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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누가복음 4 : 17 - 19
제목: 자유케 하시는 예수
일시: 2010. 8. 15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10). 그저 요셉의 아들 예수로 보기도 했다. 어떤 이는 뛰어난 유대인의 선생 랍비로 여겼다. 어떤 이들은 선지자나 엘리야로 알기도 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니 당연히 왜 오셨는지도 알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위대한 위인 중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예수 부처 공자 모하메드 이러한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여전히 랍비로 본다. 몰몬이나 이슬람에서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한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시고 왜 오셨는가? 주님은 어린시절을 보내었던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유대인의 회당에서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고 당신의 오신 목적을 말씀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것을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사야의 이 글이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이고 예수께 와서 성취된 것이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 주님은 그런 분이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빛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신 것이다.
II.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 표적을 보이시고 기적을 행하시며 놀라운 지혜와 권위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많은 기대를 걸었다. 예수님 시절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은 민족이었다. 로마가 그들을 점령했었다. 사람들은 예수라는 그 분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할 분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미가 와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여 나라가 세울 때에 자신의 아들들을 주님 나라 좌편과 우편의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은 이런 분이 임금이 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계략으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분의 죄목은 무엇이었는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인 죄목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다. 주님은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오신 분이다.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그 이상이며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그 이상의 메시야이다.
대한민국에 예수님이 소개되었을 때, 한국은 일본의 압제 하에 있었다. 그 동안 사회를 이끌어왔던 유교는 힘을 잃었고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양반 쌍놈 하는 문화 속에서 나라는 하나가 되지 못했고 폐쇄적이고 발전하지 못했다. 이때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배움의 터를 주는 학문의 통로가 되었고 여성들도 신문화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선교사와 교회는 한국 사회의 새바람이고 소망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식민주의 정책과 더불어 선교가 시작되었기에 많은 피선교국의 사람들은 기독교를 식민지의 앞잡이로 알았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기독교의 신앙은 이미 일본의 침략과 합병으로 나라를 잃는 그 때 희망으로 떠오른 믿음이었다. 눈먼 사회에 기독교신앙은 빛이었다. 일제에 눌려 있고 포로된 국민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소망을 걸었다. 그래서 일제시대 때에 독립운동가나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믿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회를 주도해서 나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그 이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우리에게 일제치하에서 독립을 주기 위한 것 그 이상이었다.
일제시대 이후에 한국전쟁을 경험한 조국은 가난의 시련이 있었다. 이때 기독교 신앙은 축복의 신앙이 강조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복 받는 것에 갈급했다. 그래서 주머니에도 복, 그릇에도 복, 숟가락에도 복, 이불에도 복, 담벼락에도 복, 어디가나 복을 언급했다. 그 동안 얼마나 못살고 복이 없는 민족이었으면 그랬을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도 그러한 축복의 신앙이 자리를 잡았고 많은 목사님들과 부흥사들은 축복을 강조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우리의 신앙은 축복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이 되었고 기복신앙이 삶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저 우리를 축복해 주셔야 하는 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축복신앙은 화를 피해가고 액땜을 하고 복을 받으려는 샤머니즘 신앙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김진홍목사님이 청계전에서 교회사역을 하는데 어느 날 새로운 사람이 교회에 등록했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교회에 오게 되었느냐고 했더니 동네 입구에 하얀 깃발을 걸어 놓고 점을 쳐주고 사주팔자를 봐주는 무당이 목사님을 소개했다나? 그래서 영 궁금해서 어느 날 기회를 잡아서 그 무당을 방문하여 물었다. 아니 어째 교회에 사람을 보냅니까? 그랬더니 무당이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어찌 혼자 먹고 살 수 있겠습니까? 같은 업종끼리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요!”
같은 업종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면 곤란하다. 교회가 그렇게 보이고 우리의 신앙이 그렇게 비쳐지면 안 된다. 그러면 주일예배는 굿이 되고 예배를 집례하는 목사는 무당이 되고 성도들은 액땜을 하고 복을 받으려 오는 고객이 되고, 드려지는 예물은 점집의 복채가 된다.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지 고객이 아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물질적인 축복을 얻는 그 이상이었다. 주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가 못 먹고 못 입고 헐벗는 그 가난에서부터의 해방하기 위한 그 이상이다.
대한민국이 가난에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먹고 살만하게 되자 눈이 뜨이게 되었다. 공장에서 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근로자들과 노동자들, 밑바닥의 인생을 사는 눌린 자들의 계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가 바로 이렇게 사회적으로 눌린 일반 민중을 해방하는 주님이라고 강조하게 되었다. 해방자 주님은 처음에 남미에서 나오게 되었다. 사회적 하류계층의 사람들이 억눌림과 가난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주님은 바로 그런 자의 주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남미의 해방신학이 나왔고 미국에서는 눌리고 억압받는 계층을 자유케 해야 한다는 여성신학이나 흑인신학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민중신학이 나왔다. 신학계에서는 Minjung 신학으로 말을 한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도 거리로 나왔고 반정부활동을 하고 민중예수를 부르짖었다.
예) 70,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박형규목사님(지금 87세)이란 분이 있었다. 그분은 80년대 초에 반정부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목사님이다. 그가 대전 한밭교회에서 특별 강연을 할 때 그저 친구들과 함께 가본 적이 있는데, 교회주변에 많은 전경들이 둘러쌓고 있었다. 그가 운동권목사님인줄 그때 안 것이다. 당시 학생들이 전두환대통령이 있었던 민정당사에 난입하여 점거농성을 벌였는데, 그것을 옹호하면서 예수님도 그러했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기 위해 성전으로 난입하여 채칙을 만드사 양과 비둘기 파는자, 돈바꾸는 자의 상을 엎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민중의 예수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그 이상이다. 이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나간 신학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을 정의하고 있다. 우리를 매고 있는 골칫거리에서 해방시켜 주고 자유를 주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소경된 자를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 것은 그 이상이다.
III.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한다고 할 때 우리는 무엇에 포로가 되었는가? 가난한 자에게 주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눌렸다고 할 때 무엇에 눌린 것인가? 주님의 자유는 조국의 독립 그 이상이다. 경제적인 회복 그 이상이다. 건강의 회복 그 이상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를 매고 있는 죄에서부터의 자유였다. 주님이 오신 근본 목적이 죄에서부터의 해방이었다. 어쩌면 조국통일, 사업이 번창하고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을 얻고 건강과 인간관계와 기타 삶의 모든 꼬인 일들이 풀려나가는 것들이 우리의 일차적인 당면한 관심사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오신 목적이 그러한 문제를 타치하는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첫 고백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회개의 고백이다. 신앙의 첫걸음은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다. “죄인입니다”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회개도 없고 주님을 만날 수 없다. 세리의 기도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는 얼굴을 바로 들 수 없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 기도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가장 듣고 싶어 하시는 것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이다. 그래야 치료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죄에 매여 있는 존재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는 어떻게 성립이 되는가? 법을 어길 때이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율법에 매여 있다는 말이다. 율법은 죄를 생산해 낸다.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 율법으로 인해 죄가 만들어지면 결과는 무엇인가? 사망이다. 죄의 삯인 것이다. 인간이 죄에 매여있다는 말은 율법에 매여 있고 사망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이 삼총사가 함께 있는 성경구절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이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람들은 죄,율법, 사망에 매여 그들의 종이 되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 19-21)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근본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죄, 율법, 그리고 사망 이 삼형제를 십자가에서 다 손을 봐 주신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더 이상 정죄하지 못한다. 사망이 우리를 통치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짐을 풀으시고 해방을 주셨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씌여 있다.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로마서 8장 2절을 보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의 종이 아니요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있지 않고 사망이 우리를 해할 수 없고 우리를 통치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일괄 처리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패스포트를 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으로 천국의 패스포트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패스포트는 힘이 있다. 미국에서 오신 목사님이 한국패스포트 좋으니까 갖고 있으라고 한다. 미국 패스포트가 못 들어가는 곳이 더욱 많다.
예)지난 달 형제, 자매들 총 7명과 프라하를 가게 되었다. 원래 계획에 없던 일인데 이곳을 방문한 노완우목사님을 프라하공항에 모셔드려야 하는 김에 남는 자리에 몇 명만 데려가려고 했었던 것이다. 나중에 보니 노완우목사님 혼자만 오신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온 것 아닌가? 지체들에게 가자고 약속은 이미 했지, 그래서 일을 크게 벌여 내 차에 못타는 사람들은 기차로 프라하로 가고 거기서부터 내 차로 올 수 있는 인원을 만들어 프라하로 간 것이다. 어디를 여행하든지 꼭 준비해야 하는 것이 여권이다. 여권 확인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주관했던 영건형제만 빠뜨렸다. 역전에서 알게 되었다. 다른 이들은 기차에 타고 있으라고 하고 나와 영건이는 부지런히 왕복달리기를 하여 여권을 가지고 기차를 타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 기차는 10여초 차이로 플랫포옴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혜를 발휘하여 기차 안에 있는 이들에게 전화하여 일단 드레스덴에 내려 영건이를 기다리게 했다. 프라하행 기차는 함께 타야했기 때문이다. 영건형제는 손발이 바쁘게 되었다. 후에 보니까 영건형제가 혼자 오면서 그 사이에 여러 해프닝이 있었다. 티켓을 샀는데, 작센카르테를 사서는 ICE를 탔다. 당연히 안 되고 그 안에서 다시 돈을 냈다. 싼 티켓은 환불도 안되고... 더불로 낸 것이다. 여권을 안 가져 간 것으로 인해 돈도 더 들고, 시간도 오전 10시 정도에 프라하 도착할 것이 오후 2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그런데 기차에서 여권 확인 없이 통과했다. 하루를 자고 다음날 오면서 아무런 조사를 하지 않으면 얼마나 그 동안 쓴 애나 돈은 어쩌나 싶다. 괜히 여권 다시 가져오니라 애만 쓴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올 때 국경에서 경찰이 우리를 쫓아온다. 좇아 올 때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고 자신감이 넘쳤다. 감사하기까지 했다. 이제 실력발휘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이 신이 났다. 바로 이 여권 때문에 시간도 늦어지고 돈도 더불로 들어가고 에피소드가 많았는데, 드디어 가져간 보람을 느끼게 될 시기가 온 것이다. 경찰차가 우리 앞으로 가더니 지붕에 글이 착 나타난다. Bitte Folgen 이라고 씌여있다. 코 꿰어서 파킹장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면서 자신있게 구텐탁이라고 했다. 웃으면서...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경찰이 alle Korean?이라고 묻는다. 나는 ja라고 하면서 내 패스포트를 주고 다른 이들에게도 파스 내라고 한다. 그때 서정아 사모는 먹던 과자를 드시겠냐고 권한다. 그것은 우리의 여행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여권을 준비해 간 의미를 있게 했다. 우리의 국적은 하늘나라이다. 하늘나라의 패스포트를 가지고 산다.
천국백성인 우리는 하늘나라에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기아차나 현대차가 아우토반에 다니면 기분이 좋다. 그 기업체에서 내게 해 주는 것은 없어도 말이다. 그래서 현대차나 기아차는 여간해서 추월하지 않는다. 그 차를 타는 사람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어한다. 나도 뚜란을 타는데, 어느 독일 사람이 타는가 싶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차가 나를 추월하려고 하면 쌩하고 달리다가도 좀 늦추어 준다. 괜히 안 끼워주면 한국차를 샀더니 힘이 없네라고 할까봐. 그리고 일본차가 오면 더 열심히 달린다. 빠듯하게 들어오도록 말이다. 삼성과 엘지의 광고가 있으면 기분이 좋다. 이왕이면 그들의 제품을 사고 싶다. 애국이다.
IV. 오늘은 광복절이다. 우리의 여권을 가질 수 있게 된 날이다. 우리가 일본에서 압제를 받다가 해방을 받은 이 날을 통해서 진정한 영적인 광복을 생각해본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의 종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백성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혼의 광복을 맞이해야 한다. 자유함이 있는 것이다. 해방이 된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하늘나라의 패스포트로 살기에 그 나라는 우리 나라이다. 우리의 패스포트로 삶의 모든 일에 있어서도 자유함을 얻을 수 있기를 경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