같은 동원(同源)이라고 조작함
2. 왕씨(王氏). 차씨(車氏). 류씨(柳氏)의 분파도(分派圖)
得姓一世 二 世 三世 四世 五世 六世 七世 八世 九世 十世
車無一 ━ 神乙(琳) ━ 夫起 ━ 惟典 ━ 茂正 ━ 介修 ━ 復 ━ 祖英 ━ 适 ━ 仁相 ┓
┏━━━━━━━━━━━━━━━━━━━━━━━━━━━━━━┛
┃十一世 十二世 十三世 十四世 十五世 十六世 十七世 十八世 十九世 二十世
┗ 甲乘 ━ 自開 ━ 武基 ━ 升閣 ━ 公乃 ━ 輔傳 ━ 濟能 ━ 登國 ━ 殷甫 ━ 延廣┓
┏━━━━━━━━━━━━━━━━━━━━━━━━━━━━━━┛
┃ 二一世 二二世 二三世 二四世 二五世 二六世 二七世 二八世 二九世 三十世 三一世
┗ 徽曼 ━ 智 ━ 溫伯 ━ 楯 ━ 渰━ 婁漢 ━ 盾階 ━ 段式 ━ 憲 ━ 渡江 ━ 儉夫 ┓
┏━━━━━━━━━━━━━━━━━━━━━━━━━━━━━━┛
┃ 三二世 三三世 三四世 三五世 三六世 三七世 三八世 三九世
┗ 建甲 ┳ 承穡 ━ 恭叔 ━ 振阜 ━ 茂先 ━ 普林 ━ 達 ┳ 孝全(延安車氏 得貫祖)
┃ ┃
┃ ┗ 孝金(文化柳氏 得姓祖)
┃
┗ 恭道 ━ 不傳 ━ 隆 ━ 王建(高麗 太祖)
(開城王氏 始祖 元德大王)
3. 의덕사(懿德祠)에 배향봉안(配享奉安) 된 제선조(諸先祖)님의 약력(略歷)
1 世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 :
공(公)의 본성명(本姓名)읕 황몽(王蒙)으로 중국(中國)의 옛 하(夏)나라에서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亡命)하여 평양(平壤) 일토산(一土山) 아래 정착(定着)한 사신갑(姒>辛甲)은 성(姓)을 왕씨(王氏)로 바꾸어 이름은 조명(祖明)으로 개명(改名)하고 단군조(檀君朝)에 치민장(治民長)을 역임(歷任)하신 왕조명(王祖明)의 58세 손자이시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準王) 때 참언(讖言)의 글에『일토초가자위왕(一土草家者爲王)』이란 말이 동요(童謠)로 세상에 퍼지니 기자준왕(箕子準王)은 이 참언(讖言)이 두려워서 일토산(一土山) 아래 사는 왕씨(王氏)를 박살(撲殺)함으로 왕몽(王蒙)께서 황급(遑急)히 일곱째 아들 왕림(王琳)과 함께 남쪽 지리산(智異山)으로 둔적(遁跡)하여 십여년(十餘年)을 은거생활(隱居生活)로 피신(避身)하게 되었다.
어느 날 신인(神人)이 왕몽(王蒙)의 피신고뇌(避身苦惱)에 감응(感應)하여 나타나 큰 소리를 내어 말하기를『너에 성(姓)인 왕자(王字)를 세 번 글자를 고쳐서 세 번째 글자로 성(姓)으로 정(定)하면 이 변난(變亂)을 피하고 자손(子孫)이 창성(昌盛)할 것이다.』함으로 왕몽(王蒙)께서 성(姓)인 왕자(王字)를 동서(東西)를 막아 전자(田字)로 전자(田字)의 중획(中劃)을 상하(上下)로 이어 신자(申字)로 신자(申字)에 천지(天地)에 각각 일획(各各一劃)을 더하여 차자(車字)로 하여 성(姓)을 차씨(車氏)로 정하고 이름은 무(無)에서 처음 다시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름은 무일(無一)이라 개명(改名)하고 아들 왕림(王琳)은 신인(神人)이 예시(豫示)할 때 두 번째 사람이다 해서 이름을 신을(神乙)로 개명(改名)하고 지리산(智異山)의 은신생활(隱身生活)을 끝내고 계림(鷄林=지금 慶州)으로 이거(移居)하였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西紀前57年) 신라 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는 그 당시 부족국가(部族國家)로 구성(構成)된 육촌(六村)의 장(村長)들이 왕(王)으로 추대(推戴)함에 부족국가(部族國家)를 통합(統合)하여 신라(新羅)를 개국(開國)하고 왕(王)으로 즉위(卽位)하여 도읍지(都邑地)를 계림(鷄林)으로 천도(遷都)할 때 차무일(車無一)께서 큰 공훈(功勳)을 세웠기에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차무일(車無一)에게 벼슬 시중(侍中)을 제수(除授)하고 차씨(車氏)로 사성(賜姓)함으로 차씨(車氏)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2 世 휘(諱) 신을(神乙) :
본성명(本姓名)은 왕림(王琳)이다. 참언(讖言)의 동요(童謠)로 인(因)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 준왕(準王)의 박멸(迫滅)을 피하여 아버지를 따라 지리산(智異山)에 둔적(遁跡) 하여 피신(避身)하고 신인(神人)의 예시(豫示)에 따라 아버지와 함께 성(姓)을 차씨(車氏)로하고 이름은 신인(神人)이 예시(豫示)한 두 번째 사람이란 뜻을 담아 신을(神乙)로 개명(改名)하고 아버지와 함께 계림(鷄林)에 이거(移居)하여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섬기어 벼슬 승상(丞相)을 역임(歷任)하였다.
3 世 휘(諱) 부기(夫起)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에 승상(承相)을 역임(歷任)하였으며 조부(祖父)로부터 3대를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 임금을 섬기었다.
4 世 휘(諱) 유전(惟典)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다. 공(公)은 그 당시 신라조(新羅朝)의 명현(名賢)으로 나라 사람들이 봉사(奉祀)하였다.
5 世 휘(諱) 무정(茂正) :
일운(一云) 무정(戊正)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司空)이며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하였다.
6세 휘(諱) 개수(介修)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司空)이며 배부인(配夫人)은 박씨(朴氏)이며 신라조(新羅朝) 2대 남해왕(南解王)의 딸이다.
7 世 휘(諱) 복(復)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大丞相)이시며, 음변국(音汴國 :東史의 기록에 지금 慶州에 屬한 安東縣 脫解王 乙丑(서기65년) 漢明帝 永平8年에 征伐함의 정벌(征伐)에 큰 공훈(功勳)이 있으며. 배부인(配夫人)은 박씨(朴氏)이며 신라조(新羅朝)의 5대 파사왕(婆娑王)의 딸이다.
8 世 휘(諱) 조영(祖英) :
일운(一云) 조영(祖永)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에 상주국(上柱國)이시다.
9 世 휘(諱) 괄(适) :
일운(一云) 괄(括)이라 하며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이시다.
10 世 휘(諱) 인상(仁相)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며, 호(號) 인의상(仁義相)인 연고로 인상(仁相)으로 사명(賜名)하였다.
11 世 휘(諱) 갑승(甲乘) :
일운(一云) 갑승(甲承)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시다.
12 世 휘(諱) 자개(自開) :
일운(一云) 자개(子開)라고도 하고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며 배부인(配夫人)은 가인(哥仁)의 딸이다.
13 世 휘(諱) 무기(武基) :
일운(一云) 무기(武奇)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大丞相)이시다.
14 世 휘(諱) 승각(升閣)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며 감문국(甘文國 : 東史의기록에 지금의 開寧府인데 신라 11대 助賁王 2년 辛亥(西紀231年) 卽 漢 後帝 建興9年에 征伐함)을 정벌(征伐)할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5 世 휘(諱) 공내(公乃)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통독(統督)으로 사양국(沙梁國 : 東史의기록에 지금의尙州이며 신라 12대 沾解王 丁卯(西紀247年) 卽 漢後帝 延熙10年에 征伐함)을 정벌(征伐)할 때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16 世 휘(諱) 보전(輔傳) :
일운(一云) 보전(甫前)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집주(執奏)이며 배부인(配夫人)은 석씨(昔氏) 우로(于老)의 딸로 신라 10대 내해왕(奈解王)의 손녀(孫女)시다.
17 世 휘(諱) 제능(濟能) :
일운(一云) 제장(濟張)이라고 하며 벼슬은 신라 13대 미추왕(味鄒王) 원년(元年) 임오(壬午 : 서기262년)에 대승상(大丞相)이 되어 국정(國政)을 바로 잡았다. 고려조(高麗朝)에 벼슬 기거랑(起居郞)을 지낸 정지상(鄭知常)이 찬술(撰述)한 서경야사(西京野史)에 유루(劉累)의 후손(後孫)과 사족(四族)이 기자(箕子)와 함께 동쪽으로 왔는데 차제능(車濟能)의 선대(先代) 황제(黃帝) 희헌원(姬軒轅)의 후손(後孫)도 그 중의 한분으로 왔다 하고 취금헌(醉琴軒)박팽년(朴彭年) 선생이 찬술(撰述)한『車雲巖先生 雪寃錄』의 세계편(世系編)을 보면 차제능(車濟能)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일세(一世)로 기록되어 있다.
18 世 휘(諱) 등국(登國)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아간(阿干)이다.
19 世 휘(諱) 은보(殷甫) :
일운(一云) 은부(殷夫)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시다.
20 世 휘(諱) 연광(延廣) :
벼슬은 구보(舊譜)에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 일운(一云) 아간(阿干)이라 기록하고 있다. 배부인(配夫人)은 김씨(金氏)로 신라조(新羅朝) 18대 실성왕(實聖王)의 딸이며, 알지(閼智)의 후손(后孫) 눌지(訥祗) 그에 임금 실성왕(實聖王)을 죽이고 신라조(新羅朝)의 19대 왕으로 자립(自立)함으로 공(公)께서 극간(極諫)에 눌지(訥祗)는 노(怒)하여 공(公)을 죽였다. 동사(東史)에 진안제(晋安帝) 의희(義熙) 13년 정사(丁巳) 즉(卽)실성왕(實聖王) 16년 정사(丁巳 : 서기 417년)에 눌지(訥祗)가 죽였다.
21 世 휘(諱) 휘만(徽曼) :
일운(一云) 만미(曼微), 또 일운(一云) 미만(微曼)이라고도 한다. 벼슬은 (新羅朝)의 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승상(丞相)이시다. 눌지왕(訥祗王)의 부왕(父王)인 내물왕(奈勿王)의 동생인 실성왕(實聖王)이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는 내물왕(奈勿王)의 장자(長子) 눌지(訥祗)를 도외시(度外視)하고 내물왕(奈勿王)의 둘째 아들복호(卜好 :눌지왕의 동생)는 고구려(高句麗)에 인질(人質)로 보내고 내물왕(奈勿王)의 셋째아들 미사흔(米斯欣)은 왜국(倭國)에 인질(人質)로 보내 버렸다. 이에 박제상(朴提上)이 주축(主軸)이 되어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 등이 실성왕(實聖王)의 부당(不當)한 처사(處事)를 거론(擧論)하여 실성왕(實聖王)이 눌지(訥祗)에게 왕위(王位)를 양위(讓位)하게 되었다. 서기 417년 정사(丁巳)에 눌지왕(訥祗王)이 즉위(卽位)한 후 왜국(倭國)에 인질(人質)로 가 억류(抑留)된 동생 미사흔(米斯欣)이 그리워서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을 여러 차례 보내어 귀환(歸還)을 요구(要求)하였으나 번번이 거절(拒絶)을 당하였다. 승상(丞相) 차휘만(車徽曼)은 박제상(朴提上)과 함께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으로 들어 가 미사흔(米斯欣)의 숙소(宿所)의 경비(警備)하는 왜인(倭人)들이 잠이 들은 틈에 미사흔(米斯欣)을 구출(救出)을 하기 위하여 선박(船舶)으로 신라조(新羅朝)로 귀환(歸還)하고 왜왕(倭王)에 이 사실을 감추었다. 이 사실(事實)이 밝혀져 왜왕(倭王)이 승상(丞相)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에게 재물(財物)의 욕심으로 항복(降伏)을 받으니 승상(丞相)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은 굴(屈)하지 않고 마침내 왜왕(倭王)에게 죽임을 당하여 왜국(倭國)에서 순절(殉節)하였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박제상(朴提上)과 함께 왜왕(倭王)에게 죽었다고 기록이 있다.
22 世 휘(諱) 지(智) :
일운(一云) 지아(智阿)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이손(伊飱 또는 승상(丞相)이시다.
23 世 휘(諱) 온백(溫伯)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아손(阿飱 또는 승상(丞相)이라 하며 배부인(配夫人) 명성(明城) 복씨(卜氏)이며 문감흘(門監乞)의 딸이시다.
24 世 휘(諱) 순(楯) :
일운(一云) 륜(輪) 또 일운(一云)에 식(植)이라 하고 또는 일운(一云) 욱(栯)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承相)이며 공(公)은 사인(士人)의 명습자(明習者 :똑똑하고 분명하게 익히는 사람)를취(取)하여 날로 유도(儒道)를 강론(講論)하였다.
25 世 휘(諱) 엄(渰>) :
일운(一云) 엄(弇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상대등(上大等)이다.
26 世 휘(諱) 루한(婁漢) :
일운(一云) 루한(婁翰)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司空)이시다.
27 世 휘(諱) 순계(盾啓) :
일운(一云) 순계(盾階)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大丞相)이시다. 공(公)은 신라 27대 여왕(女王) 선덕왕조(善德王朝)에 벙(病)으로 물러나서 은거(隱居)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28 世 휘(諱) 단식(段式) :
일운(一云) 개식(改式)이라고도 하고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大丞相)이시며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2년 임오(壬午 : 서기682년)에 상소(上疏)로 청(請)하야 국학(國學)을 세우니 설총(薛聰)과 고질(高秩) 등은 예절(禮節)을 물으며 공(公)을 곧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29 世 휘(諱) 헌(憲)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시며,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은 승상(丞相) 차헌(車憲)을 촉중(蜀中)에 사신(使臣)으로 보냈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당(唐)나라 천보(天寶) 15년 병신(丙申)에 현종(玄宗)이 록산(祿山)의 난(亂)을 피하여 촉(蜀)으로 행차한 연고로 조정(朝廷)에서 차헌(車憲)을 보내어 현종(玄宗)을 알현(謁見)하니 현종(玄宗)은 친(親)히 지은 십운시(十韻詩)와 수찰(手札)을 차헌(車憲)에 부치어 경덕왕(景德王)에게 내렸다.
30 世 휘(諱) 도강(渡江) :
일운(一云) 도강(渡康)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전의(典儀)시다. 김양상(金良相)이 그에 임금 신라 36대 혜공왕(惠恭王)을 죽이고 자립(自立)하고자 함으로 차도강(車渡江)은 김양상(金良相)을 죽여 막을 것을 공(公)은 스스로 도모(圖謀) 하였으나 실패(失敗)하였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당(唐)나라 덕종(德宗)건 중 원년(建中元年) 경신(庚申 :서기 780년)에 김양상(金良相)은 왕(王)을 죽이고 자립(自立)하였다. (※김양상(金良相)은 신라 37대 선덕왕(宣德王)이다.)
31 世 휘(諱) 검부(儉夫)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시다. 승상(丞相) 차검부(車儉夫)는 상소(上疏)로 학교(學校)에 과목(科目)을 설립하여 인재(人材)를가려 뽑았다. 배부인(配夫人)은 익원양씨(益原楊氏)이며 상장군(上將軍) 양인방(楊仁芳)의 딸이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4년 무진(戊辰 : 서기 788년). 당(唐)나라 덕종(德宗)정원(貞元) 4년에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립하였다.
32 世 휘(諱) 건갑(建甲)
일운(一云) 건신(建信)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承相)이며 신라 39대 소성왕조(昭聖王朝)의 원로신(元老臣)이며 배부인(配夫人)은 신라 4대 왕 석탈해니사금(昔脫解尼師今)의 후예(后裔)인 국성석씨(國姓昔氏)이다. 소성왕(昭聖王)은 친(親)히 주(周)나라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엎고 제후(諸侯)와 조회(朝會)하는 그림 한 폭을 주시며 공(公)에게 어린 태자(太子)를 부탁함은 애장왕(哀莊王)이 어린 까닭이다. 소성왕(昭聖王)이 서거(逝去)한 후 소성왕(昭聖王)의 유언(遺言)에 따라 12세에 즉위(卽位)하신 애장왕(哀莊王)의 보상(輔相)이 되시어 애장왕(哀莊王)을 보필(輔弼)하시고 나라의 정사(政事)를 섭정(攝政)하시어 대훈공(大勳功)을 세우시고 별세(別世)하시니 애장왕(哀莊王)은 만조백관(滿朝百官)에 왕례(王禮)를 갖추어 예장(禮葬)하고 공(公)의 신주(神主)는 소성왕묘(昭聖王廟)에 배향(配享)케 하명(下命)하고 공(公)의 묘역(墓域)을 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 :일운(一云)에 만화동(滿花冬)이라 함) 측록(側麓)의 자좌원(子坐原)에 매장(埋藏)하고 사포숙석(四舖>宿石)의 비갈(碑碣)이 있어 세인(世人)들이 차능(車能)이라 말하며 오늘 날까지 보존(保存)되고 있다.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서기826년~836년)은 기장현(機張縣)에는 소성왕조(昭聖王朝)의 로신(老臣)이며 애장왕(哀莊王)의 보상(輔相)의 묘역(墓域)을 세인(世人)들이 능(陵)으로 칭존(稱尊)하는 차능(車陵)이 있는 지방(地方)이라 하고 현명(縣名)을 승격(陞格)하여 ⑬차성(車城)으로 개칭(改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 날에 기현군(機張郡)의 고호(古號) 차성(車城)인 것이다.
http://cafe.daum.net/moonwharyu 문화류씨 뿌리깊은 버드나무 181번 차릉(車城) 2013년,1.20
84번 차릉(車城) 2013,11,23 185번 차릉(車城) 2013, 11,23, 참조
33 世 휘(諱) 승색(承穡) :
벼슬은 당(唐)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4년 기축(己丑 :서기809년). 즉(卽) 신라 40대 애장왕(哀莊王) 10년에 승상(丞相)이 되어 선고(先考)이신 승상(丞相)의 유지(遺志)에 따라 애장왕(哀莊王)을 극진(極盡)히 보필(輔弼)하였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우씨(禹氏)이다. 왕숙(王淑)인 김언승(金彦昇)이 애장왕(哀莊王) 10년 기축(己丑 : 서기 809년)에 반역(返逆)하여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하고 김언승(金彦昇)은 자립즉위(自立卽位)하여 신라 41대 헌덕왕(憲德王)이 되었다. 그러나 좌상(左相) 차승색(車承穡)은 왕(王)로 인정(認定)하지 않고 왕(王)을 시해(弑害)한 역적(逆賊)이며 친질(親姪)을 죽인 패륜아(悖倫兒)라 하며 헌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로 나라에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공(公)의 큰 아들 벼슬 신라 사공(司空) 차공숙(車恭叔)과 함께 동지(同志)들과 모의(謀議)하여 예양(豫讓)의 모략(謀略)을 본받아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이 수렵(狩獵)의 떠남을 엿보아 다리 밑에 복병(伏兵)한 궁수(弓手)로 시해(弑害)하고자 하였으나 이 계략(計略)을 아는 자가 헌덕왕(憲德王)에게 밀고(密告)함으로 이 계책(計策)이 누설(漏泄)되었다. 이에 헌덕왕(憲德王)이공(公)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여 나라에 체포령(逮捕令)을 내리고 병리(兵吏)를 풀어 찾으니 공(公)의 부자(父子)는 요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아들 김생(金生)인 생질(甥姪)의 집으로 둔적(遁迹)하여 피신(避身)하였다.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은 공(公)의 부자(父子)가 체포(逮捕)되지 못 함으로 이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여 현상(懸賞)으로 금(金) 천근(千斤)과 식읍만호(食邑萬戶)를 걸어 놓고 공(公)의 부자를 찾으니 공(公)의 생질(生姪) 김생(金生)은 현상금(懸賞金)을 탐하여 외숙부자(外叔父子)를 밀고(密告)하고자 하였다. 김생(金生)의 충복(忠僕)이김생(金生)의 계략(計略)을 미리 공(公)의 부자(父子)에게 알려 그날 밤 위험을 벗어나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아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으로 둔적(遁迹)하여서 조모(祖母)의 성(姓)인 양씨(楊氏)로 모칭(冒稱)하며 피신은거(避身隱居)하였다. 공(公)은 모성(冒姓) 양씨(楊氏)의 양자(楊字)를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가성(假姓)으로 류씨(柳氏)라 정(定)하고 이름은 잣나무 숲에 깊이 은신(隱身)한다는 뜻을 담아 백자(栢字)를 택(擇)하여 백(栢)으로 개명(改名). 가성명(假姓名) 류백(柳栢)으로 하여 유주(儒州) 고을에 부두가(富荳家)로 이름 난 집에 고용(雇傭) 살이로 피신(避身)하여 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하게 된 것이다. 신라 34대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 : 서기 918년)에 왕건(王建) 태조(太祖)께서 고려조(高麗朝)를 개국(開國)한 후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고려태조(高麗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본성차씨(本姓車氏)로 109년만에 복성(復姓)을 한 것이다.
* 차승색이⇨양승색으로⇨또 가성명 류백으로 되었다가 왕건 특명으로 본성 차씨로 109년만에 복성하였다. 유전의 법칙을 무시하고 붓끝에서 차씨와 류씨의 유전자가 뒤죽박죽 춤을 춤. 지구 상에 이와 같은 유전이 가능할까? 조작의 본보기이다.
34世 휘(諱) 공숙(恭叔)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司空)이시며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의 변난(變亂)에 아버지이신 신라좌상(左相) 차승색(車承穡)과 함께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한나라의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울 계략(計略)이 누설(漏泄)로 실패(失敗)하고 아버지와 함께 황해도(黃海道)로 둔적(遁迹)하여 아버지를 따라 본성명(本姓名)을 감추고 임시로 성명(姓名)을 류숙(柳淑)이라 하며 피신(避身)을 하게된 것이며, 공(公)의 친제(親弟)이신 차공도(車恭道)는 신라조(新羅朝)의 벼슬 사공(司空)이며 호(號) 미도(彌道)는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의 변난(變亂)에 강남(江南= 고려의 강남도(江南道 : 지금평양남도)를 말함)에 들어 가 피신(避身)하면서 구성왕씨(舊姓王氏)로 복성(復姓) 왕공도(王恭道)로 살게 되었으며 그의 증손(曾孫)이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고려개국(高麗開國)한 후 증조(曾祖)이신 왕공도(王恭道)님을 추숭칭호(追崇稱號) 고려국조(高麗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 하여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 : 서기918년)에왕건 태조(王建太祖)께서 고려조(高麗朝)를 개국(開國)한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고려태조의 특명(特命)으로 가성명(假姓名) 류숙(柳淑)은 본성(本性)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본성명(本姓名)을 복원(復元)하였다.
35 世 휘(諱) 진부(振阜) :
본성씨(本姓氏)를 감추고 가성명(假姓名) 류진부(柳振阜)로 세상(世上)을 속여 사는 처지(處地)라 은사(隱士)로 유주(儒州)에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3세(世)로 이어 받아서 성명(姓銘)을 류진부(柳振阜)로 세상(世上)을 등지고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조씨(趙氏)이며 생일남(生一男)하였으니 이름 무선(茂先)이시다. 서기918년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고려 태조(高麗太祖)께서 나라를 세운 후 특명(特名)으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케 하여 가성명(假姓名) 류진부(柳振阜)로 세상을 살아오신 분을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하게 되어 차진부(車振阜)로 성명(姓名)을 바로잡게 된 것이다.
36 世 휘(諱) 무선(茂先) :
공(公)은 해평산장(海平山長)이라 칭(稱)하며 가성류씨(假姓柳氏)를 4세(世)로 이어받아 성명(姓名)을 류무선(柳茂先)이라 하며 세상을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유씨(劉氏)이며 생일남(生一男)하였으니 이름 보림(普林)이시다. 그 후 서기 918년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나라를 세운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하여 가성명(假姓名) 류무선(柳茂先)으로 세상을 살아오신 분을 본성차씨 (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되어 차무선(車茂先)으로 성명(姓名)을 바로잡게 된 것이다.
37 世 휘(諱) 보림(普林) :
공(公)은 월흑산장(月黑山長)이라 칭(稱)하며 가성류씨(假姓柳氏)를 5세(世)로 이어받아 성명(姓名) 류보림(柳普林)으로 세상(世上)을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길씨(吉氏)이며 생일남(生一男)을하였으니 휘(諱)는 해(海)이시다. 서기 918년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나라를 세운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되어 차보림(車普林)으로 성명(姓名)을 바로 잡게 되었다.
38 世 휘(諱) 달(達) :
⑭묵방사기(墨坊寺記)에 말하기를 공(公)은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휘(諱)는 해(海)요 자(字)는 응통(應通) 호(號)는 아사(鵝沙)이며 배부인(配夫人)은 신라조(新羅朝)의 알지(閼智)의 후손(后孫) 김균(金稛>)의 딸이며 생이남(生二男)과 생일녀(生一女)를 하였으니 윤신달(尹莘達)에게 출가(出嫁)하였다.
공(公)의 5대조 맡아들 효전(孝全), 둘째 아들 효금(孝金)이며 딸은 고려조(高麗調)의 벼슬 삼중대광(三重大匡)이며 통합삼한.(統合三韓)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 이신 신라(新羅) 애장왕조(哀莊王朝)의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께서 신라 39대 애장왕(哀莊王) 10년 기축(己丑 : 서기809년)에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의 변난(變亂)에 헌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로 나라의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울 모의(謀議)가 누설(漏泄)되어 실패(失敗)하고 둔적(遁迹)하여 황해도(黃海道)구월산(九月山) 아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들어 가 조모(祖母)의 성(姓)을 딸아 모성양씨(冒姓楊氏)라 하며 은거(隱居)하였다.
그 후 양자(楊字)와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류씨(冒姓柳氏)로 6세를 전(傳)하여 공(公)에 까지 이어받게 된 것이다. 이때 공(公)은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이며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께서 남정(南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조선조(朝鮮朝)의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께서 조선 6대 단종왕(端宗王)의 어명(御命)을 받아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등 제현(諸賢)들과 함께 기술(記述)한『車雲巖先生雪寃記』의記錄에〔車達丁麗室輸勤之日孝全之於當王事靡盬之時輿興原賑陵定社之勞國以爲辦出車乘繼粮道運米征南特贈其父以車爲達世績之號〕라 하였다 이 문장(文章)의 뜻은『차달(車達)은 장정(壯丁)을 려실(麗室)에 날로 헌납(獻納) 도하여 도웁고. 효전(孝全)은 왕사(王事)이 어려움을 당(當)하였을 때 흥원(興原)에 많은 속곡(粟穀)을 진대(賑貸)하였고 현능(顯陵)과 정사(定社)에 공(功)을 세웠고 나라를 위(爲)하여 수레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싫어 남쪽 정벌(征伐)에 곡식의 운반(運搬)을 행하였더니 특별히 그의 아버지에 차씨(車氏)로서 세대(世代)를 이어라 달(達)로 이름을 하였다.』하였고,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나라를 세워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께서는 차달(車達)에게 대승(大丞)을 제수(除授)하시고 통합삼한(統合三韓)익찬벽상이등공신(翊贊壁上二等功臣)에 봉(封)하시고 특명(特命)의 말씀이『念昔車氏之弘烈旣不可忘也這間柳之冒稱又不可廢也』라. 이 문장(文章)의 뜻은〔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원래의 홍렬(弘烈)을 가히 잊을 수 없고. 근간(近間 =저간(這間))에 류씨(柳氏)로 모칭(冒稱=모성(冒姓))한 것을 또 그만두는 것도 옳지 않다. 고하시며 ⑮ 모성류씨(冒姓柳氏 =假姓柳氏)의 6세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하여 공(公)의 사성명(賜姓名)은 차달(車達)로 하시고 공(公)의 장자(長子)인 효전(孝全)은 조상(祖上)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케 하여 본성차씨(本姓車氏)를 계승(繼承)케 하시고 공(公)의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류씨(柳氏)로 사성(賜姓)하여 형제분(兄弟分)이 차류양성(車柳兩姓)으로 분성(分姓)하게된 것이다.
* 王建은 삼한통합 후 車達에게 大丞 제수 ⇨ 冒姓柳氏 假姓柳氏를⇨本姓車氏로 復元⇨車達로 賜姓名 하고⇨장자 孝全은 本姓車氏 계승⇨차자 孝金 류씨로 賜姓하니 車柳兩姓으로 分姓
* 차씨와 류씨의 유전자를 분성 조작하는 과정이 처절함. 이렇게 까지 하여 차씨와 류씨를 동원(同源)으로 조작하면 한미한 가문이 명문벌족으로 탈바꿈 할까?
* 이미 존재하는 문화류씨 시조 대승 류차달이 있는데 여안차씨 38세 달에게 대승을 제수 하였다 하니 이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38세 차달은 조작된 인물
글을 맺으며
차승색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柳*車 同源을 조작.
➤차승색(承穡) : 에 대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 질의하여 보았습니다.
제목 : 차승색에 대한 질의 회신(2008.11.27.)
① 귀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② 신라 애장왕과 현덕왕 시기 <삼국사기> 내용을 검토한 결과, 차승색이라는 인물은 찾 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어떤 벼슬을 했는지 등도 알 수가 없습니다.
③ 이상의 사실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끝
참고 논문(발췌) :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 가계(家系) 인물 관련 위조 자료와 위서를 중심으로
2007 이수건, 이수환 대구사학회
16세기 이래 士林世界는 지나친 慕華思想과 自國의 기존 史書 부정 태도로 인해「三國史記」「高麗史」「東國通鑑」등이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특히 鄭道傳 ·河崙鄭麟趾 등 조선왕조의 개국 세력과 世祖 공신들에 의해서 不事二君의 麗末守節者의 사적과 端宗 忠臣들에 대한 기사가 누락되거나 誣罔되었다고 간주하는 여론이 만연되어 갔다.
16세기 중엽「車原頫雪寃記」가 편찬, 유포되고 麗末의 金 澍의 節義 사실이 조작된다든지, 18세기 이래 英祖의 開城 행차와 함께 不朝峴 立碑와 杜門洞 七十二賢 문제가 대두된다든지, 또한 申賢 ·范世東의「華海師全」과「璜人物叢記와 같은 僞書들이 속출하는 것도 위와 같은 士林의 역사 의식속에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麗末의 守節人士에 관한 이야기를 기술한「金澍傳」과「車原頫,雪寃記」가 善山 지방을 중심으로 한 16세기 嶺南士林에 의해 널리 소개되고 읽혀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金宗直을 領袖로 한 嶺南士林派의 系譜는 麗末의 왕조 교체기에 不事二朝의 절의를 지켜 국초에는 재야 세력으로 밀려났던 사학파와 15세기 중엽 世祖의 왕위찬탈을 불의로 간주했던 낙향의 在地士族 또는 新進士類가 주축이 되었다. 金宗直 父子는 圃隱·冶隱의 學統을 직접 전승했을 뿐만 아니라 왕조교체기에 節義를 지켰던 인사들의 사적에 대해서도 父祖와 鄕老들로부터 익히 듣고 있었다.
金宗直은 뒷날 아버지의 권고로 世祖朝에출사했지만 그와 그 門人들은 일찍이 李孟專·元 昊·成聃壽 등 端宗을 위해 충절을 지키고 있던 절의파 名士들을 歷訪하면서 世祖의 찬탈 경위와 端宗의 죽음, 昭陵의 廢位에 대하여 전후 사정을 傳聞하게 되었다. 그는「弔義帝文」과「述酒詩幷序」를 지으면서 大義 名分을 강조하였다. 그의 역사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충절을 강조하는 史觀은그 제자 金馹孫 權五福 鄭汝昌 李 穆 등에 영향을 주어 世祖의 찬탈과정에서 저질러졌던 각종 宮中 비사와 世祖의 의롭지 못한 조치및 勳舊勢力들의 非理가 그들의 史草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러한 史草가 결국 戊午士禍를일으키게 하였다.
이러한 金馹孫 등의 史草들은 주인공의 죽음과 함께 소각 당했지만, 그 史草에 담긴 내용들은 中宗反正 후 편찬한「燕山君日記」에 실리는 한편, 戊午士林의 의식을 계승한 16세기 사림파에 의하여 野史로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
朝鮮王朝는 전기와 후기를 막론하고 역사가 편찬될 때 편찬 당시 어느 세력이 집권했느냐에 따라 내용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동서분당 이래 역대「실록」은 당시 집권당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史筆의 공정성 문제가 야기되어 정권이 교체될 때 수정 또는 개수하는 경우가 있게 되었다. 朝鮮前期도 二大 정치 세력인 勳舊派와 士林派가대치하였으니 역시 공정성이 문제되었다. 조선 건국 후 편찬에 착수한 고려사 착수한「高麗史」가 50여년이 지난 뒤에 刊頒 되었지만 그것을 보는 시각은 王朝 교체기에 執權士大夫냐 不事二君의 在野士大夫냐에 따라 다르며 世祖의 찬탈에 대한 시각도 훈구파와 사림파에 따라 판이하였다. 왕조 교체기와 世祖의 찬탈과정을 편찬한 주체는 훈구파이지만 16세기 중반이후부터 사림파가 대세를 주도하는 입장에 서게 되자, 훈구 세력에 의해 편찬되고 정리된 기존의 역사를 새로 인식하고 재평가하려는 데서 그 정도가 지나쳐 僞書와 조작된 사실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왕조교체기와 세조찬탈기도 시기상 약 60여년의 간격이 있지만 유교적인 의리명분론으로 두 시기를 대비해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前者는 儒佛 교체기로서 충절의식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는데 반해 後者는太宗·世宗·文宗朝의 崇儒主義와 忠孝·綱常의 관념의 심화로 인해 世祖의 찬탈을 쉽게 용인하려 하지 않은데서 生·死六臣과 같은 많은 충절인사가 나오게 되었다. 사림파의 이러한 역사의식은 마침내 麗末의 왕조교체기에도 世祖의 찬탈 때와 같이 불사이군의 충절인사가 수없이 많았을 것이라는 가정아래「車原頫L雪寃記」와 杜門洞 72현 문제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車原頫L雪寃記」에 의하면 車·柳 양 姓貫은 高麗 太祖의 功臣인 車達의 두 아들에서 갈린 같은 뿌리로 서 장자 孝全系가 車氏姓을, 차자 孝金系가 柳氏姓을 각각 취하였다. 그리고 車原頫의 선대세계가 箕子 시대까지 소급, 기재되어 있다. 이「車原頫雪寃記」는 편찬 내지 간행 반포된 뒤에 朝鮮 후기 각 문중들이 그 기재 내용을 당시의 역사사실로 확신하고 조상 유래와 족보편찬에 중요한 사실로 轉載, 인용한데서 한국의 姓貫의식과 족보 편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朝鮮 후기 조상들의 傳記·狀碣文작성과 족보편찬에 있어 온갖 조작과 협잡이 동원된 것도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車原頫雪寃記」와 관련 있는 것들이 많다.
이 책은 車 軾·車天輅·車雲輅 三父子 또는 그 3인 가운데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僞作이라고 하는 南克寬·黃胤錫 등 18세기의 일부 선각자의 지적과 같이 이 책은 단언하기 어려우나 그 三父子에 의해 조작된 僞書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 책에 대해 16세기 후반 이래 최근까지 극소수의 몇몇 학자에 에 의해 僞作이란 언급이 있었을 뿐 300여 년 동안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위서라는 판정을 내리지 못했다. 더구나 이 책이16세기말 이래 일부 嶺南士林에 의해 입수 읽히게 되면서 권문해에의 「大東韻府群玉」과 崔 晛의「文集」「一善志」, 權 鼈의「海東雜錄」, 金烋의「海東文獻總錄」(1637)등에 기재 유포되어 마침내 18세기 말 忠淸觀察使 朴宗岳의 序文과 吏曹判書 洪良浩의 跋文, 기타 당대의 名公碩學들의 追述書를 받아 활자본 또는 목판본으로 印頒되면서 관련 諸姓貫의 족보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고, 文化柳氏 쪽에서도 車柳同祖論에 서서 車柳大同譜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여기에서「車原頫雪寃記」의 위작 동기와 위작시기, 위작자, 위작 경위 및 유포 과정에 대하여 간단히 논술해 보기로 한다.
첫째, 僞作者와 僞作時期 : 이 책 書名과그 내용 일부가 기재된 최초의 圖書가 宣祖22년(1589)에 편찬된「大東韻府群玉」이라는 데서 16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南克寬.黃胤錫 등에 의해 著者들로 추정되는 車軾·車天輅·車雲輅 三父子의 활동시기가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기까지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16세기 후반 車氏 三父子에 의해 僞作되었다고 짐작된다.
둘째, 僞作 동기와 내용 : 자신들의 寒微한 家系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상 심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宣祖實錄」등에 나타나는 車氏 三父子의 사람됨과 행적을 추적해 보면 三父子가 모두 文才는 탁월하여詩書 文章으로 一代를 風靡할 수 있었지만 名祖가 없고 家系가 寒微하여 士大夫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車天輅 형제는 이른바 才勝德薄하여 경박한 언행이 많았고 특히 車天輅는 擧子의 試券을 借述해주고 壯元及第 했다가 탄로되어 그 擧子는 削科를 당하고 자신은 원지에 流配를간 적이 있다. 그런데 壬辰倭亂을 당해 對明外交에서 막중한 외교문서 처리와 관련하여 車天輅와 같은 인재가 필요하여 다시 등용했으나 高官要職은 끝내 맡지 못하였다. 이러한 車天輅의 사람됨과 문장력을 미루어 보아車氏 三父子 가운데 그가 主役을 맡아 僞作했다고 짐작된다. 僞作된 내용을 추론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車柳同祖論에 입각해서 車氏의 선대세계를 정리함에 있어 文化柳氏가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에 걸친 大閥族이라는 점에서그 시조격인 柳車達의「車」자와 車氏와의관계를 설정해놓고, 13~14세기「高麗史」에 등장하는 車姓人物을 시대순으로 적당히 系譜化하고 13세기 이전의 선대세계는 현존 高麗史에는 없으므로 이를 보충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徐 熙의「撰集餘史」, 鄭知常의「西京野史」, 金方慶의「草堂日記」라는 허구된 僞書를 거론하였다.
②車原頫=의 선대 가계를 고려후기 200여 년 동안 고관에다 당대 명공 거족의 사위였다는 것으로 위조하였는데 이것은 완전히 조작 된 것이다.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위조해도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③車原頫일가에 대한 加害者로서 이른 바車門의 外裔四孼로 鄭道傳. 趙英珪. 咸傅霖 .河 崙을 거명한 것은 高麗史에 기재되어 있는 鄭道傳의 外家賤系와 그것으로 인한 鄭道傳의 禹玄寶 가문 모함사건에 示唆를 받아 그와 비슷한 내용으로 사건을 조작한 것 같다. 가해자로 거론한 四人의 후예는 16세기에 와서는 세대가 단절되었거나 미약해서 그러한 사실이 세상에 공개되더라도 대응하지 못할 것을 예측했던 것이다. 또 이 책의 서문과 기문 찬자를 비롯한 편찬을 주관한 인로 朴彭年 成三問 河緯地 등을 제시한 것은 이 책이 편찬된 직후 이들이 모두 端宗復位事件으로 處刑됨으로써 이 책이 세상에 공개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④이른바 車門의 外裔四孼 문제는, 麗末鮮初의 權門勢族 가운데는 내외 조상의 世系에 庶孼로 간주되는 인물이 많았다는 사실을 看破하고 16세기 중엽 이후의 시대적 관념으로 麗末鮮初를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내용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太宗 13년(1413) 妻妾分揀과 庶孼差待法이 제정되기 전까지의 고려 후기 내지 선초에는 庶孼의 혐의를 받는 자가 많았다. 黃 喜의 母系를 비롯한 名公巨族에도 賤系가 섞여 있었다.
⑤車原頫일가가 죽음을 당할 때 가해자들이 庶孼系란 사실이 기재된 車柳同譜가 海州神光寺에서 소각되고 말았다는 내용도 韓國族譜史에서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최초의 編刊族譜가「安東權氏成化譜」(1476) 이므로 그보다 70년 전 인 太祖 7년에 車柳族譜가 판각될 리 없으며 또 車氏와 柳氏가 同祖(同源)라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셋째, 僞作 및 流布 경위 : 이「雪冤記」소재 車原頫의 先代世系와 車原頫 被殺 경위가 光海君 초 찬술된 車 軾의「神道碑銘幷序에 전재되어 있다. 이는 車天輅 형제가 先考의 碑文을 柳夢寅에게 청탁할 때 家狀 또는 行狀을 제시하였고 柳夢寅은 天輅 형제가 제시해준 家狀 또는 行狀을 참고하고 요약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이 책은 편찬체제 내용서술 등장인물들의 행적이나 序 記文, 48인의 應製詩 등 어느 것을 막론하고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최근까지 이 책을 僞書로 단정하지 못한 것은 朝鮮시대 儒學者들이 문헌 고증의식이 결여 되어 있는 반면 先賢先祖들의 의리와 충절에 대해서 무조건 찬양 일변도였기 때문이다.
의리와 명분을 강조했던 性理學의 보급과 士林 세력의 성장에 따라 麗末의 守節人士와 端宗 忠臣들이 16세기 이래 후대로 내려올수록 崇仰되고 반대로 鄭道傳 權 近 등 開國派와 鄭麟趾 申叔舟 등 勳舊派는 貶論되어 갔다. 이러한 양대 세력에 대한 褒貶은 곧 자료상에도 그대로 나타나게 되었다.
17세기를 기준, 그 이전과 이후는 유교의식. 국가, 사회적 법제와 관습 및 사림 세력의 消長 등 사회적 기반과 의례·의식이 현저히 相異하였다. 朝鮮 전기 실록 및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고문서. 일기. 문집 초본과 17세기 이후에 발간된 문집. 傳記 狀碣文을 서로 대비시켜 보면 자료의 연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여말의 守節人士와 世祖 簒奪 때 생존했던 인사 및 역대 士禍에 희생된 인사들의 文集 傳記 狀碣文이 17세기 이후에 편간되거나 찬술 될 때 15·16세기의 시대상이나 의식보다는 당시의 분위기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점을 염두에 두고 관련 자료를 비판해야 한다.
➧[차원부설원기}가 위서라고 지적한 조선의 학자들
① 이선 (1632~16920) 설원기 위작자는 차천로 부자형제(차식 차운로 차천로)라 함
② 남극관(南克寬 !689~1714)의 몽에집{夢囈集} 잡저(雜著)편에 [설원기]가 비루하고 교만하하여 위작되 었다고 판단
③ 이익(李瀷 1681~1783)은 [설원기]속 내용을 의심하면서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간하기 모호하다고 함
④ 홍계희(洪啓禧 1703~1771) 하위지 유고집을 간행하면서 [설원기(雪寃記)]가 위직임을 언급하고 싣지 않았다.
⑤ 윤광소(尹光紹 1708~1786)는 선조인 윤중의 문집에 실린 [설원기]의 내용은 위작이라고 자기 문집에 싣지않았다.
⑥ 황윤석(1729~1701) 차원부설원기는 위조작품이라 함
⑦ 하진현(河晉賢) 1776-1846 설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밝힘
[설원기]가 위서임을 지적하는 2000년대 학자들
⑧ 류주환 : 차원부설원기 비평 외 다수 저서 : 대호하루(大虎下淚) 위서(僞書)와 가문사(家門史)
(490페이지 충남대학교교수 태극출판사 300-160 대전광역시 동구 중동 8-2
(042)-256-8806 FAX (042-223-8806 2012년
⑨ 이수건교수 논문 :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 : 가계(家系) 인물 관련 위조 자료와 위서를 중심 으로
2007 이수건, 이수환 대구사학회
⑩ 김난옥 학술논문 : "여말선초 정치변동과 배타적 가문의식(家門意識) - 정도전을 중심으로“ 2007
⑪ 박은정 학술논문 : 차원부설원기 이본의 유통과 그 배경, 서울대학교. 2010.
➤ 제언
1. 개성왕씨 * 연안차씨 *문화류씨의 황제연원설과 류차동원설을 유전적 측면에서 탐색한 결과 이는 생물학적 유전 법칙을 무시한 조작으로 결론합니다. 따라서 이는 무조건 파기되어야 합니다.
2. 모화사상,중화사상,사대사상이 팽배한 1580년 대에 위서된 개성왕씨 *연안차씨*문화류씨는 중국 황제가 연원이다, 문화류씨와 안안차씨는 동원(同源)이라는 차식 차천로 차운로에 의해 위서 된 [차원부설원기]를 문화류씨 선조들은 철저한 고증과 검증 없이 1689년 문화류씨 기사보에 등재하여 소위 류*차문제를 400여 년간 이어 오다가 2008년 문화류씨 대종회에서는 “源派錄削除의 辯”을 천명하여 위서 [차원부설원기]를 배척하였으나 연안차씨 가문에서는 “거짓은 거짓을 낳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3. 문화류씨 시조 대승 류차달은 어디로 갔을까요?
첫댓글 위글을 유주춘추에 기고하여 여러사람에게 알렸으면 합니다.
조선시대 최대의 문사(글쟁이) 차천로는 "묵방사기"와 "차원부설원기"라는 소설을 쓰고
동 시대의 문사(글쟁이) 허 균은 사회의 변화를 갈구하는 "홍길동전" 소설을 썼으니
하나는 가문을 돋보이도록 허구의 소설, 하나는 사회변혁을 위한 소설
허구의 소설을 근거삼아 유전자검사로 차씨와의 동조여부를 따져볼 가치도 없는일이군요
자세한 설명을 위해 긴 문자이었다 생각되지만 수고스럽겠지만 요약 정리하여
누구나가 쉽게 한눈에 알아보고 접할 수 있게 하였으면 하는 생가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