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鳶島)
여행일 : ‘17. 5. 22(월)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연도리 산행코스 : 역포마을→덕포마을→소리도 등대→소룡단→정자→둘레길→남부마을→역포마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여수 남쪽 돌산도의 13㎞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인접한 금오도(金鰲島), 대부도(大釜島), 안도(安島) 등과 함께 금오열도(金鰲列島)를 이룬다. 면적이 6.8㎢(해안선 길이는 35.6㎞)에 불과한 자그만 섬이지만 해식애(海蝕崖)와 바다동굴 등으로 이루어진 해안 경관이 아름답다고 해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형(地形)은 남쪽에 위치한 증봉(甑峰, 231m)을 중심으로 기복이 비교적 큰 산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남쪽 해안을 제외하면 경사가 급하지 않으며, 특히 중앙부의 완경사지대는 농경지로 이용된다. 만안(灣岸) 일대는 사빈해안(沙濱海岸)을 이루고 있으나 나머지 해안 대부분은 암석해안이다. 중앙에 위치한 동쪽의 가량포(加良浦)와 서쪽 병포만(?浦灣)의 만입(灣入)으로 지협부(地峽部)를 이루어 남북으로 나누어진다. 북쪽 해안에 역포만이 있고, 그곳에 역포마을이 있다. 참고로 이 섬의 원래 이름은 소리도(所里島)이다. 섬의 모양이 솔개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396년(태조 5) 순천부(順天府)에 예속되면서 ’솔개 연(鳶)자‘를 써서 연도(鳶島)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소리도‘라고 부른단다.
▼ 찾아오는 방법 연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여수연안여객터미널까지 와야 한다. 연도로 들어가는 정기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연도까지는 금호고속페리호가 운항하는데 1일 2회(6:20와 14:00) 운행된다. 오가는 도중에 여천, 유송, 우학, 안도, 소고지 등 기착지(寄着地) 몇 곳을 들르게 되니 참조한다. ▼ 2시간 가까운 뱃길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거리이다. 하지만 즐기기에 따라서는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여객선이 들르는 금호열도의 섬들이 모두 아름답기로 소문난 한려수도(閑麗水道) 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뱃전에 나가 감탄사라도 연발하다보면 까짓 2시간의 뱃길 정도는 금방 끝나버린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위에서 말한 금오열도(金鰲列島)는 여수시에서 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금오도를 중심으로 안도와 연도, 수항도 등의 유인도와 대부도, 검둥섬, 알마도, 형제도, 오동도, 초삼도, 외삼도 등의 작은 무인도들을 아우르는 이름이다. ▼ 여수항을 출발한 배는 1시간 40분여 분만에 연도의 역포항에 도착한다. 중간 기착지인 여천항(금호도)과 안도항(안도) 그리고 서고지(연도)에 들렀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연도에는 섬의 중앙부근에 위치한 연도항과 북쪽 해안에 자리 잡은 역포항이 있다. 여객선 선착장은 이중 역포항에 있다. 항로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에 섬에 들어왔으니 내력부터 알아보자. 언제부터 연도에 사람이 살게 되었는지는 그 역사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의 마제석기(磨製石器)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최소한 그 이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연도항 선착장 맞은편 바닷가에서 발견된 ‘조개더미’가 바로 그것이다. 조개더미란 수렵·어로·채집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선사시대의 인류가 식료로 채집한 조개를 먹은 뒤 버린 껍질이 쌓여 이루어진 퇴적층 유적으로 패총(貝塚)이라고도 한다. 조개더미 안에는 조개껍질 외에도 당시의 인류가 잡아먹은 동물이나 물고기의 뼈, 실생활에 사용되다가 버려진 토기·석기·골각기들, 일상생활에서 남겨진 재 등도 버려져 있어 쓰레기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의 조개더미에서 압인문토기(押引文土器)와 침선문토기(沈線文土器) 등의 토기류와 석기류가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연도의 조개더미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확인된 남해안 지역의 대표적인 조개더미 유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민간에 전해오는 설화(說話)가 더 재미있다. 삼국시대에 유배지에서 탈출한 사람이 띠배를 타고 섬 가까이 이르게 되었단다. 망망대해를 떠돌던 사람이 큰 섬을 발견하였으나 사방이 절벽이라 상륙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의 연도 목에 숲이 우거진 사이로 만조에는 바닷물이 들어갔다가 간조에 빠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바가지를 바다에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 들어오니 지금의 연도만에 사람이 살만한 집터가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 선착장에서 내리면 ’소리도 역포마을‘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그러고 보면 이곳 주민들은 연도라는 공식 이름 대신에 옛 이름인 ’소리도‘를 고집하고 있는 모양이다. 문득 이미 고인이 되신 박동진 명창님의 구성진 창(唱)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냥 귓가로 흘려보내고 말았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구절이 의미를 갖고 내게 달려온다. 그 옆에는 여기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참고로 ‘역포’라는 마을 이름은 죄인을 제주도로 귀양 보낼 때 쉬어가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연도 탐방로 안내판‘도 나도 있다며 여행객들을 부른다. 왼편에다 연도의 지도를 그려 넣고 오른편에는 일주코스를 적었다. 등대입구를 출발해서 소리도등대와 소룡단, 그리고 안뜰재를 거쳐서 남부마을에 이르게 되는데, 총 길이는 4.3Km이며 걷는 데는 2시간 정도가 걸린단다. ▼ ’등대입구’가 있는 덕포마을까지는 미니버스를 이용한다. 역포마을과 덕포마을 사이를 여객선이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운행하는 마을버스이다. 버스에서 내린 다음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덕포마을이 나온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운전하시는 분께서 넌지시 귀띔을 해주신다. 이따가 돌아나갈 때에도 실어다 주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미리 연락을 주면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겠단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역포마을까지 되돌아나가는 30분 정도의 거리를 오뉴월 뙤약볕과 한판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마을 안길을 통과한 시멘트포장길은 덕포마을 아래 해안에서 멈춘다. 연도는 암석지형이라서 대개는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편평(扁平)한 해안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귀한 해안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곳이 바로 이곳 덕포마을의 몽돌해안이다. 해안은 감싸 안은 바다와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 해안의 오른편은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경관이 자못 빼어나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아픔의 현장이다. 1995년 유조선 시프린스호가 좌초되어 최악의 해양오염(海洋汚染) 사고가 났던 곳이기 때문이다. 5천t이 넘는 기름이 바다로 유출되었던 당시의 사고는 3천826㏊의 양식장에 피해가 발생하는 등 한 동안 어민들이 힘든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탓인지 몽돌해안은 깨끗해 보인다. 하지만 그 아래에 쌓였던 기름덩어리까지 깨끗이 사라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바위벼랑에 걸터앉은 순비기나무와 인동초넝쿨 그리고 억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위로의 말을 전해주는 것 같다. ▼ 덕포마을에서 등대까지는 잘 닦여진 산책로를 따라 이어진다.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비포장 길은 넓적한 반석(盤石)들을 가지런히 깔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드라운 잔디를 심었다. 깔끔한 것이 외국의 유명 관광지에 못지않다. 도보여행의 묘미를 더해 주는 멋진 길이다. ▼ 길가의 울창한 숲은 식생(植生)이 뛰어나다. 아니나 다를까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라면서 만일 임산물을 채취할 경우에는 관련법에 의거 처벌을 받게 된다는 서슬 시퍼런 경고판까지 세워놓았다. 곰솔과 후박나무, 굴피나무, 애기등, 우묵사스레피, 다정큼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첨언하면서 말이다. 특히 열매와 꽃을 동시에 달고 있는 늘푸른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육지보다 훨씬 따뜻한 기후 탓일 것이다. ▼ 그 덕분인지 예쁜 꽃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인동초와 천리향에 찔레꽃까지 꽤 여러 가지의 꽃들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 그렇게 얼마간을 걷자 저만큼에 연도등대가 나타난다. 등대의 정식 명칭은 ‘여수지방해양수산청 소리도항로표지관리소‘로 전국에서 21번째로 불을 밝힌 등대이다. 이 등대에는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전해져 온다. 6.25전쟁 당시 소리도 등대를 점령하고 있던 인민군이 등대 앞을 지나가던 해군함대에 발포하자 해군함대에서도 등대를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등대는 국제적인 유산이기 때문에 직접 맞추지는 못하고 주위만 포격했다는 것이다. 그때 등대의 등롱파리판을 맞힌 유탄의 흔적이 1979년만 해도 남아있었단다. 참! 등대로 들어가기 전에 이정표(소룡단←/ 등대↑) 하나가 눈에 띄니 유념해 두자. 다음 행선지인 소룡단으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 나뉘기 때문이다. ▼ 등대에 가까워지자 아까 지나왔던 덕포마을 해안이 한 폭의 그림으로 나타난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 중에도 보이기는 했었다. 다만 길가 나무들로 인해 찢기고 헐거워진 풍경화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온전한 볼거리에 감질나 했던 여행객들을 위로라도 하려는 양 이번 것은 아름답기 짝이 없다. 어느 유명화가가 과연 저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아무튼 맨 오른편에 보이는 바위는 애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대바위’일 것이다. 오랜 옛날 어느 여인의 딸이 나무하러 가다 ‘대바위’ 사이로 빠져서 죽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 여인은 죽은 딸이 그리워 날마다 울고 지냈는데 어느 날 대바위 밑에 검정색 가오리가 나타나 우는 어머니를 위로하듯 빙글 빙글 돌았다고 한다. 그 후 날씨가 좋지 않을 것 같을 때마다 가오리가 나타나 미리 알려주며 위로해주었단다. 한 날은 여인이 대바위 밑이 얼마나 깊은가 명주실을 내려 보았는데 아무리 내려도 그 끝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 안으로 들자 딱 트인 바다와 하늘을 배경 삼은 등대가 마치 한 폭의 풍경화라도 되는 양 멋지게 그려지고 있다. 하얀 등대를 한가운데에 놓고 둘레를 초록의 잔디밭이 감싸고 있다. 동그란 꽃밭까지 만들어 두었다. 등대 너머에는 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저런 멋진 경관이 있기에 많은 여행객들이 찾아들 것이다. 머나먼 뱃길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 남해 바다의 길잡이인 ‘소리도 등대’는 1910년 10월 4일에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여수, 광양 인근으로 출입하는 선박이나, 서해안에서 부산 쪽으로 운항하는 선박들에게 주요 길잡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이다. 등탑은 백색 육각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등대 내부는 나선형의 철제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등탑 높이는 9.2m에 불과하지만 평균 해수면으로부터 82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인근 해역을 지나가는 선박들이 멀리서도 등대의 불빛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등대문화유산 제22호로 지정된바 있다. 참고로 등대의 불빛은 흰색으로 매 12초마다 한 바퀴를 돌며 광달거리(光達距離)는 48Km이다. 날씨가 안 좋거나 안개가 낄 때 쓰는 전기혼은 매 54초마다 1회를 울리는데 음달거리는 5.5Km라고 한다. ▼ 왼편에는 전망데크를 배치했다. 소룡단(小龍端)을 조망(眺望)해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하지만 막상 눈에 들어오는 풍경화는 아쉽게도 많이 잘려나간 채로이다. 데크 앞에 있는 나무들이 시야(視野)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왕에 나무들까지 제거해 주었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 ‘표지관리소(등대)’의 구내에는 사무실과 직원숙소, 그리고 전망대를 갖추고 있는데 숙소의 일부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고 있단다. 숙소 앞에는 조각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한쪽 손을 들어 올리고 있는 여자의 나신(裸身)을 조각했는데 꽤나 투박한 편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등대에 어울리는 수준이 아닐까 싶다. ▼ 속속들이 등대를 살펴봤다면 이제는 소룡단으로 향할 차례이다. 아까 등대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갈림길로 되돌아가 트레킹을 이어가면 되겠다. 등대를 오른편에 끼고 돌자마자 삼거리(이정표 : 소룡단↑ 0.5Km/ 필봉산?증봉← 1.5Km/ 연도출장소↓ 2.8Km)를 만난다. 왼편은 팔봉산과 증봉을 거쳐 연도마을로 연결되는 또 다른 길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숲이 무성한 이 길을 이용해도 좋을 것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테크계단을 내려서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소룡단↑ 0.2Km/ 남부마을 탐방로← 3.0Km/ 등대↓ 0.3Km)가 나온다. 왼편은 남부마을로 연결되는 산책로로 최근에 새로 조성되었단다. 이따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도 하다. 그 전에 소룡단을 둘러보는 게 먼저겠지만 말이다. ▼ 계단을 내려서자 잠시 후 오른편 숲이 빼꼼히 열린다. 안으로 들어서니 바위벼랑에 걸터앉은 데크전망대가 나타난다. 건너편에 있는 대룡단(大龍端)을 조망해 보라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전망대에 서니 ’소리도 등대‘를 이고 있는 대룡단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실로 멋진 풍광이다. ▼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이 전망대는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치듯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숨어있는 쌍둥이처럼 꼭 닮은 크기로 쏙 들어간 두 개의 굴을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졌다. ’속평굴‘ 또는 ’솔팽이굴‘로 불리는 해식동굴이란다. 이 동굴에는 재미있는 얘기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네덜란드 상선이 연도 근해를 지나가던 중 동굴 쪽으로 난파를 당했는데, 이때 한 사람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선원은 배에 싣고 가던 보물을 동굴 안에다 숨겨놓고 본국으로 돌아갔단다. 오랜 세월이 지나 살아 돌아갔던 선원의 후손이 네덜란드계 미군으로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보물지도를 펴놓고 난파 당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이곳 연도출신 군인(카투사)이 우연히 듣게 되었던 모양이다. 네덜란드인 3세가 말하는 장소가 연도임을 확신한 그가 연도로 돌아와 동굴탐사를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결과는 동굴이 막혀있는 것으로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싱겁기 짝이 없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신비롭고 즐거운 상상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풍부해지고 있다니 이 또한 흥미롭지 않는가. 하긴 임자 없는 보물을 동경하기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보물이야기를 아직까지도 털어내 버리지 못하고 있을 게다. 그 동굴이 중간에서 막혔을 리가 없다면서 말이다. 굴속에 들어가면 연도리의 동부마을 부엌에서 누룽지 긁는 소리까지 들린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 이유이다. ▼ 소룡단으로 내려가다 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둘 모두 소룡단으로 연결되기는 마찬가지인데, 하나는 바위벼랑 위에 걸쳐놓은 데크로드를 통해 연결시키고, 다른 하나는 능선을 따르게 만든다. 데크로드를 따르기로 한다. 비경(?境)으로 알려진 소룡단과 대룡단을 조금이라도 먼저 조망해보기 위해서이다. 아무튼 잘 만들어진 데크로드는 아찔한 절벽의 등짝을 타고 이어진다. ▼ 돌아올 때는 능선을 따랐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팔각의 정자(亭子)를 만났다. 조망이 트이지 않는 것이 그저 쉼터용으로 지어놓은 모양이다. ▼ 데크로드가 끝나가는 지점에 이르자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소룡단이 눈에 들어온다. 등대를 머리에 이고 있는 대룡단(大龍端)이 용의 머리라면 소룡단은 용의 꼬리이다. 양 옆에 바다를 끼고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부딪쳐 파열하는 바람이 거세다. 그 바람은 말할 수 없이 청량하다. 머나먼 태평양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니 오죽하겠는가. ▼ 데크로드가 끝나는 곳에 다다르니 소룡단(小龍端)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엄청나게 큰 바윗덩어리이다. 중간부분까지는 해국과 천문동 등 키 작은 지표식물들이 자라고 그 아래 부분은 바다까지 온통 벌거숭이이다. ▼ 섬의 동쪽 해안도 눈에 들어온다. 울창한 숲을 머리에 인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 벼랑들이 장중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자연미를 마음껏 드러내 준다. ▼ 소룡단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는 이곳을 ‘소룡여’로 표기하고 있다. ‘여’란 본디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파도가 높을 때 물속에 들어가는 바위까지 포함된다니 단어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이곳에서는 소리도 등대를 중심으로 용의 모습을 한 대룡단은 물론이고 실제로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소룡단까지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다. 용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대룡단은 바다를 향해 있고 꼬리 부분인 소룡단은 바다에 꼬리를 담근 모습이다. 몸통 부분은 소리도 등대가 있는 곳으로 중심을 이룬다. ▼ 용의 꼬리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등허리를 밟으며 끄트머리까지 나아가 본다. 탁 트인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슴속까지 후련해진다. 그 바람에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짐 한 덩어리 실어 보내고 싶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씨앗을 심고 싶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씨앗을 말이다. ▼ 소룡단에 내려서면 마치 용의 비늘을 연상케 하거나 용의 꼬리 모양과 같은 희귀한 바위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등허리를 따라 나있는 독특한 문양(紋樣)이 눈길을 끈다. 바위 위에 뭔가가 스치고 지나간 자국이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에도 이런 형상을 본 일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용(龍)이 지나가면서 남긴 자국이라고들 우겼었다. 그 흔적을 이곳 소룡단(小龍端)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아무튼 소룡단이라는 지명에 딱 어울리는 자국이 아닐까 싶다. 새끼용이 어미용의 등허리를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 말이다. ▼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다시 이어간다. 이번에는 남부마을로 연결되는 탐방로를 따른다. 필봉산의 남쪽 해안을 따라 새로 열어놓은 총 길이 3Km의 산책길이다. 비탈진 사면을 헤집으며 난 이 길은 한마디로 멋지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숲이 울창한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을 지나기도 한다. 언젠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금오도 비렁길’의 이름을 빌려 '비렁길 7코스'로 이름 붙이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어찌됐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연도의 바다와 다양한 모양의 바위를 조망하며 걷는 산책길은 또 하나의 명품 둘레길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럴 경우 연간 2만여 명에 달한다는 ‘금오도 비렁길’ 방문객 중 상당수가 연도를 찾지 않을까 싶다. ▼ 탐방로를 걷다보면 심심찮게 시야(視野)가 열린다. 소룡단(小龍端)의 동쪽 벼랑이 보이는가 하면 왼편으로는 소룡단과 마주보고 있는 바위벼랑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기암절벽과 해식굴로 이루어진 해안은 한마디로 절경이다.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 놓은 빼어난 조각품들이다. 하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명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 탐방로로 들어선지 30분쯤 되었을까 길이 오른편으로 크게 방향을 트는 지점(이정표 : 남부탐방로 1.5Km/ 등대 1.8Km)에서 ‘군사제한구역’ 임을 알리는 경고판 하나가 나타난다. 업무상 관계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출입을 금(禁)한다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있다. 증봉으로 연결되는 길로 보이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뚜렷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석이 세워져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거기다 또 다른 산봉우리인 필봉산은 아예 올라갈 수조차 없다. ▼ 오른편 저 멀리 작은 섬 하나가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섬의 모양새가 까치처럼 생겼다는 까치섬, 즉 작도(鵲島)일 것이다. 섬 근처에서 조업 중인 선박이 보인다. 연도 인근의 해역은 겨울에도 난류가 흐르기 때문에 다양한 어종이 머무는 황금어장이라고 한다. 시프린스호의 사고로 한때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요즘은 많이 회복되었단다. ▼ 왼편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옛날 봉화대가 있었다는 연도의 최고봉 필봉산(또는 시루봉, 230.5m)’이나 현재는 군부대의 레이더기지가 들어서 있어 출입은 불가능한 상태이다. 하지만 저 봉우리는 여러 개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시종인 서불(徐?)에 관한 이야기다. 진시황이 장생불사를 꿈꾸며 서불에게 동방의 삼신산(三神山)을 찾아 불로초를 구해 오라는 어명을 내린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서불은 여수에서 연도(鳶島)와 월호도(月湖島) 두 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그들은 이곳 필봉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불로초는 찾지 못하고, 도리어 두 명의 장수를 잃고 말았다. 일행은 두 장수의 장례를 치른 다음 까랑포 해안 절벽 바위에 붉은 색깔로 ‘서불과차(徐市過此)’라 새겨 놓고 떠났고, 주민들은 장군이 죽어 묻힌 묘를 '장군묘'라고 불러오고 있단다. 또 다른 하나는 장서린이란 해적에 관한 이야기다. 1592년께 장서린이란 해적 두목과 부하 수백 명이 이곳 필봉산 중턱에 청기와 망루까지 지어놓고 해적질을 했었다고 한다. 관군에게 체포되면서 장서린의 해적 생활은 끝이 났지만 소리도 주민들은 아직까지도 이곳을 ‘서린이 큰 도둑놈 집터’라 부른단다. ▼ 방향을 튼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가끔은 가파른 구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 그렇게 얼마간을 진행하면 바위난간에 걸터앉은 전망데크를 만난다. 바다를 향해 움푹 파인 협곡(峽谷)을 구경하라고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데크에 서면 협곡의 양쪽 면을 장식하고 있는 깎아지른 수십 길의 단애(斷崖) 사이로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텅 비어 있는 것이 흡사 빈 캔버스처럼 느껴진다. 여백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 협곡의 끄트머리 바닷가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곳은 아까 소룡단에서 만난 낚시꾼이 말하던 해녀(海女)들의 작업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보물이야기들이 많은 섬이지만 소리도의 진짜 보물은 바닷속에 있다고 했다. 품질 좋은 해산물들로 넘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보물을 캐는 광부는 해녀랄 수도 있겠다. 언젠가 ‘소리도의 해녀들이 차려내는 해녀밥상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고 적은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밥상에는 소리도의 바다가 다 들어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전복, 문어는 기본이고 과거 결혼식 잔치 음식으로 빠지지 않던 거북손, 군부(군봇), 배말(삿갓조개) 무침에 해산물 탕국, 합자(조선홍합)까지 전부 소리도 바다에서 해녀가 건져 올린 것들이라는 것이다. ▼ 조망을 즐기다가 길을 나선다. 이제는 동구(洞口) 밖으로 난 길처럼 편안한 산길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이 섬을 일러 '장중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자연미의 섬'이라고 주장했었다. '바위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기이한 바위들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호젓한 숲길도 있었기에 그런 표현을 썼었을 게다. ▼ 잠시 후 진행방향 저만큼에 바닷가에 웅크리고 있는 자그만 마을이 나타난다. ‘남부마을’인데 또 다른 이름으로는 가랑포라 불린단다. 이 마을의 해안선은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파도가 매우 높아지는 곳으로 소문나 있다. 하지만 그 바람이 만들어내는 자갈소리는 아름답기 짝이 없단다. 동풍(東風)이 불 때면 파도에 밀리는 자갈 부딪치는 소리에 갓 시집온 새색시가 잠을 이룰 수 없어서 한번 울고, 해가 거듭할수록 이 자갈 소리에 익숙해지다가 막상 마을을 떠날 때는 자갈 구르는 아름다운 소리를 잊을 수 없어 다시 한 번 운다는 것이다. ▼ 남부마을은 몽돌이 깔린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못 견뎌 소리를 지른다는 그 자갈들이다. 아기자기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양 옆의 해식애(海蝕崖) 또한 한눈에 담기에 딱 좋다. 바위벼랑이 너무 거대할 경우 오히려 거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얘기이다. 중용지도(中庸之道)의 묘(妙)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해안은 있는 그대로 그냥 놔두고 있다. 방파제나 배의 접안시설 등이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런 아름다운 경관을 해치기 싫었을 지도 모르겠다. ▼ 마을 주변은 제법 너른 경작지가 들어서있다. 뒤편에 보이는 구릉(丘陵)도 경작지로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연도 주민의 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 그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주요 농산물로 고구마와 보리, 마늘, 콩 등을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모양이다. 주변 밭들마다 온통 방풍나물들이 점령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풍을 예방한다고 해서 도시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는다고 하더니 그 여파가 이곳까지 미쳤나보다. 하긴 짭짤한 현금 수입원을 어느 누가 마다겠는가. 아무튼 이곳 연도는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많아 보이는 섬이다. 경사진 땅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이때 나온 돌들은 담벼락을 쌓았다. 생존을 위한 각별한 노고와 지혜가 돋보이는 삶의 현장이다. 그리고 그런 삶들은 세월과 함께 섬의 곳곳에 전설처럼 녹아들었다. ▼ 역포마을로 되돌아와 민박집에서 점심상을 받는다. 8천 원 하는 백반은 가격에 비해 질이 좋은 편이다. 생선과 비말, 거북손 등 직접 잡았다는 해산물로 구이와 찌개, 무침 등 다양하게 요리를 만들어냈다. 밑반찬만 가지고도 소주 한 병을 너끈하게 비웠을 정도라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아무튼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역포항의 뒤편에 있는 취북산(162.3m)에 올라가볼 요량이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산이다. 하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민박집 주인부부가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길이 나있지 않다는 것이다. 전에도 산을 오르겠다며 길을 나선 사람들이 몇 있었지만 하나같이 실패했었단다. 우리 일행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몇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역시 중간에서 그만두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것도 고생만 죽어라고 했다며 툴툴거리면서 말이다. 덕분에 난 시도조차 해 볼 필요가 없어졌다. 점심 때 반주로 시작한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정상답사에 실패한 사람들이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취북산이 그만큼 나지막하다는 증거이리라. ▼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란 말이 있다. ’일이 늦어져서 언제 이루어질지 그 기한을 알 수 없을 때‘를 두고 하는 말로 지금 우리들의 처지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점심 때 반주까지 곁들여가며 늦장을 부렸어도 너무나 시간이 많이 남는 것이다. 세 시간 가까이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는데 민박집 주인장께서 아이디어를 내신다. 마침 썰물 때니 조개를 캐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남자들은 투망(投網)을 던지면 될 것이고 말이다. 숭어가 제법 많이 잡힐 것이란다. ▼ 부지런한 집사람이 이런 제안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배낭에서 호미를 꺼내들더니 냉큼 갯가로 내려간다. 참고로 집사람을 평소부터 호미를 챙겨 다닌다. 아무튼 그 결과는 제법 쏠쏠했다. 굵은 바지락을 한 소쿠리나 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지락은 우리부부의 밥상을 나흘 동안이나 풍요롭게 해주었다. 민박집 주인부부에게 글로써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만일 그들의 인정 넘치는 배려가 없었더라면 우리 일행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소모하느라 죽을 맛이었을 게다. ♧ 에필로그(epilogue), 연도는 경관이 빼어난 섬이다. 등대가 위치한 소룡단이나 대룡단 뿐만이 아니다. 해안선의 대부분이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진 탓에 어디를 가더라도 경관이 빼어나다. 여수시에서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관광객들이 몰려들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나는 그 원인을 두 가지 관점에서 짚어보고 싶다. 첫째는 여객선의 운항시간이다. 오전 6시20분에 여수항을 출발하는 첫 배의 도착시간은 8시5분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들어온 배가 이곳 연도를 나가는 시간은 오후 4시35분이다. 이는 8시간30분 동안은 이 섬에서 갇혀있어야만 된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기나긴 시간을 소모시킬 수 있는 아이템( item)을 찾아야 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는 트레킹 코스에 관한 문제이다. 역포항에 세워놓은 ’탐방로 안내판‘에는 이곳 연도의 일주코스를 등대입구를 출발해서 남부마을 입구에 이르는 4.3Km 구간으로 소개하고 있다. 걸어서 2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짧다. 남녘땅의 끝자락인 여수까지 온 것으로도 부족해서 뱃길로 2시간 가까이를 더 왔는데 걸을 수 있는 시간이 겨우 두 시간이라면 어느 누가 이곳을 찾아오겠는가.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부마을에서 역포마을까지를 둘레길로 연결시키는 게 가장 우선이지 않나 싶다. 이때 지도에 나와 있는 앞산과 취북산의 등산로를 함께 개설해야 함은 물론이다. 섬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많기 때문이다. |
출처: 가을하늘네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