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럭키와 베토벤이 사라진 권총의 바닷가(작가마을)
송진
부산에서 태어나 1999년 《다층》 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옥에 다녀오다』, 『나만 몰랐나봐』, 『시체분류법』, 『미장센』, 『복숭앗빛 복숭아』, 『방금 육체를 마친 얼굴처럼』, 『플로킹』이 있으며 《엄블렐라》 발행인 겸 주간이다.
송진의 시에는 늘 어떤 불안이 응축된 상태로 내재 되어 있다. 불안에는 복잡한 여러 원인들이 있겠으나, 궁극적으로 인간의 신체를 잠식하는 불안은 죽음의 불안이다. 동물의 불안 또한 죽음에 근거하기는 마찬가지다. 포식자에 대한 불수의적 불안은 곧 죽음에 대한 불안이기도 하다. 비약하자면, 생명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명 자체가 ‘불안’ 덩어리다.
왜 그런가. 자연계는 엔트로피의 법칙(열역학 제2법칙)을 따른다. 무질서도인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우주의 모든 물질들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열역학적 평형 상태에 다다르게 된다.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연계에서 질서도(음의 엔트로피)가 투여된 어떤 사물도 영원히 존속할 수 없다. 모든 것은 해체되어 흩어진다. 그것은 흘러가는 것이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알 수 없는 방향으로”(「참회록 4」) 그러나 생명체는 독특하게도 자연계로부터 질서도(음의 엔트로피)를 흡수하여 엔트로피의 증가에 저항한다.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자연계와 엔트로피의 증가에 저항하는 생명체 사이에는 엄연히 대립적 부조화에 기인하는 모종의 긴장이 존재한다. 상상해보라. 자연계를 지배하는 엔트로피의 증가라는 절대적인 법칙 속에서 가까스로 질서도를 유지하는 생명체의 불안을. 자연계의 엔트로피 증가에 반하는 생명체의 엔트로피 감소 작용은 생명체 내부에 불안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도래하지 않은 미정형未定形 상태로 신체 내부에 잠재된 가능성이다. 그것은 관념에 가깝다. 죽음의 가능성은 공포가 아니라 불안을 유발한다. 불안은 공포와 달리 구체적 대상을 갖지 않는다. 구체적 대상이 없으므로 불안은 전방위적이다. 그리고 불안은 구체적 표상 이미지와 무관하게 작동한다는 점에서 라깡의 말처럼 정동affect에 해당한다. 프로이트가 먼저 갈파했듯, 정동은 표상에서 분리된 본능이다. 즉, 정동은 구체적 표상 이미지를 갖지 않는다. 불안은 구체적 표상 이미지를 갖지 않으므로 정동의 형태로 신체를 지배한다. 따라서 송진의 시에서 불안은 구체적 이미지를 갖지 않는 유령으로 출현하기도 한다.
희멀건 유령들이 기어 나온다 스물스물 공구를 손에 들고 가벼운 유령은 가벼운 공구 무거운 유령은 무거운 공구 유령도 무게가 있다고? 누가 묻는다면 단호하게 있다라고 말한다 그동안 진실을 말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니 좀 단호하게 말해도 괜찮다 유령의 눈동자는 아침이슬처럼 빛난다 내 정수리를 적당한 공구로 내리치기 위해 달콤한 언어를 구사한다 유령이 말을 한다고? 듣도 보도 못한 소리를 한다고 베프는 나를 창밖으로 내던졌다 유령들이 안타까운 듯 발을 구른다 이 골목은 유령접목지대 저 골목은 안구교환지대 지폐만으로 살 수 없다 지폐만으로 살 수 있다 유령들은 손에 꽹과리와 삽을 들고 편이 갈린다 밤의 아우라는 깊어간다 아우는 아우를 데리고 아우를 만나러간다 철물 공구점에서 버찌의 간을 파먹는 여우의 희디 흰 목덜미가 오월의 동백으로 물들어있다
-「잔느의 생활 8 -밤의 검은 맥주 」 전문
시인의 무의식은 유령들로 가득하다. 이 시에서 유령은 곧바로 죽음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유령들은 시인 스스로도 그 정체를 알지 못하며, 그에 따라 모종의 불안에 연루된다. 유령처럼 떠도는 불안이 시인의 내면을 장악하고 있을 뿐이다. 구체적 사건의 표상 이미지를 잃어버린 감정을 프로이트는 정동affect이라 부른다. 구체적 사건의 표상 이미지를 망각할지라도 그것에 수반하는 감정은 신체 내부 깊숙이 각인된다. 시시때때로 불현듯이 구체적 사건 없이도 신체를 장악하는 감정이 정동이다. 정동은 신체와 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용하는 신체의 감각이며, 시인의 의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의 정동은 유령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 유령들은 시인의 신체에 다양한 동통疼痛을 야기한다.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동통을 말이다. “희멀건 유령들이 기어 나온다 스물스물 공구를 손에 들고 가벼운 유령은 가벼운 공구 무거운 유령은 무거운 공구 유령도 무게가 있다고? 누가 묻는다면 단호하게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시인은 유령들과 함께 숨을 쉰다. 게다가 유령들은 가볍거나 무거운 공구를 손에 쥐고 있다. 공구는 폭력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공구의 용도는 시인의 “정수리”를 “내리치기 위한” 것이다. 시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건 유령만이 아니다. 유령에 대하여 “듣도 보도 못한 소리를 한다고” ‘베프’조차도 시인인 ‘나’를 “창밖으로 내던”진다. 모든 것이 유령 때문이다. 유령들로 인하여 시인의 신체는 훼손당한다.
-박대현(문학평론가), 시집해설 「참회록과 마조히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