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사서 전식 신도비[ 尙州 沙西 全湜 神道碑 ]
이칭별칭
지사 사서 신도비명, 知事沙西神道碑銘, 증좌의정 행지중추 충간공 사서 전선생 신도비명, 左議政行知中樞忠簡公沙西全先生神道碑銘
유형 유적
시대 조선/조선후기
성격 신도비
건립시기·연도 1700년(숙종 26)
크기(높이, 길이, 둘레, 깊이) 전체 높이 333㎝비신 높이 178㎝, 폭 80㎝, 두께 16㎝
소재지 경상북도 상주시 외답동 산24-1
소유자 전상룡
관리자 전상룡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9호
문화재 지정일 2009년 12월 28일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사서(沙西) 전식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1700년(숙종 26) 경북 상주에 건립한 신도비.
개설
전식(全湜, 1563~1642)의 본관은 옥천(沃川)으로,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광해군 실정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삼로(商社三老)’ 또는 ‘상산삼로(商山三老)’라 일컬어졌다. 관직은 대사간·대사헌·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 신도비는 1700년(숙종 26)에 건립되었으며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외답동 산24-1번지(상주 시내에서 낙동 방면 국도 25호선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비문의 찬자(撰者)인 조경(趙絅, 1586~1669)의 문집 『용주집(龍洲集)』 권20에 「지사 사서 신도비명(知事沙西神道碑銘)」이란 제목으로 신도비문이 실려 있다.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용
전식의 신도비는 비신(碑身)·이수(螭首)·귀부(龜趺)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수는 운룡문(雲龍紋)의 새김이 뚜렷하고 귀부도 귀갑문(龜甲紋)을 포함한 전신의 새김이 섬세하게 조식(彫飾)되어있는 반면, 비신 전면과 후면의 하단 일부가 손상되어 떨어져나갔다.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333㎝이며, 비신의 높이는 178㎝, 정면 폭은 80㎝, 두께는 16㎝이다. 비신의 전면 상단에 “증좌의정 행지중추 충간공 사서 전선생 신도비명(贈左議政行知中樞忠簡公沙西全先生神道碑銘)”이라고 쓴 전액(篆額)이 새겨져있으며, 비신은 전면과 후면에 걸쳐 작은 글씨의 해서(楷書)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1659년(효종 10)에 조경(趙絅)(주1)이 지었고, 1700년(숙종 26)에 신도비를 건립하면서 이봉징(李鳳徵)(주2)이 지은 비문 음기(陰記) 7줄을 후면에 추가로 새겨 넣었다. 글씨와 전액(篆額)은 이진휴(李震休(주3))가 썼다.
신도비의 내용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대북(大北)의 영수였던 정인홍(鄭仁弘)에 대한 논박, 1625년(인조 3) 후금(後金)이 요동을 함락하고 있을 당시 해로(海路)를 통해 연행(燕行)한 일화를 포함하여 가계, 관력, 임란시의 의병활동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신도비는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과 더불어 ‘상산삼로(商山三老)’라 칭송된 사서 전식의 유학자로서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사서집(沙西集)』
『용주집(龍洲集)』
『충간공 전식 연보』(도서출판 세종, 2011)
한국고전번역원(ww.itkc.or.kr)
문화재청(www.cha.go.kr)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상주 사서 전식 신도비 [尙州 沙西 全湜 神道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1)조경[ 趙絅 ]
본관 한양(漢陽). 자 일장(日章). 호 용주(龍洲). 시호 문간(文簡).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형조좌랑 ·목천현감(木川縣監) 등을 지내고, 162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정언(正言) ·교리(校理) 등을 역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이조정랑을 지내고, 1636년 사간(司諫)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斥和)를 주장, 이듬해 집의(執義)로서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청군을 격퇴하자고 상소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 뒤 응교(應敎) ·집의 등을 지내고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온 뒤 형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냈다.
1645년 이조참의가 되고, 대제학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 때 이도(吏道)를 쇄신, 관리 등용의 공정을 기해 명망을 얻었다. 1648년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1650년(효종 1) 청나라 사문사(査問使)가 와서 그를 척화신(斥和臣)이라 하여 의주에 귀양보냈다.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내고 은퇴, 행부호군(行副護軍)이 되어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글씨도 잘 썼다.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홍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용주유고(龍洲遺稿)》, 저서에 《동사록(東槎錄)》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경 [趙絅] (두산백과)
(주2)이봉징[ 李鳳徵 ]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명서(鳴瑞), 호는 은봉(隱峰)이다. 1675년(숙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수찬으로 등용된 후 의정부사인·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691년(숙종 17) 개성유수가 되었으며, 1692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169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이해 갑술옥사로 남인들이 제거될 때 함께 파직되었고, 1698년 형조참판으로 복직하였다.
이후 좌천되어 1701년 오위도총부 부사를 지낼 때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사형에 반대하였는데 이로 인해 전라도의 섬 지도(智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는 조치)되었으며, 1705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봉징 [李鳳徵] (두산백과)
(주3)이진휴[ 李震休 ]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백기(伯起), 호는 성재(省齋) 또는 성암(省菴)이다. 1657년(효종 8) 이영(李泳)의 아들로 태어났다.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86년(숙종 12) 정6품 전적(典籍)의 신분으로 중시문과에 병과로 다시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 후 지평, 정언, 장령, 헌납, 수찬, 부교리, 집의, 필선, 승지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697년(숙종 23) 여주목사를 지냈다.
1700년(숙종 26) 도승지,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1701년 충청도 관찰사로 재임 중 송사를 불공정하게 처리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일시 파직되었다. 1702년 도승지를 지냈고 1703년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 2명을 죽인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705년(숙종 31)에 다시 도승지로 등용되었으며 그 후 동지의금부사, 안동부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서예에 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1710년(숙종 36)에 사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진휴 [李震休] (두산백과)
神道碑銘 幷序[趙絅]
贈左議政沙西全公旣卒之十七年。第二子前四山監役克恬。使嗣孫手故同樞黃戶氏之狀。自商山北走千餘里。乞銘於漢陽趙絅曰。吾先人位於朝也。獲私於執事久。敢藉先人靈。徼惠於執事。以不朽請。絅襒席爲禮。以齒近耄矣。難強筆硯。屢辭不得。則讀狀未半。掩卷而歎曰。余嘗聞南中士友之誦沙西公有高世行者二。今見狀良然。當光海戊申年間。頻頻之黨。推鄭仁弘爲奧主。勢焰焄灼。人莫敢迕其鼻息。觸碎犯焦。不足言也。公能造次奮舌。辨揠其誤。申梧里相正論。陳忠肅之拄章惇。不及是矣。全遼陷虜。朝周之路。變而航海。受命冠蓋。前後葬魚腹者相銜。公於是時。年過耳順矣。無幾微以老爲解。取先少壯而行。履鯨濤如康莊。視死生如往還。謝安石之無怖舟楫。敖而不足數者。由是皇朝史氏書曰。朝鮮使臣全湜來朝。特筆也。此則李潤慶登名嘉隆錄後刱見事也。傳稱死而不朽者三。公之行。奚遽不媿功與言而止哉。太史氏將大書特書。不一書已也。冷淡傖父語。何足輕重於公之不朽。顧托名顯刻。以垂來許。則吾庸多矣。蓋公立朝五十餘年。歷職三十有奇。亡論高庳外內。率所事所言。無非發於積中忠直。皆足以爲世則世師。士友所稱高世之行。特擧其大者耳。公未釋褐。宣廟朝名相金應南薦公除連原察訪。吹喣摩撫。敝郵以完。臬臣才公之爲。委以可興。收稅倉實。不以倭警而損。又令主饋給湖南軍餉。餉事擧。己亥。轉禮賓直長不就。癸卯。登上第。乙巳。選入起居注。柄相倡尊號議。三司從臾之。惡公異於己。公遂色擧。丁未。陞典籍。戊申。薦騎省郞。旋佐幕忠淸。刷邊民。剔僞歸眞甚晢。代道臣決滯訟。案無留牘。己酉。拜禮部員外。陞正郞。時有持公議者。欲置公選曹甚力。鉥公見用事郞。公笑而不答。由是事不諧。辛亥。除蔚山判官。風化大行。明年。以疾不赴金郊。出爲全羅都事。時光海政亂。彝倫垂斁。公不樂爲官。退藏于鄕。與鄭愚伏,李蒼石相羊山水間。世以爲商社三老。己未庚申。連遭內外艱。易戚俱盡。廬墓終制。癸亥。仁祖大王靖宗祊。收召畯良。公拜禮曹正郞。兼記注官知製敎。俄錄弘文。拜修撰,校理。學士任叔英嘗稱經筵官。通古今鄭經世。達事理全湜。久之。由典籍拜司憲府掌令。擧彈無所避。甲子。逆适亂作。公以太僕正扈駕。而南至天安。拜執義。論延平君李貴視師左律之罪。元帥張晩緩期縱賊之律。晩幕下武士輩盡讙。訟主將無罪發逸口。公當臺門叱曰。使宗社蒙塵。君父播越。誰之罪也。汝等亦人臣子敢爾。皆咋舌而戢。三月。由禮賓寺正。陞通政拜兵曹參議。賞羈靮勞也。冬。拜代言。上賜金公諒折衝資。公徼還。物論多之。乙丑。遷左承辭。由護軍改刑曹參議。以上价朝京師。華人見者。咸稱公德器。登州軍門武之望。尤致敬禮焉。明年。復命。又明年丁卯二月。奴穿塞綴海西。帳殿闢于江都。奴使劉海持奴書至。要與主上歃血。廟議折八和套中。公抗疏持摘和事之非切刻。改禮曹參議。俄拜大諫。進六條箚。曰納諫諍。曰去偏私。曰修軍政。曰減軍官。曰勿恃和議。曰勿爲譏察。軍官與譏察。夫人莫不知病國召亂。而畏勳貴無敢發口。公獨盡陳其狀。無毫髮爽。聞者髮豎。自庚午至辛未。往來禮部左侍者四。爲東西銓議者再。爲諫長者四。公輒自言老甚病。力不可久廁朝端。求外補堅懇。遂尹鷄林。爲治眞得汲黯之淸淨臥閤。一境化之。瓜熟而歸。民刻石爲詩美之。甲戌。拜大諫。論昔我先王製經國典。雖王子大君不敢越其制。今麟坪大君昏時衣服器用太侈。恐累先生之制也。上嘉納。又論紀綱漸弛。宮闈不嚴。又上疏論時政得失。人主好惡。天災民怨。鑿鑿累百言。無非中端。又勸上益溫舊學。更加新得。眞儒臣之言也。辭遞拜兵議。還都。諫辭拜禮議。賜告歸鄕。丙子正月。奔哭仁烈王后喪。闕下謝命卽歸。拜大諫,副學。咸辭以病。十二月。西事急。上避之南漢城。公倡義募兵。丁丑。圍解。大駕還都。公卽奔問。業有副學之命矣。肅謝請對。上側席而敎曰。聞卿倡義。予甚嘉尙。慰諭之至。且詔之曰。嶺軍再集於負來之後。良由嶺南士大夫知不後君者多。湖南能無愧乎。公涕泣而前對曰。老臣病不能袵金革。孤負主辱臣死之義。今登文石之陛。顏不翅十重鐵甲。仍進言曰。古人有言曰。臨大難而不懼者。聖人之勇也。聖上獨不觀前古帝王喪國而存國者乎。願毋自沮。毋自逸。日與群臣講興衰之道焉。蓋自出城。殿坐甚罕。故公言及此。俄拜吏議。閱數月。特陞參判。加嘉善資。辭不許。乞暇遷先墓。戊寅。三拜諫長。一遷憲長。改禮曹參判,國子大成。上以湖南軍犯律。命役南漢三月。又命巡檢使整三道舟師。公皆執非時。又上箚其目八。調養聖躬。懋修實德。痛革侈風。廣開言路。振肅紀綱。崇奬節義。勤恤民隱。革罷內需。盡毉國之粱肉藥石也。識者歎服。後兩歲。拜府院長俱三皆辭。時大臣建全某德望素高。年齡已暮。宜急大用。公聞之。尤自謙謙斂退矣。壬午二月。上特加資憲。除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從。李相聖求之啓也。公年始滿八十。故尋拜大憲不赴。是年十一月初七日。考終于尙之城外第。訃聞。上輟朝贈賻。賜祭如儀。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後用長督克恒原從功。加贈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明年二月。葬于尙治西柏田山先壠下巽坐原。治命也。公諱湜。字淨遠。沙西號也。系出沃川。其先有學浚者。仕麗朝爲領同正。傳至太子中允孝格。刑部侍郞大富。民部典書侑。版圖判書淑。始大著。爲公高祖曰應卿。贈吏曹參判。爲曾祖曰彭祖。國子上庠贈承政院左承旨。爲大父曰焜。贈吏曹參判。爲皇考曰汝霖。贈吏曹判書。以公貴推恩也。妣月城李氏。封貞夫人。參奉信之女。公生於嘉靖癸亥正月。穎卓異凡兒。才毀齕。閭里稱孝童。未十歲。就塾師學。學日進。金沙潭弘敏。有人倫鑑。見之稱賞。期以遠到。己丑。中司馬試。壬辰倡義募士。鏦殺賊數十餘。公之忘身殉國之志。發軔於此云。公爲人。白而長。身和易有量。所操者惟義與道。雖歷險阻艱難。意氣不少變。以終其身。是以其沒也。上自薦紳大夫。下至閭巷學究輩。無不嗟惜。又恨不得爲宰相於一時。膏澤生民也。公之德望。於此可見。於戲。公吾丈人行也。公視我不以幼壯先後致異。不佞於癸未歲。奉使日域。意敍別於德公床下。反哭拜靈座下。愴何可已。公凡再娶。先夫人江華崔氏。府使巨源之四世孫。未乳早世。後夫人洪氏。南陽世族士人天敍之女。生三男一女。曰克恒。文科正郞贈都承旨。以文學著名。死丙子難。曰克恬。進士前監役。曰克㤚。女適黃德柔。司憲府監察。側室三男二女。克忱,克憕,克。康鍒生員。柳之洙。克恒無嗣。庶出崇。克恬有二男四女。曰嶨。曰。爲克恒後者。女李皬,李埰別檢,金學基進士。餘幼。克㤚有一男。曰嶔。峸克憕出。克出。黃德柔三男三女。霦生員。,霆。正言洪汝河,士人成錫夏其壻也。餘幼。康鍒有二男二女。后學,世學。女幼。嶨,洪汝河有子女而幼。銘曰。懿哉我公。世孰與侶。於仁戴行。於義抱處。於夷必讓。於病必急。愼靜而至壽。強毅而容物。噫嘻斯人。其可復見於今日也哉。
正憲大夫原任知中樞府事趙絅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