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불교신문 테마연재코너 김원숙의 불교와 미학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0580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 1912년 / <자전거바퀴>, 1913년 / <샘>, 1917년
단순한 사물로 볼 때는 설명이 전혀 필요치 않은 물건이지만, 이것을 하나의 미술품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소 난해한 작품이 있다. 프랑스 태생의 작가 마르셀 뒤샹(Henri-Robert-Marcel Duchamp, 1887-1968)의 <샘 Fountain, 1917>이다. 남성용 소변기를 방향만 바꾸어 전시해 놓고 그 테두리에 R.Mutt라는 알 수 없는 이름이 서명되어 있다. 사실 Mutt는 그 당시 위생 설비 제조업체였던 'Mott Iron Work'라는 회사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뒤샹은 원래 이 이름을 생각했다가 사람들에게 보다 친숙했던 그 당시 미국의 신문 만화 "머트와 제프 Mutt and Jeff에서 착안하여 R.Mutt로 바꾸었다고 한다.
'레디메이드 (ready-made)'로 흔히 불리우는 이러한 형태의 작업은 간단히 말하자면, 실제적 사용을 위해서 대량 생산된 기성품 같은 것들을 조형예술 작품으로 그 의미를 전환하여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을 말한다. 미술사에서는 마르셀 뒤샹이 처음 시도한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용도를 쉽게 알 수 있는 기성품은 그 특정한 의미가 대상에 매우 견고하게 밀착되어 있다. 가령, 자전거 바퀴는 둥글고 튼튼해서 탈 것의 용도로 적합하게 되어 있는 그 어떤 실용적인 물건이며, 가지가 비쭉비쭉하게 사방으로 뻗은 나무처럼 생긴 와인병 걸이 역시 병들을 걸어두는 용도일 뿐, 일상에서 그 이외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레디메이드 예술은 대량 생산된 기성품들의 원래적 의미를 떼내고 해체하여, 어떤 다른 상황 속에 배치함으로써 그 대상, 즉 오브제가 가진 조형적 아름다움을 통해 감상자들에게 일종의 예술적 체험을 환기한다.
자전거 바퀴를 떼내어 전시장에 걸어 두면 작품이 되고, 주방 소품을 전시장에 가져다 놓아도 작품이고, 변기가 전시장에 놓이면 역시 예술작품이 된다. 이것이 과연 타당한가?
뒤샹이 남긴 그림들을 보면, 마치 근,현대 미술사의 포트폴리오와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가 15세 때 그린 풍경화는 전형적인 인상파 그림처럼 보이며, 20대 초반에 그린 <체스 게임>에서는 조르주 루오와 같은 야수파의 면모를 연상케 한다. 이후에 그가 그린 그림들에서는 상징주의, 표현주의, 입체파 등 그 당시 미술이 모색했던 여러 유형의 양식들이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뒤샹은 어느 날 문득 구름을 헤치고 하늘에서 강림한 미술사의 대 천재라기보다는, 현대 미술의 토양에서 싹을 틔우고 빗줄기와 햇빛을 받으며 자라나, 끊임 없이 새로운 예술정신을 추구했던 개척자이다.
"나는 울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죠. 마르셀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흔들의자에 앉아 시가를 피우고 있었어요. 그는 나한테 왜 울고 있느냐고 말했고, 나는 무언가를 말했죠. 그는 앉아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 자체로부터 나는 좀더 평정함을 느끼게 되었어요 ... 마치 그는 커다란 재난에 직면해서도 그와 같은 고요함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전통적 조형예술은 자연을 모방하고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재현된 자연에 의미가 부여된다. 그러나 뒤샹은 이 모든 것을 뒤집어버렸다. “예술품이란 색을 칠하고 구성 할 수도 있지만 단지 선택만 할 수도 있다.”뒤샹은 기성품에 부여된 일상적 의미를 떼어내고 해방시킨다. 의미와 분리되어 아무런 설명도 없이, 혹은 원래의 용도와는 전혀 상관 없는 작품 제목과 더불어 미술관 전시 공간을 차지하며 감상자의 눈 앞에 놓여진 오브제. 이제 작가의 생각, 의도, 개념 그 자체가 예술이 된다.
고정된 용도에서 해방된 오브제의 의미적 빈 공간을 채우는 일은 이제 작가의 손을 떠나
감상자, 미술비평가 및 그들을 포함한 사회의 미적 창의성으로 인도된다.
뒤샹의 작업은 푸른 도화선 속으로 불꽃을 몰아가는 힘마냥, 현대의 여러 미술 사조들을 고무했고, 평론의 영역에서도 수많은 담론을 낳았다. 이후의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그리고 조지 디키(George Dickie)와 같은 평론가, 아서 단토(Arthur C. Danto)와 같은 미학자들의 이론과 관점 역시, 뒤샹이 제시한 의미의 공허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주요 흐름을 제시한 이가 마르셀 뒤샹이다. 뒤샹은 ‘레디 메이드’를 가지고 예술의 가치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며 나섰다. 그의 반미학적 전략은 일상과 예술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예술 개념의
외연을 확대시켰고, 예술에 대한 정의 가능성에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근래 학계에서는 기존의 예술개념이 동시대미술의 다양성을 포용하기에는 이미 한계상황이므로 ‘시각문화(visual culture)’라는 용어로 대체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뒤샹의 <샘>은 그가 내세운 전략과는 유리된 채 여전히 시각적 아름다움과 미적 내용을 담고 있는 구체적인 대상물인 예술작품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미술관에 소장되고 전시 중이다. “내가 레디메이드를 발견했을 때 나는 쓸모 없는 미학자들을 낙담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네오다다는 거기서 미적 가치를 찾으려 하고 있다. 나는 미학자들의
얼굴에 하나의 도전으로 변기를 던졌는데 지금은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샘>은 스티글리츠 사진으로만 전해지고, 현재는 1964년 슈바르츠(Arturo Schwarz)에 의해 8개 한정판으로 주문 제작된 것이 남아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조사(달마)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여쭈었다.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라고 짧게 대답했다. 뒤샹의 예술적 전략은 해소(解消), 실제를 드러내기 위한 은유(隱喩) 그리고 의도적 무의미라고 하는 선문답의 알고리즘과 유사하다. 뒤샹이
제시한 오브제, <샘>은 어쩌면 무심히 뜰 앞에
서 있는 잣나무와 같을지도 모른다. 조주 선사의 잣나무와 마찬가지로 뒤샹의 <샘>은 실체에 대한 가리킴(point at)이며, 본질의 드러남을 추구한다.
눈 앞의 대상에 전적으로 시선을 집중하는 일은 소란한 삶 속에서 맞이하는 단순하고 순수한 알아차림의 순간이 된다. <샘>은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관념, 예술의 창작과 향수에 고착된 기존의 타성을 버리고 우리의 눈 앞에 현존하는 대상을 조용히 관조하라 일깨우는 것 같다. 어쩌면 뒤샹 이후 현대예술이 추구한 한가지 방향은 일체의 관습을 배제하고 실상을 꿰뚫어보는 시선에 대한 심원한 여정이다. 이뭐꼬! What is This!
마음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며,
선악을 초월하여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
염무적지 부절무변 念無適止 不絶無邊
복능알악 각자위현 福能遏惡 覺者爲賢
『법구경 法句經』 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미재 부처님 아미타불 _()_
" 이뭐꼬! What is This! " ? ? ?
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미재님의 글 열심히 정독하며 배우며 공부합니다.
뒤샹이 '현대미술에 던진 화두'를 저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삶의 본질을요.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선입관과 기억에 의해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질타해 주는군요.
뒤샹의 노력이 닦는 이들에게도 절실함을 느낍니다.
좋은 글 감사히 읽습니다.
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