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사 (直指寺)
2024. 12. 29.
직지사와 사명당의 인연
유정(惟政) 사명대사는 14세 때에 모친을 여의고 15세 때 부친 마저 돌아가시자 정신적 방황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직지사에 왔다가 은행나무 그늘 아래 널찍한 바위를 발견하고 바위 위에서 낮잠을 잤습니다. 당시 주지 신묵화상이 벽안당에서 참선하던 중 사천왕문 앞에 황룡이 승천하는 환영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나가보니 한 아이가 바위 위에서 곤히 잠을 들어 있었습니다. 신묵대사는 이 아이가 자신이 꿈에서 본 황룡임을 직감하고 거두어 제자로 삼았으니 그가 사명대사입니다. 16세 되던 해에 1560년(명종15년) 직지사에서 출가한 사명대사는 17세에 승과의 선과(禪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사명대사는 1573년(39세)에 직지사 주지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바위는 신묵화상과 사명대사의 법연이 서려 있는 역사적 장소입니다.
직지사 대웅전(直指寺 大雄殿)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건물이다. 직지사 대웅정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조선 전기에는 대웅대광전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려 선조 35년(1602)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이후 인조 27년(1649)에 중영(重營)이 있었고, 영조 11년(1735)에 다시 중창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지붕 형식은 겹치마 팔작지붕이다. 직지사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짜임새가 있으며, 높은 천장에 화려하면서 절제된 장식은 종교적인 장엄함을 더한다. 세 분의 부처님이 낮아 계신 수미단은 효종 2년(1651)에 조성된 것으로 용, 물고기, 개구리, 연꽃 등 여러 무늬들을 소박하게 조각하였다. 폭이 9m에 이르는 후불벽 뒤에는 활달한 필치로 관세음보살을 그렸으며, 다른 벽면도 화려한 벽화들로 장식하였다.
대웅전 삼존불탱화(大雄殿 三尊佛幀畵)
대웅전 수미단 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불과 서쪽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불상 뒷벽에는 각 부처들의 설법 장면을 그린 석가모니후불탱, 약사후불탱, 아마타후불탱 등 3폭의 불화가 걸려 있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불화들은 모두 길이 6m가 넘는 거작으로 영조 20년(1744)에 직지사의 세관(世冠) 스님을 비롯한 16명의 화승(畵僧)들이 그린 것이다. 각 폭마다 여래를 중심으로 보상, 나한, 헌왕, 신장 등을 배치하였고, 채색은 적색, 녹색, 황색을 주조색으로 설채하였다. 짜임새 있는 구도, 각 존상(尊像) 표현에 보이는 뛰어난 묘사력, 차분한 색조와 조화로운 배색, 화려하고 섬세한 표현 등이 어우러져 장엄한 불교회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직지사 삼존불탱화는 작품성과 규모에 있어 조선 후기 불화를 대표하는 우수한 직품이다.
강락사지 삼층석탑(江洛寺址)
이 탑은 통일신라 말기(9세기)의 석탑으로 원래 구미시 선산읍 원동 낙동강변 강락사터로 전해지는 절터에 무너져 있던 것이다. 1968년 경북 선산군 군청 앞뜰로 옮겼다가 1980년 다시 이곳으로 옮겼으며 이때 상륜부를 추정 복원하였다. 기단이 단층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양식을 고루 갖추고 있다. 기단은 한 면을 두 장의 돌로 짜맞추었는데 안기둥과 귀기둥을 돋을새김했을 뿐 별다른 장식은 없다. 탑신을 이루는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몸돌에는 다른 장식 없이 귀기둥만 돋을새김하였으며, 지붕돌에는 수평을 이룬 처마선 아래로 5단의 처마받침을 두었다. 1층 몸돌의 높이는 2. 3층에 비하여 성큼하게 높으면서도 폭과의 높이의 비율이 1:1에 가까우며 지붕돌의 두께와 폭이 알맞아 단층기단의 탑이면서도 차분한 안정감과 경쾌한 균형감을 보인다.
“포대화상”은 불교의 나눔을 상징하고 있는 스님이다. 중국의 스님으로 이 “자유로운 영혼”은 중국 명주 태생의 선승(禪僧)이다. 이름은 계차(契此), 사람들에게 기부받은 물건을 담은 포대를 메고 거리를 배회해 “포대화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포대화상은 전란으로 부모를 잃고 걸식하는 고아, 굶주린 이들을 위해 종일 탁발하고 그것을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줬다. 그에게 물건을 얻은 가난한 이들은 그때부터 재복이 일어 가난을 면하고, 음식을 얻어먹은 이들은 먹을 복이 생겨 굶주리는 일이 없어졌다한다. 포대화상이 빛나고 사랑받는 것은 재물을 쌓아두지 않고 어려운 이들과 나눠야 복되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명각 및 사명대사
사명각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진영(塵纓)을 봉안하여 대사의 자취를 길는 건물로 조선 정조 11년(1787)에 창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75년 박정희대통령의 지원으로 중창한 것이다. 현판도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구식 기단 위 자연석 초석을 설치하였다. 일축목 이익공 양식이며 부연을 덧달아 낸 겹처마 형식이다. 사명 유정(惟政)(1544~1610)은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성사의 볍명을 유정, 호는 송운(松雲.사명(四溟)이고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명종 15년(1560) 이곳 직지사(直指寺)에서 신묵화상(信黙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출가 후에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서산대사를 찾아가서 참선, 수행하며 진리를 탐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 67세릐 일기로 가야산 해인사에서 입적하였다.
사명대사의 사상
사명성사의 생애에서 불교의 호국사상(護國思想)과 중생구제(衆生救濟)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임진왜란 초기 사명성사는 불법(佛法)으로 일본군의 칼을 거두게 하여 9개 군을 수호했다. 사명성사는 잔혹하고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는 왜군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감화함으로써 물리친 것이다. 이러한 사명성사의 사상은 출가 수행자로서 대승불교의 보살행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사는 불살생의 계를 지키는 일과 왜군을 맞서 싸움으로써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백성을 지키는 일을 놓고 고뇌한 끝에 분연히 일어서서 왜군과 맞서 싸우는 길을 택하였다. 이는 작은 악으로 더 큰 악을 먹는 계차법(階差法)의 지혜이기도 하였다. 수행자답게 사명성사는 전쟁이 끝나자 산사로 돌아갔다. 성사의 활동은 자비심으로 백성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지 자신의 공명을 탐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성사는 에오라지 자비행을 통한 호국애민의 실천으로 살다간 구국의 스승이다.
오유지족(吾唯知足)
이 네 글자 모두 입 구(口)자가 공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아를 중심에 두고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상하좌우의 각 방향에 한 글자씩 배치하였습니다. 오유지족은 “나는 오직 만족함을 알 뿐이다”로 풀어낼 수 있으며, “자신의 분수를 알고 적은 것에도 만족할 중 알아야 해복해진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맑은 물 한잔으로 마른 목을 축이고 마음까지 넉넉히 채워 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