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 공동체 설립의 요람이며 전파의 중심지이자 신앙 선조의 순교터
양근 지방은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 설립의 요람이며 전교의 중심지이자 신앙 선조의 순교터이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 권철신·권일신 형제의 고향이자 윤유일이 거주하던 감호와 점들, 그리고 양근 관아와 참수터가 있는 양평 읍내를 가리키며, 현재 양평군 일대이다. 양근이라는 지명은 ‘양제근기(楊堤根基)’라는 말에서 비롯했다. ‘방죽에 버드나무를 심어 농지 유실을 막고 튼튼한 근원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고구려 시대 때부터 써왔다. 1908년 9월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쳐 ‘양평군’이 됐다.
양근 지방은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권철신(權哲身,1736~1801, 암브로시오),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의 영향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되었다.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 전라도 전주 초남(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양근에서 살던 윤유일(尹有一, 1760~1795, 바오로)은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밀사로 1795년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00년 5월 윤유오(尹有五, ?~1801, 야고보), 유한숙(兪汗淑, ?~1801, 일명 사겸) 등 7명이 체포되었고, 양근의 권상문(權相文, 세바스티아노, 1769~1802)은 1800년 6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0월에는 경기 감영(현 적십자 병원 자리)으로 이송되어 감사 앞에서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경기 감영에서 형벌을 받던 예비 신자 조용삼( ?~1801, 베드로)은 1801년 3월 27일(음 2월 14일)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 지역에서 탄생한 신유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였다.
신유박해 당시 조정에서는 해읍정법(亥邑正法)의 영을 내려 모든 지방 신자들을 거주지로 압송하여 처형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윤유오 야고보, 유한숙 등 2명은 1801년 3월 11일에 판결을 받고 3월 13일(양력 4월 25일)에 양근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이어 윤점혜(尹占惠, 1778~1801, 아가타)는 5월 22일에 판결을 받고 5월 24일(양력 7월 4일)에 양근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으며,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12월 26일에 판결을 받고 양근으로 압송되어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에 순교하였다.
한편 교회측 기록에는 1801년 3월에 양근에서 순교한 신자가 모두 13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윤유일의 삼촌 윤관수( ?~1801, 안드레아)는 양근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1801년 5월경에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잔인하였던 양근 군수 정주성에 의해 이재몽(1747~1801)·이괘몽 형제와 두 딸, 김원성, 윤점혜와 활동한 이 아가타 등이 양근에서 처형되었고, 10월 초에는 양근 출신의 유명한 신자 조동섬(趙東暹, 1739~1830, 유스티노)의 아들 조상덕(趙尙德, ?~1801, 토마스)이 옥사하였다.
이와 같이 양근 지방은 순교 성인의 탄생지이고,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이 뿌려진 곳이다. 이곳 성지에서 우리는 윤점혜 아가타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수도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고, 조숙(베드로)ㆍ권천례(데레사) 동정부부를 통하여 성가정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는 곳이다.
◆ 양평 지역의 천주교 사적지
양근 성지에서는 관내 성지와 사적지를 순례하고자 하는 순례자들을 위하여 도보성지순례와 수상성지순례 코스를 개발하여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 양근 관아터
본래 양근군의 치소는 고읍면(古邑面, 현 옥천면)에 있다가 1747년(영조 12년)에 현 양평읍내로 이전되었으며, 그 위치는 현 양평읍내 관문 거리에서부터 100m 북쪽까지로 관아 전체는 남향이었다. 본래 관아는 남쪽을 제외하고는 작은 동산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지금은 북쪽 정상에 초등학교가, 옥터 서쪽 동산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참수터
양평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참수터의 위치는 이기경(李基慶)의 《벽위편(闢衛編)》에 수록되어 있는 1801년 3월 15일자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의 장계 내용을 통해서 살필 수가 있다. “양근 관아의 문에서 서쪽으로 2리쯤 떨어진 큰길가에서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죄인 유한숙과 윤유오 등을 법률에 따라 참수하였다”고 언급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현 양평 군청 서쪽 200~300m지점(양근 4리)의 양평 휴게소와 양평 주유소 인근, 즉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 놓여 있는 일명 오밋다리(서울로 가는 다리)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감옥터
조상덕(趙尙德, ?~1801, 토마스)이 순교한 감옥터는 관문거리에서 보면 왼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옥터 서쪽 동산에 아파트가 들어서있다. 그리고 윤관수( ?~1801, 안드레아)가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한 동헌 앞은 오늘날 어느 지점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감옥터와 동헌 자리에 대한 정밀한 조사 연구가 필요하다.
▒ 대감 마을에 대한 이견
근래 천진암의 변기영 몬시뇰은 권오규 변호사(권일신의 5대손,1900~1996) 등 권씨 후손들의 구전과 다산의 문집 등을 토대로 ‘대감 마을’을 양평읍내로 비정하였으며 ‘감호’를 양평읍내 북한강 북안으로 보고 있다.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살던 마을은 양평군 강상면 대감 마을이 아니고, 양근면 갈산리(葛山里)로, 현재도 갈산리로 부르며, 양평읍 사무소와 도서관이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대감 마을은 안동 권씨 선영(先塋), 즉 선산(先山)이 있는 곳으로, 이모씨(李某氏)네가 늘 대대로 내려오면서 권씨네 시향제를 차렸었다고 한다.
강북의 양근면 양근리에 연결된 바로 상류지점인 갈산 옆을 흐르는 물결이 늘 맑고 잔잔하여, 노 젓는 배를 대기 쉽고, 또 권씨네 형제들이 사는 양근리에 붙은 갈산리에 많은 선비들과 손님들이 오고 가므로 갈산 나루까지 있던 강북의 갈산(葛山), 양근(陽根), 덕곡(德谷 : 감호정(鑑湖亭)이 있던 마을)마을의 앞 강물을 감호(鑑湖)라고 불렀고, 그 마을들에 사는 이들이 자연스레 물 맑은 감호에 거한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감호정은 현재 양근 성지가 있는 일대의 어느 지점이다.
▒ 감호암(鑑湖岩)
감호암이란 석문이 쓰여진 바위의 발견으로 권철신, 권일신 형제의 생가가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대감 마을이 아닌 양평군 양평읍 갈산 현 양평 읍사무소 자리로 굳혀지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녹암 권철신의 묘지명에서 녹암이 거쳐하던 곳은 감호라고 불렀다. 즉 감호라는 곳에 거하였다는 것인데 감호암이란 석문의 발견은 양근 성지 일대가 감호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감호(鑑湖)란 강물이 잔잔하고 맑아 ‘거울같은 호수’라는 말이다. 현재 감호암이 발견된 곳은 경기도 양평군 오빈리 번지로 되어있다.
○ 도곡리
도곡리 3 번지 조동성 유스티노와 그 아들 조상덕 토마스 순교자를 기리는 경당을 지을 장소로(도곡리 3 번지) 이동해서 조동섬 유스티노와 조상덕 토마스 순교자들의 삶을 배운다. 현 도곡리 244번지는 1911년 이상화 신부가 잠시 사목을 하던 성당이었던 곳이다. 후일 이곳은 조씨 가문의 순교를 기리는 작은 경당이 세워질 예정이다.
조동섬 유스티노는 명례방 사건이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용문사에서 8일간 침묵 피정을 하였고, 1800년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801년 2월 12일 양근에서 다시 체포되어 서울 금부로 이송 되어서는 2월 26일 배교후 30년 유배형을 받는다.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를 간 조동섬 유스티노는 그곳에서 배교를 깊이 뉘우치고, 무산까지 찾아온 정하상 바오로에게 신앙교육과 한문 교육을 가르치고 교회 재건과 신부 영입에 적극 힘써 줄 것을 당부한다.
조상덕 토마스는 아버지 조동섬 유스티노에게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것 밖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 하면서 양근 관아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고 옥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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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성지, 감호암 발견 [평화신문 보도] 2010.5.10
한국 천주교회 창설을 이끌었던 권철신ㆍ권일신 형제가 활동했던 지역으로 알려진 '감호(鑑湖)'가 경기도 양평군 양근리 지역임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발견됐다.
수원교구 양근성지(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전담 권일수 신부는 "양평 강변에서 우연히 '감호암(鑑湖岩)'이라 쓰여진 바위를 발견했다"면서 "그동안 감호가 양근리 일대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었는데 이 바위로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 생가터가 양근임이 확실해졌다"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서 '녹암(권철신 호)이 거처하던 곳은 감호라고 불렀다'고 했다. 양근리 일대는 강이 거울처럼 맑은 호수같다고 해서 '감호'로 불렸다. 하지만 그동안 권씨 형제 생가터는 양평군 대석리로 알려져 왔다. 대석리 효자산에서 두 형제 무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생가터가 양근리라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안동 권씨 후손들과 일부 학자들은 대석리는 권씨 선산이었고, 그들이 살던 마을은 양근리었다며 생가터 '대석리설'을 반박했다. 하지만 '양근리설'을 확증할 구체적 사료가 없었는데 이번에 감호암이 발견된 것이다.
또 권철신이 여러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했다는 감호정(鑑湖亭)은 이 감호암 위에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권 신부는 "감호암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견"이라며 "양근리 일대가 한국 천주교회 창설과 관련이 깊고 초기 순교자를 배출했던 성역임이 확실해진만큼 양근성지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겠다"고 말했다. 권 신부는 이와 함께 감호암과 양근성지, 양근대교 아래 순교터, 생가추정터를 연계해 배를 타고 순례하는 성지순례코스를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권철신ㆍ일신 형제
우리나라에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신앙 공동체 설립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이다.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은 천주교를 처음 들여온 이벽이 천주교를 알리기 위해 제일 먼저 찾은 이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따르는 선비와 학자들이 많았던 권철신이 천주교 신자가 되면 저절로 선교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벽은 권철신 집에 머무르며 천주교를 전했다.
이 때 권철신의 셋째 동생 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1)은 형보다 먼저 이벽, 정약전, 정약용 등과 함께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경기도 양근지역 신앙공동체 설립을 주도했다.
권일신과 함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로 건너가 각 지역에 신앙을 전파했다. 초기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이들은 모두 권철신의 제자거나 권철신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평화신문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2010. 05. 09발행 [10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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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정녀(童貞女)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로서 종교적 목적을위해 동정을 지키며 정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2세기말까지 초대 교회에서의 동정녀들은 기도와 금욕 생활을 위해 모임을 가졌고, 과부들은 특수한 교회 활동을 위해모임을 가졌다.
그 후 3세기경에 이르러 동정녀들은 공식적인 축성식을 갖게 되고, 또한 동정녀들의 모임도 주교가 직접 관할하는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어 이후 동정녀들의 모임은 여자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교회 창설 이후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출하기 전까지 많은 동정녀들이 나타나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한국 교회 최초의 동정녀 회장 윤점혜(尹占惠)를 비롯, 1839년 기해박해 때 동정으로 순교하여 성녀(聖女)가 된 김효임(金孝任)·김효주(金孝珠) 자매, 이인덕(李仁德), 이경이(李瓊伊) 등이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동정녀들이다.
■ 순교자
◆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2년)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 출신으로 권철신(암브로시오)이 큰아버지이고,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그의 아버지였다.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윤유일(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복자 권천례 데레사(1784∼1819년)
권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중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4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 하였으나 친척들의 설득으로 동정을 포기하고 21세 때 조숙(베드로)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하는 날 밤 권 데레사는 남편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자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후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동정으로 지냈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다 1817년 3월 말경 체포되어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나이는 36세였다. 순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거두었는데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 복자 조용삼 베드로 ( ?∼1801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수조차 없었다. 그 후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정약종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친을 끌어내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 무렵 그는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 ( ?∼1802년)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서(庶) 동생이요, 홍필주(필립보)와 이현(안토니오)의 장인이다. 그는 1785년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796년 그는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웠고,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복자 조숙 베드로 (1787∼1819년)
조숙(趙淑) 베드로는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이다. 이후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8세 때 권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였다. 혼인날 밤, 아내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는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 바오로는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한양에 있는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온갖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정 바오로가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아내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다. 문초중에 데레사는 남편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그들은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33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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