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남미(6)칸쿤/뚤룸유적지
일 시: 2010.5.8.(맑음)
국 명: 멕시코
코 스: 칸쿤- 뚤룸 유적지- 하바나이동(쿠바)- 숙박
툴룸을 보고 있으면, 화목하게
생활공간을 공유하면서 살아 온것같은것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야인들의 작은 공동체였던 칸쿤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12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툴룸은 아름다운 카리브해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 자리잡고 있으며, 세 면이 5m 두께의 돌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5개의 입구의 문이
있는 마야의 유적지다
'툴룸'이라는 말은 '패쇄' 혹은 '벽'을
의미하는 말로 벽으로 둘러쌓인 데에서 유래되었으며
유적지로써 AD1200에 가장 번성하였다. 유적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는
툴룸은 마야인들의 공동체 삶을 보여주는데, 툴룸 지역 안에는 여러 개의 피라미드와 함께
귀족들이 살던 궁성터가 있으며, 궁성터 건너 돌담 밖에서는 일반인들이 마야 스타일의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즉, 낮은 돌담은 엄격한 신분차별이나 군사적 의미의 방어 시설이 목적이 아닌
성스러운 지역과 일반 거주지를 구분하기
위한 시설이었다고 한다.
유적지 내에는 프레스코화의
사원(The Temple of the Frescoes)이라는
관측소가 있는데, 여기서 해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천문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부 벽에는 초 자연적인 형상을 한 불가사의한
뱀의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엘 까스띠요(El Castillo)는 성으로, 유적지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출입구 위에는 세 개의 니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중앙의 니치에는
하강하는 신을 조각하여 놓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바람의 피라미드', '하강하는
신(神)의 피라미드 ', '달력의 피라미드', '세노떼의 집'과
같은 다양한 유적을 갖추고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1
옛 문명들이 찬란한 유산을 남겼고
순수한 원주민이 생활하며 불가사의한 고대의 유적과
웅장한 자연이 살아 숨쉬는 남미는 매력이 넘치는 대지. 자연과 역사, 순수와
즐거움이 함께하는 이 변화무쌍한 생명력이야말로 우리가
남미를 갈망하는 이유일 것이다.
2
공연을 시작할 모양인데
우리 일행은 그냥 지나치고 유적지를 가기 위해
표를 받아들고 차 있는곳으로 갔다.
3
유적지 입구 근처까지 운행되는 버스
4
유적지 입구인데 표를 검사 받는 곳이다.
5
작은문 다섯개중의 성곽문,
이곳 마야인들은 키가작아
성문을 보면 성인 한사람 지나갈 크기며 성벽의
높이도 2미터 정도밖에 안된다.
6
왕궁터
7
마야인들은 키가 작아 계단이 필요 했다고 한다
8
희생의 샘에서 본 이구나나보다
크기도 크고 살도 통통 쪘는데 이곳엔 많았다.
9
신하들이 왕을 만나러
올적에는 왕궁앞에 있는 낮고 작은 문을 통해
기어 오도록 했다고한다.
10
11
뚤룸의 유적은 마야후기의
유적임이에도 불구하고 많이 파괴되어 있었다.
12
건물 왼쪽 모서리를
보면 작은 사람 얼굴 모습도 보인다.
13
14
15
16
뚤룸 유적지에서 가장 크고 뱃
사람들의 이정표 역활도 했다는 엘까스디오 성이다.
17
18
언덕을 올라온 순간 청옥색의
바다를 보는 찰나에 가슴이 뛰고 어머나 하며 감탄을
연발 하며 움직을 줄을 몰랐다.
19
하얀 모레위에 잔잔하고
부드러운 파도가 가볍게 그림을 그리곤
사라지는 가슴가득 고운날이다.
20
너무나 아름다워서 땡빛아래
멍하니 숨조차 멎은채 바라 보던곳 에메랄드 빛
바다와 유적지가 함께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찼나보다.
21
아~~ 멋진 바다의 풍경이다.
무슨 말로도 형용이 안되는 물색이 예쁜 바다다.
22
23
해변 가까이 있는 뚤룸 유적은
현존하는 마야 유적들 중에서 가장 풍광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24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이데로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진다
25
바다로 튀어 나온 바위 위에
서 있는 석조건물의 잔해가 마야의 도시 유적이다.
유적지의 독특한 위치 때문에 역사 유적에 별 관심이 없는 여행자라도
뚤룸에 와서는 대개 흡족해 할 것이다.
26
바닷가에 선인장꽃도 멋
스러움을 더하고 이국 정취에 낭만이 흐른다.
27
유적지를 들어 가는데 가족들이
웬 수영복을 입고 입장을 하는가 의문이풀리지가
았았는데 이제야 알것만 같다.
28
29
이곳의 바다와 유적지 최상의 궁합같다.
30
31
32
33
해변 모래도 얼마나
부드러운지 모래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고
밀가루같이 아주아주 고았다.
34
35
// 중남미(7)하바나/혁명광장.의사당건물
일 시: 2010.5.9.(맑음)
국 명: 쿠바
코 스: 하바나- 혁명광장- 의사당건물(카피톨리오광장)- 신시가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쿠바
제 1의 도시 아바나 시는 고층 건물이 즐비한
현대적인 아바나와 스페인 통치 시대 모습을 간직한 건물이
들어선 구 하바나로 구분 된다.
2 백20만의 아바나 시는 유엔이
인류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구 아바나의 옛
스페인식의 건물들과 사회주의 혁명 광장을 본다 혁명광장은
쿠바 행정부 건물벽에 그려있는 혁명가
체게비라의 벽화가 인상적이다.
혁명광장은 1948년부터 1951년 사이에
건설돠었고 142m높이의 기념탑과 민족 해방운동가
호세마르띠의 동상이 서 있다. 주변에는 카스트로의 집무실과 내무성,
방송국, 도서관등이 있는데, 뒷편 건물에는 체 게바라
얼굴이 크게 붙어 있다.
체 게바라는 알젠틴 출신
의사였는데 카스트로와 손잡고 쿠바혁명을
이끌었고, 쿠바 혁명후에 억압받는 민중을 구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소신으로 볼리비아에 잠입하여 혁명을 주도 하다가 미국CIA의
사주에 의해 체포 사살 되었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현재
쿠바인들의 영웅으로 추대되고 있다.
1
혁명광장의 쿠바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세 마르띠 기념탑과 동상
관광객들의 행렬만 간간히 오가는
평온한 분위기였다. 아바나시 중심부의 광장을
내려다 보며 우뚝 서있는 기념탑은 마치 평양의 주체탑을 연상시켰다.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탑이겠거니 여겼는데 다가가 보니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독립시켰던 영웅 호세 마르티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2
혁명광장을 한 면을 채우고
있는 커다란 기념탑과 대리석상은 역시나
호세 마르띠를 기리는 것.
사회주의 국가지만 쿠바 전역의 동상이나
기념건조물은 대부분 독립전쟁의 영웅들로 채워져있다.
혁명 이후 반세기동안 까스뜨로 정권이 유지되고 있으나 그의 숭배물은 보기
드물다. 오가면서 가장 많이 만난 조형물은 단연 호세 마르띠. 공항 이름도 그를 딴 것이니..암만 국부에
대한 존경과 예우가 공산당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북한과 비교되는 측면이다.
널리 알려진 민요 '관따나메라'의 가사도 호세 마르띠의 시란다.
호치민처럼 비타협적 독립을 외쳤던 쿠바독립의 아버지. 교육자이면서 시인이었던 사람.
볼 때마다 찡해지는 건 그에 담긴 진실성이려니..
나는 야자나무 고장에서 자라난 순박하고 성실한 사람
내가 죽기 전 내 영혼의 시를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어.
내 시 구절들은 연둣빛이지만,
늘 정열에 활활 타고 있는 진홍색이라네.
나의 시는
상처 입고 산에서 은신처를 찾는 새끼사슴과 같아.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나는 시를 뿌리고 싶네.
바다보다 산속의 시냇물과 함께하겠네.
..
나는 잘 안다네 사상이,
핏기를 잃고, 피곤함에 지칠 때도
깊은 침묵 위로
부드러운 시냇물이 중얼거리는 것을.
나를 망각 속에 묻지 말게나
배신자자처럼 죽이면서
나는 성실한 사람, 성실하다네
태양을 바라보며 죽으리니.
나는 원한다네, 나 죽을 때엔
상전이 없는 나라에다
비석 위에 이걸 놓아두게나
꽃다발과 우리나라 깃발을.
3
혁명광장의 내무부 건물 벽면에는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얼굴과
그의 표어인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Hasta la Victoria Siempre'"가
철골로 만들어져 부착되어 있다.
4
이동중 버스안에서 촬영
5
화려함과 거대함의 상징, 의사당건물,
1989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군정을 설치하고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며
쿠바를 식민지로 만들게 된다. 미국시민권자였던 초대대통령 에스트라다 팔마!
쿠바의 토지, 산업, 자원, 교통의 이권이 미국 자본의 수중으로
넘기게 되고 이어 당선된 1925년 게라도 마차도는
장기독재까지 하게 되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카피톨리오...
1929년 3년이상의 기간동안 5천명의 노동자를 동원하고
1700만달러를 만든 건물이다. 용도는 워싱턴과 같은 국회의사당....
혁명 후에는 쿠바과학원과 국립과학기술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중앙홀에 옥내기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공화국 여신상이 있다
6
쿠바의 국회의사당은
센트럴 공원의 남서쪽 코너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국의 워싱턴에 있는 캐피톨(Capitol)과는 쌍둥이 설계이며
국회의사당 건물과 닮은꼴로 만들어졌다.
이 건물은 건축학적으로
매우 정확하게 만들어 졌으며, 도시의 분위기를
한층 다양하게 만들었다.
7
건물 내부는 사치스러운 장식으로
도배되어 있으며, 각 방마다 클래식한 분위기이다.
이 국회의사당은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수백명의 건축가와 기술자의
지휘하에 단지 3년밖에 안걸려 지어진 것이며, 1929년에
거대한 축하쇼와 함께 오픈하였다.
혁명 쿠바에 카피톨리오에는
쿠바 공화국의 깃발이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8
건물앞에 조각작품
9
의사당옆에 있는 공원
10
신시가지 거리
뒷 건물은 국립극장이고
만화에 나오는 앙징맞고 노란색의 장난감같은
모양은 오토바이로 만든 택시인데
길거리 도로에 많았다.
11
왼편이 국립극장
오른편에 시가(담배) 공장이 있다.
12
신시가지 거리풍경
13
식사하는 우리 일행의 모습들이다.
무지 유명한 식당이란다.
식당 벽에는 다녀간 사람들의 사진이 빽빽하게 걸려있었다.
허나 우리나라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14
15
사회주의 국가라는 의미를 갖고
탑이 있는 혁명광장에서 사진 한장을 남겼다
// 중남미(8)하바나/헤밍웨이박물관
일 시: 2010.5.9.(맑음)
국 명: 쿠바
코 스: 혁명광장- 의사당건물(카피톨리오광장)- 신시가지- 헤밍웨이박물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별장이 있는 아바나는 1961년 쿠바의 공산화와 함께 친구이자
관리인인 푸엔테스에게 별장을 넘겨주고 미국으로 떠난다. 본인은 계속 살고
싶었으나 간첩의 누명을 입게 되므로 어쩔 수 없이 다 버리고 떠났으며 그 뒤 푸엔테스는 기증 형식으로
국가에 헌납하여 지금은 박물관으로 관광객을 맞고 있으며 낚시대회 수상트로피,
헤밍웨이보트(삘라르), 책, 가구 들이 잘 보존되어있으며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의 가치가 충분하다.
헤밍웨이(1899~1961)의 최후는 그의 고향인
미국 아이다호 주의 케첨에서 머리에 총알이 박힌 시체로 발견된다.
부인의 말로는 자신의 장총을 닦다가 오발사고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했지만 친구들은
당시 헤밍웨이는 몹시 낙담에 젖어있었다고 했다. 평소에는 활달한 사람으로 기억 되고 있던 그가 두 번의
비행기 사고에도 살아남기는 했으나 그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해지자 자살한 것인지도 모른다.
노벨문학상(1954)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세계적 대문호 헤밍웨이는 20년간 후세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으며 대표 작품으로는 “태양은 언제나 뜬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 등 걸작 품이 많고
간결문체로 육중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모험과 사냥을 좋아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부친도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
박물관 앞 정원
2
3
헤밍웨이 박물관은 하나의 저택이었는데,
하바나 시내에 살던 헤밍웨이가 이쪽으로 옮겨와서
여러가지 저술활동을 하는 등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바로 이 곳이다.
그렇게 헤밍웨이가 살던 집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놓은 곳이 바로 이 헤밍웨이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헤밍웨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바나 시내의 장소들 뿐만 아니라,
꼭 와봐야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빌려온 사진이다.
입장할때 포토비를 주고
들어와야 하는데 가이드말 살짝 찍고 1불주면 된다고
했는데 양심상 아예 포기했다.
헤밍웨이 박물관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서 창밖에서 내부를 들여다 보는것이 전부이다.
헤밍웨이가 실제로 쓰던 물건과 사냥해온 동물의 박제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정돈과 보존이 잘되어있다.
사냥도 즐겼고 특히 요트로 바다낚시하는일은 그가 소일하는
즐거움이었기에 뒷 정원엔 새요트처럼 기름칠을 해 놓은 그의 요트가 녹하나
안슬고 깨끗하게 잘 보관되있다.
(입장할때 포토비를 지불행 되는데 순간 나의실수)
4
5
헤밍웨이가 미국에서 타고온
배를 보러 가기 위해서 내려 가는 길인데
야자나무 숲길이 인상적이다.
6
7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보면 하바나
시가지의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하바나의 외곽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
입장료을 많이 받아서인가
박물관 내부는 물론 주변도 깔끔했다.
9
쿠바에서 헤밍웨이는 커다란 관광상품이었다.
그가 즐겨 찾았다는 선술집..지금은 음식점도 겸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식사비도 비싸지만 오래전부터 예약이 밀려있어서 우린 그냥 한번
둘러보는 것으로 메꿨다.
10
노인과 바다라는 걸작을 쓸 수 있었던
헤밍웨이는 그 외에도 훌륭한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여전히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이다. 그의 작품들을 꽤나 어릴때 접해보고서,
이해를 못하다가 나중에 나이가 든 이후에 다시
읽어보고 큰 감동을 받았었다.
11
헤밍웨이를 기념하는 그림들과 조각,
그리고 벽에는 생전의 헤밍웨이의 사진들이 전시 되어있다.
12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소설가
출생:/1899년 7월21일(미국) 사망:1961년 7월 2일
가족:/마리엘 헤밍웨이
데뷔:/1923년 단편집 '3편의 단편과 10편의 시'
수상:/1954년 노벨문학상,1953년 퓰리쳐상
경력:/1936년 공화정부군,캐나다 토론토지 특파원
13
코히말은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소설의 배경이 된 하바나(Havana) 외곽의 항구마을 이다.
14
15
이곳은 어느 유럽의 광장처럼
말끔하게 건물들이 예쁘게 단장을 하고 있었다.
16
아르마스 광장 옆 헤밍웨이가
자주 갔던 식당 "Floridita"에서도 헤밍웨이의
생전의 모습들을 볼수 있는곳이다.
17
벽에 걸려 있는 헤밍웨이 사진들.
박물관에서 시작한 헤밍웨이의
살아생전의 모습은 코히마르 마을을 거쳐
여기 아르마스 광장 옆 헤밍웨이가 자주 갔던 식당
"Floridita"까지 잘 보관 되어있다.
18
순수하게 웃는 헤밍웨이의
모습은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의 인상이다.
19
20
거리 축제가 있어 담아본 사진이다.
21
// 중남미(9)하바나/아르마스광장
일 시: 2010.5.9.(맑음)
국 명: 쿠바
코 스: 혁명광장- 의사당건물(카피톨리오광장)- 신시가지- 헤밍웨이박물관- 아르마스광장- 멕시코시티- 숙박
올드 아바나지역의 가장 볼만한
관광 명소로써 식민지 시대의 건물을 그대로
간직한 대 성당외 그 주변은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며 주말에는수공예품장이 열린다. 플라사 데 아르마에는 중고책 시장 및
야외 공연도 볼거리중 하나다.
아르마스광장은 수많은 박물관과
도서관, 기념비, 콘서트 홀 등 역사적인 건물들로 둘러
쌓여 있으며 건설 된 지 400년이 넘은
하바나 시민들의 휴식처이다.
아르마스 광장 중앙에는 1868년
쿠바를 독립으로 이끈 영웅 세스페데스의
동상이서 있으며 작고 아름다운 분수가 있고 대리석으로
만든 벤치와 많은 가스등이 있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
이동중 버스안에서 촬영
2
대 성당은 교황 바오로 2세가
생전 남미선교여행 마지막으로 미사를 보았던
곳이며 콜롬부스의 유해가 안치
되었던곳 이기도 하다.
3
4
골목 거리를 지나면서....
5
아르마스 광장 중앙에는
1868년 쿠바를 독립으로 이끈 영웅 세스페데스의
동상이서 있다.
6
7
광장에서 아이에게 먹을것을
주웠는데 껍데기를 벗기느냐 정신 집중이다. 귀여운
아이들의 머리 스타일이 독특했다.
8
길거리 지나다가 머리 꽃
장식이 예뻐서 원달라 했더니 안 받는다고
멋지게 포즈를 취해준다
9
무슨 열매같은데
잎은 없고 열매만 가득 달려 있다.
10
광장 골목길의 책방
책들을 덮을듯한 나무는 벤자민나무다.
우리나라에서는 화분에 심고 푸른 잎을 보는 게 다였는데
이곳에는 아름드리로 붉은 꽃이 피었다.
벤자민꽃, 처음 본 꽃이다.
11
이 벽화는 쿠바 귀족의 가계도란다.
12
스페인 풍의 카테드랄(대성당)
이곳은 하바나에서 가장 아름답고
보전이 잘 되어 있는 광장이다. 광장을 둘러싸고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많은 건물들(롬빌로궁전, 마르퀴세테궁전.
식민지 시대의 예술 박물관(1972)이 있다.
13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광장 카페는 빈 의자가 많았다.
14
15
16
대성당의 종각
17
나무가 참 신기했다.
항구로 이동중인 우리 일행들,
18
구 아바나 지역은 말레꼰
해변과 항구가 있다. 이 지역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다.
19
오른쪽에 등대와 같은 건물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16세기 콜로니얼
스타일로 건축 된 레알 푸에르자 요새가 있는데 이는 현재
도자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있다.
20
21
22
점심 식사후 멕시코시티로
가기전 비행기시간이 여유가 많아 어느 호텔의 뒷쪽,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휴식을 가졌다.
23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어디서나 젊은 연인들은 멀리서 봐도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24
25
호텔의 뒷 전경
// 중남미(10)멕시코시티/과달루페성당
일 시: 2010.5.10.(맑음)
국 명: 멕시코
코 스: 멕시코시티- 과달루페성당
포르투갈의 파티마, 프랑스의
루르드와 더불어 세계 3대 성모발현 성지이다.
과달루페 성모 발현지이자 성당이 지어진 테페약 언덕은
애초에 아즈텍의 전통 여신을
모시는 곳이었다.
황색 피부에 검은 머리를 가진
과달루페 성모의 발현은,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요구 당했던 스페인 침략시기의 원주민들에게 전통여신의 부활로
여겨져, 많은 원주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여기에 1754년 교황의 칙서 이후,
멕시코에서는 과달루페 성모가 그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한 예로, 멕시코 독립 전쟁 시
독립군들은 과달루페 성모가 그려진 깃발을 사용하였다.
멕시코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미구엘 이달고 이 코스틸라 신부가 과달루페
성모 휘장을 들고 있는 모습이 현 멕시코
화폐에도 새겨져 있다.
1
새로지은 바실리카성당
2
무릎걸음으로 참배하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성당 안쪽의 조명은 육각형의
벌집모양을 띤 조명등이 설치되어 있어 마치 은하수가 명멸하는 형용이었다.
미사가 집전되고 있었고 성당 안 전면에는 실내에 각국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태극기는 없었다.
3
외관상 체육관 모습의 뉴
바실리카에선 매 시간마다 미사전례가 거행된다.
이처럼 미사전례는 미사전례대로 관광은 관광대로 한 공간에서
같이 진행되기 때문인지 아쉽게도 종교적
경건함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는 순전히 관광객(순례객)의
편의를 우선하는 정책 때문이겠지만.
1904년, 비오 10세로부터 바실리카라는 지위를 부여받고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성모발현’을 공인받은 이 성당의 정식 이름은
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Guadalupe 이다.
4
디에고의 틸마에 새겨진 聖母畵 원본,
사열의 평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가며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사고로 성모상이 떨어졌을때 성모상은 안 상하고 그 사고 때문에
망가진 금속제 철구류가 전시되어 있었다. 여하튼 470년 지난 초상이 전혀 빛바래지
아니 하였으니 이것도 레이디 과달루페의 영험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5
뉴 바실리카에 있는
그 유명한 틸마 원본이다.
6
이 그림은 과달루페 성모의 모사품이다.
7
과달루페 성당
매년 수십만 명의 성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이곳은 성모님이 발현하셨던 테페약 언덕위에
자그마하고 아름다운 성당이, 그 아래 넓은 광장에는 1709년 다시 세워진
아름답고 웅장한 바로크식 성당건물(Old Basilica)이 있는데 지반침하로 붕괴의 위험이 있어
현재는 박물관과 공연장 등으로 사용되고 바로 옆에 조개껍질을 엎어놓은
형상의 엄청난 규모의 성당을 지어 미사를 봉헌한다.
8
9
성당앞 광장의 시계탑
10
신 바실리카성당과, 과달루페 성당
11
1531년 12월 9일, 미사를 보러가던 인디오
‘후안 디에고’는 테페약 언덕에서 푸른 망토를 걸친 성모님을 만난다.
성모님은 ‘나는 너희들의 슬픔과 비탄의 소리를 듣고 위로하러 왔다. 너는 주교에게 가서
이곳에 성당을 짓도록 전하여라....’ 디에고는 주교관으로 달려가 이 이야기를 전하지만 스페인 주교
‘후안 데 수마라’는 증거를 가지고 올 것을 명한다.
다시 테페약 언덕으로 간 디에고는
성모님을 만나 그 말을 전했고 성모님은 처음
만났던 언덕위에 가서 피어있는 장미꽃을 주워오라고 한다.
바위투성이의 산일뿐더러 겨울철로 장미가 피는 계절이 아니었지만
언덕위에는 장미꽃이 만발하여 있었다. 꽃을 주워 내려오자 성모님은 디에고가 펼쳐놓은
틸마(멕시코인들의 겉옷)위에 가지런히 장미를 놓아주며
가는 도중에 절대로 펼쳐보지 말라고 한다.
디에고가 주교님 앞에 가서 틸마를 펼치자
멕시코에서는 자라지 않는 주교의 고향인 스페인 카스티야산
장미 꽃송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꽃을 쌌던 디에고의 틸마에 성모님의
모습이 새겨져 나타나는 기적이 일어난다. 틸마에 새겨진 성모님은 1m 45cm의 키에 피부색은
인디오처럼 거무스름한 황갈색이고 머리카락은 검은색이며 머리에서 발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청록색 밝은 망토를 입은 모습이었다.
12
13
14
샘물성당
15
벽과 천정의 밝은
부분은 전등이 아니라 햇빛이다.
16
17
테페약 언덕을 오르는 아름다운
석조계단은 꽃과 장미로 뒤덮인 언덕 모습과 어울려
환상적이었고 옆쪽 절벽 아래쪽에는 디에고가 성모님을 만나는 모습의
조각이, 또 조금 떨어져 디에고가 주교님 앞에서 틸마를 펼쳐 보이는 모습이 동상으로 세워져 있다.
테페약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성당의 모습은 정말 그림 같이
아름다워서 가슴가득 감동을 주었다.
18
19
과달루페 성당뒤 성모를
알현하고 공양드리는 모습들의 조각,
20
샘물성당
21
22
23
24
25
성모 발현 언덕에서
내려다 본 과달루페 성당과 멕시코 시
26
27
28
디에고의 틸마에서
장미가 쏟아져나왔던것처럼 장미꽃이
유난히도 많았다.
29
교황 요한 바오로2세상
30
31
32
멕시코인들의 ‘과달루페 성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카톨릭 신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며 전국 어디를 가나 성당마다 과달루페 성모님을 모시고 있고
성당이름도 과달루페를 딴 성당이
수도 없이 많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페인이 멕시코
식민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과달루페 성모’는
멕시코 독립운동은 물론, 멕시코혁명 때에도 성모님이 새겨진 휘장을 높이 받들고
성모님이 새겨진 모자를 쓰고 독립투쟁과 혁명에 나서서
민중의 커다란 구심점과 힘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