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리아와 디아스포라를 반복하는 삶의 여정
축적된 차이가 만드는 위대함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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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Aporia)**와 **디아스포라(Diaspora)**는 각각 인문학적, 사회학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두 단어 모두 그리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겪는 '길 잃음'과 '경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 1. 아포리아 (Aporia): 지적인 막다른 골목
그리스어로 '길이 없음(a-poros)'을 뜻합니다. 철학적으로는 해결 방안이 없는 난관, 혹은 모순적 상황으로 인해 진퇴양난에 빠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 **철학적 배경:**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지식이 논리적 모순에 부딪히게 만들었는데, 이때 상대가 겪는 당혹감이 바로 아포리아입니다.
* **현대적 의미:** 단순히 '문제가 어렵다'는 뜻을 넘어, 기존의 가치관이나 논리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마주했을 때 사용합니다. 데리다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이 아포리아를 해체적 사고의 시작점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 2. 디아스포라 (Diaspora): 흩어진 자들의 삶
그리스어로 '흩뿌리다(dia-speirein)'에서 유래했습니다. 특정 민족이 본래 살던 땅을 떠나 타국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현상이나 그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 **역사적 배경:** 본래 바빌론 유수 이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게 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용어였습니다.
* **현대적 의미:** 오늘날에는 전쟁, 기아, 정치적 박해 또는 경제적 이유로 고향을 떠난 난민, 이주민뿐만 아니라 그들이 형성한 **이중적인 정체성**을 연구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의 삶과 문화를 상징합니다.
## 3. 두 개념의 교차점: "경계에 선 인간"
아포리아와 디아스포라는 서로 다른 영역의 단어 같지만, **'정착하지 못함'**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집니다.
**통찰:** 디아스포라의 삶은 필연적으로 **실존적 아포리아**를 수반합니다. "나의 뿌리는 어디인가?" 혹은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태는 그 자체로 삶의 커다란 아포리아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두 단어는 우리가 안주하고 있던 '익숙한 공간'과 '당연한 논리'에서 벗어날 때 마주하게 되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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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aporia)란 그리스어로 '길이 없음'을 뜻한다. 철학적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역설 앞에서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막힘의 상태다. 그러나 살아있는 삶에서 아포리아는 더 정확한 얼굴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르게 사는 법을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 우리는 익숙한 감옥 속에서 감옥 창살을 더 촘촘하게 만들어 안전을 구하는 자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스스로 감옥의 문을 열고 걸어 나가는 자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선택이 만들어온 삶이 어떻게 분기하는지를 기록한 역사다. 성경은 단순한 신앙의 서사가 아니다. 성경은 아포리아의 감옥에 갇힌 인간이 디아스포라(diaspora)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실존적 여정의 기록이다. 성경에서 디아스포라란 단순한 지리적 이주가 아니다. 그것은 익숙한 정체성을 버리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자아를 구성해야 하는 존재론적 도약이다. 성경은 이 도약의 반복을 통해 인간은 어떻게 구원이라는 근원적 변화를 성취할 수 있는 지를 명징적으로 보여준다.
낙원이라는 아포리아
인류의 최초 디아스포라는 에덴에서 시작된다. 아담과 이브는 낙원의 질서 속에 살았다. 그러나 그 질서는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주어진 것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순간, 그들은 최초의 디아스포라를 위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디아스포라를 선택한 이상 이전의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자기 힘으로 터득해야 했다. 에덴의 추방은 형벌이기 이전에, 인간이 세계의 지혜와 질서를 스스로 발명해야 하는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가 목격한 성경의 장엄한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낙원이라는 아포리아를 떠난 최초의 디아스포라에서 성경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방인임에도 환대 받는 삶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이것은 단순한 이주 명령이 아니다. 디아스포라를 감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우르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가나안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디아스포라를 떠났다. 이방인으로 도착한 곳에서 차별을 경험했고, 이방인으로 살면서도 환대받는 삶의 비밀을 익혔고, 마침내 정주민이 되어서 이방인을 환대할 수 있는 자로 변모했다.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나무 곁에서 세 나그네를 맞이한 아브라함의 환대(창세기 18장)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었다. 디아스포라를 통해 몸으로 익힌 이방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감내한 자만이 발현할 수 있는 타자성의 윤리였다. 레비나스(Levinas)가 '타자의 얼굴(le visage de l'autre)'이라 불렀던 것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이방인으로 살아본 자만이 이방인을 환대할 수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아브라함 계열의 세 종교가 이 디아스포라 여정 위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강제된 디아스포라와 자발적 디아스포라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간 강제 디아스포라의 희생자였다. 노예로 시작한 이방 땅의 삶에서 그는 억울함에 무너지는 대신, 이방 땅의 문법을 몸으로 익혔다. 그 결과 파라오의 총리가 되어 기근 속에 죽어가는 자기 민족을 구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던져진 디아스포라가 가장 높은 구원의 통로가 되었다.
룻의 여정은 다른 결의 디아스포라다.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 룻은 과부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는 자발적 디아스포라를 결단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룻기 1:16) 이 선택은 헌신이었다. 롯은 혈연을 넘어선 사랑의 디아스포라의 상징이다. 룻은 결국 이스라엘의 족보 안에 들어왔고,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어 메시아의 계보에 자리를 얻었다. 이방인의 사랑이 택한 민족의 역사를 다시 썼다.
광야에서의 디아스포라 훈련
모세의 출애굽은 단순한 해방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40년에 걸친 정체성의 해체와 재구성 프로그램이다. 애굽에서 430년을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몸에는 노예의 신경회로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시냅스의 수준에서 노예의 문법이 각인된 자들에게 가나안의 땅은 주어질 수 없었다. 광야 40년은 징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예의 신경회로를 주인의 신경회로로 다시 새기는, 본인의 저서『급진거북이』에서 논증한 시냅스 포팅(synaptic porting)의 기간이었다.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의 원리 위에서, 광야의 고통은 매일 조금씩 다른 인간을 빚어냈다. 가나안에 직접 들어갈 수 없었던 출애굽 1세대는 그 훈련의 비용을 몸으로 치렀고,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대가 여호수아의 인도로 마침내 약속의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이들에게 디아스포라는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전면적 전환이었다.
상실이 문명을 낳는 역설:
바빌론과 로마
바빌론 유수(기원전 586년)와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기원후 70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혹독한 비자발적 디아스포라였다. 성전이 무너지고, 땅을 잃었다. 그러나 바로 이 상실 속에서 인류사의 역설이 발생한다. 땅을 잃은 민족이 율법과 시나고그(synagogue)를 발명함으로써 장소를 초월한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흩어짐이 도리어 신앙의 보편성을 기반으로 한 운명공동체를 이끈 것이다. 바빌론 유수는 많은 다니엘과 에스터 등 유대인에게 정체성의 경계를 넘어 축적된 차이를 넘은 운명 공동체 방식을 가르쳤고, 결국 이런 디아스포라 훈련이 축적되어 에스라와 느혜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에 귀환해 무너진 성전(공동체)을 복원하는 기회를 얻었다.
로마의 지배하에 흩어진 유대인들, 그리고 그들 속에서 자란 예수의 제자들은 복음을 로마 제국의 도로망을 따라 온 세계로 전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자신을 이끈 추진력을 사랑(agape)이라 명명했다. 바울이 주창한 사랑은 관념이 아니었다.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서로를 지탱하기 위해 몸으로 실천한 사회적 헌신(Social Commitment)이었다. 사회적 헌신이 충만한 공동체는 관계적 응집이 만들어내는 정서적 에너지를 헌신의 연료로 전환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군사적 승리의 산물이 아니었다.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사랑이라는 안트로피(anthropy)가 로마 제국의 엔트로피를 이긴 것이었다.
노벨상과 디아스포라 유대인:
경계가 창의를 만든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역설이 있다.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한 유대인이 전체 노벨상 수상자의 약 22%를 차지한다. 다른 민족과 비교해 무려 100배가 넘는 압도적 노벨상 생산성을 자랑한다. 그런데 이 수상자들의 절대 다수는 이스라엘 정주민이 아니라 디아스포라를 경험한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의 조상은 오래전 예루살렘을 떠나 디아스포라를 통해 운명 공동체를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정주지에서의 삶이 아포리아로 변하면 다시 디아스포라를 감행한 사람들이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의 디아스포라를 감행했고, 프로이트는 빈을 떠났으며, 수많은 유대계 사상가들이 문화 사이에서, 언어 사이에서, 세계관의 경계 위에서 디아스포라를 감행하는 삶을 살았다. 단일한 정주가 깊이를 만들지 모르나 역사는 두 개 이상의 세계를 살아온 디아스포라가 기존의 틀을 깨는 창의적 돌파구를 만들었음을 증명한다. 물론 유대인들 중 삶의 존재목적을 발견하지 못해 디아스포라에서 얻은 장점을 자신 혈족의 명예, 돈, 권력을 위해 쏟아 부어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유대인도 많다. 하지만 디아스포라 도중 삶의 존재 목적을 깨닫은 경계인(borderline being)의 삶은 누구보다 생산적이었다. 이들에게 이주민으로 사는 불안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한 문명에 갇히지 않는 시야의 자유를 만끽했다. 이들은 이 자유를 분출해 가장 창의적으로 문제를 푸는 성공자를 만들어냈다.
성경 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의 근원적 변화도 아포리아와 디아스포라를 반복해 만든 여정을 통해 축적한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삶의 번성은 오직 사람을 통해서 찾아온다. 디아스포라는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넘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을 찾아서 떠나는 기회의 여정이다. 존재목적을 기반으로 이 자발적 여정을 성공적으로 감내한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천문학적 기회가 찾아온다. 아브라함처럼 이방인에게 환대 받을 수 있는 삶의 원리를 익힌다는 것은 삶의 성공과 번성을 초월하는 존재목적이 이끄는 비밀을 터득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자신의 삶이 안락한 오두막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떠나야할 아포리아임에 대한 각성을 통해서다. 이 오두막 감옥을 벗어나 더 큰 세상이 부르는 삶의 존재 목적에 따라 디아스포라를 감행한 사람들만 자신이 세상에 약속한 근원적 변화를 성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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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청년들에게 배를 만들게 하고 싶다면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지 말고, 먼저 (디아스포라를 꿈꿀 수 있는) 광활한 바다를 보여줘라" -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
< 윤정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