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1968년 하랄 왕세자와 평민출신 소냐와의 결혼식이 열렸다고 한다
중앙제단은 최후의 만찬을 조각해 놓았으며 그 위에 예수의 고난
상이 있었고 비켈란이 만든 스테인 그라스의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18세기에 만든 6000어개의 파이프와14단계의 음계를 갖춘 파이프
올겐이 유명하다고 한다
음향 시스템이 좋아 매년 교회 음악의 경연대회가 이 성당에서 열린다고 한다
성당의 외벽에는 노르웨이의 신화인 뱀의 보호를 받고 있는 노르웨이의
신화 조각품으로 유명한 "악마 오브 오슬로 (Oslo of Devlo)"는 오슬로 대성당
외곽 마케트 스퀘어 (Maket Square)를 마주하고 있었다
대 성당의 정원에는 코펜하겐에서 태어 나 오슬로에서 사망한 노르웨이 성직자이자
작가인 빌헬름 안드레아스 벡셀스(Wilhelm Andreas Wexels)의 동상이 있었다
시티 버스를 타고 우리 구세주 공동묘지(The Graveyard of our savior)를 찾아갔다
1808년 대 기근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과 연이어 창궐한 콜레라
등으로 희생된 시민을 위하여 건립하기 시작하였으며 1911년에는 확장공사를
하였으나 지금은 빈자리가 없다고 한다
묘지는 노르웨이의 명사들이 잠들어 있어 우린 그들의 숨결을 느껴
보고져 시간을 내어 묘지를 찾았다
노르웨이의 국민 작가 헨리크 입센, 절규로 유명한 국민 화가 뭉크 ,
유명 작곡가 올레 올센등이 영민하고 있으며 이곳 정교회 교회가 이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Oslo의 명예 매장지에서 화가 Hans Gude (1825-1903)와 가족의 무덤. 형제인
Ove Gude(185v3~1910)와 Nils Gude (1859~1908)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
화가 한스 구데는 우리가 국립 미술관에서 보았든 노르웨이의 산수화가 놀르웨이의
피요르드를 그린 화가이다
국민화가 뭉크의 묘도 별도 지역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입센의 묘를 찾는 데는 한 시간이 걸렸다 도면에 위치가 나와 있으나 도면대로
찾아가면 보이자 않아 묘지를 두 비퀴나 돌아도 찾지 못하다가 망치가 그려져
있어 어느 노동 운동가의 무덤인 줄 알고 그냥 지나쳤으나 가까이 가서보니
입센이라고 반석위에 새겨져 있었다
요한 할보르그 (1864~1935)는 그리스티아나아 국립극장의 지휘자로 30여년간
있으면서 30개의 오페라와 무대음악을 작곡하였고 노르웨이 광시곡을
비롯하여 그리그의 피아노곡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하였으며 그 중하나를
그리그의 장례식때 연주하였다고 한다
헨델의 바이올린과 첼로 2중주곡을 편곡하여 <파사칼리아>를 작곡하였다
Frk. Anne Halvorsen |
26.11.1875 - 20.12.1966 |
|
Graves of Hals family,
Karl Marius Anton Johan Hals (1822년~1898년)는 피아노 제조업체 인
Brødrene Hals를 공동 창립 한 노르웨이어 사업가입니다
노르웨이 의회의 의원으로도 봉사했다고 한다 .
Graves of Hals, Karl Hals, Olav Hals 딸 Tanny, Thor Hals등이 안장되어 있다
올레 올슨은 작곡가이자 트롬본 연주자이며 군대 음악의 대가이다
올레 올슨은 그리그보다는 한 세대 후의 인물로 그리그와 스벤센처럼 상쾌하고
정감넘치는 작품이 인상적인 작곡가이다.
'아스가르트의 비행'은 북유럽 신화의 거인 족들을 묘사한 작품으로 무시무시한
박력이 느껴지는 관현악곡이며 '트럼본의 마술사' 린드버그가 독주자로 참여한
트럼본 협주곡은 올레 올슨의 초기작인 교향곡 1번등을 수록하고 있다.
Johan Sverdrup (1816 – 11892)은 노르웨이 초대 국무총리이다
1884년부터 1889년까지 집무하면서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시킨 정치가이다
정말 구세주 묘역에는 노르웨이를 빛낸 모든 사람들의 사후 요람이었으며
이곳을 찾아 꽃다발을 바치는 순수한 마음은 그들이 존재함으로 우리들의 삶이
풍요로워 진것에 대한 무한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립묘지도 이렇게 성역화 하여 우리나라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만들어 대중 앞에 나서야 된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이었다
우린 디시 시내로 돌아와 나머지 관광을 시작하였다
노르웨이 왕궁을 바라보고 있는 노르웨이 문학의 아버지 입센 박물관
(Henrik Ibsen's Home)을 찾아 갔다
헨릭 입센 (Henrik Ibsen1828~1906)은 노르웨이 극작가이자 시인이며 근대 연극의
창시자였으며 William Shakespeare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극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1895년부터 그가 죽을 때(1906년)까지 아내 Suzannah와 함께 살아오면서 마지막
두편의 희곡(John Gabriel Borkman과 When We Dead Awaken)을 쓴 장소이다
가구들은 실제 사용했든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창문을 통하여 왕궁의 정원을
비라볼 수 도 있었고 특히 입센은 왕궁의 정원을 드나들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입센은 순수하고 나서기를 싫어해서 당대의 문학가 비에른슨(Bjernson)에 밀려서
두각을 나태내지 못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입센의 예술 세게를 인정하고
국민 극작가로 대우 하였으며 아들은 노르웨이의 총리를 지냈으며 딸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까지 올랐다고 한다
간이 사재와 간이 침대
입샌 박물관을 나오니 날씨가 너무 좋았으며 광장에는 익살스런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누구인지 가까이 가서 보니 이 나라의 초대 왕인 호콘 7세 동상을
익살스럽게 만들어 세워 놓았다
호콘 7세(1872~1957)는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8세의 차남으로 스웨덴 노르웨이
동맹이 해체된 후 1905년 노르웨이가 독립되면서 국민 투표에 의하여 압도적으로
왕위를 물러 받았다 본명은 Christian Fredrik Carl Georg Valdemar Axel이다
민주주의 수호자인 그는 세계 1,2대전시 독일에 대항하도록 의식을 고취시켜
독립을 쟁취한 그는 1957년 죽을 때까지 국민의 높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서구 문명에는 어딜가나 유명인들의 동상이 세워져있어 그들의 인생을 음미해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있는 동상마저 없애 버리는 문화가 아쉽기는 하였다
우린 간단한 점심을 먹고 바이킹 박물관을 보기 위하여 Ferry를 타고 비그되이
(Bygdey)지구로 갔다 이곳은 박물관들이 모여있고 조용한 주택가로 아름다운
집들이 많이 있었다
교수로 활동했던 가브리엘 아돌프 구스타프손(Gabriel Adolf Gustafson1853~1915)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발견된 세 척의 바이킹 배를 보관할 새로운 공간을 만들 것을
제안하여 1926년부터 오슬로 대학의 주도 아래 바이킹 박물관을 만들었다
오세베르그(Oseberg), 고크스타(Gokstad), 투네(Tune) 등 3척의 배와 그 안에서
발견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당시 바이킹들은 지도자 등의 장례를 치를 때
배도 함께 바다에 수장시키는 풍습이 있었는데 세 척 모두 장례를 위해
사용된 선박이었다.
오세베르그(Oseberg)는 1904년 출토 843년경 제작으로 추정되며 여왕
전용선으로 이용됐던 배로 여왕의 장식품 등 다양한 유품들이 함께 발견되었으며
보존상태가 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한다
3척의 배 이름은 출토된 지방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오세베르그는 바이킹 선박 중 세계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다고 히며
고크스타(Gokstad)는 1880년 출토 890년경 제작으로 추정되며 32인승 배로
돛과 노 등 장식품도 함게 출토되었으며 투네(Tune)는 1867년 출토 900년경
제작된것으로 추정하나 부패가 심해 배의 밑바닥 부분만 남아 있었다.
정원 뜰에는 고고학자 안네 스티네(Anne Stine)와 부인 헬게 잉스타(Helge Ingstad)
동상이 있는데 그 아래에는 ‘이들은 바이킹의 아메리카를 발견 했다’라고 세겨져
있다 이들 부부가 1960년 카나다의 동북부 뉴파운드랜드 북단에서 11세기 바이킹
촌락 유적지를 발견해 냄으로써 바이킹이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전에 신대륙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을 밟혔다고 한다
이곳에는 민속 박물관,해양박물관,프람 박물관등 몇 개의 박물관이 있는데 우린 조금
피곤하고 장거리 여행의 시초라 체력을 축척하기 위하여 오슬로 시내로 돌아 와
아케르 후스 성을 보고 오슬로 관광을 마치기로 했다
바이킹의 전성기였든 1050년경 하랄 하르드로데 왕이 바닷가에
아케르 후스 성을 만들었으며 그 후 1300년경 하콘 5세 때에는
성에 단단한 요세를 만들어 이케르 후스성을 완성했다
1624년 요새에 화재가 발생하자 크리스티아니아 4세는 요새를
르네상스식으로 재건하면서 요새 서쪽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크리스티아니아라고 불렀다
19세기에는 주위의 군주들을 흡수하여 도시가 크게 발전하자
1925년에는 오슬로라 이름을 고쳐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성은 외부의 침입이 불가하여 한번도 함락 당한 적이 없으나
2차 대전시 독일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한 사실이 있으며 전쟁이 끝난 뒤 전쟁 범죄를 저질러
사형을 언도받은 노르웨이의 매국노 8명을 이곳에서 처형하였다.
나치 통치 시 나치에 협조하여 노르웨이에 괴뢰정부를 수립했던
노르웨이 장교 비드쿤 크비슬링(Vidkun Quisling)도 함께 처형되었으며
그의 이름에서 유래해서 ‘quisling’은 배반자 매국노의 의미를 갖는
다고 한다
성은 바닷가 암벽에 세워졌기 때문에 견고하고 튼튼하였으며
항구를 바라보는 경치도 아름다워 크리스티아니아는 이 요세를
왕궁으로 사용헀으며 시신도 부인과 함께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은 해군 사령부와 무기고와 레지스탕스박물관 성당등이 있었다
우린 성을 내려 오다가 미국대통령 프랭크린 루즈벨트 석상이 안치되어 있는
석상을 보았다
석상의 유래를 물어보니 1945년 얄타회담에서 독일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독립국가로 인정해 준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의 고마움을 잊지 않키
위해 아케르스 후스 성의 입구에 석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린 시청 쪽으로 내랴와 카롤 요한거리를 걸어면서 호텔로 가기로 하였다
시청 뒷편 광장에는 부두와 맞닿아 있고 분수대에는 어머니가 두 자식을
돌보고 있는 동상이 세겨져 있다
시청 주변의 동상들은 모두 인간에 대한 동상이 었다
노동자 동상, 사무원 동상,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상이 있어 시청의
공무원들은 인간 중심 사회임을 잊지 말라고 충고해 주는 것 같았다
거리를 걷다가 우린 피곤하여 한적한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1816년 건립된 노르웨이의 중앙 은행격인 Norges Bank가 눈앞에 있었다
한참 벤치에서 앉아 피로를 풀고 있는데 퇴근시간쯤 된 시각인지 자전거
거치대의 자전거가 점점 많이 지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퇴근하면서 직장에서 자전거를 타고와 이곳에 자전거를
보관하고 P의 주차장으로 내려 가 자기 차를 타고 지하 거리를 통해
자기 집까지 타고 간다고 한다
오슬로 구도심은 특별한 이유 없이는 차를 가지고 들어 올 수 없고
지하 차도를 타고 시내를 빠져나간다고 한다
20여분을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벤치에서 쉬고 보니 Norges Bank
맞은편에 Johannes Brun(1832~1890)의 동상이 있었다
요하네스 버룬은 19세기 노르웨이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 배우였으며
많은 돈을 벌어 후배 양성에 기여한 점도 크게 평가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 뒤에는 1857년 문을 연 맛집 ‘잉게브라트’가 있었다
노르웨이 최초의 미셀링 스타를 받은 식당으로 역사와 전통의 식당답게
19세기 그 시대 노르웨이의 문학인들이 드나 들던 곳으로 1849년 베르겐
극장을 오픈한 음악가 올레 불(Ole Bull)은 물론 그의 제정지원을
받았든 연극인 요하네스 버룬, 노벨수사상자이며 노르웨이 국립극장
극장장인 비에른 비애른슨, 입샌은 물론 그리그까지 당대의 내노라하는
얘술 인들이 드나 들던 유명식당 이라고 한다
우린 예정에 없든 일이라 식사는 포기하고 양해를 구하고 내부를
구경하고 바로 나왔다
150여년 전의 모습 그대로라고 하며 내부는 아주 고풍스런 분위기 였다
우린 이제 피곤한 몸으로 오슬로 관광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 와서
오늘을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