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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미님의 영벽정과 조광조 선생의 유배지 포스팅을 스크렙하여 왔습니다.
박자미님은 능주의 충신각, 영벽정, 조광조 유배지, 잠정리 햇살마을, 고인돌공원 등 많은 곳을 포스팅하여 블로거로서 활동하는 여행작가십니다. 위의 블로그(카페)를 클릭하면 박자미님의 포스팅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zzoam.blog.me/220276171632 영벽정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 대해 사람들은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까? 필자는 비록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살고 있지 않지만 주변에서 "너의 고향은 어떤 곳이니?"라고 물으면 휘황찬란하게 대답하고는 한다. "내 고향은 화순군인데~...", "내 고향에는 oo가 있는데~.." 라는 말들을 꼭 미리 대답해온 포트폴리오처럼 말이다. 어느 순간에19살까지 이 곳에서 살아 오면서 자주 가봤지만 크게 염두하지 않았던 곳들이 꽤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군데씩 알리고 싶은 곳을 찾아가 보았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영벽정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서 동네 위생청결 봉사활동을 나가면 꼭 여기에 와서 쓰레기를 줍고는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왜 굳이 초등학생인 우리가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쓰레기를 주웠는지 모른다. 학교에서 공부를 해야할 시간에 말이다. 고등학생 때도 교문에서 복장단속에 걸리면 꼭 토요일 오후에 이곳에 와서 쓰레기를 줍고는 했다. 결과적으로 마을에 좋은 일을 한 거라 싫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단지 왜 였을까 싶다.

영벽정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영벽정이라는 이름은 계절에 따라 변하는 연주산의 경치가 맑은 지석강물에 투영되어 운치 있게 바라볼 수 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정자는 능주팔경의 하나로 연주산 밑 지석강의 상류 영벽강변에 있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양팽손 등이 쓴 제영,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종직의 시 등으로 볼 때 16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능주목(군), 즉 관청이 주도하여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1632년(인조 10) 목사 정윤이 아전들의 휴식처로 개수하였으며, 1872년(고종 9)에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이듬해 목사 한치조가 중건하였다. 이후 보수를 거듭해오다가 1982년, 1983년에 각각 보수하였으며 1988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건물은 2층 팔작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형이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두리기둥으로 누각 아래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원래 목조였으나 1988년 해체 복원시 영구성을 위해 석조로 대체하였따. 기둥 위에 마루를 깔아 중층 누각형 정자를 만들었다.
마루 둘레는 계자난간으로 장식하였고, 처마 밑에 활주를 세웠다. 누각 위의 기둥머리에는 익공형식 공포를 하였고, 천장은 연등천장인데 가운데 부분만 우물천장이다. 지붕은 3겹으로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정자 안에는 9개의 현판이 있다.


영벽정 옆에는 기찻길이 하나 있다. 위험하게도 어릴 때 이 기찻길 위에서 다이빙을 하는 동네 오빠들을 흔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오빠들 뿐 아니라 용감한 남자아이라면 한번쯤은 여기서 뛰어 내렸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머리가 고꾸라져서 머리통이 깨져 죽었다고 한다. 어느 동네라도 이런 허황한 소문들이 있지 않은가. 저 기찻길 너머 산 속에 연주사라는 절이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절을 가려면 길은 이 기찻길 뿐이라 가끔 사람들이 기찻길을 따라 걸어가던 모습도 기억난다. 그저 친구들하고 있으면 용기가 샘솟던 어린 시절에 나도 기찻길 위에 섰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지 싶다.





영벽정 앞에 있는 강은 영벽강이다. 맑은 강이 아니라 시골의 냇가에서 흔한 다슬기를 잡는 일 따위도 없었다. 항상 물이끼가 낀 것처럼 초록빛이 나는 영벽강은 항상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문들도 무성했다. 이 강에는 물귀신이 사는데 나뭇가지가 밑으로 쳐진 것은 물귀신이 잡아 당겨 생겨난 현상이라 한다. 어릴 때는 이런 이야기 들으면 굉장히 무서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들이 이 강에서 물놀이를 못하게 하려고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이끼가 많은 강이라 물놀이를 하고 나면 옷에 온통 물이끼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주변 친구들이 물귀신에게 빨려 들어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모두 소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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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능주면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유배지가 있다. 옛날에는 높은 양반이 유배도 올 정도로 큰 고을이었는데 지금은 '능주'를 말하면 아는 이가 없다. 그래서 항상 '광주'라고 말을 하던가 '화순'이라고 말하게 된다. 화순에 속해 있는 능주라 화순이라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뭔가 씁쓸하다. 정암 조광조 선생은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 선생은 여기 화순 능주로 유배를 와 한달만에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중종이 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조광조는 유교 정치의 이상향을 실현하는 개혁 정치를 실시한 인물로 도교 사당인 소격서의 철폐, 향약 실시, 토비와 노비 하사의 특권을 인정 받았던 훈구공신의 명부인 흔적을 삭제하는 등 왕도 정치의 이상 세계 구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다. 조광조의 무리했던 많은 정책들이 2년여 동안 계속 되자 기존 세력이 반발을 일으켰고 중종 또한 중국과 맞설 수 있는 성군을 만드려던 조광조의 열정이 부담스러워 역성 혁명을 꾀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유배지가 바로 여기 화순 능주다.
조광조 뿐만 아니라 개혁을 이루려던 모든 신지식인들이 이 당시 축출되었는데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유배지에 온지 한달 만에 사약을 받고 사사하게 되는데 추후에 이를 안타까워하고 조광조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위의 사진이 바로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 유허추모비다. 비석의 앞면에는 붉은 색 글씨로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 뒷면에는 조광조선생의 유배 내력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현종 8년 때 당시 능주목소를 지내고 있던 민여조가 건립했고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정암 조광조 선생 유허비 번역문
아, 이곳은 정암 조선생이 귀양와서 별세하신 곳이다. 아, 이제 정암선생께서 돌아가신지 149년이 되었는데도 기묘 학사와 대부들은 그 학문을 사모하고, 백성들과 하급관리들은 그 은혜를 생각함이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잊지 아니하고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로 하여금 삼강오륜의 윤리를 알게하여 이적(되놈)과 금수(짐승)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하는 것은 오직 정암선생의 덕택이라하여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엄숙하게 머리 숙여 공경치 아니한 이 없느니나.
이는 그 누군가 그렇게 하셔서 하는 것일까. 그사람은 누구나 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아! 저 남곤 심정 홍경주의 무리들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고 우리나라는 기자가 성인의 학문을 밝히고 어진 정치를 한 뒤로 수 천년 동안 학문과 정치가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포은 정몽주 한훤당 김굉필 선생 등이 나시어 성인의 학문을 밝혔으나 송나라 성리학자 명도 정호 이천 정이 회담 주희 선생 등의 학통을 이어받아 요순의 왕도정치에 뜻을 두어 뛰어나게 명덕과 신민으로써 표준을 삼는자는 정암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선생의 휘(이름)는 광조요, 자는 효직이니 한양인이다. 성화임인(성종 13년. 1482년)에 출생하여 정덕경오(중종 5년, 1510년)에 진사장원하고 을해(1515년)에 문과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기묘년 11월에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밀의하여 주초위왕이 왕이된다는 무근지설을 조작하여 변을 일으켜 변고가 일어나 즉시 이곳 능주에 유배되니 옥주는 관노 문후종이다.
다음달 12월 20일에 사약이 내려 돌아가시었다. 그로부터 149년 뒤 정민년(현종 8년, 1667)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월이 오래되면 그 유허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그곳에 비를 세워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고자 하니 옛날 정부자께서 영락정에 대한 글을 지으시면서 물은 차마 이를 폐할 수 없고 땅은 차마 이를 버리지 못한다고 하니 아! 이 글을 이 비에 새김이 합당할지로다.
정미년(현종 8년, 1667) 4월 병진에 후학 승록대부의정부우찬성겸성균관제주세자이사 송시열은 비문을 짓고 정헌대부원임의정부좌참찬겸성균관제주세자시강원찬선 송준길은 비문을 쓰고 통정대부수충청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민유종은 전서를 쓰다.

정암 조광조 선생이 유배 당시 살았던 초가집을 그대로 복원했다. 초등학생 때 왔을 때는 이 초가집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지어져 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봉사활동으로 마을 가꾸기에 쓰레기 줍고 청소하러 왔었다. 마룻바닥에 양초를 긁어 광을 냈던 기억도 있다.





정암 조광조 선생이 모셔져 있는 영정각이다. 그 안에는 초상화가 걸려있다. 37세의 나이였으니 지금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젊은 나이다. 초상화를 보니 굉장히 미남이신 것 같다. 잘 생기신 분이 머리까지 비상했으니 주변의 시기와 질투가 엄청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하고 반듯한 사람은 항상 사람을 불러모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