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가 좋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다라니를 정당화시켜도
그것은 이치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실이 없는 것이며
이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우매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 이러한 말법의 영향 탓으로
각 종파마다 독특한 주문을 만들어 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주문이 신성한 천신의 기운을 받게하며
자신들을 선택받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높은 천상의 신이
자의로 자신들의 기운을 인간세상에 내려보내지 않습니다.
높은 차원의 신들은 세상의 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세상에 떠돌면서 세상일에 관여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이 세상에 집착이 있어 머물게 되면
세상의 끈적끈적한 인력에 끌려 다시 재생해야 하는 업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차원에 이른 영혼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아니하고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시중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영적 현상은거의 대부분 세상에 한과 집착이 많은 말법의 인연을 지닌
하급령의 장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환상의 신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세상을 올바른 이치로 밝히는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없으며
대부분 일시적인 신비현상으로 사람들을 현혹할 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급령들은 주문을 통해 산자와 죽은 자의 신호로 삼고
산자 속으로 들어와 영적 작용을 일으키며
세상을 어둠과 말법에 빠뜨리게 됩니다.
따라서 주문은 산자와 죽은 자의 암호로
죽은 자를 불러 영혼을 팔아 그 종이 되는 일이니
잘못된 인연으로 말미암아 함부로 주문을 외우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높은 차원의 신은 자신의 뜻을 이치로 나타내는 것이지,
자신을 섬기는 자에게 나타나 자신이 만든 이치까지 어겨 가면서 편파적으로 도와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면 도와주는 현상은
대부분 하급령의 집착이며 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신이 행동에 의해 결과를 받는 것이 우주의 원리이며 하늘의 뜻인 것이니
이를 명심하여 영에 의지하는 일은 금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 밀교의 특징은 신앙적 요소입니다.
부처님의 법이 여느 인도 종교와 다른 점은
진리를 강조하고 신을 중시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원래 불교는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이라고 하는 붓다의 가르침처럼
스스로 청정한 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자신을 완성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신을 중시하지 않으며
의례나 예배의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믿고 진리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의 정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대중화되고 변질되면서
대승불교에 와서는 붓다가 중생 구제를 위한 신의 화신으로 변하게 됩니다.
즉 브라만적인 인도에서 자리잡기 위해서 불교는 인도민중의 토속적인 신앙과 기복적인 욕구에
적극 영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고
민중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힌두신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불교는 인도인들의 정서에 맞게 변해갔지만
결국 인도의 토속신앙인 힌두교와 비슷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입니다.
이때 힌두교 신으로서 불교에 들어온 신으로는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부동명왕(不動明王), 변재천(辨才天)등이 있습니다.
제석천은 베다에서는 일체의 악마를 정복하는 천둥벼락의 신이었으며,
우빠니샤드 시대에 와서는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모든 신을 주재하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던 인드라(Indra) 신입니다.
범천(梵天, Brahman)은 브라만교에서
만유의 근원인 브라흐만을 신격화한 우주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는 제석천과 함께 불법수호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부동명왕은 힌두교에서 시바신의 다른 이름으로 아찰라나타(Acalanta)라고 하는데
대일여래의 화신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변재천은 불교에서 지혜·변설(辯舌)·기예(技藝)의 여신으로 힌두교의 신이며
사라스바티(Sarasvat)의 역어입니다.
변재천은 이 경을 설법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 지혜·장수·재산을 준다고 합니다.
그 이외에 절에서 많이 보는 사천왕은 원래 힌두교의 신화에서는 호법신이었는데
동방을 수호하는 지국천은 힌두신인 드리따라쉬뜨라,
남방을 수호하는 증장천은 비루다까,
서방을 수호하는 광목천은 비루빡샤,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은 바이슈라바나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금강역사(Vajradhara)는
원래 인도에서 문을 지키는 야차의 종류에 속하는 수호신인데
불교에서는 이를 인왕(仁王)이라 하여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도입합니다.
팔부중도 불법을 수호하는 8 가지 신으로서 원래는 고대 인도의 신들이었습니다.
그 성격은 악마나 귀신이지만 붓다에게 교화되어
10 대 제자와 함께 붓다의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천은 데바, 용은 나가, 야차는 약샤(Yaks), 아수라는 아수라(Asura),
건달바는 간다르바(Gandharva), 긴나라는 낀나라, 가루라는가루다(Garuda),
마후라가는 마호라가(Mahoraga), 대흑천은 마하깔라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밀교 시대(7∼8 세기)에 이르게 되면
여러 관음 신앙이 나타나 예배형식이 확립되고, 특별한 가피력이 보편화됩니다.
특히 관음신앙은 북서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 지역의 토착신앙을 흡수하여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관세음보살은 범어로 아와록까떼쉬와라로
구원을 구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고,
나타나는 모습이나 형태에 따라 천수(千手) 십일면(十一面) 여의륜(如意輪)
준제(准提) 마두(馬頭) 등의 이름이 있습니다.
천수관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인드라 신이나 비슈누, 쉬바 같은 힌두신들의 특성이
불교적으로 변용된 것입니다.
준제관음은 춘디(Chundi)라고 하는 힌두의 토착적요소가 강한 여신입니다.
마두관음은 하야그리바(Hayagriva) 신으로서
원래는 비슈누의 화신이라고도 하고,
혹은 물고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비슈누에게 살해된 악마라고도 합니다.
청경관음은 쉬바 신의 다른 이름인 닐라깐타(푸른 목을 가진 존재)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인도의 여러 지방에서 쉬바 신의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의륜관음은 찐따마니짜끄라, 대세지관음은 마하스타마쁘라따라는 힌두식 이름이 있습니다.
그외 지장보살은 크시티가르바(Ksitigarbha),
미륵보살은 메이뜨레야(Maitreya),
문수보살은 만주슈리,
보현보살은 사만타바드라(Samanthabhadra), 일광보살은 수르야쁘라바,
월광보살은 짠드라쁘라바(Candra-prabha),
십일면관음은 에까다샤무카인데
그 원형은 고대 인도의 폭풍의 신 루드라(Rudra)에서 유래합니다.
그 중 가장 주목해야 될 사항은
굽따 왕조 후기(AD 500년경)에 힌두교 내에서
붓다가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수용된 것입니다.
이는 힌두사회가 불교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편입시킨 사례로서
불교가 힌두교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인도사람들은 비슈누 신이나 붓다
그리고 쉬바 신이나 아와로까떼슈와라(觀音菩薩)의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는 힌두교의 한 종파로 정착되어
인도사회 내부에서 안정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결국 불교와 힌두교는 구별이 사라지게 됨으로써
마침내 인도에서 사라지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5. 밀교의 기본 교리
밀교의 교리에 관한 내용은 이글의 취지에 어긋나나
사실을 바로 알아야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올리는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밀교는 기존의 불교의 가르침과 같이
중생에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달은 覺(bodhi)의 세계에서 본 교리와 사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보다 시각적이고 육감적이며 상징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데
만다라라고 하는 그림을 활용합니다.
만다라는 원래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세계를 말한 것이나, 그 의미를 변형하여수행의 도량 또는 부처님과 보살상,
그리고 제존을 봉안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밀교에서는 중중무진한 법계연기의 세계,
불성이 법성화한 깨달음의 세계를 태장계(胎藏界)
만다라와 금강계(金剛界)만다라로 그리고 있습니다.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은 밀교의 두 경전인데
태장계만다라는 대일경사상을,
금강계만다라는 금강정경사상을 각각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태장계만다라는 중생에게 원래 갖추어 있는 맑고 깨끗한 본성(보리심)을 나타낸 것으로
이법신(理法身) 또는 이만다라(理曼茶羅)라고도 하며
금강계만다라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 무명의 상태에서 수행하여
그 본성인 보리심을 깨달아가는 수행과정을 나타낸 것으로
지법신(智法身) 혹은 지만다라(智曼茶羅)라고도 합니다.
밀교적 교의에 따르면 태장계만다라와 금강계만다라 곧 이법신(色法)과 지법신(法法)으로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며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본체(本體)와 현상계가 서로 둘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밀교에서는 연기의 근원이 되고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실체를 육대(六大)로 파악하고 있는데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이 그것입니다
지(地)는 그 성질이 견고부동하여 만물을 능히 생성(生成)하고보호하는 덕성과 그 작용을 의미하고
수(水)는
그 성질이 습윤(濕潤)하여 만물을 능히 섭수(攝受)하는 작용을 뜻하며.
화(火)는
그 성질이 따뜻하여 만물을 성숙시키는 작용을 말하고
풍(風)은
그 성질의 유동성이 있어 만물을 장수(長養)하는 작용을 가리킵니다.
공(空)은
그 성질이 무애하여 일체를 포섭하며 걸림이 없는 작용을 말하고,
식(識)은
명료하게 아는 요지(了知)의 성질이 있어 결단하고 판단하는 작용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육대(六大)에 있어서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등
오대(五大)는 색법(色法)으로서 물질적 근원을 의미하고,
식대(識大)는 심법(心法)으로서 정신의 실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색법(色法)과 심법(心法)의 관계에 있어서
오대(五大)를 떠나 식대(識大)가 있을 수 없고
식대(識大)를 무시한 오대(五大)도 생각할 수 없다고 합니다.
색법과 심법이 서로 걸리지 않는 연기적 관계에 있는 것은
육대(六大) 자체가 각기 다른 나머지 오대(五大)를
그 자체안에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地大는
단순한 지대(地大)가 아니요
그 자체에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 등 다른 오대(五大)를 갈무리하고 있고
수대(水大) 또한
여타의 지(地) ·화(火) ·풍(風) ·공(空) ·식(識)을 자체 내에 갈무리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色法(五大)을 나타낸 태장계만다라와 心法(識)을 체계화한 금강계만다라도
서로 무관한 관계가 아니요,
서로 무애한 연기적 불이(不二)의 관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밀교에서는 우주와 인생을 형성하는 본체를 六大로 파악하고,
六大의 연기에 의하여 생성된 모든 존재의 모습을
다시 대만다라(大曼茶羅), 삼마야애다라(三摩耶愛茶羅), 갈마루다나(褐磨壘茶羅),
법만다라(法曼茶羅) 등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모든 법의 실상으로서의 4종 만다라는 종교적 의미와 철학적인 뜻이 있는데
먼저 종교적 의미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만다라는 회화 조각 등으로 표현되는 불상의 집대성과,
그 각각의 불상 보살상이 갖추고 있는 相好의 덕성을 말합니다.
삼마야만다라는,
관음보살이 연꽃을 가지고 있음은
동체대비와 물들지 않는 것을 상징하고,
문수보살이 칼을 가지고 있음은 큰 지혜로써 범부의 어리석음을 끊는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모든 불상과 보살상이 가지고 있는 물건과
그 수인 등의 특성을 삼마야만다라라고 합니다.
갈마만다라(karma-ma)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중생구제를 위하여 행하는 일체의 활동을 의미하고,
법만다라(dharma)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명칭과 그 가르침의 내용을 말합니다.
4종 만다라는 이와 같은 종교적 의미 외에도,
현실적인 철학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대만다라는 六大로 구성된 우주와 인생의 전체적인 모습을 말하고,
그러한 전체는 개체가 모여서 형성되는데
이러한 전체를 이루는 개체들의 독립된 모습을 삼마야만다라라고 합니다.
갈마만다라는 일체의 존재와 사물의 활동작용을 말하고,
독립된 개체가 자기 그 특수한 활동작용에 따라 나타내는
언어 ·문자 ·음성 ·명칭 등을 법만다라라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4만다라의 종교적 철학적 의미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모두가 4만다라의 모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일체의 만상이 다 육대 법신의 현현인 까닭으로
하나의 티끌에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대만다라요, 산천초목 모두가 삼마야 만다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전에 기록된 일체의 문자를 비롯하여
우리들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언어, 명칭와 새소리, 바람소리에 이르기까지
법만다라 아님이 없고,
인간들의 일상적 활동작용을 위시하여 자연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갈마만다라라는 것입니다.
밀교에서는 우주와 인생의 진리와 참모습이 만다라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인간은 무지의 구름에 가리워 그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갖가지의 불행과 악을 자초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밀교에서는 육대의 체와 사만다라의 모습에 대한 작용의 세계를 설명하고 중생으로 그 실상을 깨닫고 체득케 하기 위하여
그 수행방법으로 삼밀작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행위가 짓는 업에는 신, 구, 의(身, 口, 意) 삼업이 있는데
삼밀(三密)의 청정으로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을 깨끗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언어와 생각과 행동은 법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릇이고
진리와 합일하는 비밀의 통로이기 때문에
이것을 청정하게 하면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는 것입니다.
몸으로 나쁜 일을 하는 대신 불보살의 행위인 結印을 하고,
입으로는 좋지 못한 말을 하는 대신 진리를 상징하는 언어인 眞言을 염송하며
마음으로는 삼매에 들어 법신인 大日如來의 덕성을 생각하며
만다라(曼茶羅 mandala)나 얀트라(圖象 yantra)를 명상하면
중생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이러한 중생의 수행방법인 有相三密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佛은 이미 法性 그 자체이기 때문에 六大대로 구성된 법계의 體相을 그 身密로 하고,
그 일체의 음성 ·명칭 등 법 만다라를 語密로 하며,
그 무소부지한 주변의 識大를 意密로 하기 때문에 이것을 佛의 三密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밀교 수행자가 三密을 행하면 부처님(大日如來)의 덕성과
그 삼밀의 위신력이 수행자의 三密에 상응하고,
유상삼밀을 행하는 수행자의 신심이 부처님의 삼밀과 加持하게 되어
부처님의 身密과 중생의 신밀이 加持하고 부처님의 意密과 중생의 의밀이 서로 감응하여
결국은 범부와 부처님이 서로 깨달음을 계기로 만나게 되고 중생과 법신이 一加하게 된다고 봅니다.
중생이 삼밀가지의 수행을 닦아 일단 가지성불을 하고 나면,
별도의 結印과 특수한 眞言의 지송이 필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성불의 입장에서는 육대법신과 사만다라가 깨달은 자의 실체이므로
일체의 행위가 결인 아님이 없고,
모든 언어와 음성이 그대로 眞言이요, 일체의 마음이 그대로 三摩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밀법을 행하는 자의 일신 三密上에 우주만유의 덕상이 모두 갖추어져
우주법계의 大我를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즉 밀교는
바로 이러한 육신 성불을 목적으로 하여 수행한다는 완벽한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6. 밀교 교리에 대한 비판
그러나 이 말들은 논리는 그럴 듯 한데 그 전제가 잘못 되었습니다.
이것이 절대적 진리이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을 대각을 이루었다고 증명된 각자가 설했어야 하며
그분이 만다라를 그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교경전이 만들어질 7세기경에
당시 인도에 대각을 이룬 부처가 나타났다는 역사적 증거가 없으며
지금의 서지적 결과에 의해서도 대일경과 금강정경은
모두 후기에 논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입니다.
즉 밀교의 경들은 정각을 이룬 분이 반야심에서 본 진리의 실상이 아니라
논사들의 머리에서 나온 관념과 논리인 것이며
태장계(胎藏界) 만다라와 금강계(金剛界)만다라 또한
수행자들이 명상의 과정에서 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깨달음의 세계를 모두 안다는 듯이
진리의 법계를 설하고 그러한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인간의 허황된 관념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후기 불교의 논리가 실상의 진리가 아니라 생각 속에서 지어진 관념에 불과하니
이를 믿는 이들 중에 정각을 얻은 이는 나타나지 않고
탄트라 불교라는 기이한 형태가 나타난 것입니다.
부처님은 만다라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실상에 존재하는 사실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상과 관념으로 만다라를 그리고, 태장계만다라와 금강계 만다라를 조화시켜
지혜와 방편, 심법과 색법, 본질과 현상계를 조화시키려고 하고,
남녀간의 합일을 통하여 해탈의 열락을 체험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생각 속에서 지어낸 관념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힌두교의 탄트리즘에서 시바와 샤크티와의 관계를
불교적으로 지혜(般若)와 방편(방편)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놓았을 뿐
그 바탕에 있어서 양자는 전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불법을 왜곡시키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남녀간의 열락을 깨달음의 환희와 같다고 생각하여 도의 본체로 삼지만
이러한 논리가 얼마나 부처님의 종지와는 어긋나는 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바른 이치를 알아 마음을 닦아나가면
점차 심신 속에 끼어있는 습이 사라져 업이 걸리지 않은 맑은 해탈심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때 성욕 또한 하나의 습으로 떨어져나가기 때문에
해탈한 자는 점차 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올바른 이치이며 정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종지와 정반대로 남녀간의 성생활을 법의 요체로 하고 있으니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관념적이며 말법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을 습으로 삼는 자는 결코 성을 벗어나지 못함은
인과의 원리상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들은 수행에 있어서도
몸과 말과 마음의 삼업을 닦는 삼밀
(진언과 만다라에 대한 명상과 결인)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또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진리의 음성인 진언(眞言, mantra)을 염송한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진언은 부처님이 밝힌 실상 속의 진리가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인도 브라만교의 주문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깨끗이 하자면
먹는 것을 조심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여 기을 유통시키고
몸의 탁한 성분을 배출해야 하는 것이며
바른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진언을 외울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진리를 배우고 깨달아 그 이치를 습득해야만
세상을 보는 바른 시각이 생기고
좋은 마음이 생겨 좋은 업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진언을 잘못 외우면
그 속에는 영계의 주문이 있어
사람을 신령의 노예로 만들게 되니 매우 조심해야할 현상인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그 이치를 밝혀 좋은 원인을 지어야 하는 것이지
주문을 외우고 신에 의지한다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밀교에서는 마음을 닦기 위해서
만다라(曼茶羅 mandala)나 얀트라(圖象 yantra)를 마음에 새기고
대일여래의 성품을 관상한다고 하는데
명상해야 할 것은
부처님의 자비심이며
세상에 대한 사랑이며
중생에 대한 보살행인 것입니다.
아무리 만다라를 관상한다고 한들 그 속에는 참된 뜻과 이치가 없으니
바른 이치가 없는 그림은 사람을 공허하게 만들고 환상에 빠지게 할뿐입니다.
모든 불법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이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체를 정화하기 위하여
좌법, 호흡, 인계(印棨 mudra) 등을 수행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좌법으로 요가를 수행하고
결인을 하여 기를 받아들이고 한다고 해서
신체가 정화되거나 마음이 밝아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를 받아들인다 한들
마음은 외부에서 돌고 있는 기보다
더욱 미세하고 고차원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마음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며,
삶을 통하여 닦는 것입니다.
지금 각 종파에서 유행하고 있는 각종 명상기법이
말법이 되고 있는 것은
마치 그것이 수행의 전부인 것처럼 되어
삶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삶에서부터 시작되며 삶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삶을 소홀히 하는 진리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무용지물입니다.
귀하가 정녕 부처님의 깨달음이 정각이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부처님이 왜 고행과 선정에서 벗어나
바른 마음으로 바른 시각을 얻고
바른 이치에 따라 바르게 행동하여
바른 원인을 짓는
팔정도가 올바른 수행법이라고 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불교가 사실을 기초로 한 진리이며
바로 보고, 좋은 원인을 짓는,
실천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밀교는 힌두교의 관념과 논리를 차용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신비적인 열락을 추구하는 힌두교와 유사하게 됨으로써
스스로 진리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인도에서 소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출처 : 진실의 근원 / 허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