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1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공항
새벽에 일어나 야딩공항으로 향했다. 해발 4,400에 있는 공항이었다. 우리가 묵었던 다이쩡에서 700미터를 더 올라가야 했다. 새벽이고 고산지대여서 내복을 입었는데도 추웠다. 공항 대합실에서 벌벌 떨다 시피했다. 비행기 안에 들어가니 히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기내에 들어가서야 추위를 덜 수 있었다. 청두 공항에서 내려 버스에 옮겨 탔다. 구체구, 황룡, 모니구 등의 풍경구가 있는 고산지대로 다시 올라가는 것이었다. 천주사시에 올라가면 세 개의 명승이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구체구는 지진 복구가 덜 되어 이번 여행지에는 빠졌다.
중간에 장족마을에 내려 둘러보았다. 한국어 안내문이 곳곳에 있었다. 한때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다.
버스는 강물을 거슬러 계속 올라간다. 비가 솓아지기 시작했다. 빗속에 휴게소에 내렸다. 앞에 보이는 해자가 인공의 저수지가 아니고 자연재해에 의해서 만들어진지 얼마되지 않은 자연호수 이다. 티벳트 사람들은 호수라고 하지않고 바다라는 의미의 해자라 부른다. 이 해자는 어마어마한 폭우가 쏟아져 산이 무너져 내렸고 물길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호수가 만들어졌다. 그 호수에 매몰된 가구 수가 백여 호되었다. 그 가구마다 매몰된 사람만 4백 명이 넘었다. 중국정부는 복구 시키지 않았고 그대로 두었다. 자연의 준열함은 사람이 거슬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저 호수 안에는 몇 개의 마을과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대로 수장되어있다고 한다.
호수 끝에 작게 언덕지어있는 부분이 산사태로 제방이 된 곳이다.
호수 앞에 숙연해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여객선 침몰로 인해 정권이 침몰했는데, 중국은 인권이 얼마나 보장되는 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자와 인민의 국가라고 공산주의 기치를 들고 혁명을 했지만.
그 동안 중국이라는 거대국가의 역사를 보면. 인구가 많아 권력집중이 빠랐고, 계급간의 격차가 빠르게 심화되었다. 그 결과 빠르게 집중이 된 권력은 빠르게 부패했다. 왕권교체 주기가 짧았다. 지금 중국의 정권을 장악한 시진핑은 장기집권을 도모하고 있다. 장기집권은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있다. 그 결과는 뻔하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만들었던 가장 좋은 정치제도는 권력의 주체가 선거와 민의에 의해서 바뀌는 민주주의 였다. 미국은 독립전쟁 끝나고 건국의 영웅 워싱턴이 대통령을 두 번하고 애덤스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로 이백년동안 한 번의 쿠테타도 없었고, 독재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세계제일의 국가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천주사시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해발 3.000미터 였다. 그동안 계속 고산지대에서 지냈다. 내일 하루를 더 묵어야하니 고산에서 자는 날만 따져 엿새가 된다.
8월 1일 황룡풍경구
호텔을 일곱 시 반에 출발해서 황룡풍경구로 향했다. 터널로 가면 삼분이내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터널로 들어가지 않고 산위로 돌아 올라갔다. 좋은 경치를 즐기도록 했던 가이드의 배려였다. 산위로 올라갈수록 운무가 아름다워 지나칠 수가 없었다.
고개정상에 오르기 전에 다섯 번 차를 세웠다. 해발 4,007 고갯마루에서 차를 내렸다. 고개 이름 설보정. 고개를 내려가 황룡풍경구에 입장을 했다. 중국은 국립공원에 60세 이상이면 입장료가 무료, 아니면 반액을 냈다. 여권을 내고 입장료를 할인 받았다.
여행객이 밀리지 않았다. 드문 일이라 했다. 다른 때였다면 4키로 이상 줄을 섰다는데 그날은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관광곤도라를 타고 오백미터를 올라갔고, 숲으로 난 목책길을 따라 2 키로 정도 올라가니 황룡계곡이 펼쳐졌다. 다섯 가지 색깔이라 해서 오체지라 부른다. 계곡에 흘러내리는 물에 석회암이 섞여있어 석회암 퇴적층을 이루고, 빛과 물의 각도에 따라 다섯가지 색깔로 보인다. 경이로운 자연이었다.
그 계곡을 2키로 넘게 따라 내려가면서 여러 가지 조화를 즐길 수 있었다. 계곡물이 흐르는 벤치에 앉아 한참 쉬었다. 바람 솔솔 불었고 물소리 정겨웠다. 그날 일정의 여유였다. 두시 사십분에 숲길을 내려와 버스주차장에 도착했다.
8월2일
천주사 호텔에서 이틀을 묵었다. 드디어 해발 3,000의 고산지대를 내려간다. 송판고성에 들렸다. 송판고성은 당나라와 티벳의 경계였다. 송찬간보와 문성공주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송찬간보는 당시 여러부족으로 나눠세력다툼을 벌였던 티벳을 통일하여 강국으로 만들었던 영웅이었고, 문성공주는 당나라 황실을 공주로 당이 티벳트와 화친정책으로 송찬간보와 정략결혼을 했었다. 티벳으로 시집을 와서 당나라 문화보급에 기여를 많이하였기에 티벳사람들은 그녀를 널리 기렸다.
송찬간보와 문성공주
모니구 폭포
석가모니가 다녀갔다고 해서 모니구라고 했다는데 실제로 석가모니가 여기까지 다녀갔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네팔까지는 천키로도 넘는다. 종교적으로 만들어진 신화는 언제나 가능한 것을 훨씬 뛰어 넘었다. 실제다 아니다를 따질 수는 없다. 모니구에서 점심식사가 그 동안 먹었던 중국음식 중에서 가장 입맛에 맞았다고 했다. 점심 반 주 마우타이 주에 군침이 흘렀지만 점심 한 끼를 굶었다. 그 동안 설사가 약을 먹었어도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뱃속을 비운 것이 훨씬 편했다. 더운 차만 몇 잔 마셨다.
8월 3일
첫날 묵었던 세렝게티 호텔에 다시 들었다. 청두, 성도의 시내여행이 마지막 날 여정이었다. 사천성이 팬더의 고향이고 팬더는 엄격히 보호를 받는 동물이다. 팬더를 사냥하다 걸리면 사형이다. 최고 사형이 아니고 무조건 사형이다. 엊그제 쓰구낭산 올라갈 때 보호구역이라는 간판이 있었고, 성도 내에 팬더 공원이있다. 팬더를 보러 갔다. 사람이 무지하게 많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래도 팬더는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어도 그 녀석은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 어쩌다 움직이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곤 했다. 팬더 사진을 몇 장 담았다.
두보 사당
당 현종 시절 중국을 대표하는 두 시인이 있었다. 이백과 두보였다. 이백은 뛰어난 천재성으로 술을 좋아했고, 세상에 관심이 없고 풍류를 즐기다 갔고, 두보는 민중시인이었다. 그의 시에는 전란에 시달렸고, 굶주렸던 백성들의 삶이 담겨있었다. 그가 여기 성도에 삼년정도 머물렀다. 나라에서 관직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의 지인이 관직을 받았는데 그 지인을 도우려고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를 기리는 사당이 있었다. 두보 사당에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붓을 한 자루 샀다.
무후사
무후사는 제갈공명을 기리는 사당이다. 중국에는 제갈공명 사당만 40여 군데 있고 여기 성도에만 여섯 군데가 있다. 중국인들에게 제갈량은 수호신이었다.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 정도였을 것이다. 여기 성도는 그가 재상으로 있었던 촉의 수도였다. 우리가 갔던 무후사는 유비의 무덤이 있는 곳에 있었다. 삼국지 박물관이 있고, 관우, 장비, 유비의 입상이 있었다.
누구의 동상이라고 토를 달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사진은 무후사의 주인공 제갈공명상이다.
언뜻 봐도 그 이미지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무후사 뒤에 유비의 묘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삼국지 이야기 속에서 살았고, 삼국지를 열 번은 더 보았을 것이다, 동양인들은 삼국지 이야기에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동양의 중국문화권에 있던 나라들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국, 일본, 아마 베트남 등. 삼국지 주인공들의 숨결을 느낀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었다. 좋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