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걸객 하면 김삿갓을 떠올리나 그보다 더한 이가 있으니 곳 매월당 김시습이다. 그가 남긴 해학적인 시를 감상하며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소금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8월을 맞이한다.
要路院(요로원)의 두 선비
(要路院夜話記(요로원 야화기)는숙종조의 한 시골 선비가 서울서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충남 아산 어름의 요로원에 잠자리를 찾아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병든 말에 초췌 남루한 행색의 나그네는 가는 곳마다 홀대와 업신여김을 받았다. 한 숯막에서 서울의 행세하는 집안의 끌끌한 선비와 함께 묵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기본 줄거리이다.
자신의 꾀죄죄한 행색을 보고 갖은 수모와 비아냥거림을 던지는 서울 선비에게 시골 선비는 아예 작정을 하고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촌놈 행세를 한다. 이에 더욱 기가 난 서울 선비는 숫제 아래 것 다루듯 시골 선비를 희롱하며 놀다가 완전히 기를 죽여 놓으려고 肉談風月(육담풍월) 짓기 시합을 제의하였다. 육담풍월이 무엇인고 하니, 다섯 자 일곱 자로 언문진서를 섞어 짓는 문자 놀음이다. 다음은 서울 선비가 먼저 던진 풍월이다.
我觀鄕之賭 (아관향지도)
怪底形體條 (괴저형체조)
不知諺文辛 (부지언문신)
何怪眞書沼 (하괴진서소)
내가 시골 '내기'를 보니
몸 '가짐'을 괴상히 하는 도다.
언문 '쓸' 줄도 알지 못하니
眞書(진서) '못'함을 어찌 괴상타 하리.
*眞書(진서): 한문으로 된 시
원문과 번역을 대조해 보면 갸우뚱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각 구의 끝 글자는 한자의 의미로 새긴 것이 아니라, 훈으로 읽은 것이기 때문이다. '賭(도)'는 '내기'이니 '鄕之賭(향지도)'는 섞어 읽어'시골내기'가 되고, '條條(조조)'는 '가지'라서 '形體條(형체조)'를 '몸가짐'으로 읽는다. '辛(신)'은 맛이 '쓰다'는 뜻으로, '諺文辛(언문신)'이라 해 놓고서 '언문을 쓴다'고 읽고, '沼(소)'는 '못'이니 '眞書沼(진서소)'는 '眞書(진서)를 못함' 즉 한문을 모른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서울 선비는 제깟 것이 뜻인들 알랴 하는 마음으로 풍월을 읊고는 득의양양했겠다. 그리하여 화답을 재촉하니 시골 선비는 짐짓 못하겠노라고 사양을 한다. 더욱 기세가 오른 서울 선비는 화답지 않음은 나를 업신여김이니 이 방에서 몰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에 시골 선비 풍월을 읊조려 가로되,
我觀京之表 (아관경지표)
果然擧動戎 (과연거동융)
大抵人物貸 (대저인물대)
不過衣冠夢 (부과의관몽)
내가 서울 '것'을 보니
과연 거동이 '되'도다.
대저 인물을 '꾸'었으나
의관을 '꾸민' 것에 불과하도다.
라 하였다. '表(표)'가 '것(겉)'이 되고, '戎(융)'은 뙤놈이란 뜻을'되다 '로 읽었다. '貸(대)'는 '꾸다.'로, '夢(몽)은 '꿈'이니 이를 '꾸미다.'로 읽었다. '시골내기'를 업수이 보다가 '서울 것'이 된통 당한 형국이다. 네까짓 것이 언문도 쓸 줄 모른다니 진서야 일러 무엇하겠느냐고 얕보았던 서울 것에게, 그래 너는 겉만번드르 했지 잘난 게 무예냐는 반격이다. 내용으로만 보자면 시랄 것도 없는 시답잖은 말장난이지만, 순발력과 재치가 돋보인다.
'서울 것'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쪽같이 속았던 자신이 부끄럽고, 깜찍하게 속였던 '시골내기'가 맹랑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서울 것과 시골내기는 시 짓기 시합을 벌이는데, 여기에 동원된 詩體 (시체)라는 것이 앞서 소개한 바 있던 잡체 시들이다. 人名 (인명)을 넣어 짓는 人名詩(인명시)로 겨루고, 聯句聯句(연구연구)로 주거니 받거니 시합하고, 다시 六言(육언)으로실갱이를 하다가, 종내 3 5 7言의層詩(층시)로 옮겨 가고, 藥名體(약명체)로 승부를 결하였다. 서울 것은 시골내기에게 끝내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참패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이번엔 거꾸로 시골내기가 五行詩(오행시)로 겨룰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짓는 방법은 첫구첫자에 '木(목)'자를 넣고, 끝자에는 '土(토)'로 맺으며, 둘째 구 첫 자는 '水(수)' 자로 열어 끝 자는 '火(화)' 자로 닫으며, 그 가운데에 '金(금)' 자를 넣어 五行(오행)의 구색을 갖추는 것이다. 시골내기가 먼저 짓기를,
萍犠何處至 (평희하처지)
花月滿虛堂 (화월만허당)
부평 같은 자취 어드메서 이르렀나
꽃 달만 빈 집에 가득하도다.
라 하였다. 두 구절의 첫 자 '萍(평)'과 '花(화)'는 머리에 '艸'(초)'를 얻었으니, '木(목)'에 속하고, '至(지)'와 '堂(당)''은 破字(파자)하여 아래만을 취하면 '土(토)'가 된다. 그러자 서울 것이 한참을 끙끙대다가, 겨우
흐르는 그림자 금 술잔에 어리니 流影金樽照 (류영김준조)
란 한 구절을 맞추고는 4구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流(류)'는 '水'(수)'에 속하고 '照 '(조)'는 '火'(화)로 받쳐져, 그 가운데 '金(금)'을 얹은 것이다. 그러자 시골내기는 즉시
맑게 흰빛을 마시는 도다. 瀅然飮白光 (형연음백광)
로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시골내기의 완전한 한판승이 확정되는 순간이다.
〈요로원야화기〉는 단순하게는 갖은 詩體(시체)를 놓고 두 선비가 각축을 벌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거들먹거리는 서울 것을 기절시킬 만큼의 詩才(시재)를 지녔으면서도 정작 시골내기는 靑雲(청운)의 벼슬길에 명함 한번 내밀어 보지 못했고, 전전하는 여관마다 천덕꾸러기 신세였을 뿐이었다. 모처럼 서울 것 하나가 제대로 걸려 분풀이는 했지만, 뒷맛은 언제나 씁쓸하다.
눈물이 석 줄
한시의 어조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과거처럼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인 목소리에서 벗어나 모순되고 복잡한 양태를 연출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적 세계관이 규정하는 제반 사회조건에 길들어 있었으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인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희극적 양상을 나타내게 되는데, 그 결과 시는 진지성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른바 戱作化(희작화)의 경향은 이 시기에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이전의 詩話(시화)에도 희작의 양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로원야화기〉부터 김삿갓의 시에 이르러 극에 달하는 파격의 희작 시들이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집단적 양상을 띠고 등장하는 것은 주목되는 한 양상이 아닐 수 없다.
이들 희작시의 작가들이 창작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시 정신은 탈 중심주의, 탈 이데올로기의 현대 해체시가 표방하고 있는 세계와 긴밀하게 맞닿아 앗다. 비시적 대상의 시화를 통해 이미 용도 폐기되어버린 공허한 언어의 일상성을 파괴하고 당대 현실의 삶에 뿌리내림으로써 이들은 구체성과 정직성을 획득하고 있다. 80년대 해체주의가 전통적 시 양식에 대한 전면적이고 과격한 파괴를 통해 관습적 시관에 도전장을 던졌다면, 김삿갓을 비롯한 일군의 시인들은 전통 한시의 기교 지상주의적 관념 시단에 대해 비아냥거림과 조소의 태도를 통해 야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禦睡新話(어수신화)란 책에 실려 있는 17자시는 바로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다. 제목 그대로 이 책에는 졸음을 단번에 씻어가 줄 수 있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말하자면 당대의 개그 笑話集(소화집)인 셈이다. 17자 시는 세 수의 연작이다.
어느 해 가뭄이 몹시 심했다. 원님이 단을 쌓아 놓고 기우제를 지내는데, 그 齋(재)를 올리는 곳이 기생집 근처였다. 말이 기우제이지, 원님은 잿밥에 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한 선비가 그 꼴을 보고 시를 지었다.
太守親祈雨 (태수친기우)
精誠貫人骨 (정성관인골)
夜半推窓看 (야반추창간)
明月 (명월)
원님이 몸소 비를 비는데
그 정성 뼈에 사무치더라.
한 밤중에 창을 열고 내어다 보니
밝은 달.
정성을 다해 드려도 시원찮을 기우제를 온통 잿밥에 마음이 쏠려 지냈으니, 기우제에 대한 하늘의 응답은 明月(명월)이었다. 원님이 이를 듣고 대로하여 선비를 매질하였다. 곤장을 실컷 맞고 나온 선비가 또 가만있지 못하고,
作詩十七字 (작시십칠자)
受笞二十八 (수태이십팔)
若作萬言疏 (약작만언소)
必殺 (필살)
열일곱 자의 시를 지었다가
곤장 스물여덟 대를 맞았네.
만약 만언의 상소를 지었다면
죽었을 거네.
라고 근질대는 입을 놀렸겠다. 원님은 한층 격노하여 그를 멀리 귀양 보냈다. 떠나는 날 그 외삼촌이 술과 안주를 차려 전송을 해 주었다. 그 정성이 느꺼워 선비는 다시 붓을 들었다.
斜陽楓岸路 (사양풍안로)
舅氏送我情 (구씨송아정)
相垂離別淚 (상수이별루)
三行 (삼행)
저물녘 단풍든 언덕길에서
나를 전송하는 외삼촌의 마음.
서로 떨어뜨리는 이별의 눈물은
석 줄이네.
선비의 외삼촌은 애꾸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사실 우리나라 사람의 작품은 아니고 중국 명나라 때의 무명씨의 작이다. 중국의 秋水涉筆(추수섭필)에 위 17자 시가 실려 있는데, 대개 두 가지 줄거리를 가진 5수의 17자 시가 하나로 뭉뚱그려져 어면신화에 변개 수용된 것이다. 글자의 출입도 상당하다. 이 책에는 16자 시도 실려 있다.
月上柳梢頭 (월상류초두)
人約黃昏後 (인약황혼후)
父母俱睡熟 (부모구수숙)
偸 (투)
달님이 버들가지 끝에 떠오니
해 진 뒤에 만나기로 약속합시다.
부모님 모두 곤히 잠들면
몰래.
아쉬운 데이트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흘러 가버려 어느덧 달이 늘어진 버들잎 사이로 떠올랐다. 그러나 뜨거운 청춘 남녀는 그것으로 만남을 끝내기엔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부모님께 들통 나지 않게 한밤중에 다시 만나 밀회를 나누자는 약속을 주고받는 것이다.
意在不言中 (의재부언중)
低頭重眼風 (저두중안풍)
今日來不得 (금일래부득)
紅 (홍)
마음은 말없는 가운데 있어
고개를 푹 숙이고 눈웃음 짓네.
오늘 오지 못하게 되면
난 몰라.
다정한 임의 소곤거림에 그녀는 더욱 두근대는 가슴을 달랠 길 없었다. 혹시 부모님이 늦게 주무셔서 약속을 못 지키게 되면 어떻게 하나. 벌써 그녀의 두 볼은 붉게 물들고 말았다.
대개 이런 시들은 형식미의 굳건함을 고수하던 전통 한시에 대해 풍자와 해학의 효과를 발휘하기에 충분하다. 내용의 희화화뿐 아니라 형식도 더불어 와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누구인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는 청간(淸簡). 이며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신재(神童 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작가의 말
매월당 김시습 하면 우리는 생육신인 그를 우선 생각한다. 그는 조선이 나은 비운의 선비일 것 같다. 우선 시대적 배경으로 조선조 왕들 중 제일 경멸하고 왕으로서 존경받지 못할 사람이 세조일 것 같다. 왕권과 그 권위를 얼마나 탐이 나면 나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별도 달도 없는 강원도 영월로 원지 유배시켜, 그것도 모자라 사약을 내려 죽게 하는 자가 왕이 되어 수년간을 호의 호색하다가는 말년에 지날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으며, 정신병으로 죽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일 것이다. 거기에 당시 일등공신이란 자는 천하에 벼락을 맛을 짓을 주도한 한명희이다. 수많은 조정의 사람들을 살생부(殺生簿)를 만들어 모두를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들을 노비로 만드는가 하면 어린 여식들을 노리개로 전락시키는 그를 일러 일등공신이라 한다. 여기에 항거한 자들이 조선의 선비란 분들이다. 목숨을 미련 없이 버리며 바른길을 간 그들을 일러 후세사람들은 사육신이니 생육신이니 하면서 추앙한다. 용케도 살아남아 대를 이은 그 후손들은 그러한 조상님들의 사상과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시대 흐름에 편승하며 살았으면 당시의 가족과 후손들은 그러한 고초를 겪지 않고서도 그마한 벼슬과 관료이면 편한 삶이었으리라. 어느 것이 오른 지는 후학의 목이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 사회도 마찬가지인듯하다 남을 죽이기 위하여 갖은 중상모략과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며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창밖을 보라! 수만 수백의 민주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국민의 건강을 걱정하며 불의와 싸우고 있지 않은가! 군홧발에 밟히고 물대포가 쏘아지며 소화기가 날아다니고 최류 가스를 쏘아댄다고 해서 국민의 분노가 삭지는 않을 것이다. 이명박대통령의 생각과 관료들의 생각이 70년대식 군사정권의 말로를 보는듯하여 씁쓸하다. 진정 국민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정부의 말로는 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국에 맞선 자들이 선비들이다 수백 수천의 선비들이 잡혀가 형장을 이슬로 살아졌고 목숨과 바꾸어 지킨 이 나라는 지금 상당한 자괴감에 빠진듯하다. 위정자들이 잠시 숨을 고르고 옛 선비들이 생각했던 지혜를 모아 이 난국을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국민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단지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도 뼈저린 통렬한 반성을 해야 한다. 외국 것이면 사족을 못 쓰는 국민정신과 물건을 외국 것보다 좋게 못 만드는 나라와 회사들 또한 일본의 국민처럼 철저하게 처절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미국의 또는 외국의 장사꾼들이 망해서 철수하도록 안 사먹고 안 쓰면 된다. 허나 우리네 국민은 몇 칠 지나면 모든 상황을 잊어 먹고 생활을 한다. 국민성이 그러하다 나부터도 옛것은 잊어 먹고 기억도 없다. 언제 그러한 일이 있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몇 칠 지나면, 이것이 고쳐져야 할 우리네 국민의 냄비 근성이다.
하면 매월당의 삶은 어떠했는가! 전국을 떠돌며 유람을 하고 건인 걸식을 하며 끝내는 속세를 떠나 귀의했다가 다시 속세로 나와서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유교와 불교를 넘나들며 그의 사상을 지키다가 부여의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松竹(송죽) 같은 절개 치켰고 송곳 같은 절의를 지키지 않았던가! 설사 사지가 찢어져 죽을지언정 가족들이 노비로 절락되고 권력의 노리개가 된다 한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코,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부를 축적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위정자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권력을 이용하고 노리개가 되어 부를 축적하지 않았는가! 지금 이 시점에서 그분의 삶의 잘잘못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가 남기고 간 주옥같은 글을 보자는 것이다 매월당과 몇 백 년 후의 김삿갓을 일러 혹자는 사회의 흐름에 동조하지 못한 이단아라고 하나 몇백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들이 주목받음은 당대 최고의 기인이자 선비이며 시선들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매월당의 욕으로 된 한시에서 일부 발췌하여 재편집하였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