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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을 사직하면서 겸하여 소회를 진달하는 상소〔辭持平兼陳所懷疏〕
···················································································· 병산 이관명 선생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타고난 성품이 용렬하고 우매하며 재능과 식견이 공허하고 천박하여 과거 공부를 엉성하게 익히다가 늦게 급제하였는데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지기(志氣)는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하읍(下邑)에서 벼슬하여 운 좋게 어머니를 봉양하려는 소원을 이루게 되자, 영화로운 벼슬길에 마음을 끊어 승진하고픈 바람이 더 이상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 칠십 노모의 숙환인 담화병(痰火病)이 허약한 틈을 타서 재발하였는데, 증상이 위독하고 한 달이 넘도록 지속되어 다급히 의원을 찾아보고자 휴가를 받아 상경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새로이 사헌부의 관직에 제수하는 명이 별안간 길을 떠난 뒤에 나왔으니, 신은 이 소식을 갑자기 듣고는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은혜로운 소명을 비록 중도에 어기긴 했지만 신의 분의(分義)에 있어서는 감히 지체할 수 없었기에 마지못해 도성에 들어가 사가(私家)에서 움츠린 채 간절한 심정을 아뢰어 부월(斧鉞)의 형벌을 무릅쓰면서 어울리지 않는 직명(職名)이 불시에 환수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사(喉司 승정원)는 신의 사정을 헤아려 주지 않고 줄곧 물리치기만 하니,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황공할 따름입니다.
지금 나라의 기강은 떨치지 못하고 인륜의 상도가 무너져서 사나워진 인심은 이미 고질화되고 분열된 조정의 의논은 구제할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강직하고 방정하여 과감하게 직언하는 선비를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책임을 완수하기 어려울 것인데, 신의 용렬함이야 본인이 매우 분명히 알고 있으니, 어떻게 일마다 올바른 이치로 간하고 공정한 의논을 넓혀서 새로 발탁하여 멀리서 부르신 성상의 성대한 뜻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천지부모와 같은 성상께서는 쓸모없는 신의 실상을 굽어 살피시어 빨리 체차하심으로써 명기(名器 벼슬)를 중시하고 신의 본분을 편안케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면직을 청하는 글에서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나 신의 구구한 충분(忠憤)의 뜻이 마음속에 저절로 쌓인 것이 있고 마침 언관(言官)의 자리를 맡고 있으니, 어찌 성상 앞에서 한번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윤리와 기강은 천지간의 당연한 도리로서 국가에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군주 된 자가 이것을 소홀히 한다면 나라는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이고 신하 된 자가 이것이 있는 줄을 모른다면 의관을 갖춘 금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사이 사면된 여러 죄인 중에서 목내선(睦來善, 1617~1704)이 ‘공손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는다〔不恭不敬〕’라고 한 무함과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스스로 하늘을 끊는다〔自絶于天〕’라고 한 말은 이 어찌 신하 된 자가 감히 마음속에 품고서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들은 시대의 불행을 다행으로 여기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 모욕하는 짓을 달가워하는 가운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니, 그들의 속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길 가는 사람들도 모두 아는 바입니다. 이런 그들의 마음을 미루어 본다면 장차 못하는 짓이 없을 것입니다.
당초 죽어 마땅한 이들의 죄를 용서해 준 것이 이미 형벌이 극도로 공정성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나라의 성대한 은전을 통하여 끝내 아무런 처벌도 없이 방면하였으나 사람들은 태연하게 사소한 일로 간주하고 있고, 천하의 대방(大防 넘어서는 안 되는 원칙)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는데도 이들을 구호하려는 말들이 간혹 상소문에 나타나고 있으니, 왕법(王法)이 엄하지 못하고 세도가 무너진 것이 아, 또한 심합니다.
그러나 일에는 발단이 있고 형세는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법이니, 그 유래를 따져 본다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국모(國母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해한 것이야말로 얼마나 간악하고 패역한 짓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6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천지 사이에 편히 살면서 천벌을 받지 않았으니, 귀신과 사람들은 더욱 분통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은 그저 세월이 흐를수록 사악함을 응징하려는 마음은 점차 느슨해진 채 토죄(討罪)의 의리가 점점 멀어지고 잊혀지다가 상도가 완전히 사라지고 이론(異論)이 횡행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당초 하교하실 때 말씀하신 취지가 준엄하고 죄악이 환히 드러나서, 법률로 논죄하면 이들을 공개적으로 죽이더라도 오히려 가벼울 것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들을 용서하려는 논의가 자복한 뒤에 갑자기 나와, 성조(聖朝)에서 역적을 토벌하는 형전(刑典)이 편의에 따라 구차히 처리하려는 주장에 막힘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삼사(三司)에서도 고집스럽게 논란한 적이 있긴 하지만 자신을 돌보지 않고 강력하게 간쟁한 자는 한 사람도 없었고, 끝에 가서 청대(請對)한 일은 결국 책임을 때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머지않아 정계(停啓)하려는 말이 곧바로 어전에서 흘러나왔으니, 대소 신료들의 실속 없는 형식적인 행동이 이렇게 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성상의 마음을 돌려서 왕법(王法)이 펴지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 날 정계한 일은 저들의 비위를 맞추고 앞서 한 말에 부합한 것으로, 도리어 여러 해 동안 옥신각신 쟁론한 것이 단지 사체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구차하게 스스로 벗어날 계책으로 삼았을 뿐이지, 끝내 사실을 규명하거나 책임을 묻는 말 한마디가 없었습니다. 이 같은 행동으로 또한 천하 후세에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 놀라운 점은 전후로 두둔했던 부류에 대해서는 진실로 똑같이 처벌해야 하는데,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논박하고 축출하여 청요직에서 끊고, 세력이 있는 경우에는 죄를 다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자랄세라 감싸고 장려하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극선(極選 더할 수 없는 선임)에 두었습니다. 사의(私意)가 횡행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꾸물대다 일을 그르쳐서 끝내 오늘날 죄인을 관대하게 용서하게 된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인심과 세도가 어찌 앞에서 언급했던 ‘의관을 갖춘 금수’의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양사(兩司)가 환수를 청한 것을 따르시어 국법을 엄히 함으로써 의리가 조금이나마 펴지게 하십시오. 또 신은 전하께서 요사이 내리신 처분에 대하여 또한 개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정호(鄭澔)와 이언경(李彦經) 등의 일은 최근 십여 년간 진신(搢紳)들이 서로 쟁송(爭訟)한 것으로, 그 옳고 그름은 또한 오늘날 처음 나온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 지지하고 억제하는 사이에 전후가 현격하게 달랐습니다. 높이고 숭상하는 예우가 모두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변별하여 취사선택하신 것도 시세에 편승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성상께서 지니신 덕이 확고하지 못하고 기준이 없어서 일을 벌이기 좋아하고 자신의 당파를 옹호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성심(聖心)의 향방을 엿보게 하여 논의가 겹겹이 일어나 그치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이 일을 가지고 전적으로 신료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을 듯하며, 성상께서도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반성하시어 우리나라에서 세워 둔 법도가 편당(偏黨)이 없는 길에 이르게 하신다면 시비는 앞으로 정해지기를 기약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정해질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신이 신진(新進) 인사로서 때가 지난 일을 뒤늦게 논의하는 것이 기왕의 일을 구제할 수 없고 성심(聖心)에 관심을 받지도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윤리와 기강이 밝지 않고 조정의 논의가 안정되지 못하다면, 비록 전하께서 치세를 바라는 정성을 위에서 날마다 부지런히 힘쓰시고, 신료들이 폐단을 바로잡아 구제하려는 간언을 어전에서 날마다 올리더라도 참으로 정령(政令)을 닦고 형벌을 밝혀서 세도를 만회할 길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일들은 진실로 오늘날 소홀히 할 수 없는데, 그 큰 근본을 따져 본다면 바로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심(聖心)이 정대하고 공평한 본체를 다하신다면 처리하는 정무가 저절로 천리(天理)와 부합될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 의리가 밝지 못하고 시비가 정해지지 않을까를 걱정하겠습니까.
예로부터 신하들이 군주에게 경계의 말을 올릴 적에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 만화(萬化)의 근원으로 삼았던 것은 이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듯하지만 근본을 바로잡고 끝을 가지런히 하는 의리로는 이보다 나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은 감히 간략히 진달한 몇 마디 말을 가지고 직책을 완수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성 어린 뜻은 전하께서 늘 학문에 힘쓰시되 한층 성찰하는 공부를 더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깨끗하게 해서 반드시 의리를 밝히고 시비를 바로잡는 것을 임무로 삼으시는 데 있습니다.
[주-1] 지평을 …… 상소 : 1699년(숙종25) 4월 19일에 이관명은 지평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5월 4일에 이 상소를 올린 것이다. 《국역 숙종실록 25년 4월 19일, 5월 4일》
[주-2] 하읍(下邑) : 함열(咸悅)을 가리킨다. 이관명은 1698년 1월 25일에 함열 현감에 제수되었다. 《兼山集 卷15 外舅左議政屛山李公墓表》
[주-3] 목내선(睦來善)이 …… 말 : 1689년(숙종15)에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을 고하는 주문(奏文)을 가지고 청(淸)나라에 갈 때 부사 신후재(申厚載)가 좌의정 목내선에게 저들이 힐문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물었다. 목내선은 ‘불공불경(不恭不敬)’으로 대답하라고 하였는데, 인현왕후가 폐비될 때 주상이 들추어낸 죄과에는 ‘불공순(不恭順)’이라는 3자는 있었지만 ‘불경(不敬)’이라는 글자는 없었다. 이 일로 목내선은 갑술년(1694)에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위리안치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15년 8월 11일, 20년 5월 12일》 이현일은 인현왕후가 폐위되었을 때 올린 상소에서 ‘중전의 도리를 지키지 않아 스스로 천륜을 끊었다.’라는 등의 말을 하였다가 불손(不遜)하다는 탄핵을 받고 갑술년에 종성부(鍾城府)에 위리안치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15년 9월 24일》
[주-4] 정호(鄭澔)와 …… 일 : 1698년(숙종24) 10월 20일에 정호가 상소를 올려 윤증이 스승인 송시열을 배사(背師)한 잘못을 나열하였는데, 같은 해 11월 4일에 지평 이언경이 이에 반박하면서 오히려 정호가 경박하며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인물로, 붕당을 일삼아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갖은 사람을 전부 소인으로 몰아 임금의 귀를 어지럽힌다며 공격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24년 10월 20일, 11월 4일》
<출처 : 병산집(屛山集) 제3권 / 소차(疏箚) 16수>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유영봉 황교은 (공역) | 2015
辭持平兼陳所懷疏
伏以臣賦性庸愚。才識空疎。粗習擧業。晩竊科第。而年迫四紀。志氣衰頹。廁跡下邑。幸遂將母之願。絶意榮途。無復進取之望矣。適因七十老母宿患痰火之病。乘虗復發。證情危劇。閱月沉綿。急於就醫。受暇上來。千萬夢寐之外。栢府新命。遽及於登程之後。臣驟聞驚懼。靡所容措。下召恩旨。雖違於中途。在臣分義。不敢遲滯。黽勉入城。縮伏私次。仰暴危懇。干冒 o鈇鉞。冀使不似之職名。收還之不時。而喉司不諒。一向退却。一日二日。冞增惶蹙。目今王綱不振。倫常斁絶。人心之陷溺已痼。朝論之潰裂莫救。雖使剛方敢言之士處之。猶難稱塞。如臣疲劣。自知甚明。其何望隨事規諫。恢張公議。以不負聖上新擢遠召之盛意哉。玆敢不避猥越。冒死呼籲。伏乞天地父母。俯察賤臣無用之實狀。亟賜鐫改。以重名器。以安愚分。不勝大幸。臣於乞免之章。不宜更贅他說。而區區忠憤之志。自有蓄積于中者。適當言地。其何敢不一暴陳於君父之前乎。夫倫紀者。天經地緯。有國 o之不可一日少熄者也。爲人君而苟忽於此則國無以國。爲人臣而不知有此則冠裳而禽獸矣。可不懼哉。近日蒙放諸罪人中。如睦來善不恭不敬之誣。李玄逸自絶于天之說。是豈爲人臣子者。所敢萌於心而發諸口者哉。其幸時不幸。甘心於誣辱。不復顧藉者。其心所在。路人皆知。推此心也。將無所不至矣。初許貸死。已極失刑。今因霈典。終至全釋。而人情恬然。視之爲薄物細故。無以存天下之大防。而營救之言。或發於章奏之間。王法之無嚴。世道之淪喪。吁亦甚矣。雖然事有根柢。勢有積漸。究厥所由。非他故 o也。夫謀害國母。何等惡逆。而尙今六載之久。偃息覆載之間。天討不行。神人愈憤。在廷之臣。只以歲月之稍久。漸弛懲惡之心。沐浴之義。寖遠而寖忘。以至彝倫掃地。異議肆行。寧不痛心哉。當初聖敎之下。辭旨嚴截。罪逆昭著。論以三尺。顯戮猶輕。而不幸容貸之論。遽出於輸情之後。使聖朝討逆之典。不免沮撓於權宜苟且之說。三司之臣。亦嘗論執。而無一人忘身而力爭者。至於末梢請對之擧。終爲塞責之歸。匪久欲停之語。徑發於前席。則大小羣僚之應文無實。至此難掩。若是而其可望回天聽而 o伸王法哉。翌日停論。承風旨而符前言。反以屢歲爭執。徒傷事體。苟然爲自解之計。而終無一言糾責者。似此擧措。亦何以有辭於天下後世哉。尤可駭然者。前後左袒之類。固宜一體施罰。而在異己則駁之逐之。見絶於淸路。有勢力則不惟不罪。吹噓奬拔。如恐不及。置之極選。無所顧忌。私意之橫流。一至於此。其無怪乎因循陵夷。終至於今日之曠蕩也。若此不已則人心世道。幾何不至於向所謂冠裳而禽獸者乎。伏願殿下亟從兩司還收之請。以嚴國法。使義理少伸焉。且臣於殿下近日處分。亦有所慨然 o者。鄭澔,李彦經等事。固是十餘年來搢紳間互相爭訟者也。其是其非。亦非刱出於今日。而殿下於扶抑之間。前後懸殊。其所以尊尙禮遇者。非盡出於誠心。而辨別取舍者。亦或由於時勢。此正聖明執德不固。權衡無定。使喜事護黨之類。有以窺聖心之左右。論議層生。無所止泊。竊恐此事不可專責於羣下。而聖明亦宜惕然自反。使我之所以建其有極者。能臻於無偏無黨之道。則是非將不期定而自定矣。豈不休哉。臣以新進之人。追論後時之事。極知無救於旣往。不槪於聖心。而誠以倫紀不明。朝論不 o靖。則雖殿下願治之誠日勤於上。羣下匡救之言日進於前。實無以修明政刑。挽回世道也。凡此數事。誠今日之不可忽者。而顧其大本則正在於殿下之一心。若使聖心克盡正大公平之體。則酬應萬幾。自合天理。夫何患義理之不明而是非之不定乎。從古人臣進戒於君上。必以此爲萬化之原者。其言雖若迂遠。正本齊末之義。無以越此。臣不敢以草草數語。謂可以能盡職責。若其欵欵之意則深願殿下日懋典學。深加省察之功。以澄出治之本。必以明義理正是非爲務焉。
<출처 : 병산집(屛山集) 제3권 / 소차(疏箚) 16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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