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의 문종(1046~1083)과 숙종시대(1095~1105)를 살았던 인물로 불교에 관한한 입지적인 인물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義天)이다.여기서 대각(大覺)이라 함은 크게 깨달은자를 뜻하는 부처
(佛)와 상통하는 호칭으로 의천(1055~1101)이 사후 고려 황실과 조정으로 받은 '시호(諡號)' 다.그리고 불교
국가에서 국사(國師)란 승직은 아무나 할수없는 직책으로 '국가나 왕의 사표(師表)가 되는 고승에게 왕실(왕명)
과 조정이 내려주는 칭호로 왕사(王師)보다 높은 최고위 승직' 이다.고려시대 국사에 대한 최초의 임명은 고려
광종 19년(968)에 혜거(惠居)를 국사로 삼은 것에서 부터 비롯한다.또한 의천(義天)이란 호칭은 이름이 아닌
자(字) 였으며,그의 실제 이름은 '후(煦:왕후)'였다.그러나 의천은 평생 후(煦)라는 이름을 사용치 못했는데 그
이유는 북송의 철종(1086~1100) 임금의 이름이 왕후의 후와 같은 조후(趙煦) 였기 때문이라고 고려사는 전한다.
2, 문종의 4째 아들이자 숙종의 바로 아래 동생이기도 했던 대각국사 의천이 입적 했을때 고려의 왕실과 조정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재주와 덕행의 탁월함을 칭송하며 국사(國師)로 추존했고,이어서 왕을 비롯한
신하들이 상례의 상복인 '현관(玄冠) 과 소복(素服)을 입고 3일간 조회를 중지' 했다.이어 부의를 후하게 함과
동시에 책명까지 내려 '대각국사'로 추증을 하고,제자들 에게도 교서를 내려 조문을 했다 고 고려사 열전에 쓰여져
있는 것을 보면,의천이 고려를 대표하는 큰승려였음은 틀림이 없다.그의 득도와 공부과정을 설명할려면 너무
길어지고 늘어질 것 같아 본론으로 들어가서 애기하면,고려 대각국사 의천은 '불교 천태종의 개창자(창시자)'
였다.그리고 그의 형인 고려 숙종은 즉위 2년(1097년) 2월에 천태종(天台宗)을 창시한 자기 동생 의천을 위해
그 유명한 '국청사(國淸寺)'란 사찰을 지어주고 주지를 맡겼다.그리고 불법을 나라 전체에 전하게 함을 물론
제외각국에서 가져온 불교 서적들도 번역 간행하게 해 주었다.
3, 이로서 의천이 천태종의 개창자로 초대 국청사의 주지가 된다.국청사란 '불법이나 불심으로 나라의 근심 걱정을
깨끗히 없에게 한다' 의미를 지닌 국영 사찰명이다.고려왕들과 의천이 자주 갔었던 영통사(靈通寺) 역시 '부처의
불심(령)과 상통하는 나라를 기원하는' 뜻의 사찰명이고,의천과 연관이 깊었던 흥왕사(興王寺)는 '왕업의 번성을
기원' 하는 사찰 이름이다.문제는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이 개창(창시)한 천태종이란 불교의 종파가 어디에서 시작한
것이냐 다.분명한 것은 반도는 절대 아니다.고려조정도 대각국사 의천도 반도의 그 어는곳도 해당사항이 없다고
역사서나 불조통기에 쓰고있다.조계종(曹溪宗)이 지금의 '광동성 소주(韶州:지금은 소관)의 곡강현 조계동(조계산)'
에 시원을 두고있고,또한 태고종(太古宗)이 강소성 태호 남쪽인 '절강성 호주(湖州)의 하무산(霞霧山)의 태호국사'
에서 비롯한 것 처럼,대각국사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天台宗) 역시 지금의 '절강성 천태현(天台縣)의 천태산(山)'
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열도 일본의 천태종도 여기서 분종(파)되어 간 것이고 그것도 근현대사의 얘기다.
4, 19세기 중반 조선의 화서학파의 종장인 이항노가 대륙의 화동지역(華東)에 고려가 있었다고 말했고,역사의 기사는
강소성 오현(吳縣)에서 날 좋으면 3일이면 갈수있는 곳에 고려가 있다고 했다.또 조선아가(朝鮮兒歌)에서도 지금의
강소성 소주(蘇州)에서 육로로 가까운 동쪽에 고려가 있다고 했으며,송시열의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지금의 강소성
구용현(句容縣)에 있다는 것을 감안해,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과 1대 주지를 했다는 국청사(國淸寺)를
찾아가 보자.고려의 숙종 황제가 지어주고 그 동생인 의천이 주지를 했던 고려의 그 국청사는 지금 '절강성 천태현
천태산 자연관광 지역내' 의 아름다운 유명 사찰인 국청사로 자리하고 있다.의천의 천태종과 고려의 국청사를 있게한
그 천태산(天台山)은 지금의 절강성 천태현의 북쪽에서 선하령과 천태산맥이 겹치는 지역에 오롯히 있으며 천태산의
최고봉 높이는 해발 1,100 미터 인데, 이칭은 '화정봉(華頂峰)' 이다.즉 '법화경과 화엄경이 자리를 편(보금자리) 으뜸
지역임을 의미하는 산 이름이다.바로 이곳에 고려의 대가국사 의천의 국청사가 지금도 있는 것이다.
5, 현 천태산의 천태종 국청사는 원나라 시대에 소실되어 청대에 중수한 것인데 지금도 넓은 면적에 전각,불우,승방이
600여칸을 자랑하고 있고,승려들이 공부하는 강당만 해도 7동이나 된다.지금은 없어져 아쉽지만 고려의 아주 중요한
유산이 있었다.즉 고려의 인종시대와 명종시대를 살았던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유공권(柳公權:1132~1196)이 대각국사
의천을 숭모하고 고려 국청사를 자랑하기 위해 '대중국청지사(大中國淸之寺)' 란 편액을 써준것을 볼수없다는 사실이다.
혹시나 모르겠다 지금쯤은 써서 걸어 놓았을 지도.우리는 여기서 고구려나 고려가 '가운데와 중앙(핵심지역)' 의 뜻이며
중국(中國)을 다르게 불렀던 '케세이,키타이,카레이,까오리,까우리'와 상통한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즉 홍콩
의 케세이 항공은 '중국항공' 이란 서구권(특히 러시아어권)의 다른 표기다.1930년대 후반에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연해주인들이 조선인이라고 하지 않고 '원동에서 온 고려인' 이라고 말하는 원의는 곧 '먼 동쪽(동방)에서
온 중국인' 이란 뜻의 다름 아니다.
6, 역사의 고려국이 대륙의 황제국이었다는 사실은 고려사에도 직접 서술되고 있다.대각국사 의천의 아버지이자 고려의
11대 왕인 문종(1046~1083)은 아들을 13명이나 두었다.아들중 4명은 순종(1083)->선종(1083~1094)->헌종(1094~1095),
->숙종(1095~1105)으로 이어지는 왕위를 물려받아 왕을 했었다.아들중 승려가 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을 고려
문종이 제후로 임명을 했다.그 정황을 고려사 열전 기사에서 찾아보면 이렇다.'상안공 왕수(常安公),금관후 왕비(金官侯),
변한후 왕음(卞韓侯),낙랑후 왕침(樂浪侯),조선공 왕도(朝鮮公),부여후 왕수(扶餘侯),진한후 왕유(辰韓侯)등을 두었다고
쓰고있다.즉 반도가 아닌 대륙의 넓은 땅에서 고려의 문종 황제는 자신의 아들 7명을 앞에 열거한 대륙지역에서 왕(제후)
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이다.이런 역사 지명들은 모두 현 대륙의 화동지방을 중심으로 북방과 남방에 넓게 포진하고 있었던
고대 나라명이자 지역명이란 것을 알아두자.또한 고려 왕실과 조정은 '개성후(開城侯),평양공(平壤公),한산후(漢山侯),대방공
(帶方公)'등 많은 지역에 제후왕들을 임명해 통치하고 있었다.어찌보면 조씨의 북송과 남송의 역사나 이력이 왕씨의 고려와
많이 닮은것이 아닌가 한다..
첫댓글 잘 알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확실히 고려는 대륙에 있었다고 생각하시면서... 끝끝내는 비슷하지 않나고 매듭지으시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