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 주머니에 항상 챙겨둔 수첩
-공항.기내서 보고 들은 것 메모
-나의 분신.... 모두 서랍에 보관
화물 업무 완수하려 2000쪽 암기
-운송 규정 메뉴얼 눈 감고 술술
-땀 흘리지 않는다면 성공도 없다
공항 운영과 캐빈 서비스, 운항과 화물 수송, 정비, 지상 조업과 케이터링...항공사 입사 전까지 이렇게 다양한 업무가 존재하는 지 전혀 몰랐다. 누군가는 항공업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했다. 다양한 악기가 서루 어우러져 아름다운 연주를 완성하듯, 수많은 분야의 유기적 협업을 통해 온전한 한 편의 운항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직종을 세분화해 채용하는 항공사에서는 입사할 때 맡은 분야에서 퇴직할 때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좀 특이하게도 여러 업무를 경험했다. 1992년 아시아나항공에 입사해 20여년간 화물과 공항 운영, 캐빈서비스, 경영지원 업무 등을 맡았다. 새 일을 맡을 때마다 나는 호기심과 열정에 들떴다. 담당 업무를 완벽하게 끝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은 노력'밖에 없었다. '바이블'같은 업무 메뉴얼을 읽고 또 읽었다.
처음 맡은 화물 업무를 완수하기 위해 2000쪽이 넘는 항공운송 관련 메뉴얼을 달달 외었다. 소나 말, 돼지가 제한된 공간에서 숨 쉴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 위험화물의 종류별 포장방법과 무게 제한치 등 국제 민간항공운송협회(IATA)의 생동물, 위험화물 운송 규정을 눈감고도 술술 읊을 정도였다.
1997년 샌프란시스코 공항 지점장으로 발령받았다. 부임 전 500쪽짜리 국제여객서비스 메뉴얼(IPSM)을 세 번 정독했다. 일하면서도 곁에 두고 수시로 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객 업무 전반을 확실히 파악했고, 나만의 시간도 갖게됐다. 그 덕분이었을까. 이듬해 본사 평가에서 최우수 공항 지점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새로운 업무를 맡을 때마다 나는 무한불성의 정신으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땀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LA공항에서 3년간 일한 뒤 2005년 귀국해 캐빈 서비스 담당 임원이 됐다. 기내식과 음료, 와인, 식기류와 냅킨, 면세품, 신문 , 잡지 등 읽을거리와 기내 음악까지 총괄 관리하는 자리였다. 객실 승무원을 선발해 교육하는 일도 해야 했다.
귀국 전, 평소 공항과 기내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틈틈이 적어놓은 것을 정리했다. '할일 목록(Do List)'이 100여 개나 됐다. '이렇게 많았나'싶을 정도였다. 나에겐 메모 수첩을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무엇이든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화물 업무를 보면서도 여객 관련 업무를 흘려보내지 않았고, 공항 서비스를 담당하면서 객실 승무원들이 하는 일을 눈여겨봤다. 항공기 정비사나 운항관리 직원들의 업무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관심은 오랜 세월 동안 종유석 자라듯이 조금씩 성장한 것 같다. 입사 이후 사용한 업무 수첩과 나의 분신이자 '보물1호'다. 사무실 책꽂이와 서랍 속에 한 권도 빠짐없이 보관하고 있다. 깨알같이 써내려간 메모들은 그것이 성공을 기록한 것이든 실패를 기록한 것이든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서비스로 브랜드 가치를 높여 우리 회사를 널리 알리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유명 해외 평가사로부터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서비스향상위원회를 운영하며 최선을 다했다. 2007년 영국 스카이트랙스의 '5스타 항공사'인증을 받아 1단계 꿈을 이뤘다,. 당시 5스타 항공사는 전 세계에 5곳 뿐이었다. 이어 2009년 ATW사. 2010년 스카이트랙스, 1012년 미국 글로벌 트래블러지, 2012년 미국 프리미어 트래블러지 등으로부터 '올해의 항공사'상을 잇달아 수상했다.
외국 항공사의 기물 탑재 기준을 우리 실정에 맞춰 비용을 줄여나가는 작업도 펼쳤다. 서비스 본부장 때는 매주 금요일 아침 일찍 출근해 새벽 비행을 나가거나 야간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객실 승무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격려했다. 출장 때눈 기내 승무원들의 애로사항을 찾아 개선하는 일을 계속했다.
한번은 커피 서비스를 하는 일등석 승무원의표정이 불편해 보였다. 커피포트가 문제였다. 일등석에선 고급스러운 은제품을 사용하는데 열전도율이 높아서 뜨거운 커피의 온도가 손잡이를 통해 그대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헝겊싸게를 나눠주는 등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끝네 열전도율이 낮은 재질로 손잡이 부분을 바꾸기로 했다. 이후 커피 서비스를 하는 일등석 승무원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경영지원 본부장 때는 인사.노무. 광고. 홍보. 의료. 환경. 고객만족 등 회사 살림을 맡았다. 아시아나 임직원들이 점심식사 후 산책하는 둘레길을 만들었고, 구내식당 식사 품질도 대폭 높였다. 평소 작은 것을 지나치지 않고 메모해 개선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고 자평한다.
돌이켜 보면 새로운 업무라는 환경 변화 속에 이를 완벽히 해내겠다는 나의 열정, 그리고 주변의 격려가 맞물려 지금까지의 성공을 이루지 않았나 싶다. 그런 '도전과 응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대충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스스로 채찍을 내리친 것이 '강한 나'를 만든 밑거름이 됐다.
올 1월 나는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부산 지역을 기반으로 한 에어부산의 대표이사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