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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음험한 밀실
사내 나이 스물 세 살이면 무엇이고 할 수
있는 나이면서 무엇이든 안되는 나이인 것
같다.
어쩌면 가장 애매한 연령인 것 같다.
애들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어른도 아니다.
스물 세 살짜리 사내들은 어른 흉내내기에
바쁜, 그러면서도 어른 취급을 받을 수 없는
애매한 부류인 것만은 사실이다.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살아 왔는지
뒤돌아보았다.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지난해의 증거는 살아 있다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도 좀 애매하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나는 달력 엎에 큰 백지 한 장을 붙였다.
어려서도 해만 바뀌면 책상 모서리에 흰
종이를 붙여 놓고 성공. 노력. 성실 따위의
글씨를, 마치 교훈이나 급훈 훙내처럼 써
놓곤 했었다. 물론 그 종이는 오래 붙어 있지
않았다. 뜯어내서 딱지를 만들거나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 버리는 것으로 내
성공. 노력. 성실도 접어 버리거나 날려
버리는 게 고작이었다.
상식적으로 살자
사인펜으로 이렇게 썼다. 보통으로 살자,
사람같이 살자, 솔직하게 살자, 힘껏 살자,
사는 것처럼 살자, 뭔가 하자, 악쓰며
살자...... .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모두
내가 지난 한 해를 반추해 볼 자료라고
생각하는 일기를 쓰지 않은 것도 벌써 두어
해가 넘었다. 기찻길 옆에서 왕초 노릇할
때부터 시덥잖게 써 왔던 일기장, 가출할
때도 옆에 끼고 다니던 일기장, 그런 내
비밀스런 기록들도 그해 겨울에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관상대는
예보가 틀려야만 사람들이 알아주는 곳이라는
걸 눈치채서 그랬는지, 그해 겨울은 따뜻할
거라고 했다가 더 유명해진 해였다.
충청도 공주의 어느 한적한 산골로 피신 겸
겨울방학 동안 책이나 보겠다고 내려간 적이
있었다.
새해를 맞는 날 아침이었다. 뭔가 마음을
다져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사과
붙여 놓고 머리를 쥐어 짠다는 게 하필
'솔직하게 살자'였다.
어려서 고해성사하러 신부(神父)앞에
가서도 솔직한 것처럼 쑥스럽고 죄스러운 게
없었다. 토요일마다 고해소 앞에 가서
멀뚱멀뚱 살아 있는 신부에게 부모님께
거짓말했습니다, 신공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연보 돈 준 걸 반은 눈깔사탕 사먹었습니다,
여선생님 변소 들어갈 때 거울 디밀어
봤습니다. 여학생들 치마 들춰보고 약을
올렸습니다, 친구를 때렸습니다, 이웃집
판자담을 뜯어다 쥐불 놀이했습니다, 친구들
공책 훔쳐서 딱지 만들었습니다, 여자선생과
남자 선생이 숙직실에서 이상한 짓 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고해할 수 없었다.
죄목을 적은 공책을 펼쳐놓고 신부가
생각해도 그 나이에 그만한 죄를 짓는 건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죄목만을 네댓
개씩 외어가지고 고해하곤 했다.
나는 새해 아침에 어째서 갑자기
솔직해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너무
솔직하지 못한 삼을 지속해 왔다는 죄책감
때문이기도 했다. 언제나 나는 착한 척,
괜찮은 사내인 척, 의리의 사내인 척, 곧고
바르게 사는 척, 정의롭고 슬기로운 척만
했다.
솔직해 보자. 일기장 속, 내 비밀스러운 그
속에서만이라도 솔직해 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나만 솔직하지 못한 게 아닐까?
그런 자격지심도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은 악마의 피를 타고
난 것이지, 천사의 피를 이어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일기를 써 나가며 솔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깨달았다.
보통 '솔직히 말해서'라는 단서를 붙여
말하는 사람치고 진짜 솔직한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매일매일 피를 거꾸로 쏟는 기분으로 썼다.
솔직하자는 구호와 그래도 남아 있는 내
지독스런 위선자 기질과 남이 혹시 볼지
모른다는 두려움, 새롭게 내 치졸함과
비겁함을 발견하는 소름 끼치는 스스로의
혐오감, 이렇듯 추잡스러운 자신을 향한
분노로 치를 떨며 써 나갔다.
위인전과 자서전, 영웅전과 회고록 따위가
나는 또 깨달았다.
되돌아 읽는 내 일기장 속의 나는
99.9퍼센트 이상의 악마와 0.1퍼센트 이하의
천사로 조립된 극도로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악마 덩어리였다.
솔직한 게 죄가 아니라면 감히 얘기할 수
있겠다.
나는 내 혈족, 그것도 가까운 혈족을 뺀
세상의 모든 여자를 다 갖고 싶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독재자, 하나님과 비슷한 권한을
갖는 황제이고 싶었다. 세상 모든 일을 내
뜻대로 해치우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 권한만 주어진다면
나는 내 마음대로 해치울 게 빤했다.
길게 설명할 필요없이 나는 악마였다.
더럽고 추잡하고 비겁한 모든 것의
스무 살 남짓한 사내의 짧은 일기장, 겨우
3개월 남짓한 그 일기장은 지옥에 갖다
놓아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최고의
악마전이었다.
화로를 엎어 놓고 그 알불 위에 일기장을
태우기 시작했다.
한장 한장 찢어서 불을 사르고 그 타버린
종이 위게 남은 글씨자국을 지우기 위해
종이재를 부수었다.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모른다. 내 자신이
고작 그 정도의 인간밖에 안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일기장을 태우고 집에 와서 그동안
소중하게 보관했던 일기장들을 죄다 마당에
내던졌다. 그 위에 석유를 뿌리고 성냥을
그어 던졌다.
드러누우시더니 끙끙 앓기 시작했기
십 수권의 악마전, 조악하게 위선으로 써
왔던 그 일기장은 남김없이 타
버렸다. 그것들을 태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내 과거를 태우는 심정으로
일기장을 태웠다.
아침밥을 먹고 몇 군데 세배하러 다녔다.
다혜네 집에 세배하러 가려다가 되돌아서고
말았다. 차라리 구정 때 세배하러 가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 나 같은 촌놈에겐 아직도
신정보다는 구정에게 향수가 많았다. 남들이
하니까 그저 따라 하는 세배에 지나지
않았다.
명절이라면 적어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축제의식이 살아 있어야 한다. 신정은 아직도
축제라는 개념보다는 남들 눈치나 보는 그런
날 같기만 했다.
"할 얘기도 있고 하니 나와라."
"오늘은 나가고 싶지 않아요."
저녁에 다혜가 놀러오겠다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너, 나한테 세배 안할 거냐?"
"형이 좀더 늙으면 할 거요. 그때까지만
살아 있어요."
"정초부터 재수없는 소리 말고 나와라.
내가 뻐근하게 살 테니까."
"형, 나 편하게 좀 해줘요."
"자아식, 내가 언제 너 괴롭힌댔어. 얼굴
보자는 거지. 네 맘 아니까 걱정 말아."
"오늘 집에서 약속이 있어서 그래요."
나는 완강하게 나갈 의사가 없다는 걸
밝혔다.
"너, 미향이 알지?"
"설악산 말야."
"보슬비...... 알아요. 왜요?"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
밑바닥에서 욕망의 덩어리가 치솟아 오르곤
했다. 나를 초대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여자지만 그 밤의 정열을 나는 잊고 있지
않았다.
"걔 언니가 없어졌어. 나는 땅띔도
못하겠다. 도치 애들이 안 보여. 가물치가 나
잡으려는 판에 뛰어들 수도 없고, 애는
딱하고 해서 전화했다."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정초부터 그런 일에
끼여들고 싶지 않았다.
"형, 나 정말 편하고 싶어요."
"알아, 자식아. 애들이 불쌍해서 그랬어.
안 들은 걸로 해라."
물어볼게요. 서유리라고 있죠. 걔 요즘 어디
있어요."
"그 녀석 잘 있지. 요즘 재일동포 녀석한테
시집간다고 정리하는 모양야. 너
짝사랑하냐?"
"아뇨. 애가 하도 괜찮아 보여서 말이죠.
잘됐군요. 그 친구 시집갈 때 꼭 알려 줘요."
"커튼 뒤에서 울려고 그러는 거냐?"
"좀 울면 안 됩니까."
춘삼이 형은 서운한 말투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어진 후부터 내 가슴 속에는 묘한
죄책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런
증발사건이라면 빤한 것인데, 내가 모른
체한다는 게 아픔으로 와 닿았다. 춘삼이
형이 내게 부탁하는 것은 그만한 것을 부탁할
데가 마땅찮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 여자가
강심장을 가졌을까?
다른 여자도 아니고 내 불타는 욕망의
찌꺼기를 가라앉혀 준 여자의 언니인데도.
아니, 그게 아니라도 내가 내 양심을 걸고
참을만큼 독한 것일까?
보슬비라면 사랑받는 가수였다. 언제나
발랄했고, 언제나 대중에게 기쁨을 주는
율동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참아보자. 그것은 그들 개인의
고통이지, 내가 아파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는 엎드려서 춘삼이 형 부탁을 잊어
버리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정초부터 그런
일에 뛰어들기는 정말 싫었다. 정초에 재수가
없으면 일년 내내 재수가 없다는 어른들 말이
퍼뜩 떠올랐다.
"너 왜 그렇게 안절부절하고 그러니. 다혜
온다니까 정신이 혼미해지나부다. 좋을
때다."
은주 누나가 옆에서 빈정거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화기를 잡았다.
"형, 나요. 종찬이요."
"편하게 해 드렸는데, 왜 이러셔."
"형, 지금 나갈게요."
"너 말릴 사람 있겠냐?"
"어디로 가면 돼요."
"H호텔로 와서 날 찾아. 미향이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나는 다시 다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혜는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
"은주 누나가 갑자기 시골 가서 그래."
"내가 뭐, 찬이네 누나 보러 가는 줄
알아?"
"이왕 오려면 누나 있을 때 오는 게
좋잖니?"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네."
"좋아. 그럼, 와. 단둘이 있으면 내가
어데게 변할지 몰라서 봐주려니까 되게
뻐기네."
내 말은 약이 되었다. 다혜는 느물거리며
대꾸했다.
"누군 공일인 줄 알아? 되게 양심인 척하구
그래."
"오라니까 그래. 와서 밥도 좀 해 주고
양말도 좀 빨아주고, 그러면 되잖아."
"봐 줄게."
다혜는 언제 보아도 현명한 여자였다. 나와
단둘이 있게 되면 빠져 나가기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은주 누나에게 집에 들어오지 못할지
모른다는 말과 만약 다혜가 전화할지도
모르니까, 아예 전화기를 내려 놓으라고
말했다.
"네 놀음에 내가 놀아나야 하니, 원. 정신
좀 차려라. 너, 정초부터 바쁜 걸 보니 올해
내내 정신 못 차리겠구나. 좀 가만히 있을 수
없니?"
"그게 내 사주팔자에 씌어진 대로 사는
건가 봐. 호적초본에도 내 팔자는 그렇게
씌어 있을 거야."
"조심해라."
"알았어, 누나."
나는 밖으로 뛰어나와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H호텔로 가십시다."
택시는 한적한 도심지를 질주해 달리기
시작했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면 그 다음 신호등이
통과신호를 보내 줘야 마땅할 것 같았다.
"저 놈의 신호등 개판이구만요. 정상적인
속도로 달리면 신호등이 딱딱 떨어져 줘야지.
저 지경이니 차가 밀릴 수밖에 없겠어요."
내가 투덜거리자 운전사가 맞장구를 쳤다.
"누가 아니랍니까. 개판이라구요."
운전사가 투덜거리며 달렸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초조한지 몰랐다.
나는 H호텔에 내려서 춘삼이 형을 찾았다.
객실에 들어서자 춘삼이 형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 옆에는 초췌한 표정의 미향이가
앉아 있었다.
"미향이 때문에 온 거예요."
"누가 뭐래?"
춘삼이 형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은 그런 내 마음을
노린 셈이었다.
"술 한 잔 할래?"
"본론으로 들어가요."
내가 다그치고 나섰다.
미향이는 눈두덩이가 부어 있었다. 실컷
울고 난 뒤끝인 것 같았다.
"미안해요.괜히 이런 일로 괴롭혀 드리게
돼서요."
미향이는 제대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나와
정열적인 밤을 지샌 그날의 기억 때문인 것
같았다.
"첨부터 얘기해요, 자세하게."
내가 서두르는 만큼 춘삼이 형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는 도대체 서두르는 적이
없었다. 그것이 그의 뱃심인 것 같았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 남아서 왕초로서 대우를 받는
것도 그런 배짱 때문이었다.
"어젯밤에 k호텔에서 심야무대가 있었어요.
새벽에 공연 끝내고 짐 챙겨서 운전하는
미스터 박에게 맡기고 뒷문으로 내려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덮쳤어요. 여섯 사람이었어요.
저는 그때 무슨 정신으로 계단에서 뛰었는지
몰라요. 그 높은 데서 말예요. 그리고 사람
살리라고 소리 지르며 주차장으로 뛰었어요.
마침 미스터 박이 짐을 챙기다가 쫓아왔어요.
그 사람들이 미스터 박을 때려 누이고 하는
사이에 저는 무서워서 소리만 치고 있었어요.
언니는 어디로 끌려 갔는지 몰라요. 지금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새벽 몇 시였지?"
"세 시쯤 됐어요. 그리고 뛰어가는데,
했어요. 그 말은 맞아요. 신고해 봤자
빤하잖아요. 우리만 엉망진창이 될 거고,
언니는 언니대로......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생각하면 지금도 떨려요. 어떻게
좀 우리 언니 구해주세요. 소문나면
큰일예요. 우린 끝장이라구요."
"그 자식들이 노린 게 바로 그거야."
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어떡하면 좋죠? 우리 좀 살려
주세요. 춘삼이 오빠께서 총찬씨만 나서면
쉽게 해결될 거라고 했어요. 당장 내일 공연
펑크내면 소문이 날지도 몰라요."
미향이는 떨고 있었다. 나는 그런 미향이
등을 도닥거려 주었다.
"차근차근 생각해 봐. 언니나 네가 납치될
만한 일이 있는지, 아니면 그런 조짐이
공연이나 밤무대이거나 귀찮게 굴던 애들이
있었는지 말야."
미향이는 훌쩍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화장기 없는 앳된 얼굴이 더 고와 보였다.
"춘삼이 오빠한테 얘기했어요. 데뷔할
무렵부터 성주학이라는 사람이
쫓아다녔어요."
"성주학?"
"성주학."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S주식회사 성사장, 큰 놈 있잖아."
춘삼이 형이 대신 말했다.
"밑 닦아 주는 놈들이 있나부죠?"
"도치 애들이라니까 그래. 그 녀석 벌써
그런 전과가, 여러 건야."
"가물치 애들 아녜요."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한참동안 방 안을
걸어다녔다.
"내가 하죠."
나는 입을 앙다물고 말했다.
가냘프게 떨고 있는 미향에게서 나는
강렬한 여자 내음을 맡았다. 목덜미에서
솟구치는 냄새인지 그녀의 몸 전체에서 나는
냄새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춘삼이 형, 도치 애들 어디 가면 만나요?"
춘삼이 형은 고개를 흔들었다. 미향이가
불안한 눈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밤에만 불타는 여자는
아니었다. 평소에도 열정이 있는 여자
같았다. 나는 그런 미향이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짙은 내음이 풍겨왔다. 그것은 내
욕정의 끄트머리에 서서 사라지지 않았다.
주세요. 구해만 주면 오빠가 하란 대로 다 할
거고...... 그 은혠 잊지 않을 거예요."
"은혜 은혜 하지 마.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
내가 역정 비슷하게 말했다. 나는 그놈의
은혜라는 말이 싫었다. 마찬가지로
키워준다는 말도 역겨웠다. 흔히 뒷바라지해
주거나 도와준 사람들이 누굴 키워줬다고
자랑삼아 떠드는 걸 보면 메스꺼웠다.
"고마워요, 오빠."
미향이가 다소곳이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춘삼이 형에게 따지듯 말했다.
"형, 형도 이런 짓 그만 할 수 없어요?
젊어서 한때 놀아볼 순 있어요. 이젠 형은
애들이 아녜요. 애들 땐 그럴 수 있어요.
애들 때 그러지 못하면 할 때도 없겠지만
돼봐요. 주먹 아무리 휘둘러 봐야 그게 그거
아녜요. 진짜 왕초 한번 해 보려면 그런
식으로 해선 안 돼요. 가물치 형하고 한번
붙어서 죽고살기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손
싹 씻고 공부하든가, 그것도 싫으면 장사꾼
왕초가 되든가 말예요.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 후회해요. 나 같은 놈도 공부해서 졸업장
받게 되잖아요."
춘삼이 형이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임마, 사람 기죽이지 마."
"평생 그렇게 살 거요?"
"맘 잡고 돌아다니지 않잖아."
"형은 맘 잡은 게 아녜요. 힘이 달리니까
그런거지."
"야야, 아픈 데 건드리지 마."
"형, 내가 맘만 먹으면 가물치 형 정도는
살아요. 주먹으론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춘삼이 형은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 어디가 아픈 사람 같았다. 떠돌이
행자승 무초 스님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강자는 용서할 줄 알고 참을 수 있는 자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관용은 확실히 강자의
논리인 것이다.
강한 척 허세를 부리는 겉만 강자인 치들은
언제나 화를 잘 내고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는 것이다.
"형, 나도 아직 어리고 아는 게 없고 성질
급하지만 어떻게 사는게 좋은 거라는 건
알아요. 난 형이 평생을 그렇게 살다 가는 게
싫어요."
"알았다. 그만 해라."
본성이 착한 춘삼이 형은 내 말뜻을 쉽게
알아들을 사람이었다.
"미향이 넌 집에 가 있어. 내가 꼭 찾아 올
테니까."
"네, 알았어요. 오빠, 미안해요."
"형, 갈랍니다."
"도치 애들 표창 가졌다. 조심해라."
"알았어요. 쓸데없는 소리해서 미안해요."
"자아식...... ."
춘삼이 형은 내 손을 잡고 문을 열어
주었다.
도치 패거리들이라면 아직도 찌렁찌렁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패거리였다. 나는 도치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다. 도치쯤이야 겁날 것이 없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가물치는 내게도
형이 두려워하는 제일급의 실력자였다.
오랜만에 카페 아담에 들렀다. 카페
아담에는 갖가지 소문을 들을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참새 한마리 구워 줘."
나는 밀실로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 미라는
생글거리며 웃기만 했다. 그 참새라는 낱말이
무슨 뜻인지 미라는 알고 있었다.
"어떤 참새 말예요?"
미라가 간드러지게 물었다.
"매 잡는 참새 말야."
"걔들 없어진 지가 언젠데 그래요."
"그럼 우리 미라 아씨가 참새 좀 잡아
줘야겠는데."
"어쩐지 불쑥 나타났다 싶더니...... ."
미라는 곱게 눈을 흘기고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고슴도치라고 있지. 걔들 요즘 어디서
무슨 장사하는지 알아?"
"고슴도치라니, 도치 말예요?"
"그래."
"왜 찾아요. 괜히 찔리려고."
"그건 알 거 없고. 무슨 장사하는지 말해
봐."
"오늘 매상 얼마나 올려주려고 이러실까?"
"어서 말해. 시간 없어."
"밤이 짧을까."
"그럴 시간 없대두 그래. 담에 와서 매상
올려주고 사랑해주고 다 할게. 정말 급해서
그래."
"오랜만에 와서 애간장 녹이는 소리만 하구
있어."
웬만한 정보는 알고 있지만 도치에 관한
심정인 것 같았다. 그만큼 도치가 찌렁찌렁
울리고 다닌다는 암시였다.
"나 알잖아. 하루 이틀 겪어봤니? 어서
얘기해. 급해서 그래. 애들 만나기만 하면
속옷 뭐 입었는지도 알아낼 수 있어."
"그럼 나는 뭐 입었지?"
미라는 치마를 들썩일 것처럼 하며 말했다.
"시간 없대두 그래. 빨리 말해."
미라는 밀실의 문을 열어본 뒤에 내게 더
바싹 다가앉았다.
"도치, 장사하는 거 몰랐어?"
"뭔가 한다는 소린 들었지."
"남자장사 시작했잖아."
"남자장사라니?"
"호호, 숙맥 같애. 괜히 이러지 마.
장총찬씨가 모르는 게 다 있네."
진짜 모르는 거야 뭐야."
"도덕적으로 살다보니 이렇게 됐다."
"도덕 좋아하네. 참새가 웃겠네."
"너 정말 나 맘 잡은 거 몰라?"
"누군 맘 안 잡은 사람 있나."
"좋다. 아무렇게나 생각해가. 어디서 판
벌이고 있지?"
"한남동."
"한남동 어디?"
내가 채근하자 미라는 손바닥을 벌렸다.
"백원이라도 줘. 거래는 거래니까."
나는 백원짜리 동전을 미라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 그것은 미라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일이었다. 그냥 나불대는 여자가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는 정보비를
받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기
여자가 아니라는 걸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좀 싸긴 싸다."
미라가 동전을 가슴 속에 넣으며 한
말이었다.
"잔솔밭 지하에다 감쪽같이 차렸대."
"확실한 거야?"
"내가 가 봤나 머."
"비밀통로가 있겠는데."
"암호도 있고 비밀 열쇠도 있고......
하여튼 철저한가 봐."
"그 이상 아는 거 없어?"
"내가 귀신인 줄 알았어?"
"알았다. 고맙다. 담에 와서 꼭 원수
갚아줄게."
나는 미라의 엉덩짝을 한대 때려주고
밖으로 나왔다. 미라가 따라나와 귀엣말로
"나 좀 열나게 해 줘. 그러려면 몸조심해야
돼. 도치 성깔 알잖아."
"알았다."
찬바람이 골목길을 휘젓고 있었다. 미라가
택시를 세웠다. 나는 그런 미라의 등을 살짝
때려주었다.
"한남동으로 갑시다."
택시가 속력을 놓자 나는 허리띠 속을
점검해 보았다. 살끝을 건드리는 표창의
날카로운 날이 곤두서 있었다.
잔솔밭이란 간판이 퍽 단정해 보였다. 보통
술집 간판과 다른 고급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술값이 꽤 비싼
술집이란 인상을 대번에 받았다. 촉 낮은
전구와 밀실로만 장식된 내부가 그런 인상을
치마라기보다는 헝겊쪼가리를 아랫도리에 댄
것 같은 여자가 서양 여자들이 임금 앞에서
인사하듯 한쪽 다리를 접고 인사를
했다.그녀의 웃옷도 치마처럼 헝겊쪼가리에
불과했다.
옷감 소모량에 있어서 여자를 당할 수
없겠지만 이런 경우에는 여자가 얼마나 옷감
소모량을 줄일 수 있는지 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섬유업계 인사들이나 여자 속옷 만드는
회사 사장들은 기분 언짢아서 못 다닐
집이었다. 어쨌든 나를 안내하는 여자는 가린
것보다는 안 가린 부분이 더 많았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여자를 이렇게 벗겨 놓은 건
여자들 스스로 결정한 것인지 아니면
남자들의 강요인지 모르겠다.
보고 그린 사람들은 무조건 천사들의 옷을 롱
드레스로 만들었다. 요즘엔 천사도 씨가
말랐는지 아니면 공해물질 때문에 내려오길
꺼리는지 몰라도 도통 천사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요즘 천사를 그리라고 한다면
아마 미니 스커트 입은 천사를 그릴 것만
같았다.
어쨌든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낸 것은 백번 잘못한 일에 속할
것이다.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밀실을 열고 들어선 여자의 얼굴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퍽 세련된 용모였다. 예쁜
여자들은 어째서 이런 데 몰려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술은 뭘로 하시겠어요?"
"막걸리 두어 되 줘."
"아이, 농담도 잘하셔."
"농담 아냐, 이 친구야. 텁텁한 막걸리
마시고 싶어 왔어."
"양주 드실까요?"
"네 기분내키는 대로 가져와."
"안주는요."
"네가 안주하면 되잖아."
"마른안주 할까요?"
"풍만한 안주로 해라."
"잠깐만 계세요."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검붉은
불빛과 편안한 소파의 분위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한숨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술상이 차려졌다. 그녀는 술을 따르고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허벅지가 훤히
보이는 짧은 헝겊쪼가리 아래로 그녀의 윤기
있는 살갗이 보였다.
"너 같은 여자만 있으면 우리 같은 놈은 딱
굶어죽기 쉽겠다."
"왜요?"
"내가 속옷 만드는 회살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어머머."
"어머머고 아바바고 옷 좀 입어라. 심장
약한 놈 어디 술 마시겠냐."
"괜히 그래."
"도덕 시험 맨날 빵점 맞다 보니 나도
성인군자 다 돼 간다."
"그만하고 마셔요."
"너 좀 마시면 안 되겠냐?"
"밤은 길어요."
"나는 급해."
"뭐가 그렇게 급해요. 굶으셨나."
"호호호...... ."
여자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이 여자와
친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노련한
술꾼처럼 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너 잔 비운
뒤에 나는 그녀 앞에 술잔을 내밀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너도 양반씨는 받은 모양이구나. 그
맵시가 성춘향 같구나."
"재미있으셔."
코먹은 소리로 응수하며 술을 조금씩
마셨다.
"생각보다는 얌전하신데."
"얌전해 보이나?"
"말하는 거 보면 프로 같은데 그렇지
않잖아요."
"나도 이골이 나서 그런다. 이 바닥에서 몸
축낸 게 수십 근도 넘는다."
"여러 여자 울렸겠어."
"여러 여자 때문에 내가 울었다."
"호호호...... ."
"너 웃는 거 보니까 여럿 잡았겠다."
"팔도 서방님 모시고 살려면 웃음이라도
헤퍼야죠."
"잔소리 말고 묘기대행진이나 좀 보자."
"나 그런 거 못해요."
"알고 왔어, 임마."
"누가 그래요?"
"우리 큰 형님이 그러지 누가 그래."
"큰 형님이라뇨?"
"도치 형님 몰라?"
"어머...... 그럼...... ."
"안에 계시냐?"
"진작 말씀하시지. 난 그런 줄도
싶대요."
"계시냐니까 그래. 지하실 장사 잘 되는지
모르겠다."
"거기야 늘상 그렇죠, 머."
나는 속으로 웃었다. 내가 꾼처럼 짚고
넘어가는 데 속아주는 여자가 더 귀여워
보였다. 도치가 지하실에 차려 놓은 사업이
꽤 잘되는 모양이었다.
"온 김에 큰 형님이나 뵐까?"
"아까 이 방에 계셨으니까 그리로
내려갔겠죠."
"매상이나 올려드리고 내려가야지. 너 한
잔 더해라. 이따가 데리고 나가서 실컷
사랑해 줄게."
"큰 형님한테 혼나려고."
"임마, 큰 형님이 나 먹여 살리는 거
"첨 봤으니 모를 수밖에."
"종로 두꺼비 얘기도 못 들었느냐?"
"호호호...... ."
"왜 웃어?"
"난 두꺼비라고 해서 진짜 두꺼비처럼 못
생긴 줄 알았지."
"알고 보니 잘 생겼다 이거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장사 하나는 끝내주게 하는구나."
우리는 술병이 반쯤 비도록 술을 마셨다.
여자는 내가 종로 두꺼비라는 말에 속아
넘어가서 조잘거리며 지하실의 비밀문이며
새로 바꾼 구조며 경비를 서는 애들의 숫자와
출입하는 요령을 얘기했다.
지하실에 내려가고 싶은 여자들도 처음에는
이 잔솔밭에 들어와서 안내를 받아야만 했다.
화장실로 안내된 뒤, 비밀문을 통해 지하실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지하실에는 열 개의
방이 있고 방마다 샤워실과 쑥탕이 달려
있었다.
남자가 필요한 여자들은 우선 마사지
보이의 서비스를 받은 뒤에 사진첩에 진열된
남자들의 번호표를 부르거나 좀더 확인해 둘
사항이 있으면 실물 전시를 요구해서
선택하거나 했다.
경비 서는 사내는 네 명, 비밀문 통과할
때는 누구든지 몸 수색을 받는다고 했다.
"임마, 나도 몸수색 받아야 한단 말야?
그리고 얼굴 대조하란 말야?"
"큰 형님이 시키는 일인데 뭘."
"안 그랬다간 들어서자마자 쐐기박을
텐데."
쐐기란 몽둥이를 뜻하는 은어였다.
"종로 두꺼비도 여기선 안 통한다 이
말이냐?"
"인터폰 대줄게 큰 형님.하고 직접 얘기해
봐요."
"관둬라. 기다렸다가 만나지."
나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 여자에겐 내가 종로 두꺼비라고 속일 수
있겠지만 비밀문을 안내하는 사내나 지하실의
경비원에겐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술 한병이 거의 바닥이 나자 여자는 술을
계속하겠느냐고 물었다.
"너를 사랑해 주려면 그만 마셔야지. 안
그래?"
"데리고 나갈 때 지배인한테 얘기 좀 잘해
줘요."
"알았어."
나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지하실에 들어갈 길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도치는 철저한 친구였다.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도리어 당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 치밀한 도치라면 감쪽 같은
탈출구나 방비책은 갖추고 있을 위인이었다.
"지난번에 큰 형님 큰일 치를 뻔했다며? 큰
형님이 혀를 내두르더라."
내가 은근히 치고 들어갔다.
"말도 마요. 그때 벌집이었어요. 비상구로
나와서 담뛰기 했는데 밖에서 기다리더래요.
아무튼 그때 생각하면 오싹해요. 땅개비
애들이 어떻게 비상구까지 알았는지 몰라요.
그 뒤에 서로 잘하기로 했다니까 문제는 없을
거예요."
나는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들어갔니?"
"같이 먹고 살자는 데야 할 말 없죠."
"그 뒤로 경비나 철저하게 세웠나
모르겠다. 땅개비가 쿵하면 달려들 텐데."
"지난 번엔 이쪽에서 먼저 무니까 그랬죠,
머."
나는 그 순간에 너구리작전을 생각했다.
비밀 문 앞에 불을 지르고 비상문에서 차례로
낚아채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내가 되긴
싫었다. 정당한 방법으로 승부를 보고
싶었다. 막상 맞붙었을 때 상대방이 비겁하게
나오지 않는 한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요 앞에 차 세워놔도 되니?"
"그럼요."
먹여야겠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가 팔소매를
잡고 말했다.
"미스터 김 보내면 돼요"
"뭐 심부름시킬 것도 있도 해서 그래."
나는 눈치껏 잔솔밭을 빠져나왔다.
골목길에는 승용차들이 한켠으로 세워져
있었다.
은회색 피아트가 눈에 띄었다. 눈깔 크고
짧은 치마 입은 계집애처럼 날렵하고 깔끔해
보였다. 번호를 확인한 나는 바람구멍을
열어놓았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
근처에 있는 두 대의 차도 마저 바람을 빼
버렸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도치
패거리의 기동성을 없애 둔 것이었다.
마당이었지만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담을
훌쩍 뛰어 넘었다. 조심스럽게 담장 밑으로
기어갔다. 표창을 꺼내 짐작이 갈 만한 곳을
자꾸 쑤셔 보았다. 무엇인가 움직이는 게
있었다.
나는 뒤돌아섰다. 토실토실하게 살찐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쫓아왔다.
강아지는 손을 내저어도 자꾸 꼬리를 흔들며
쫓아왔다. 강아지를 가슴에 안았다.
사람이 꽤 그리운 강아지 같았다. 내
얼굴을 자꾸 핥았다. 짖지 않은 게 고마워서
쓰다듬어 주었다. 꼬리가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표창 끝에 걸리는 금속음을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비상구
자국이 드러났다. 겉은 잔디가 깔려 있어서
성품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정원석을 빼내어 조심스럽게 비상구
위를 덮기 시작했다. 웬만한 장사라도
비상구를 열고 나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시 담을 넘었다. 강아지가 연신
낑낑거렸다. 별로 할 일이 없다면 그
강아지를 옷 속에 넣어 가지고 나왔을 것
같았다. 공중전화가 불빛 아래 애처롭게 서
있었다.
"형, 납니다. 애들 두 명만 보내줘요."
"왜? 어렵겠냐?"
"준비는 다 됐는데 혼자 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어요."
"어떤 앨 보내래."
"손 빠른 애들이면 더 좋아요. 올 때
철사하고 펜치 좀 갖다 줘요. 열댓 명 묶어
參淄煞岷楮?"
"어디로 보낼가?"
"잔솔밭으로요. 들어와서 입구에 서서 큰
소리로 두꺼비 찾으라고 해요. 그게
신호니까요. 내가 들어오라고 하면
전화줄부터 끊어 버리게 해줘요."
춘삼이 형은 대충 상황을 짐작한 것
같았다.
"차 필요 없냐?"
"야통증 가진 애 있으면 같이 보내요."
"20분 내로 보낼게. 조심해라."
"문 부술 때 쓸 연장도 좀 보내요."
"알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잔솔밭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반겨
맞았다.
"난 튄 줄 알았어요."
"우리 같이 염복 많은 놈은 그게 탈이라구.
오늘 너 안 만났으면 몸 풀어줘야 할 여자
많았다구. 너 행복한 줄 알아."
"피이...... ."
여자는 바람소리를 내고는 나를 끌고
밀실로 들어갔다.
"너 이담에 남편 덕은 보겠다."
"왜요?"
여자는 몸을 꼬며 물었다.
내 손은 여자의 가슴 속에 들어가 있었다.
내가 적어도 두꺼비라는 걸 의심나지 않게
하려면 이 정도의 능청은 떨어둬야 했다.
"이게 크면 남편 덕 본대잖아."
"아퍼, 살살."
여자는 음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지하실 가서 대접받고 싶지 않니?"
없겠어."
"큰 형님한테 얘기해 줄 테니까 한번
내려가서 서비스도 좀 받고 몸도 풀고 해라."
"내 팔자에 무슨."
여자는 시큰둥했다. 지하실은 도치의
돈벌이인 남창이었다. 남자 창부 녀석들에게
돈 싸들고 오는 여자들, 욕정을 풀며
황후처럼 대접받고 싶은 여자들을 환대하는
비밀스런 곳이었다. 그곳에 오는 여자들은
남자들이 사우나탕의 밀실이나 창녀촌에서
받는 환대 이상의 쾌락과 즐거움을 맛보고
가는 곳이었다.
하나님. 지금 흥미진진하게 보고 계시죠?
세상 참 공평합니다. 사내들만이 으스대며
즐기는 걸 봐 줄 수 없으니까 저런
공평하신 겁니까.
제가 호를 하나 지어드리죠.
하공평. 어떻습니까? 맘에 드십니까? 하긴
그래요. 사내들은 몇푼의 돈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여자를 살 수 있습니다. 대낮에
점심 먹고 나가서 목욕 한탕하고 현금을
지불한 만큼의 쾌락을 산 뒤에 의젖하게
들어올 수도 있고 저녁에 술 한잔 걸치고는
술김이란 핑계로 장화신고 오입 한번 해도
사내다우면 사내다웠지 바보취급은 받지
않잖아요. 여자라고 그러지 말란 법
없잖아요. 꼭같은 사람 아녜요. 하나님이
애초 만들 때부터 남자편만 들었다는 것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여자라고 배알이
없는 줄 아세요.
여자도 사람이다 이겁니다. 여자도 욕망과
말입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여자를 너무 깔보지 마세요. 알 거 다 알고
할 거 다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남녀평등 몰라요?
내가 뛰어들어가 그 용감하고 존경할 만한
여자들 상판대기 좀 똑똑히 보여드릴 테니
웃지나 마십쇼.
하나님답게 침묵을 지켜달라 이 말입니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의 사내가 들어섰다.
가방을 멘 사내는 키가 컸고 골프백을 든
사내는 키가 작았다. 나는 얼른 시계를
보았다. 춘삼이 형이 약속한 시간이었다.
"두꺼비 형님 계십니까."
키 큰 사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놓고 나왔다.
"여기다. 들어와라."
나도 큰소리로 말했다.
두 사내가 손을 들었다. 나는 여자를 잡아
일으켰다.
"조용히 해. 떠들면 죽어. 비밀문으로
안내해, 어서."
"왜 이래요. 큰 형님 알면 어쩌려고."
"잔소리 말고."
"정신 나갔나 봐. 큰 형님 성깔 알면서."
"정신 멀쩡하니까. 어서!"
여자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서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비틀어 잡았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전화선을 끊은 사내가 다가왔다. 세 명의
종업원이 뒤로 손목이 묶인 채 따라와서
비상벧을 가리켰다.
"차례차례 묶어서 밀실에 처 넣어라.
비상벧은 그냥 둬."
"손님들은요."
"묶으면 안 돼. 한방으로 모아놨다가 문이
부서지면 내보내."
우리 행동이 쉽게 발각되지 않은 것은 밀실
덕분이었다. 모든 구조가 밀실로 만들어져
있어서 우리가 눈치 채지 않게 한방 한방을
다니며 종업원과 손님을 구분해서 갈라 놓을
수 있었다.
"형, 다 끝냈어요."
키 작은 사내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공구 가져왔지?"
"이거요."
사내는 골프백을 열었다. 연장들이 들어
있었다.
두 사내는 재빨리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넌 여기 지키고 넌 손님들 내보낸 뒤에
나를 따라 붙어."
"알았습니다."
녀석들은 제법 손이 빨라 보였다. 춘삼이
형이 챙겨서 보낸 것 같았다.
"그 비상벧을 누르고 땅개비 애들이
왔다고 소리쳐!"
나는 화장실 안 쪽에 붙어 있는 문 쪽으로
붙었다. 키 작은 사내가 연장을 꺼내들고 내
맞은편에 붙었다. 키 큰 사내가 비상벧을
눌렀다.
인터폰 소리가 들렸다.
"뭐냐?"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걸찍했다.
"땅개비 애들이 세 명이나 와서 큰 형님
키 큰 사내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가만 둬, 우리가 올라갈 테니까."
인터폰은 찰칵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들 모시고 나가라. 오늘 술값은 안
갚아도 좋다고 해."
"원님 덕분에 공짜 술 먹었군요."
키 작은 사내가 음흉하게 웃었다. 손님들이
재빠른 동작으로 나갔다. 철사줄로 묶인
종업원들이 체념한 듯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안에서 문 따는 소리가 들렸다. 키 큰
녀석이 종업원들 옆에 서서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한 사내가 뛰어 나왔다.
키 작은 사내가 발목을 걸어 쓰러뜨렸다.
뒤따라 올라오던 사내가 후다닥 계단뛰기를
"묶어 놓고 따라 붙어라."
내 말이 끝났을 때는 벌써 사내의 손목에
철사줄이 감겨 있었다. 종업원들의 철삿줄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괜히 시끄러운 일을
만들것 같아서 내버려 두었다. 쫓아나가
불량배들을 불러들인다든지 도치 패거리한테
연락이라도 했다간 일만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지하실은
캄캄했다. 전기를 차단시킨 모양이었다.
"불 키고 밝은 낯으로 상면 좀 합시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 안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비상구는 잠겼소이다. 캄캄한 곳에서 괜히
코피 나는 일이 없도록 해 봅시다. 여러
여자들도 있고 하니 말입니다. 도치 형, 불
그래도 아무 대꾸가 없었다. 입구에
잠복하고 있을 경비원들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도치는 이를 앙다물고 결사적으로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있을 게 빤했다.
"이렇게 비신사적으로 나오면 연기 좀 피울
수밖에 없겠소, 나 혼자니까 우리 피차 얼굴
좀 봅시다."
고요했다. 인기척이 없었다.
"그럼 할 수 없이 소방차 올 때까지 불 좀
쪼입시다. 119에 신고할래도 전화선이
끊어져서 못하겠으니 양해하슈. 어이, 여기
석유통 엎어라."
키 작은 사내가 석유통을 들고 내 옆에
섰다. 녀석은 재미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위금을 후하게 보내드리리다."
내 말소리가 지하실 안으로 흘러
콸콸콸 흘러 내려갔다.
"석유냄새니까 좀 참으슈. 곧 성냥불도
보내드리겠소."
그때 안에서 불이 켜졌다. 그리고 한
사내가 입구에 얼굴을 내밀었다.
"좋소. 내려와서 얘길 좀 합시다."
"형씨가 도치 형님이슈?"
"그렇소. 형씬 뉘쇼?"
"나는 이름없는 나그네올시다."
"지나가는 과객치곤 호기가 대단하시군."
사내의 목소리는 걸찍했다. 기름통을 엎어
놨는데도 자세가 의연해 보였다. 온갖 풍상을
겪은 사내다웠다.
"내려가곤 싶은데 옆의 애들이 신경
쓰입니다."
"얘들아, 비켜서라."
어지간하면 맘 놓고 내려가게 해주쇼."
"소문 들어 알고 있었소. 진작 그렇다고
하실 일이지. 얘들아 비켜라."
도치가 이렇게 말했다. 사내들이 모두 도치
옆에 나란히 섰다. 모두 열 두 명이었다.
생김새나 풍채로 보아서 솜씨깨나 있어
보이는 사내는 도치까지 다섯 명이었고
나머지 애들은 모두 남창노릇을 하는 사내
같았다.
"그럼 내려가리다."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도치는 약속대로
대여섯 발짝쯤 떨어져 주었다. 큰 홀에는
아무 장식없는 소파가 놓여 있었다. 위층처럼
밀실로 된 방과 머리 손질을 할 수 있는
미용도구들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도치 형,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해주쇼."
"그럽시다. 들어가 얌전하게 있어라. 귀한
손님 오셨다."
도치의 말은 제법 손님대접을 하는 말투
같았지만 실상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라는 명령이었다. 귀한 손님이란
실력이 만만찮으니 몸조심하라는 암호였다.
"무슨 일로 오셨소. 우리 할배 형 소문이야
익히 들었던 터요. 동주 형님이 퍽 아끼셨던
모양입니다."
"동주 형님한테 귀염 좀 받았지요. 도치 형
소문도 그 형님 편에 많이 들었지요."
나는 그를 깍듯하게 대했다. 어떻게 따지든
내겐 대선배였다. 전 같으면 감히 이런 식의
상면조차 할 수 없었다.
"본론으로 갑시다."
"보슬비라고 있지요. 노래하는 애들
말입니다. 언니되는 수향이가 증발했는데
내가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도치 형이
도와줬으면 해서 왔습니다."
도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잘못 오셨소. 난 이 짓이나 해서 먹고
사는 놈이라 그런 거 신경 쓸 새가 없소. 그
문제라면 가는 게 좋을 거요."
도치는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이거 왜 이러슈. 알 만하니까 온 거 아뇨.
나도 오늘은 성질 차고 왔어요. 좋게 좋게
끝냅시다."
"여봐 형씨. 위 아래 높고 깊은 건 알고
덤벼야잖아. 남의 밥이지만 한 구덩이에서 밥
먹었다는 인연 아셨음 이런 대접 안 했을
거야. 잔소리 말고 곱게 가봐."
일어섰다. 애들이 천천히 걸어와서 나를
둘러쌌다.
"도치 형, 손님대접 이렇게 하는 거 아뇨.
성질 차고 왔다잖소. 성주학이 밑 닦아주는
거 알고 온 놈요. 곱게 가게 해주쇼."
"이 아이가 저녁 잘못 먹은 모양이다. 소화
좀 시켜줘라."
도치가 의젓하게 한마디 했다. 애들 손에
날이 허옇게 선 칼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손을 저어 보였다.
"도치 형, 우리 말로 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양보요."
"이 자식이 점점 귀엽게 노는군. 재롱 더
떨게 해줘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애들이 한꺼번에
덮쳤다. 나는 선 채 공중회전하며 소파로
차례로 걷어찼다. 세 녀석이 고꾸라지자
나머지 녀석들이 뒤로 물러났다.
"칼 버려."
그래도 애들은 나를 꼬느고 있었다.
나는 표창 두 개를 던졌다. 애들이 칼을
버리고 주저앉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도치 이리 와. 어서!"
도치 손에는 표창 네 개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동주 형 밑에서 표창 실력을 닦은
사내였다.
"표창 내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어서!
애들은 장난하면 눈깔 빠져."
"너 오늘 비로소 임자 만났구나."
도치는 여유 있게 지껄였다.
"동주 형님한테 가서 무초 스님 얘기나
전해라. 장난하다 눈깔 빠지는 거라고."
쉭쉭 쉭쉭!
표창이 소파에 꽂혔다. 나는 벌떡 일어나
표창을 들어보였다. 녀석이 잽싸게 내 쪽으로
굴렀다. 나는 녀석의 턱을 걷어찼다. 도치가
대굴대굴 굴렀다. 실력자한테 나는 한방
이상을 쓰지 않는 성미였다.
도치는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도치 정도의
전문가라면 이렇게 단 한방에 당한 경우가
처음일 것이다.
"애들 다 묶어라."
춘삼이 형이 보낸 녀석이 철사줄로 하나씩
묶었다. 도치가 그제서야 겨우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폈다.
"도치, 내 말 명심해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치의 턱을 들고 내가
말했다. 아직도 고통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사내였다.
"네가 실력자란 건 안다. 너 정도
실력자라면 지금쯤 좋은 사업을 할 나이란 걸
선배들을 봐서도 알 거다. 이 따위로
남창이나 차려서 얼마나 벌겠다고 몸 쓰는
거냐. 너답지 않게 말야."
도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네가 원한다면 맞장 붙어주마.
대신 내가 눈 뜨고 있는 한 이것은 용서하지
않겠다. 당장 걷어치워라. 내 말 알겠지?"
도치의 표정이 실룩거렸다.
"이거 고슴도치답지 않구나. 왕년에 내가
존경하던 고슴도치가 아니구나."
도치는 겨우 일어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거물 대접을 하기 위해서
도치만은 묶지 않았다. 그것은 내 예의였다.
괴로운 표정으로 도치가 말했다.
"끝까지 이 짓을 하겠다는 거냐?"
"난 식솔이 많다."
"그래서 남창으로 돈 벌어 먹여야 한다
이거냐?"
"비록 오늘은 내가 당했지만 무릎 꿇진
않겠다. 난 이걸 계속하겠다. 어느 놈이
뭐라든."
다부진 말투였다.
"너, 사람 잘못 봤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이 꼴 못봐 주겠다."
"네 맘대로는 안 될 거다."
"두고 보마. 후회하는 쪽이 누군가."
"널 없애겠다. 내 목숨을 걸고."
"넌 역시 두목질에 이골이 난 놈이구나. 난
네 말을 명심할 테니 넌 내 말을 잊지 마라.
난 두방 이상 쓰지 않는다."
"어서 나가라."
도치가 풀리지 않은 육체를 꼬아가며
말했다.
"내가 시범을 보여주고 나가마. 가서 끌고
와라."
"잠깐."
도치가 다급하게 말했다.
"넌 말할 자격이 없어. 어서 끌어내."
"잠깐, 손님들은 내버려둬라."
"난 두 마디 않는 놈이라고 했잖아. 아직도
넌 귀가 덜 뚫렸어."
도치는 앉은 자세에서 재빨리 내 쪽으로
덮쳤다. 그의 손엔 사시미칼이 쥐어져
있었다.
"이 자식이 이거, 뒈지려고 진짜 악쓰고
있네."
생각 같아서는 손목의 혈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런 실력자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주기는 싫었다.
몇 대, 급소를 때렸다. 도치가 대자로 뻗어
누웠다. 나머지 녀석들은 그 옆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
"가서 죄다 끌고 와."
그때까지 내 지시만 기다리던 사내가
방문을 열고 여자와 남창노릇 하는 사내들을
끌고 나왔다.
"저쪽 방으로 몰아 넣어."
나는 여자들을 대충 훑어보고 복도 끝방을
가리켰다. 여자들은 그때까지도 속옷 차림에
가운만 걸친 채였다. 더러는 속옷마저 입지
않은 채 가운을 걸친 여자도 있었다.
낯익은 여자들이 눈에 띄었다.
여자들의 얼굴은 신문이나 텔레비전, 잡지
속에서 가끔 낯간지러운 도덕강의를 하는
여자들이었다.
나는 여자들만 모아 놓은 방으로 갔다.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고개 들어, 이년들아!"
내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런다고 그들이
얼굴을 내밀고 내가 누구라고 나서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 여자만은 아까부터 초연한 척 고개를
들고 나를 빳빳하게 노려봤다.
나는 차마 그 여자에게만은 욕지거리를 할
수 없었다. 남창에 온 여자가 저렇게 얼굴을
드러내놓고 당당할 수 있을까?
"아줌마는 뭐가 그리 자랑스럽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 계슈?"
"난 과부예요. 그렇다고 새로 시집가고
싶진 않아요. 애들도 있어요. 이게 나쁜 짓인
줄은 알지만 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려고
여기 단골 손님이 된 여자예요."
"떳떳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죄될 것도 없지요."
"하루에 얼마씩 냅니까?"
"내가 여기 다닐 때부터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어요."
"당신은 가슈."
"이 여자들도 같이 가게 해줘요."
"먼저 나가요. 내가 잡아먹진 않을
테니까."
그 여자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갔다.
"고개 들어라. 어서!"
얼굴을 들지 않았다. 나는 돌아가며 얼굴을
들어 따귀를 갈겼다. 여자들은 더 깊숙하게
얼굴을 수그리기만 했다.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이런 짓
않겠습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다 해
드릴게요."
용감한 어떤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
"뭘 해주겠다는 거냐?"
"필요하신 거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얼굴을 벽 쪽에 감춘 여자가 또 말을
받았다. 여자들은 용기가 생겼는지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주부도박단으로 걸린
여자들이나 범죄자로 잡힌 여자들이 텔레비전
카메라를 피하듯 벽 쪽에 고개는 처박았지만
말은 그럴 듯하게 했다.
나는 제일 뒤 쪽에서 고개를 처박고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그녀는 더 깊게 머리를
박았다.
"네가 그 잘난 여성운동가지? 가만 있자,
그래 네가 이지숙 박사라고 하는 년이지?"
그녀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녀는
자주 얼굴을 팔아먹고 사는 여자였다.
여자들을 위한 법률상담과 가정상담도 했고
여성들의 권익을 위한다는 무슨 단체의
회장질도 하고 있었다.
재작년인가 그 전 해인가에는 정숙하고
가정이 원만하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운
여자에게 상을 주는 괜찮은 상도 받은
여자였다.
"네 남편이 알면 좋아서 펄쩍펄쩍 뛰겠다.
여성운동하는 마누라가 제 길로 들어섰으니
남녀평등이냐? 에이 더러운...... ."
나는 쫓아가 머리끄덩이를 번쩍 치켜
들었다.
"이년들아, 똑바로 봐. 이 여편네가
너희들의 대변자인 이지숙 박사라는 년이다."
그녀는 그래도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가운 속으로 늙어서 축 늘어진 육체, 늙으면
누구나 그렇듯 볼썽사나운 알몸이 드러났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내 바지를 잡았다.
"선생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한 번만...... ."
"네가 선생이지 내가 선생이냐? 너 몇 살
처먹었지?"
"쉰 여섯입니다."
"너 젊었을 때 우리나라 여학생들을
왜놈들한테 정신대로 팔아 먹은 년이지?"
"여학교 다니면서 위대한 황군을 위해
정신대로 가라고 강연한 거 기억에 없다, 이
말이냐?"
"그럴 리가...... ."
"그럴 리가 없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옳게 말하지 않으면 확 불어 버린다. 네
남편, 네 자식, 네 제자들이 박수치게
해줄까."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부탁입니다. 한번만 살려 주세요."
"네가 여성지도자라는 게 구역질이 나서
죽겠다. 꽃 같은 여학생을 정신대로 넘기고
황국신민 되자고 연설하고 다닌 년들이
지도잡네 하고 소리치며...... 남녀평등합네
나는 이지숙 박사를 방바닥에 내던졌다.
그녀는 창피한 것을 잊었는지 내 바지를 잡고
흐느끼고 있었다.
"꺼져, 빨리."
그녀는 허겁지겁 내게 큰 절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을 열고 소리쳤다.
"너 한 번만 더 얼굴 내밀고 헛소리 했다간
볼장 다 보는 줄 알아. 집안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마. 알았어?"
"네네네, 네네네."
일본여자처럼 허리를 수그린 채 연신
자발맞은 대답을 했다.
"가서 도치 깨어났나 보구 와."
사내는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여자들을 한대씩 더 갈겼다. 얼굴에 손자국이
시뻘겋게 났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종교 믿는 년 있으면 손 들어 봐."
역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남편 없는 년들 손 들어."
두 여자가 손을 들었다.
"빨리 꺼져."
두 여자가 게걸음으로 방을 빠져 나갔다.
나는 나머지 여자들의 따귀를 두 대씩 더
올려붙였다.
"너희들 다음에 걸리면 국물도 없어.
너희들 명단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알아서들
기어다녀. 집에 가서 발 닦고 남편과
자식들한테 큰 절을 한번씩 한다고 맹세하는
년들은 가도 좋다."
내 말이 떨어지자 여자들은 모두
맹세하겠습니다란 말을 반복하며 나갔다.
녀석이 귓속말로 말했다. 나는 소파 있는
곳으로 나왔다.
"방마다 뒤져서 수향이 있나 찾아 봐."
"알았습니다."
녀석이 재빨리 복도 쪽으로 갔다.
"도치, 너한테 한마디 더 할 게 있다."
"해라."
여전히 당당한 대답이었다.
"난 두 마디씩 하기 싫은 놈이다. 그건
네가 소문 들어서 더 잘 알 거다.
수향이를 내놔라."
"지금 여기 없다."
"S주식회사 상속자 성주학은 어디 있지."
"지금까지 일은 서로 없었던 걸로 하자."
도치가 나를 진지하게 바라다보았다.
"경고한다. 수향이 내놔라. 성주학이도."
"두 마디 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나는 사정없이 도치의 어깻죽지 밑을
가격했다. 숨소리가 탁탁 끊어졌다. 지하실을
다 뒤져본 녀석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나는 도치의 오른손의 혈을 잡았다.
"할 수 없지. 네가 세상을 이해하는
수밖에."
도치는 혈을 잡힌다는 게 어떤 형벌인지,
그리고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누구 부탁이냐?"
도치가 응어리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 개인적인 문제다."
"성주학에게 손대지 않는다면 내주겠다."
"세 대는 때려줘야지 않겠나? 사내가 칼을
빼고 나섰는데."
"여기에 또 비밀 지하실이 있는 줄은
몰랐다. 데려와라."
"쟤들 풀어줘라."
"허튼 짓 하면 다 날려 버린다."
"안다."
철삿줄에서 풀린 두 녀석이 소파를
들어내고 지하실로 내려가서 성주학과
수면제에 곯아 떨어진 수향이를 데리고
나왔다.
"성주학, 너 이리와."
재벌 2세답게 미끈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겁먹은 얼굴이었지만 당당하게 보이려는
허세가 숨어 있었다.
"도치하고 협상을 했다. 수향이를 데려가고
너는 세 대만 때리기로."
성주학은 도치를 쳐다보고 이내 무릎을
"형님! 하란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보내주십쇼. 나도 사냅니다."
"오늘은 하란 대로 하겠다는 놈
투성이구나. 넌 세 대를 맞아야 돼. 애비
믿고 돈만 까불려서 안 된다는 걸 배워둬야
해. 네 행위로 봐선 밤새 맞고 새벽에 턱이
부서져야겠지만 도치하고 약속했으니 세 대만
맞아. 무릎 꿇고 맞는 거보다는 서서 맞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형님!"
"이 자식아,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이
없어. 어서 일어나."
"형님, 제발 이러지 마시고 제 말씀을
들어보세요."
"들어보나마나 빤해. 재벌 새끼답게 돈을
내놓겠다든지 아파트를 한 채 준다든지
"...... ."
"이 자식아, 돈 가지고 안 되는 게 어떤
건지 배우라고 했잖아. 느이 애비한테 이런
거 못 배워. 맞는 것도 임마 돈내고 배워둘
필요가 있는 거야."
"형님, 전 말입니다. 수향이와 결혼할
생각인데 말입니다. 수향이가...... ."
"너 아가리로 재벌 새끼 됐냐?"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너 잔소리 더 하면 사타구니를 못 쓰게
만든다."
녀석은 그 한마디에 입을 봉했다. 나는
녀석을 세워놓고 주먹질을 했다.
성주학은 세 대째 맞고는 완전히 뻗어
누웠다. 아마 속으로 살이 들어서 몇달 동안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수향이를 데리고 나왔다. 도치가
엉금엉금 기어나오며 말했다.
"두 번 다시 오지 마라. 그땐 널 끝장
내겠다."
"나도 총알이 내 몸에 박히는 건 싫어하는
놈이다. 그러나 네가 그 장살 계속하는 한
너하고 난 재수없게 만나게 될 거다."
"두고 보자."
"네 손님들 명단이 내 손에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뭐라구!"
도치는 호주머니를 만졌다. 도치의 수첩을
내가 들어보였다. 도치가 이를 악물었다.
"널 없앨 거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곤 했다."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녀석이
따라나온 도치가 철푸덕 주저앉아서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바람 빠진 차 옆에 자동차 정비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차체를 손질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여자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달려라."
자동차는 골목길로 질주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향이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잠만
자고 있었다.
하나님.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 보고 계셨을
테니까요. 남창이란 걸 알고 계셨죠?
그러면서 그렇게 입 봉하고 가만히 계실 수
있는 겁니까? 창녀촌도 내버려 두는데 웬
소리가 많으냐고 하신다면 할 말 없습니다.
? 하나님.
이게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미향이가 문앞에 나와 있다가 나를
얼싸안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의사 부를 생각마. 수면제니까 괜찮아.
깨어나면 안정시키도록 해."
"고마워요 오빠. 내 꼭 신세 갚을 거예요."
"그런 소리 말고 언니나 잘 보살펴라.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고."
"오빠, 정말 고마워요. 꼭 갚을게요."
"알았다."
나는 수향이를 데려다 주고 바로 돌아섰다.
그 자리에 오래 있어 봤자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