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합매(上合梅)
◯ 범대생(範大生)
범광선(范广善, 1847-1902), 범흠인(范钦仁·1875-1942/범중엄(范仲淹의 29대손)) 부자(父子)의 별칭으로 범광선(范广善)과 범흠인(范钦仁) 부자가 만든 명호는 모두 '대생(大生)'을 주전자 위에 새겨 넣었기 때문에 '대생(大生)'은 그들 부자가 공용하는 예명으로,
그들의 작품은 정교하게 제작되고 조형이 풍부하여 민국 시대에는 "천금난구대생호(千金难求大生壶)"라는 명성을 누렸으며, 그들의 창작품은 6회 연속 국제 금상을 수상했으며,
의흥자사 최초의 국제 금상 수상자입니다.
대생호(大生壶)'는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범광선(范广善), 범흠인(范钦仁) 부자(父子)를 '범대생(範大生)'이라고 불렀습니다.
1902년 아버지 범광선(范广善)·대생호의 창건자)이 집에서 별세했습니다.
향년 56세. 승보(承甫) 형제 다섯 명. 승보는 장남으로 주전자 제조업을 하면서 집안의 짐을 짊어졌습니다.
1916년 "강소성 제5중학교"(常州) 교장 동비(童斐)는 범대생‘승보(承甫))을 학교 수공예 기술사로 초빙했습니다.
자사기예(紫砂技艺)가 교실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범대생(範大生)이 의흥 자사 직업 교육의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1917년 촉산에 '강소성립의흥도업공광(江苏省立宜兴陶业工厂)'이 설립되어 반보희(潘宝熙)가 공장장을 맡고 범대생(承)) 등을 기사(技师)로 초빙하여 학도 여명을 모집하였습니다.
자사기예(紫砂技艺)가 사회에 공개되기 시작했습니다.
1921년 이영도공전습소(利永陶工傳習所)가 설립되고 범대생[승보(承甫)]이 과외 교사로 초빙되어 풍계림(馮桂林), 예덕희(葉德喜) 등의 자사 명가를 배출하였습니다.
1925년 대생은 문인 아사(雅士)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사방죽정호(四方竹鼎壶)」, 「육방죽정호(六方竹鼎壶)」를 각각 절옥성수(切玉聖手)의 반치량(潘稚亮), 도각의 명가 진소정(陈少亭/(1875—1953/사부 노란방(盧蘭芳1870-1930년) /임감정(任淦庭)(1889-1968)의 사형(师兄))과 협업해 업계에 미담으로 알려졌습니다.
1926년 대생의 '동파제량호(东坡提梁壶)'가 '미국 필라델피아 엑스포'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1930년 대생의 '합릉호'가 '벨기에 국제박람회'에 참가해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1932년 『의흥(義興)토기개요』에 자사 작품을 공모하여 1933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 참가하였는데, 범대생[승보(承甫)]이 갑기(甲技)로 자사 기예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1933년 대생의 '어화용호(鱼化龙壶)'는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1935년 범대생(승보)은 실업구국의 애국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봉응(一棒鹰)을 리메이크해 영웅독립(英雄独立)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영국 런던 국제박람회'에 참가해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1937년 칠칠로구교사변(七七卢沟桥事变)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항일 전쟁이 발발하여 의흥 도업이 손상되어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1942년 자택에서 사망. 향년 6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