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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玩易齋 姜碩德의 詩世界*
강 혜 종 * * 45)
<국문초록>
본고는 여말선초의 문단과 예술 지형을 살피기에 유의미한 인물이지만, 그동
안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던 玩易齊 姜碩德(1395-1459)의 삶과 시문학을
고찰하였다.
그는 通亭公 姜淮伯(1357-1402)의 아들이자, 仁齋 姜希顏(1417-1464)과
私淑齋 姜希孟(1424-1483)의 아버지이며, 沈溫(1375-1418)의 사위로 세종과
는 동서지간이다.
완역재에 관한 기록과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사숙재가 엮은『晉
山世稿』와 관련 문헌 등을 통해 그의 삶과 시문학의 특징을 살필 수 있었다.
완역재는 당대에 뛰어난 문필과 그림을 보는 안목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그
의 작품에는 修身과 學行을 통한 성찰적 삶의 지향이 반영되는 경향을 보였다.
당대에 “高古雅澹”한 풍격으로 평가 받았는데, 이는 그의 문학적 취향과 불교
적 사유, 騎牛子 李行(1351-1432)의 문하에서 한시를 교류한 경험 등에 기인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은 사색적이고 관조적인 태도와 담박한 어조로 경물을 담아내면서
여운을 주는 방식으로 정서를 응축하여, 정적인 시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특징
* http://dx.doi.org/10.14381/NMH.2016.50.06.30.141
** 연세대학교. hyejo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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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였다. 특히, 탈속과 성찰의 공간이자 매체로 형상화된 자연은 완역재 시세
계의 특징적인 면모를 구성하였다.
장편의 고시로 시적 대상에 대한 비교적 적극적인 생각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
도 질박하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호방한 풍격은 義氣로서의
감정이 발현된 것이었다.
이러한 완역재 시세계의 특징이 당대에 옛 시의 풍격을 얻었다고 평가 받았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주제어 : 玩易齋 姜碩德, 晉山世稿, 조선전기, 시문학, 시세계, 高古雅澹, 騎牛
子 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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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 머리말
2. 완역재의 삶과 “高古雅澹”의 한시 풍격
3. 脫俗과 省察의 시세계
3.1. 탈속과 성찰의 자연 공간
3.2. 시세계에 구현된 불교적 사유
4. 맺음말
1. 머리말
본고는 玩易齋 姜碩德(1395-1459)의 삶과 시문학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
는 通亭公 姜淮伯(1357-1402)의 아들이자, 뛰어난 文才와 예술적 재능으로
이름을 떨친 仁齋 姜希顔(1417-1464)과 私淑齋 姜希孟(1424- 1483)의 아
버지이며, 영의정 沈溫(1375-1418)의 사위로, 세종과는 동서지간이 된다.
완역재는 騎牛子 李行(1351-1432)의 문하에 있었으며, 세종의 신임을 받
아 관직에서도 활약하였다. 태종 초에 蔭仕로써 啓聖殿直이 되었으며, 이후
仁壽府少尹으로 遷職되었다가 司憲府執義로 승진되고, 1440년 承政院同副
承旨에 올랐을 때, 세종의 명으로 國朝五禮儀를 편수하도록 知禮曹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戶曹參判를 거쳐, 1445년 司憲府大司憲, 1446년 吏曹參
判·刑曹參判·開城留守, 1450년 同知中樞院事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들어와
知敦寧府事를 지냈다.
일생동안 학문에 힘썼으며, 시문과 글씨에 능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鍾繇(151-230)와 王羲之(307-365)의 篆書, 隸書, 楷書, 草書를 본받은 솜
씨가 정묘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해서체로 昭憲王后
(1395-1446)의 묘지문을 쓴 글씨가 매우 절묘하여 사람들이 다투어 간직하
여 가보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숙재는 완역재의 행장에 “고상한 옛 풍
취에 아담하게 글을 짓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서 옛 사람의 법도에 맞지 않으
면 감히 경솔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은 시와 글씨가
세상에 드물게 전하였다”1)고 밝혔다.
1) 晉山世稿, 「玩易齊先生戴慜姜公行狀」, 서울 : 晋山世稿重刊委員會, 1976, 6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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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들은 사후에 玩易齋集으로 정리되었으며, 이것이 통정공과 인
재의 작품과 함께 사숙재가 편찬한 晉山世稿로 전한다. 완역재의 작품이
실려 있는 卷2에는 絶句, 律詩, 古詩, 雜體詩 등의 시 38題 50首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통정공과 인재의 작품 수에 비해서는 적은 것이며, 완역재와 관
련된 다른 문헌의 기록도 많은 편이 아니지만, 그의 삶과 문학적 특징을 파
악할만한 자료가 된다.
특히, 그림에 대한 안목이 높았던 그가 남긴 제화시들과 불교적 사유와
정취를 담고 있는 작품들은 당대의 문단과 예술문화의 특징을 보다 구체적
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듯 완역재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인재와 사숙
재에 비하여 그에 관한 연구는 미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말선초의 사회문
화적 맥락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그의 삶과 문학 활동을 본격적
으로 조망하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
따라서 본고에서는 완역재의 시와 산문 등이 수록된 진산세고를 관련
문헌과 함께 고찰하여 완역재의 문학적 성취와 그 의의를 밝혀 보고자 한다.
2. 완역재의 삶과 “高古雅澹”의 한시 풍격
완역재의 인물됨과 문인으로서의 면모는 몇몇 기록들을 통해 전해지는데,
名利를 추구하지 않는 청렴하고 올곧은 성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世祖
實錄에 실린 완역재의 졸기와 사숙재가 작성한 「玩易齊先生戴慜姜公行狀」
등을 보면, 완역재가 청렴, 慷慨, 高邁하며, 예를 행함에 어긋남이 없고, 옛
것을 좋아하며 태만하지 않다는 戴慜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었다.3)
(이하, 晉山世稿로 표기함.) “詩以高古雅澹爲宗, 不中古人矩度, 不敢輕以示人。
故所著詩文若筆蹟, 世罕傳焉。”
2) 완역재에 관한 연구는, 여말선초 조선의 사회문화에 관한 연구나 인재나 사숙재
에 대한 연구, 조선의 제화시 등에 관한 연구의 일부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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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의 졸기에는 "내가 60세가 되었는데, 비록 功利는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일을 행하는 데 權謀와 詐欺가 없었으니, 스
스로 반성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4)고 한 완역재의 말을 인용하여, 청
렴하고 정직한 성품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사숙재가 지은 행장에는, “타고
나신 성품이 豪邁하여 세상 풍속에 뒤섞여 합쳐지지 않았으며, 곧고 청렴하
고 강개하며, 착한 일을 행하고 도를 즐기셨다”5)면서, 집 안에 책을 비치해
두고, 향불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 고요하고 평안하여, 영예를 구함이 없었다
고 하였다. 완역재의 청빈한 성품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완역재가
國舅였던 장인 安孝公에게 서서히 승급되기를 청하고, 세력을 좇아 찾아온
빈객들을 멀리하였으며, 인재와 사숙재가 榮親宴을 열고자 한 것을 거절하
는 일화 등을 싣고 있다.
한편, 행장에는 완역재가 8세 되던 해에 아버지 통정공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에게 청하여 밖에서 스승을 모시고 학업을 수행하였으며, 과거에 한
번 응시하였으나 낙방한 이후 “스스로 즐길만한 도의가 있으니, 과거를 보
아 무엇하겠는가[自有道義可樂, 何用科目爲。]”라 하고는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고 하였다.6) 이 내용은 몇몇 야승류를 통해 전해졌다.
공은 성격이 高亢하여 한번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자 물러나며
탄식하기를, “사내가 세상에 나서 진실로 磊落하게 살 것이어늘 [名臣
錄에는 스스로 즐길만한 道義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찌 과거 공부를
3) 晉山世稿, 「玩易齊先生戴慜姜公行狀」, 65면. “典禮不愆戴, 好古不怠慜”
4) 세조실록 17권, 1459년(세조 5) 9월 10일의 기사. “吾行年六十, 雖無功利之
及人, 行事無權詐, 則自反無愧矣。”(진산세고를 제외한 자료의 원문과 번역은
대부분 한국고전번역원 db에서 인용하고 필요한 경우 수정하였으며, 그렇지 않
은 경우는 따로 출처를 밝혔다.)
5) 晉山世稿, 「玩易齊先生戴慜姜公行狀」, 65면. “公天性豪邁, 不混流俗, 貞白慷
慨, 行善樂道。”
6) 위의 글, 63면. “年八歲, 通亭捐館, 公請母夫人就學外傅, 學成, 一擧不中, 歎曰:
‘自有道義可樂, 何用科目爲?’ 遂不復就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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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하늘 아래서 재주를 다투어 평생 출세할 매개로 삼으리오.” 하고는 다
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7)
그 중에서 위의 인용문은 燃藜室記述 권3, 「世宗祖名臣」에 실린 靑坡
劇談의 기록인데, 과거를 통한 출사에 연연하지 않고 도의를 따르고자 하
였던 완역재의 생각이, 그의 행장보다 구체화되어 서술되어 있다. 이는 名門
巨族을 이루면서도8) 名利를 추구하지 않았던 완역재의 태도가 세간에 회자
되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사후 인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기록하는 졸기와 행장이라는 문체적
특성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전해지는 기록들의 공통된 내용은 완역재의 인
물됨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만하다.
특히 다음의 인용 단락은 이러한 완역재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내용으로,
역시 여러 기록을 통해 회자되었다.
항상 두 아들에게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부귀와 영달은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지 구한다고 얻어지는 바가 아니다. 몸소 다해야 할 것은, 효제
충신과 예의염치일 뿐인데 여기에 부끄러움이 있게 되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으니, 너희들은 그것을 조심하여라.” 하셨다.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榮
親宴을 베풀고자 청하니, 공이 사양하며 말씀하시기를, “영화로운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영화가 있으면 반드시 욕됨이 있는 것이다”하시고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공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실수하기 쉬운
것은 분노와 탐욕이다.” 큰 글자로 ‘분노를 억누르고 욕심을 막아라[懲忿窒
慾]’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벽에 붙여놓고 항상 눈앞에 보이도록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외물에 접하게 되면 분노하기가 가장 쉬운 것이니, 깊
7)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3, 「世宗祖名臣」, 693면. “公性高亢, 一擧不中退嘆曰:
‘男兒生世, 固當磊落’ [名臣錄曰: ‘自有道義可樂’] 安用擧業以爭技白日之下爲
平生進取之媒乎? 竟不復擧。”
8) 강제훈(200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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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살피지 않을 수 없다.”하고 古詩를 벽에 쓰시기를,
노여움은 급히 타오르는 불이라 怒氣遽炎火
화기를 태워 스스로를 해칠 뿐이네. 焚和徒自傷
사물이 오면 다투어 좇지 말지니 物來莫與競
일이 지나가면 마음이 맑아질 것이네. 事過心淸凉
라 하셨다.9)
완역재는 두 아들에게 부귀영달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고, 효제
충신과 예의염치라는 유가적 가치를 바탕으로 수신하는 삶의 태도를 갖출 것
을 강조한다. 그가 좌우명으로 제시한 ‘懲忿窒慾’은 周易 「損卦 象傳」의
“산 아래에 못이 있는 것이 損이다. 군자는 이것을 보고서 분노를 다스리고
욕심을 막는다.[山下有澤損, 君子以懲忿窒欲]”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벽
에다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기 위하여 지은 위의 시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였
듯이, 덧없는 분노의 감정과 사욕을 억누르는 修身의 방법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완역재의 인물됨과 삶의 태도는, 사숙재의 언급처럼 함부로 시를
지어 남에게 보이지 않고, 옛 법도에 맞추어 시를 지었다는 그의 엄격한 詩
作 활동과 그의 시세계를 분석하는 데에 유의미한 고려 요소라고 생각된다.
즉, 원칙을 지키며 과잉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고자 하였던 완역재는, 詩作
활동에 있어서도 자신의 삶의 지향이 반영된 시세계를 형성하여, 함부로 시
9) 晉山世稿, 「玩易齊先生戴慜姜公行狀」, 65-66면. “常戒二子曰: ‘人之富貴榮達
在, 非求之可得。 所自盡者, 孝悌忠信, 禮義廉恥而已, 有愧於是, 餘不足觀, 汝曹愼
之。’ 二子登科, 請開榮親宴, 公辭曰: ‘榮非吾好也。 有榮必有辱。’ 竟不受。公以謂
人, ‘所易失者, 忿與慾也。”, 作大字書 ‘懲忿窒慾’ 四字, 貼諸壁上, 常目之。 又曰:
‘心與物接, 惟怒最易發。 不可不深省。’, 書古詩於壁曰: ‘怒氣遽炎火, 焚和徒自傷。
物來莫與竟, 事過心淸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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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짓지 않고, 古雅하고 淸新한 시세계를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사숙재는 완역재의 행장에서 아버지가 “고상한 옛 풍취
에 아담하게 글을 짓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며[高古雅澹爲宗]”, “옛 사람의
법도[古人矩度]”에 맞추어 시를 지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陽村 權近
(1352-1409)의 외손으로, 사숙재와 깊이 교유하며 완역재를 가까이에서 지
켜보았던 徐居正(1420-1488)의 평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몇 편의 글에, 완
역재의 인품과 시품에 대한 평가를 남겨놓았다.
1476년 책판을 함양에서 진주로 옮기면서 추가되었다고 알려진 서거정의
진산세고 발문에서는 ‘통정의 端雅淸新, 완역재의 高峻簡潔, 인재의 平淡閑
雅의 격률이 삼엄하였으며, 집안의 법식이 있었다.’10)고 평하였다. 그가 주목
한 삼대의 공통된 담박한 풍격과 격률에 맞게 시를 짓는 “家法”은 완역재 시
세계의 주요한 형성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서거정은 筆苑雜記 에서, ‘완역재의 성품이 예스러움을 좋아하여,
風流와 文雅를 근대에 비길 데가 없다고 하면서, 詩品이 매우 高古하고 書畫
도 절묘하며, 세상 사람이 공이 과거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그를 가볍게 여
김은 아주 잘못’11) 이라고 하여, 완역재의 성품과 시품을 함께 언급하며 높
이 평가하고 있다.
그가 1477년에 지은 「騎牛先生贈玩易齋詩序」를 보면, 완역재의 시에 대
한 평어의 의미와 면모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완역재 강대민의 학문은 문절에게서 나왔다. 대민은 일찍부터 호탕하고
뛰어난 재주로 연줄을 통해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문장에 마음껏 뜻을
두어 제자백가의 서적을 섭렵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만년에야 자신을 알아
10) 晉山世稿, 「晉山世稿跋」 (박영돈 소장본). “通亭之端雅淸新, 玩易齊之高峻簡
潔, 仁齋之平淡閑雅, 格律森嚴, 而亦自有家法。”
11) 徐居正, 筆苑雜記 卷1. “姜戴敏公碩德性好古, 風流文雅, 近代無比, 作詩最高
古, 書畫亦妙絶, 諡之曰敏宜矣。 諡法好古不怠曰敏。 此元朝學士趙文敏之敏也。 世
之人以公不於紅紙上題名輕之, 甚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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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성군을 만나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詞藻로 발현된
것은 高古하고 간결하며, 필법은 精粹한 경지에 이르러 江左의 법을 얻었다.
공의 두 아들인 伯氏 景愚와 仲氏 景醇이 모두 나와 과거에 같이 오른 동년
이고 절친한 벗이므로 나는 공을 아버지처럼 모셨고, 공도 나를 자식처럼 여
겼다. 일찍이 백씨와 중씨에게서 완역재의 詩稿를 얻어 읽었는데, 지극한 맛
이 담박하여 애써 매끄럽게 다듬지를 않았으니, 주나라의 솥과 은나라의 술
그릇처럼 꾸밈이 없어, 옛날의 풍모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이에 나는 공의
시문은 지금의 시문이 아니라 바로 옛날의 시문이라고 여겼다. 이후로 내가
근대의 인물을 평론할 때면 반드시 두 선생을 추대하여 으뜸으로 삼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니, 대개 공론이기 때문이다.12)
서거정은 완역재의 글이 “高古簡潔”한 풍격을 지녔으며, “지극한 맛이 담
박하여 애써 매끄럽게 다듬지를 않았으니, 周나라의 솥과 殷나라의 술그릇
처럼 꾸밈이 없어 옛날의 풍모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至味淡泊, 不假雕琢,
如周鼎‧殷彝, 古貌大存。]”라고 평한다. 이는 “好古”라는 인물평을 받았던 완
역재의 시세계 역시 고시의 질박한 옛 풍모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았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서거정의 글에서 주목되는 점은, 완역재가 스승인 기우자와 시를 주고
받으며 知音으로서의 깊은 문학적 교류를 나누었다는 사실이다. 서거정은 기
우자가 만년에 한가롭게 지내면서 문장과 서화에 젖어 노닐고, 풍류가 고상
하여 당대의 영수가 되었으며, 시문이 “淸瘦하고 간결 담박하여 속세의 티를
털어 없애 옛사람의 체제를 얻었다[淸瘦簡淡, 擺落塵俗, 得古人之體。]”라고
평한다. 따라서 완역재와 기우자의 작품이 공통된 풍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
12) 徐居正, 四佳文集 卷6, 「騎牛先生贈玩易齋詩序」, 한국문집총간 11, 270면.
“玩易齋姜戴敏之學, 出於文節。 戴敏早以豪邁之才, 不事媒進, 肆意於文章, 諸子百
家, 靡不搜括, 晚年遭遇, 有大設施。 其發爲詞藻者, 高古簡潔, 筆法精詣, 得江左法。
公之二子, 伯氏景愚·仲氏景醇, 皆居正同年執友, 居正以父視公, 公亦以子視居正。
嘗從伯仲氏, 得玩易齋稾而讀之, 至味淡泊, 不假雕琢, 如周鼎,殷彝, 古貌大存。 予
以謂公之詩文, 非今之詩文, 卽古之詩文也。 自後居正評論近代人物, 必推兩先生爲
首, 人不敢異議者, 盖公論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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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두 사람의 문학적 교류가 완역재 시세계에 영향을 끼쳤을 것임을 추측
할 수 있다.
기우자는 고려시대에 신흥사대부로서 사전혁파 등에 관한 진취적인 개혁
을 주장하였으나,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고려를 위하여 절의를 지키고 은거
하였던 인물이다. 이후, 태종이 벼슬을 내렸으며 세종은 국가원로로 대접하
였다. 완역재는 기우자의 말년 무렵에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우자의 학문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집현전 학사들에게도 간접
적으로 그의 학풍이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13)
기우자의 학문적 영향관계와 관련하여, 사숙재가 지은 행장에는 “문절공
이행에게 사사하여 제자백가서에 통달하고 궁구하지 않음이 없다”14)라고
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이 書史를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던 완역재의 적극적
인 학문적 태도의 연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은 이미 병환이 위독하였을 때 모든 생각을 다 잊어버리셨으나, 오직 書
史에 대해서는 잠시도 잊지 않으시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아들에게 차
례로 글을 읽게 하시고는, 경동시킬만한 말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셨다. 그
까닭을 물으면, “내가 지금 병이 들어 다시 성현의 미묘한 뜻을 궁구하지 못
하는 것이 한스럽다.”라고 답하셨다.15)
이와 같은 학문의 열정과 관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아 지은 「次晉州新
鄕校板上韻」에는 향교라는 詩作과 학문의 공간을 맑은 심상으로 형상화하
였다.
13) 태종대 이후 기우자가 성남에 기거할 때 문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완역재
의 숙부인 通溪 姜淮仲과 이행은 각별히 친한 사이였다. 기우자 이행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김정자(1995), 256-257면 참조.
14) 晉山世稿, 「玩易齊先生戴慜姜公行狀」, 63면. “師事李文節公行, 百家諸書靡
不通究。”
15) 위의 글, 67면. “公旣病篤, 百慮俱耗, 獨於書史, 暫不遺忘, 夜不能寐, 令諸子更
迭讀書, 至聞警語則, 泫然流涕。 請其故, 答曰: ‘吾今病, 恨不復窮聖賢微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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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풍화 인심을 적시고 千年風化洽群情
봉이 우는 높은 언덕 빼어난 정기 잉태하였네. 鳴鳳高崗孕秀精
새로 지은 강당 배움의 바다를 맑게 하고 新闢鱣堂澄學海
때때로 행하는 필진은 시성을 움직이네. 時行筆陣動詩城
가을 깊어지면, 푸른 대나무 깨끗하게 바람을 머금고 秋深絲竹含風淨
봄날 따스하면, 푸른 쑥이 비 맞아 향기롭네. 春暖靑莪冒雨馨
바로 지금이 태평성대라 어진 선비 많으니 盛代卽今多吉士
우리 고향의 뭇 선비들 열심히 경서를 궁구하겠네. 吾鄕諸彦盡窮經16)
위의 칠언율시의 수련과 함련은 긴 시간동안 이루어진 진주의 風化와, 정
기 서린 훌륭한 배움의 터전이 되는 관향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으며,
경련에서는 깨끗한 바람을 머금은 푸른 대나무와 향기로운 쑥을 묘사하여,
학풍을 진작시킬 수 있는 맑은 분위기를 그려낸다. 이는 미련에서 경서를 궁
구하는 선비들이 사시사철 학문에 정진하며 시를 짓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
든다.
한편, 위의 작품에서 보이는 淸新한 풍격을 지향하는 완역재의 생각은
「海東釋禪坦師詩集序」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완
역재가 益齋 李齊賢(1287-1367)과 가깝게 교유하였던 고려 말기의 승려 禪
坦(?-?)의 시집에 붙인 서문인데, 완역재가 생각하는 시평의 기준과 시세계
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
완역재는 이 글에 선탄의 「早春詩」17)를 수록하고,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에는 “格調도 그다지 높지 않고, 詩想도 그다지 깊지 않으며, 표현도 그다지
공교하지 않은데, 어째서 후세에까지 이처럼 칭송을 받는 것인가.[以謂格未
甚高, 思致未甚遠, 語又未甚工, 何見稱於後世久如是耶?]”18)라는 생각을 품
16) 晉山世稿 권2, 80면.
17) 晉山世稿 권2, 「海東釋禪坦師詩集序」, 100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管
絃聲碎竹外澗, 水墨畫點烟中山。立馬停鞭望復望, 鶬鶊上下春風端。”
18) 위의 글,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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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고 하여, ‘格’, ‘思’, ‘語’를 시평의 기준으로 삼았음을 밝혔다.
그런데 그는 작품들을 계속 감상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선탄의 시의
진면목을 음미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나는 이에 반복하여 읊조리니, 아름다운 감정이 발동하여 견디지 못하는
데 이르러서는, 마치 귀한 집 청년이 靑樓에서 마음껏 술을 마시고 妖姬를
희롱하는 것 같아서 단정치 못하게 되며, 그 소박하고 꾸밈없는 대목은 농부
가 농사 이야기를 하는듯하여 자못 우아한 풍치가 모자라는 것 같았으나, 그
호탕하고 뛰어난 대목은 王氏나 謝氏의 귀족 자제가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것과 같아서 풍류가 사랑할 만 하였다. 또한 4, 5편의 작품은 淸新冲澹하여
天趣가 절로 높아 문장 巨公인 益齋 선생 같은 분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당
연하니, 「조춘시」의 경우는 단지 급작스럽게 지은 것일 뿐이다.
아, 나는 성격이 疏放하여 자못 산림에 묻힌 사람들을 좋아하는데, 다행히
도 수백 년 뒤에 태어나 오래된 책에서 그의 시편을 얻었으니, 神氣가 교합
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19)
완역재는 선탄 작품의 호방한 풍류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특히 “淸新
冲澹”하여 “天趣”가 저절로 높은 작품들은 익재에게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
고 하였다. 또한, 자신의 성격이 “疏放”하여 “산림에 묻힌 사람들을 좋아한
다.”라고 한 대목은, 淸新冲澹한 시세계를 선호하는 자신의 시적 취향을 드
러낸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고고한 아취와 탈속의 정취, 호방한 기상 등이 어우러진 「歸來圖」는 이와
같은 완역재 시세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동문선 권8에도 실
려 있다.
19) 위의 글, 101면. “余於是, 反復諷詠, 迨乎麗情橫發, 不能自持, 如貴遊年少, 靑樓
縱酒, 玩弄妖姬, 已自不端, 其朴野處, 如田夫農談, 殊乏雅致,其豪縱逸邁, 如王謝
子弟, 倜儻不羈, 風流可愛。 又有四五篇, 淸新冲澹, 天趣自高, 其奬與於文章, 巨公
如益齋先生, 固宜也。 向之早春詩, 特率爾爲之耳。 嗟乎, 予性踈放, 頗好林下人。 幸
生數百載下, 獲其編什於殘編斷簡中, 未必不爲神交氣合然也。”
玩易齋 姜碩德의 詩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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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원래 세속 피하는 늙은이가 아니니 先生初非避俗翁
누가 알까, 천재의 영웅호걸임을. 誰知千載之英豪
우연히 구름 따라 깊은 숲 속에서 나가니 偶爾隨雲出林壑
향리소아는 나의 무리가 아니었네. 鄕里小兒非吾曹
돌아오니, 세 길에는 잡초만 무성한데 歸來三徑任蕪沒
마침 거문고와 술 있어 웃고 즐기누나. 恰有琴樽供笑傲
쓸쓸한 집안 북창에 누우니 環堵蕭然臥北窓
희황상인인 듯, 흥에 겹구나. 羲皇上人興陶陶
문득 산하가 옮겨짐을 보게 되어 眼中忽見山河移
진의 갑자를 쓰는 마음 괴로웠도다. 書晉甲子寸心勞
어찌 높은 의리 하늘에 닿았을 뿐인가. 豈但高義凌天衢
그 충성과 의분 곧 가을 구름에 비길 만하네. 忠憤直與秋雲俱
처사의 절개 홀로 우뚝함을 어찌할까. 何如處士節獨高
당시 조정에 호준들도 많았었네. 當時廊廟多俊髦
나 이제 그림 어루만지며 거듭 탄식하니 余今撫圖重嘆息
맑은 바람 불어와 희끗해진 귀밑머리 날리네. 清風颯颯吹鬢毛
歸來圖는 六朝時代의 隱逸詩人 陶淵明(365-427)이 지은 「歸去來辭」의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주지하다시피, 도연명은 東晉에서 劉宋(420-479)으
로 왕조가 바뀌자 이름을 潛이라고 바꿨다. 「귀거래사」는 405년 그가 41세
때에 관직에서 겪은 부조리한 현실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전원에서 자족
하며 절의를 지키는 모습이 형상화되었으며, 그에 대한 문인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20)
완역재는 귀래도에 표현된 「귀거래사」의 모티브를 시 안에서 형상화시키
고 있는데, 처음 두 구에서 도연명이 그저 세속을 피해 은둔한 인물이 아니
라 천재의 “英豪”라는 점을 강조하고, 이어지는 3구부터 10구까지는 도연명
이 관직에 나아갔다가 “鄕里小兒”와 같은 무리를 만난 후 귀향하여 자연 속
에서 “羲皇上人”과 같이 자족하는 모습을 그리는 한편, 나라를 잃고 가슴 아
파 하면서도 절의를 지킨 내용을 풀어내고 있다.
20) 귀래도에 대한 설명은, 이종숙(2005), 39-71면 참조.
南冥學硏究 제5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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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里小兒”는 도연명이 귀향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준 인물형이다. 도연
명이 彭澤縣令으로 있을 때, 郡에서 시찰을 위하여 파견한 督郵로, 아전이
도연명에게 의관을 갖추고 독우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자, 탄식하면서
“내가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꺾어 향리의 어린아이에게 굽실거릴 수는
없다.[我不能爲五斗米折腰向鄕里小兒]”라고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세 번째 구는, “구름은 무심히 산에서 나오고, 새는 날기에 지쳐서 돌아온
다[雲無心而出岫 鳥倦飛而知還].”라고 한 「귀거래사」의 내용을 가져온 것으
로, 명리를 위하여 관직에 나간 것이 아니었으며, 세속의 현실을 떠나 고향
으로 돌아가는 도연명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11구와 12구에서는 도연명의 “忠憤”을 높은 가을 하늘에 닿을 듯이 떠 있
는 서늘한 구름의 이미지에 비유하며, 그에 대한 공감을 드러낸 후, 15구에
서는 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림을 어루만지면서 탄식하는 화자의 모습
을 묘사한다. 이는 하얗게 센 귀밑머리에 불어오는 “清風”의 모습을 감각적
으로 형상화한 마지막구로 이어지며, 완역재의 마음이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점층적으로 호응하며 응집되어 마무리되는 구성을 만들어낸다.
마지막 구인 “清風颯颯吹鬢毛”는 「귀거래사」 初頭에 도연명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그린 “(고향으로 가는) 배는 출렁이며 가볍게 떠가고, 바람
은 불어 옷깃이 나부끼네[舟搖搖而輕颺, 風飄飄而吹衣]”에서 취한 것이다.
완역재와 도연명은 각각,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교직하고 있으며, 인생의 흔
적을 함축한 시어인 鬢毛가 청풍에 나부끼는 모습은, 바람에 옷깃 날리며 고
향으로 돌아가는 도연명과 완역재를 극적으로 겹쳐보이게 만든다.
진산세고에 수록된 완역재의 작품 중에는 위와 같은 장편 고시의 비율
이 통정공이나 인재의 작품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다. 수수하면서도 진솔
한 언어로 삶에 대한 성찰 및 꾸밈없는 감상과 義氣를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옛 시의 특징을 보여주는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玩易齋 姜碩德의 詩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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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脫俗과 省察의 시세계
진산세고에 수록된 완역재의 시는 내용에 따라 詠史詩, 詠物詩, 次韻詩,
送別詩, 題畫詩 등 다양하다. 완역재는 시적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자신의 감
정을 조탁하여 작품을 꾸미려 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담박한 어조로 경물
을 그려내며 여운을 주는 방식으로 시적 화자의 정서를 응축하여 표현하며,
사색적이고 관조적인 태도로 자신과 세상에 대한 성찰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완역재 시세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삶의 지향이 녹아든 문학적 취향과
詩觀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완역재의 시세계의
특징을 작품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1. 탈속과 성찰의 자연 공간
그림에 조예가 깊었던 완역재는 제화시를 여러 편 남겼다.21) 그 중에서 瀟
湘八景圖22)를 보고 지은 칠언절구의 시23)는 동문선 권22에도 실려 있다.
완역재는 安平大君(1418-1453)의 명을 받고 8경에 대하여 모두 시를 지었
21) 「題松竹曉風雪月圖」, 「題夢桃園圖詩卷」, 「歸來圖」 등이 있다.
22) 소상팔경도는 중국 양자강 이남 湖北省 長沙縣 零陵郡부근에서 瀟江과 湘江이
만나는 지점의 경치를 여덟 주제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 소상팔경도의
성격, 역대 작품들, 수용 양상 등에 대해서는 송희경(1995); 전경원(2007); 안장
리(2014), 참조.
23) 완역재는 시제에 「奉敎題瀟湘八景圖 圖有宋眞宗筆跡」이라 하여, 송 진종
(968-1022)의 필적이 있는 그림을 보고 시를 지은 것임을 밝혔는데, 안견이 그린
그림을 보고 지었다고 추정되지만 어떤 그림인지 확실하지 않다. 완역재의 시가
수록된 匪懈堂瀟湘八景詩帖은, 안평대군이 晋에서 元에 이르기까지 역대 제왕
과 명신의 법서가 수록된 東書堂集古法帖 권2에 수록된 宋 寧宗(1168-1224)
의 소상팔경시의 내용을 안견에게 그리도록 하고, 여기에 題詩하도록 명하여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匪懈堂瀟湘八景詩帖에 관한 내용은 박해훈(20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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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24), 전체적으로 그림을 원경으로 묘사하며 담박한 어조로 관조하듯이
그려내고 있다. 그 중에서 완역재 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다음의 두 수를
살펴보자.
「烟寺暮鐘」
푸른 연기는 아득히 높은 봉들을 감쌌는데 靑烟漠漠鎖㠝岏
소나무 그늘진 숲속 길은 구불구불하구나. 松檜陰森路屈盤
묻노니, 고요한 절은 어느 곳에 잠기었는가. 試問招提藏底處
한 번 울린 종소리가 흰 구름 끝에서 떨어지네. 一聲鍾落白雲端25)
「江天暮雪」
언 구름 드리워져 땅 끝까지 어둡더니 凍雲垂地暗坤倪
갑자기 봄빛 놓여 강 서쪽에 가득하네. 忽放春光滿水西
강 길에는 사람 없고 하늘은 저물려 하는데 江路無人天欲暮
매화꽃 두루 피고 댓가지가 나직하여라. 梅花開遍竹枝低26)
「烟寺暮鐘」은 해저물녘 연기에 가려진 절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江天暮
雪」은 겨울 저녁 무렵 강과 하늘이 맞닿아 보이는 풍경을 형상화한 것이다.
중국 소상팔경도의 작가가 대부분 선승들이었기 때문에, 그림에 쓸쓸하고
고아하면서도 적막한 분위기가 풍긴다는 평가도 있으나27) 해당 주제로 현
전하는 다른 작품들28)과 비교해 본다면 완역재의 작품은 보다 정적인 분위
24) 8경 시의 주제는 모두 다음과 같다. 「煙寺暮鍾」, 「遠浦歸帆」, 「洞庭秋月」, 「江
天暮雪」, 「漁村落照」, 「瀟湘夜雨」, 「山市晴嵐」, 「平沙落雁」. 당시 19명의 문인이
참여하였으며, 고려의 문인까지 합하면 21인의 작품이 匪懈堂瀟湘八景詩帖에
수록되었다. 박해훈, 위의 논문, 229-232면.
25)『晉山世稿』권2, 84면.
26) 위의 책, 같은 곳.
27) 송희경, 앞의 논문, 56면.
28) 전해지는 작품은 각각 51수, 58수가 있다. 전경원, 앞의 책 참조.
玩易齋 姜碩德의 詩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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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29)
「烟寺暮鐘」을 보면 깊은 산중에서 사찰을 찾아가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데, 사찰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길을 찾아 간다는 설정은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예컨대, 李仁老(1152-1220)의 시의 마지막 구
에서는 “好風吹落一聲鐘”으로, 成三問(1418-1456)의 시에서는 “雲外落從
容”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완역재의 시는 시의 轉句에서 아득히
잠긴 산사를 찾고 있는 마음을 질문의 형식으로 드러내고, 이어지는 結句에
서 곧바로 응답하듯이 한 번의 종소리가 구름 끝에서 떨어진다고 하여 煙霞
가 감싸고 있는 고찰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종소리를 표현한 듯한 여운 있
는 구성을 감각적이고 절묘하게 만들어냈다.
「江天暮雪」의 경우 같은 주제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눈이 내리는 풍경이나
고기 잡는 어부, 나그네 등이 표현되기도 하지만, 완역재는 작품 속에서 이
러한 소재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눈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대신, 기구
의 “凍雲”과 승구의 “春光”을 대조하여 곧 눈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과 이미
봄을 품고 있는 겨울의 전경을 긴장감 있게 표현하였다. 전구에서는 저무는
길가에 아무도 없다는 무채색의 겨울 풍경으로 시선을 집중시킨 후, 결구에
매화와 대나무로 감각적인 반전의 묘미를 주었다. 또한, 시 안의 풍경에 인
간을 배제하여,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의 순환이라는 자연의 섭리
를 한층 더 집중하여 느낄 수 있도록 한다.
29) 당시 소상팔경도 제시에 함께 참여한 이들의 작품과 비교하여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완역재의 시가 그림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시각이 비교적 적극적으로 투영되어 형성된 작품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서는 해당 작품들과의 비교분석을 통한 보다 정치한 논의가 있어야 하
겠지만, 소상팔경이 고려후기부터 문인들이 시재를 겨루는 소재가 되었으며 이후
일상화된 문화로 수용된 측면이 있었다는 점 역시, 소상팔경을 소재로 한 시에 작
자의 개성이 반영될 여지가 높았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소상팔경의 수용양상에
대해서는 안장리(2014), 참조.
南冥學硏究 제5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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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숙재는 ‘완역재가 글과 그림을 좋아하였으며, 서화 수백여 건이 집에 있
어서 반드시 거두어 책으로 만들어 보관하라고 명하였고, 여러 작품들 중에
서 익제 이제현의 팔경시를 특별히 아꼈다’고 하였다.30) 완역재의 소상팔경
을 주제로 한 작품에 대한 애정과 문학적 취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洪萬宗(1643-1725)의 小華詩評에서 格調 높은 시로 소개한 완역
재의 「秀菴卷子」의 첫 수는 깊은 산 중의 봄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홍만종
은 통정공으로부터 삼대로 이어지도록 문장으로 가업으로 잇는다는 것은 겨
우 소식과 두보 두 집안을 꼽을 수 있을 뿐31)이라고 평하면서, 통정공의 「寄
燈明師」, 인재의 「詠松」과 함께 이 시를 꼽았다.
연하를 독차지한 마음 절로 한가한데 占斷烟霞心自閑
우뚝 솟은 푸른 산에 띠 집 높이 지었네. 茅茨高架碧孱顏
배고프면 먹고, 지치면 잠들뿐 다른 일 없는데 飢飡倦睡無餘事
봄 새 한 번 지저귀니 온 산에 꽃이 피네. 春鳥一聲花滿山
완역재는 자연 속에서 자적하는 시적 화자와 봄 풍경을 조화롭게 표현하
였는데, 기구와 승구는 시적 화자가 있는 깊은 산 중 초가집의 풍경을 先景
30) 私淑齋集 卷5, 「瀟湘八景」, 한국문집총간 12, 66면. “先君戴慜公, 雅好書畫,
家累百餘件, 必令希孟收藏齊帙。 其中奇愛者, 益齋文忠公所作 「瀟湘八景巫山一段
雲八首」 乃其手翰也。 希孟間請得於何所, 公曰: ‘得之文忠公遠孫李公暿。’ 此實眞
跡也。”
31) 小華詩評 卷上. (劉暢·許敬震·趙季, 韓國詩話人物批評集 1, 서울: 보고사,
2012, 329면.) “姜通亭淮伯、玩易齋碩德、仁齋希顏祖子孫三人皆以文章大鳴。
噫!歷觀往古讀書能文章者爲難;雖能文章,而成一家傳後世爲難。雖能傳後世,
奕世趾美不墜其業爲尤難。 求之於古,僅得蘇、杜二家。而我東方獨有通亭一家繼
世箕裘,豈不韙哉?通亭 「寄燈明師」 詩曰:‘人情蟬翼隨時變,世事牛毛逐日新。
想得吾師禪榻上,坐看東海碧粼粼。’ 玩易齋 「題秀菴上人軸」 詩曰:‘占斷煙霞心自
閒,茅茨高架碧孱顏。飢飡倦睡無餘事,春鳥一聲花滿山。” 仁齋 「詠松」 詩曰:‘階
前偃蓋一孤松,枝榦多年老作龍。歲暮風高揩病目,擬看千丈上青空。’ 格調最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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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전구에서는 화자의 無爲를 구체화하여 시선을 집중
시킨 후, 결구에서 새와 꽃이 호응하는 봄의 풍경을 역동적으로 묘사하여,
시적 화자가 자연과 합일되어 있는 상태를 그려냈다. 또한, 刪 평운의 閑,
顔, 山로 압운한 측기식32) 칠언절구로, 기구와 결구의 뒷부분에 孤仄을 두
었지만, 운율감이 느껴진다.
살펴본 바와 같이 완역재 시세계의 자연은 이상화된 탈속적 공간이자, 시
적 화자의 감상과 주제를 함축한 대상이기도 하다. 다음의 작품들은 특히 결
구에 자연물을 끌어들여 원경 구도의 공간을 형상화함으로써 주제의 여운을
남기는 완역재의 詩作 방식이 두드러지는데, 모두 “雲”이라는 시어를 사용
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아름다운 이, 하늘 끝에 있으니 美人天一涯
꿈 속에서나 서로 찾은 지 오래이네. 魂夢相尋久
만나기 어려운 괴로움을 늘 원망하는데 每怨苦難逢
푸른 구름만 골짜기 입구에 비껴 있네. 碧雲橫谷口33)
위의 시 「送友人」은 멀리 떨어져있는 벗을 그리워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
이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결구에 골짜기에 걸려있는 해 저
문 밤하늘의 구름인 碧雲에 시선을 둠으로써 벗을 향한 그리움을 함축적으
로 드러내며 시의 여운을 더하고 있다. 오언절구34)인데, 상성 有운목 측성
운인 久와 口로 압운하고 있다.
「次驄馬契友韻」의 두 번째 수 역시 결구에서 시를 마무리하며, 시적 화자
가 구름에 시선을 두고 그리움의 감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구성을 취하
32) 평측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 ○○○●●○◎, ○○●●○○
●, ○●●○○●◎
33)『晉山世稿』권2, 88면.
34) 평측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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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일찍이 궁중에서 주하의 글을 관장하였고 曾掌殿中柱下書
서로 이끌고 술 통음하며 거리낌이 없었지. 相携痛飮任狂疎
늙어지니 모이고 흩어짐이 동서로 달라 老來聚散東西異
하늘에 떠가는 외로운 구름만 서글피 바라보네. 悵望孤雲飛大虛35)
驄馬契는 사헌부에 속한 이들의 모임으로, 후한 때 강직한 어사로 이름이
높았던 桓典이 환관들이 권력을 휘두르던 때에 권력자들의 비행을 탄핵하면
서 驄馬를 타고 다녔기에, 그를 驄馬御史로 부른 데서 연유한 명칭이다. 따
라서 이 시는 완역재가 사헌부 집의, 대사헌 등으로 있을 때 인연을 맺었던
동료의 시에 차운한 것으로 보인다.
완역재는 사헌부의 관리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며 동료와 호기로운 교제를
나누었던 시절을 추억하며, 이제는 서로 다른 인생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인
생을 반추하고, 동료에 대한 그리움을 “孤雲”이라는 시어에 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완역재의 시세계의 자연은 道를 관조할 수 있는 탈속의
공간이자, 시적 화자가 처한 현실과 마음이 투영된 매체로, 작품의 풍격을
형성하는 지배적인 심상이었다. 특히, 완역재가 즐겨 사용했던 구름과 같은
시어는 완역재 시세계의 자연이 단지 탈속적 정취를 만들어내는 장치에 그
치지 않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성찰의 공간을 구성하는 매체라는 점을 뒷받
침 한다.
3.2. 시세계에 구현된 불교적 사유
앞 장에서 살펴본 「送友人」, 「次驄馬契友韻」, 「歸來圖」의 “碧雲”, “孤雲”,
35)『晉山世稿』권2, 88면.
玩易齋 姜碩德의 詩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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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雲”이라는 핵심 시어는 모두 시적 화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이다.
이처럼 완역재가 만드는 원경의 공간구도에서 ‘응시’라는 의미를 살피기에
보다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題寂照軒」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시적 화자가
외물을 바라보는 행위가 곧 세상과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는 행위임을 보다
구체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높은 집 큰 길가에 있어 層軒臨高衢
멀리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이네. 騁望聊解襟
어찌 시끄러운 세상과 멀어졌을 뿐이랴. 豈但喧卑隔
평소의 마음이 좁았기 때문이지. 自多陿素心
늙은 잣나무 한가한 뜰 가에 서있고 古栢閑庭際
찬 이슬 맑은 소리 내며 떨어지네. 玉露滴淸音
긴 하늘에는 가는 노을도 없어지고 長天絶纖靄
한 티끌의 침입도 받지 않았네. 不受一塵侵
밝은 달빛만 가득 차고 皎月當空滿
물결에 비친 달빛은 먼 숲에 이어지네. 流光延遠林
경물을 보아 이미 얻은 바 있으니 覽物旣有得
이러한 이치를 뉘라서 찾겠는가. 此理誰肯尋
담연히 말을 잊고 澹然忘言說
원이를 편히 감당하겠네. 圓伊安可任
오래 앉아 있으니 밤은 벌써 깊어지고 坐久夜將半
외로운 성에는 찬 다듬이 소리 일어나네. 孤城起寒砧36)
위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一塵侵”도 허용치 않는 성찰의 공간에 앉아,
“覽物”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있다.
1-4구에서는 시적 공간이 단순히 세속의 세상과의 물리적 거리로서 단절
된 곳이 아니라 마음의 성찰이 가능한 공간임을 밝히고 있는데, 14구의 시
어인 “圓伊”는 圓伊三點37)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불교적 성찰을 형상화하고
36)『晉山世稿』권2, 76-77면.
37) 法身·般若·解脫 三德 등을 相卽相離, 不一不二, 三卽一, 一卽三 등의 관계로 설
南冥學硏究 제5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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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교적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해본다면, 8구의 “塵”이란 9구의 “皎
月”에 대조되는 시어로 볼 수 있다. 한 티끌의 客塵煩惱, 즉 외부로부터 마음
에 침범한 일체의 부질없는 번뇌38)를 떨쳐내고 밝은 달빛으로 상징되는 깨
달음의 지혜가 충만한 공간에서 眞如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13-14구에
서 마치 禪定에 이른 듯한 시적 화자는 마지막 구에서 찬 다듬이소리로 다시
현실의 세계로 소환된다.
이와 관련하여, 완역재 시세계의 불교적 인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시로 「倚巖觀音」 두 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관에 소복입고 티끌 한 점 없이 華冠素服絶纖塵
수심어린 짙푸른 눈으로 만물에 봄이 왔음을 보네. 紺目愁看萬物春
삼십 이신은 모두 다 환상이고 三十二身都是幻
바위 앞, 풍월에 한가한 사람 하나 있네. 巖前風月一閑人
한가롭게 만 길 높은 푸른 절벽에 기대었는데 閑倚蒼崖萬丈間
봄바람 불어 푸른 대나무 흔들리네. 惠風吹動碧琅玕
은근히 가리키는 하늘에는 달 지나고 殷勤指點天過月
동자는 응하는 듯 눈을 들어 바라보네. 童子應須着眼看
첫 번째 수의 기구의 관음보살은 「題寂照軒」에서처럼 티끌 한 점 없는 佛
道의 세상에 있으나, 승구에서 관음보살의 눈에 어린 “수심[愁]”은 그가 세
상과 이어져 있음을 표현한다. 온 세상에 봄이 찾아왔으나 중생들을 고통 속
에서 구하기 위하여 자비와 구원의 시선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전구에서는 楞嚴經에 설명되어 있는 관음보살의 삼십 이신 化現에 대한
명하는 불교의 상징적 개념 용어.
38) 반라밀제 번역·선화 상인 강설·정원규 편역, 능엄경 강설 上, 서울: 불광출판
사, 2012, 301-306면 참조.
玩易齋 姜碩德의 詩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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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담았다.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바세계의 각 중생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관음보살 32응신39)을 “幻”이라고 하여, 결구에서 관음
보살 앞에 선 시적 화자를 떠올리게 하는 “一閑人”과 대응시킨다.
이는 관음보살이 부처와 같은 힘을 얻어 32응신으로 화현하기까지의 수행
방도를 “幻”이라고 한 대목의 내용40)과 관음보살의 설법 앞에 ‘實’인 眞如
를 성찰하는 시적 화자의 존재를 대응시키는 구도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수에서 달을 가리키는 관음보살에 응하여 하늘을 바라보는 동자를 설정하
여, 불법을 깨닫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구도와도 상통한다
고 할 수 있다.41)
이처럼 깊은 완역재의 불교적 통찰은 「題凝石寺影堂」에서도 엿볼 수 있는
데, 이 시는 유구한 세월동안 불법으로 인간세상을 구제하였던 천년 고찰의
신령스러운 위엄과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오래된 절 깊은 산에 단청의 고운 빛 열렸으니 寺古山深金碧開
몇 번이나 세상에 누런 먼지를 일으켰나. 幾回人世漲黃埃
말 달리듯 우레 같은 설법 바다로 가니 馬奔雷吼朝宗去
호랑이 웅크리고 용 서린 듯 진압하러 왔네. 虎踞龍盤作鎭來
오래도록 지녀온 모습은 흰 보배와 같으니 久把儀形如白璧
어찌 신령한 기운 차가운 재와 같으리오. 肯將神氣若寒灰
아름다운 유적 천지에 남겨야 한다면 要令勝迹留天地
오직 옥대와 같은 이 절이 있네. 唯有招提似玉臺
응석사는 554년(진흥왕 15)에 현재 진주시 集賢山에 창건된 사찰이다. 수
39) 반라밀제 번역·선화 상인 강설·정원규 편역, 능엄경 강설 下, 서울: 불광출판
사, 2012, 109-110면 참조.
40) 관음보살이 관음여래에게 공양하여 金剛三昧를 얻게 된 내용인 “蒙被如來授我
如幻聞薰聞修金剛三昧”의 내용을 취한 것이다. 위의 책, 같은 곳.
41)『능엄경』,「見性實相」에 “如人以手, 指月示人, 彼人因指, 當應看月.” 이라는
내용이 있다. 능엄경 강설 上, 3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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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과 함련에서는 고찰이 창건된 후 우레 소리와 같은 설법이 행해진 것이,
求道의 길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진리라는 바다를 향하여 달려가는 듯한
무수한 물줄기와 같았다고 비유하고, 영당에 모셔진 존재들이 이를 다스리
고자 응석사에 와 있다고 표현한다. 경련과 미련에서는 과거로부터 장구한
세월 존재했던 보배로운 응석사의 불심과 靈氣가 유구하게 이어지기를 바라
는 마음을 담고 있다.
완역재의 불교적 사유는 어린 시절 학업을 위하여 사찰에 머무르며 접했
던 불교 문화에 영향을 받은 바 큰 것으로 보인다. 완역재는 그 때 인연을 맺
었던 승려 省玄을 위하여, 1442년(세종 24) 승정원 좌부승지 때에 「送玄無
悟南歸序」를 지었는데, 자신이 어린 시절 支天寺에서 학업을 닦고 있을 때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세속에 얽매이며 佛法의 도를 지키지 않은 승려 무리
들을 멀리하였으며, 義士의 기풍으로 이러한 무리들과 달랐던 승려 省玄과
는 교유하였다고 추억하였다.42)
또한 1448년에 지은 「寄濬和尙書」에는, 완역재가 젊었을 때 사찰에서 학
업을 익히는 여가에 승려들과 자주 이야기 하며 불경의 개념을 대략 얻어들
은 바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사람이 천지간에 태어나 불행히도 나아가는 방향에 異端으로
달라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통하고 막힘, 귀하고 천함이 마음의 선악에 달렸
을 뿐이지, 하늘이 어찌 그 사이에 厚薄하겠습니까? 43)
성인의 가르침으로 말하면 마음 밖에 도가 없고, 도 밖에 마음이 없는 것
이라 하겠습니다. 진실로 格物ㆍ致知ㆍ誠意ㆍ正心의 功을 성취하지 못할 것
같으면, 오히려 어찌 修身ㆍ齊家ㆍ治國ㆍ天下의 效를 바랄 수 있겠습니
까?44)
42) 晉山世稿 권2, 「送玄無悟南歸序」, 97-98면. “予雖童稚, 尙不以人遇此類。 獨
上人之倜儻不羈, 救人之急, 不望其報, 屹然有古義士之風, 羞與此流爲伍。”
43) 같은 글, 98면. “予惟人生霄壤間, 不幸趍向有異端之殊。 然其通塞貴賤, 在一念
善惡如何, 天豈厚薄於其間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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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들을 보면, 완역재는 유가의 사대부로서의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진리를 궁구하는 열린 태도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마음가짐과 마음의 운용이다. 완역재는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
로 당대의 선사들과 논할 정도로 깊이 있는 불교적 사유를 하였던 것으로 보
인다.
「寄濬和尙書」에서 그는 “하루 아침에 홀연히 布袋를 잃어버리고 한번 몸
을 통하여 땀을 흘리면, 문득 아미타불과 서방 정토가 스스로 나타날 것이니
어찌 상쾌하지 아니하겠는가![一朝忽然失却布袋, 一回通身流汗, 則彌陀淨
土, 當處自現, 其不快哉!]”45)라고 하여 禪을 통한 깨달음에 이르는 방식을
논하고 있다.46)
나아가 昭憲王后(1395-1446)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法華經, 法華經,
彌陀經, 梵網經을 엮고 쓴 「諸經跋尾」과 「華嚴經跋」 등을 보면 완역재
가 불교를 종교적으로도 수용하고 있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완역재 문학의 불교적 특징은 당대의 불교문화의 문학적 수용 및 형성화
방식과 관련지어 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여말선초 숭유억불정책에도 불
구하고, 서거정과 같이 유불교류에 비교적 적극적이었던 당대 문인의 인
식47)과 불교 관련 작품들을 비교 고찰한다면, 완역재 시세계의 특징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44) 晉山世稿 권2, 「寄濬和尙書」, 103면. “以聖人之敎言之, 心外無道, 道外無心。
苟不成格ㆍ致ㆍ誠ㆍ正之功, 尙何望修ㆍ齊ㆍ治ㆍ平之效乎?”
45) 같은 곳.
46) 이는 앞에서 살펴 본 「題寂照軒」에서 시적 화자가 성찰을 통한 깨달음의 순간
을 형상화하는 완역재의 구도적 시세계의 특징을 이해하는 일단이 된다.
47) 김상일(20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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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본고는 그 동안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던
완역재의 삶과 문학 활동을 시세계를 중심으로 고찰하여, 여말선초의 문단
과 예술 지형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고고아담"의 풍격을 지닌 완역재의 시세계는 탈속과 성찰의 자연 공간을
형상화하였으며, 꾸밈없는 古詩의 특성을 보였다. 修身과 學行을 바탕으로
한 그의 성찰적 태도와 깊은 불교적 사유는, 작품 안에 자아와 세상에 대한
성찰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또한, 언어를 조탁하여 기이하거나 화려한 시어들로 자신의 작품을 꾸미려
하지 않았고, 사색적인 태도와 담박한 어조로 경물을 담아냈으며, 여운을 주
는 방식으로 시적 화자의 정서를 응축하여 표현하는 정적인 시세계를 그리고
자 하는 특징을 보였다.
장편의 고시를 통해 시적 대상에 대한 비교적 적극적인 생각을 표현하고
자 할 때에도, 질박하게 시상을 전개하였으며, 작품에 따라 강한 어조에서
느껴지는 호방한 풍격 역시 사사로운 감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義氣로서
의 감정이 발현된 것이었다.
이러한 완역재 시세계의 특징이 당대에 옛 시의 풍격을 얻었다고 평가받
았던 이유라고 생각된다.
앞으로 완역재의 개별 작품에 대한 보다 미시적인 분석 및 당대 문인들과
의 교유 양상과 문학 활동 등의 비교 분석이 진행된다면, 완역재 문학적 성
취와 그 의의가 더욱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투 고 일 : 2016년 05월 10일
심사기일 : 2016년 05월 21일 - 05월 29일
게재확정 : 2016년 0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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玩易齋 姜碩德의 詩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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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Detailed Analysis into the Poetic Works of Kang Seok-deok
Kang Hye-jong
(Yonsei University)
This paper analyzes in depth the life and poetic works of literature
by Kang Seok-deok, (1395-1459), who is a crucial figure in the
literary field in early Joseon period, yet immensely under- researched
by scholars.
Son of Kang Hoi-baek (1357-1402), father to Kang Hui-an (1417-
1464) and Kang Hui-maeng, he is also the son-in-law of Sim-on and
brothers-in law to King Sejong. Revered for his exceptional ways with
writing and sophisticated taste for paintings, Kang Seok-deok’s literary
works appear in “Jinsansego”, a three-generation anthology which
Sasukjae compiled along with works by Tongjeonggong and Injae, and in
books such as “Dongmunseon”
While there are few records of his life and works, records show Kang
Seok-deok strived to maintain an introspective life through the
manifestation of human nature and the implementation of his experience.
His theological idea of his life is imprinted in his poetry. It also
contributed to his poetic style through his experience of interchanging
Chinese poems under the guidance Yi Haeng (1351-1432).
From Sasukjae’s commentary, Kang Seok-deok’s works were highly
considered for its “traditional, highly sophisticated and unaffected”
南冥學硏究 제5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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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He did not attempt to elaborate his language nor tried to adorn
his works with grandiose poetic words, and portrayed with a
thoughtful attitude and a plain, simple tone in such a way that the
effect lingered. Through these, he concisely expressed the sentiments
of the poetic narrator, with a tendency of opting to depict a tranquil
poetic universe. In particular the image of nature as the means and
backdrop of escaping the secular world in introspect is a consistent
trait of the poet’s works. This seems not only due to his literary
disposition, but also his deep Buddhist believes.
Through his feature length traditional poems, Kang Seok-deok
inclined to omit using or constructing poetic words for ornate
purposes, leaning towards an unadorned, succinct style. The virile
character of the narrative shown at times with a surging emotion of
devotion to righteousness, with all its impurities abolished. Through
these traits the poet is considered to possess all the virtues of a
classical poem.
key words : Kang Seok-deok, poetic works, Jinsanse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