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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인 자녀교육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일반 교회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같이 자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할 것과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대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기에 힘쓰라는 교훈이다.
그렇다. 너무나 범죄가 만연한 세상에서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에 겨운 일이다. 그러므로 자녀를 기도의 손으로 안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인 성경 말씀대로 자녀에게 교훈하고 훈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녀교육의 방법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좋은 대학만 보내면 교육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이 사회에 만연하고 그 가운데서 우리 자녀들이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대개 자기 자녀들이 일류 대학에 가서 법관이나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데 문제가 있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녀를 일류 대학에 보내기 위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고액 과외를 시킨다고 한다. 특히 한국의 교육은 점수를 높이기 위한 주입식과 암기식 교육에 집중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성적이 사람됨을 판단하는데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성적에 따라 훌륭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대우하는 풍토가 굳어지고 있다.
2011년 통계에 의하면 수능지원자 수가 71만인데 그 중에 서울에 있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수는 대략 18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약 20만은 훌륭한 사람, 약 50만은 쓸모없는 자 취급을 받는다는 말이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이스라엘 나라는 강원도만한 땅임에도 노벨수상자가 2016년까지 151명이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어떤가?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외에는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 사람은 유대인보다 머리가 좋고 부지런과 교육에 대한 열심이 대단한 민족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교육이 잘못된 관계로 큰 인물을 키워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모두 다르게 창조하시면서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좋게 하셨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손재주가 좋게 하여 뛰어난 기술자가 되게 하셨다. 어떤 사람은 말을, 어떤 사람은 예술을, 어떤 사람은 요리를, 어떤 사람은 체력을, 어떤 사람은 사업적 수완을, 어떤 사람은 리더십이 뛰어나게 만드셨다. 꽃의 모양을 다 다르게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들도 다양하게 창조하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모든 재능을 100% 갖춘 사람은 없다.
우리 부모들이 할 일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달란트와 사명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것을 잘 발전하도록 키워주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삼남매를 교육할 때 달란트를 중시했다. 제가 2012년에 ‘달란트 교육’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당시 큰 아들 김용민pd는 ‘나꼼수’ 때문에, 둘째 아들 김용범pd는 ‘슈퍼스타K’로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어느 날 출판사에서 ‘어떻게 자녀를 교육했는지’에 대해서 글을 써달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 글을 쓰는 도중에 난데없이 정봉주 전의원 대신에 김용민pd가 국회의원에 출마하였다가 8년 전 막말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낙선되는 바람에 책이 출간되었을 때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만약에 출마하지 않았거나 당선되었더라면 베스트셀러가 되어 목돈이 생길 뻔했는데 아쉽다.
여하튼 우리 부부는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가를 찾으려 애썼고 그것을 될수록 발전시키려고 북돋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에게 있는 달란트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키워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육의 맹점은 모든 학과를 골고루 잘해야 우등생이 되게 하는 데 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무시한 교육이다. 지금은 아주 다양한 시대가 되었다. 옛날에는 공부를 잘해야 성공하는 사람이 되었으나, 이제는 예술, 스포츠, 컴퓨터, 심지어 게임 등, 자기 분야에서 우수한 사람이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적 위주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개성을 존중하는 인본주의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
부모님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들이 성적이 안 좋은가? 낙심하지 말라. 여러분의 자녀에게도 각각 고유한 달란트를 부여하셨다. 이제 하나님이 자녀에게 부여하신 독특한 달란트와 사명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주시기 바란다. 또한 우리 각자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가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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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달란트 교육'에서 카피한 원고 전문이다)
둘. 자녀의 달란트를 발견하라.
(1) 한국 교육의 맹점과 달란트 위주의 교육
우리 부부는 삼남매를 교육할 때 달란트를 중시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에게 있는 달란트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키워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에 가장 큰 맹점이 무엇인가? 상위권 대학만 보내면 교육은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그 풍조가 이 사회를 심하게 병들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일류 대학에 가서 법관이나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데 문제가 있다. 심지어 어느 부모는 자기 자녀를 일류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고액 과외를 시킨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점점 짙어지고 있어 더욱 문제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한국의 교육은 점수를 높이기 위한 주입식과 암기식 교육에 집중하고 있다. 더 나가서는 성적이 사람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오용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성적은 외면에 속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성적이 나쁘면 중심까지도 나쁜 것으로 오인 받아 무시를 당하게 된다. 성적에 따라 훌륭한 사람, 아닌 사람으로 대우하는 풍토가 굳어지고 있다. 같은 잘못을 하더라도 공부 잘하는 아이는 용서를 받고, 공부 못하는 아이는 야단을 맞는 오늘날의 현상은 성적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며 사람의 중심까지 판단하는 잣대로 오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런 성적 위주의 경쟁구도에서 인성교육이나 철학, 혹은 창의력 교육은 엄두나 낼 수 있겠는가? 그런 비인간적인 교육풍토에서 청소년들의 심성은 병들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별히 가장 민감한 나이요, 사춘기에 해당되는 중학교 후반 때부터 견디다 못해 학교 중퇴나 가출 등 탈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근절되기는커녕 날로 심화되고 있는 학교폭력, 이로 인한 피해학생들의 자살, 성적비관에 따른 고통 등 우리 아이들의 문제는 언론보도만 접해도 끔찍하기만 하다.
지난해 11월에 너무나 끔직한 뉴스를 들으면서 이 땅의 온 부모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서울 광진경찰서는 24일 모친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하고 시신을 내버려둔 혐의(존속살해 및 사체유기)로 고등학교 3학년 A(18)군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A군은 지난 3월13일 오전 11시께 광진구의 다세대주택 자택에서 부엌에 놓인 흉기로 어머니 B(51)씨의 목을 찔러 숨지게 한 뒤 8개월간 시신을 숨겨둔 혐의를 받고 있다.
A군은 경찰에서 “어머니가 '학부모 방문의 날'인 다음날 학교에 오기로 돼 있었는데 모의고사 성적표에 전국 4,000등을 한 것을 62등으로 고쳐놓은 게 들통 나면 무서운 체벌을 받게 될까 봐 겁이 났다”고 진술했다. A군은 범행 전날에도 B씨가 62등으로 위조한 성적표를 보고서 “더 잘하라”는 잔소리와 함께 자신을 엎드려뻗치게 시키고 야구방망이와 골프채로 번갈아가며 10시간에 걸쳐 체벌을 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A군은 평소 어머니 B씨가 자신에게 직업관이나 꿈을 키워주기는커녕 “서울대 법대를 가라.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 “전국 1등을 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으며, 아들의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을 안 주거나 잠을 못 자게 했다고 주장했다. 어머니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성적표를 위조해 보여줬던 A군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와서부터 성적이 조금씩 떨어져 최근 응시한 대학수학능력시험 가채점 결과 3등급 정도의 점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어머니를 살해한 상황에도 친구를 집으로 데려다가 라면을 끓여 먹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다가 심성이 이처럼 사악하게 되었는가? 잘못된 교육이 가져온 비극이다. 어찌 그 가정에만 국한된 일이겠는가? 크거나 작거나 그러한 심각한 갈등들이 많은 부모들과 자녀들 사이에 증폭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물론 자녀들이 부모의 뜻에 순응하여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다 다르게 창조하셨다. 어느 사람은 머리를 좋게 하셨다. 그러나 어느 분은 손재주가 좋게 하여 뛰어난 기술자가 되게 하셨다. 어느 분은 말을, 어느 분은 글을, 어느 분은 요리를, 어느 분은 체력을, 어느 분은 인정이 뛰어나게 만드셨다. 꽃의 모양을 다 다르게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들도 다양하게 창조하신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100% 재능을 다 갖춘 사람은 없다. 머리도 좋고, 성품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살림도 잘하고, 인정도 많게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한국 교육의 맹점은 모든 학과를 골고루 잘해야 우등생이 되게 하는 데 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무시한 교육이다. 지금은 아주 다양한 시대가 되었다. 옛날에는 공부를 잘해야 성공적인 사람이 되었으나 이제는 자기 분야에서 우수한 자가 인정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성적 위주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개성을 존중하는 인본주의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곧 성경적 교육이다.
원동연, 유동준 교수는 저서 「달란트 교육혁명」에서 강조하기를
“성경적 달란트 교육이란 먼저, 하나님이 우리각자에게 맡기신 달란트와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인생의 목표를 확실히 정한 다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맡기신 달란트를 극대화시켜, 그것을 남을 위해 선용함으로써 빈부나 학력고하 등 세상적 조건에 관계없이 누구나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구가하게 만드는 교육을 말한다.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은 각각 고유한 달란트와 은사, 적성과 사명을 부여하셨다. 이제 하나님이 각자 개인에게 선천적으로 부여하신 독특한 달란트와 은사, 적성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일반적 특징으로 판단할 수 있는 달란트 판별법으로는 3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일에 대해서 마음에 강한 소원을 지속적으로 주신다면 그 일이 나에게 부여하신 달란트와 관련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실 때 반드시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소원을 품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 일이 나의 재능과 일치하는 것이다. 재능이 있다는 것은 적성에 맞는다는 얘기인데, 하나님은 재능대로, 적성대로 달란트를 주시기 때문이다. 셋째, 마음에 소원도 일어나고 나의 재능과도 일치하는 일인데, 그 일을 향한 기회가 하나씩 열린다면 그 일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와 은사, 적성, 사명과 관련된 일일 수 있다”라고 했다.
(2) 딸로부터 시작된 달란트 교육
세 자녀 중 내가 가장 기대했던 아이는 딸이었다. 사실 대학 때부터 내 꿈은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다. 소설가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가지게 된 것은, 군대시절 만났던 소설가 김성일 씨 때문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기초훈련을 마치고 처음 배치 받은 부대는 임진강변에 있었다. 그곳에서 고참인 김성일 씨를 만났다. 우리는 전방 고지에서 임진강을 바라보며 문학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었다. 그가 제대할 때는 군대 시절 틈틈이 썼던 시모음집을 내게 기념으로 주었다. 사실 누구로부터 문학적인 수업을 받은 것은 그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제대한 다음 대학에 복학하고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했지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매년 신춘문예가 응모했지만 번번이 낙방이었다. 다만 기독교 계통의 잡지사와 경북대학교 학보지에 응모하여 받은 당선작과 가작상이 전부였다. 그리고 목회자 길에 들어선 후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소설가에 대한 아쉬움을 딸을 통해서 대리만족하고 싶었다. 딸에게는 겨우 한글을 깨우친 때부터 어린이용 문학집들을 구입해 읽히기 시작했다. 아빠의 마음을 알았는지 딸아이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학년이 높아가면서 글재주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재주로만 문학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고독과 절망, 심한 고난 속에서 안으로 쌓인 한이 마침내 여물어 외부로 터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무엇인가 작품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비록 가난한 목사의 가정이지만 단란한 분위기에서 귀여움을 받으며 자란 딸에게 쌓인 한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슬기롭고 아름답게 성숙해 가면서 대학생 때나 간사 일을 하는 때나 공동체 멤버로 활동하면서 확고한 신앙과 소신으로 자기 역할을 다 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부모의 대리만족을 위해서 자녀를 대역(代役)으로 세우는 것은 욕심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그 때부터 부모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과연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내가 교사 출신인데다 적극적인 성격이어서 학교 공부나 진학 공부에 대해서 열심히 격려했기 때문에 내가 일일이 간섭할 일이 별로 없었다. 대신 여유를 가지고 자녀들의 달란트를 찾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도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용민, 용범은 자라는 모습이 너무나 달랐다. 지연과 용범은 아내가 시키는 대로 공부는 물론이고 엄마가 가르치는 영어성경 공부나 예능 공부들을 잘 수용함으로 우등생다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용민은 특이했다.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고 용기를 갖게 하려고 태권도 도장에 보냈지만 성의를 나타내지 않았기에 곧 포기하고 말 정도였다. 용민과 용범은 연년생이라 시골교회 시절 아내가 두 아이를 키우며 교사 일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춘천 할아버지 할머니가 1년 반 동안 맡아 키워주시다가 홍익교회로 부임하면서 합류하게 됐다. 그런 탓인지 처음에는 서먹한 채 매사 겉도는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독차지하던 용범의 텃세가 심해서 두 형제가 자주 다툼으로 나로부터 두서너 번 매를 맞기도 했다. 다행히 누나가 중간에 서서 화해의 역할을 함으로 점점 형제애가 두터워졌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형제 사이의 미묘했던 감정들을 용범은 고3때 성동고등학교 교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 잘 표현했다.
나의 형(兄)
지금 방금 형과 싸우고 들어오는 길이다. 대학생이 된 형과 아직도 라디오 볼륨 때문에 싸워야 한다니…. 라디오 소리는 정말이지 참기가 힘들다. 라디오 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탁 막히는 것 같다. 하지만 형은 듣는 것 특히 라디오를 무척 좋아한다. 이것이 나와 형의 큰 차이점이다. 집에 라디오가 하나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주 양쪽 귀에 매달고 다녔을 것이다. 형과 나는 연년생이다. 그랬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를 낳으시자 어머니는 형과 나를 함께 키우시기 매우 벅차셨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 형에 대한 기억은 잘 나지도 않고 거의 없다. 그래서 결코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국 나 때문에 형은 춘천에서 뇌막염도 앓아 보고 엄마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형이 춘천에서 돌아온 날 할머니와 떨어지기가 너무 섭섭했던지 할머니가 다시 집으로 가시던 날까지 매일 울었다. 그런 형을 보던 어머니는 얼마나 슬프셨을까? 그 당시는 그런 형의 모습이 보기 매우 싫었다. 지금은 이해가 가지만 말이다. 아무튼 난 형한테 못되게 굴었다. 아버지가 형 하고 같이 사먹으라고 과자 사먹을 돈을 주시면 친구하고 같이 사먹었고, 형이 일러서 혼이 나면 형하고 싸우고, 내가 7살 때야 비로소 유치원이 생겼기 때문에 나만 유치원을 다니고 1년 일찍 태어난 형은 다니지 못하고, 또 4살 위에 누나가 있기 때문에 첫째인 누나는 첫째라고 위해주고 난 막내라고 귀여움을 받을 때 때 사이에 낀 형만 어정쩡했었다.
또 성격이 야무지지 못하고 덜렁거렸기 때문에 어머니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다. 그래도 난 형을 못살게 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집에 고양이 한 마리를 아버지께서 얻어 오셨다. 집에 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새끼였는데 너무 귀여워서 하루만 밖에서 키우고 다음날부터 방안에서 키웠다. 형은 너무 정이 많아서 그 고양이를 참 좋아했다. 나 또한 고양이를 내 동생같이 예뻐했다. 그래서 화장실로 썼던 흙도 같이 버리고 함께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그때부터 형하고 매우 친하게 되었다. 비록 5학년 때 이사하는 바람에 다른 집에 주어버렸지만 말이다.
지금은 건장한 나머지 뚱뚱하기는 하지만 옛날 형은 매우 말랐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형이 밥을 통 먹질 않아 혼자 우시기도 많이 하셨다는 정도니까. 그런 형이 언제부터인지 살이 찌기 시작하더니 아주 뚱뚱해졌다. 그렇게 보기는 싫지 않았지만 항상 한 방을 써야 했기 때문에 잘 때는 참 좁았다. 비록 그렇게 좁은 방에서 함께 잤지만 형은 얘기를 잘 해 주었다. 특히 웃긴 얘기를, 난 형이 해 준 얘기를 만화로 그려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곧잘 들려주었다. 다른 사람이 형과 내가 형제라면 잘 믿지를 않는다. 내가 소심하고 내성적인 반면 형은 재미있었다. 나보다도 훨씬 활발하고 활동적이고 난 그런 형이 몹시 부러웠다.
학교에서 무슨 발표회를 할 때 형이 연극을 잘 해 낼 때면 부러운 나머지 질투까지 났다. 사람들은 형에게만 관심을 보였고 난 언제나 어린 동생으로밖에 보아 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형에 대한 경쟁심이 일었다. 형보다 잘해야지 하는 생각 말이다. 형은 나의 경쟁자였다. 그러던 형이 맹장염에 걸렸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고 음력으로 생신을 지내시던 할머니 생신도 함께 겹쳐서 친척 분들 모두 우리 집에 올라오셔서 식사를 하고 있었던 때였다. 형은 배가 몹시 아파 아무 것도 못 먹고 학교도 못 갔다. 생일은 형 때문에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끝냈다. 대기실에서 누구보다 난 무서웠다. 형이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혹시 나도 맹장염에 걸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수술 후에도 형은 몹시 힘들어했다. 뚱뚱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형이 안쓰럽기보다 이상해 보였다.
이렇게 아픈 형의 모습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형! 난 잘해주지 못했다. 괜히 접근할 수가 없었다. 작년 형이 전기대에서 떨어졌을 때 너무 낙심하던 형을 보며 너무 씁쓸했다. 무어라 말 해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고생하던 형이 우울할 때 위로 한마디 해 주지 못하다니……. 형을 난 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형과의 끈끈한 사랑은 우리 형제애를 키우고 있었다. ‘형’은 나의 경쟁자이고 나를 기쁘게 해주는 나의 형다운 형이다. 연년생이라 제대로 형 구실도 못해보고 마음고생만 한 형. 방금 줄이고 들어온 라디오 볼륨을 형이 다시 올렸다. 나가서 다시 줄이면 또 싸우겠지 하지만 난 형을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할 것이다. “형, 사랑해!”
여하튼 용민은 특이했다. 한번은 초등학교 때 방학을 맞아 교사였던 엄마가 두 형제를 앉혀 놓고 그 학기의 과학 실험을 다 시켜 볼 요량으로 촛불을 켜놓고 제1단원에 나오는 ‘불꽃 모양’과 ‘불꽃의 온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용민이가 갑자기 “불이야!”라고 소리치는 것으로 웃음보들이 터지면서 결국 공부는 끝나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민은 별종이었다. 공부에는 별관심이 없어 성적은 겨우 중상위권에서 맴돌았지만, 말솜씨 하나는 뛰어났다. 아마 말을 배울 당시 할아버지와 할머니 틈에서 자란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다른 교회와 연합운동회를 개최할 때는 중계방송을 하여 교우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기도 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선생님이 가르치다 지치면 용민이를 불러내서 동화를 구술하게 할 정도였다. 라디오방송, 특히 기독교방송이나 극동방송을 많이 청취함으로 아나운서나 방송 내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또한 용돈이 생기면 복음송가 테이프를 구입하여 들음으로 몇 박스의 테이프가 쌓이기도 했다. 그런 때문에 대학생 때 극동방송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할 때, 방송직원들보다 더 복음송가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누나처럼 어린이 명작 읽기를 많이 강조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음으로 아내가 청계천 헌책방에서 만화로 된 세계사나 과학들을 사다 읽히게 할 정도였다. 대신 용민은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 읽기를 좋아하고 중학교 때부터는 사설을 열심히 읽음으로 오늘날 많은 글을 쓸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용민은 자기가 쓴 「보수를 팝니다」라는 책에서 자신의 어렸을 때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나도 텔레비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어렸을 때에는 다른 아이들처럼 만화영화에 푹 빠져 있었지만 초등학교 3학년쯤부터 친구들과는 다른 길(?)을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다가 점점 다큐멘타리나 뉴스로까지 관심 분야가 넓어졌다. 중학교 1학년 때쯤에는 뉴스를 보고 친구들에게 시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어쭙잖은 비평까지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때 장래희망이 지금 내가 밥 벌어 먹고사는 ‘시사평론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른이 되어 방송사나 신문사와 같은 곳에서 일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지금보다도 훨씬 날씬한 몸매로.”
자라는 과정에서 용민이 한 가지 더 특이했던 사항은 편집에 능했다는 점이다. 컴퓨터가 일반화되기 전에 나는 설교 작성을 위해서 ‘워드프로세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고작 사용해야 한글 작성 정도였다. 그런데 용민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내가 교회에 가 있는 동안, 혹은 먼 거리 심방을 하는 동안, 그 ‘워드프로세스’를 사용하여 ‘푸른계시록’이라는 제호에 학생회지를 만들었는데 나를 너무나 놀라게 했다. 마음대로 글씨를 변형하고, 사진이나 그림을 삽입하는 등 편집기술이 뛰어났다. 내가 오랜 동안 그 기계를 쓰면서 발견했지 못했던 기능들을 살리어 편집했다는 점에 감탄을 했다.
사실 나는 신학대학시절 「신학춘추」라는 학보를 편집한 경험이 있기에 고등학생이 그렇게 만들어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을 알았다. 그 학생회지를 보고 아내는 대단히 화를 내면서 ‘지금 고2년이면 대학입시 준비에 전력할 때인데 왜 이런데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질책했지만 나는 속으로 용민의 달란트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공부에 진력하지 않고 자기 취향대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결과 용민은 결국 수도권에 위치한 지방대학 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내의 소원은 용민이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던 까닭에서 나온 선택이었지만 나는 큰아들이 목회자의 길보다 방송선교의 길을 가기를 바랐다. 한국교회는 목회자를 너무 양산하는 데 치우칠 뿐, 문화선교에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극동방송에서 한국교회 갱신에 대한 대담하는 시간에 대학 1년짜리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 때에 용민이는 방송국 PD에게 아르바이트 일을 자원하게 됨으로 방송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용범은 학과 성적이 우수하고 모든 면에 재질이 보일 정도이지만, 탁월한 재주는 없어 보였다. 다만 어학 면에 뛰어난 면이 보여 장래에 외교관이나 교수가 되기를 막연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와서 발견한 사실은 그림그리기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는 점이다. 아빠와 가수 서태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너무나 탁월했다. 더욱 하필이면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가수 서태지를 그렸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자,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어려서부터 음악성이 뛰어난 가수를 좋아했던 것이다.
어렸을 때 그의 예능적인 면이 나타난 때를 찾아내라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을 내세우겠다. 장학사가 수업참관을 하게 되었는데, 음악시간이었다. 아마도 고전음악 감상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수업이 음악과는 대조적으로 경직된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고 느꼈음인지 갑자기 용범이가 앞으로 나와 음악에 맞추어서 발레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담임교사와 의논도 하지 않은 의외의 행동이었다. 그래서 그 수업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용범은 영화 마니아였다. 용범이 영화나 드라마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텔레비전의 영향이 크다. 훗날 고백하기를 아빠와 엄마가 목회 일 때문에 교회에 있거나, 먼 거리 심방에 간 동안 그는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중학교부터는 미군방송인 <AFKN>을 통해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미국 드라마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대학생 때는 미국인과 농담할 정도로 어학 실력이 뛰어나게 됐다. 그가 예능계의 PD로 활동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는 청소년 때부터 열심히 시청한 미군방송 때문인 것이다. 용민의 전언에 따르면 용범은 9·11테러가 났을 때 방송사에서 동시통역을 하며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용범의 방안에는 온통 각종 영화와 미드 CD가 가득하다. 밤늦게 그의 방을 지나가노라면 영화를 보는 소리가 들렸다. 부모와 대화하는 시간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영화 이야기가 나오면 열변을 토했다. 부모 생일 때도 영화 예매권을 선사하고는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M-net>에서 ‘슈퍼스타K'를 제작하고 있는 것도 우연 같지만은 않다. 앞으로 그의 성향으로 보아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 등과 같은 프로의 제작을 감행하지 않을까 싶다.
두 형제가 요즈음 방송인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서 우리 부부가 한 가지 농담 삼아 이야기하며 웃는 일이 하나 있다. 아내가 시골 중학교 교사 시절, 가을운동회 때마다 매스게임이나 부채춤 등을 지도하고는 했는데 그 때가 두 형제를 임신한 상태였다. 아이들이 뱃속에서 자연적으로 태아교육을 받게 되었을지 않았을까 하면서 미소를 짓곤 하는 것이다. 아무튼 지나간 날들을 되돌아볼 때 자녀교육에서 중요한 점은, 성적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그들이 타고난 달란트가 무엇인가를 발견해주고 그것을 계발해 주는 것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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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샬롬! 2020년 5월 17일 주일날! 나홀로 예배시에 검색 하여 찾음 !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