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프리카’라고 불리는 도시 대구의 온도가 점점 뜨거워지는 7월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7월에는 뜨거운 여름밤을 시원하게 해 줄 김동원 시인의 시와 만납니다.
그동안 시하늘 초대 시인들과의 대담에 여러 번 나와 주셔서 낭송회를 더욱 빛내 주셨던 김동원 시인을 우리는 참 많이 기다렸지요? 드디어 그의 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김동원 시인의 맑은 시와 함께 만들어 갈 아름다운 시간을 기대해 봅니다.
일시/ 2017년 7월 21일 금요일 19시
장소/ 건들바위라이브레스토랑
김동원 / 약력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출간
2002년 제 2시집『구멍』출간
2004년 제 3시집『처녀와 바다』출간
2007년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출간
2014년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깍지』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원. 대구시인협회 감사.『텃밭시인학교』운영
전화번호 : H:010-3276-8034
깍지
김동원
내 손을 나꿔 챈 그녀에게 아내가 있어 안 된다고 했다. 곁에 벗은 예쁜 속옷은 유채 꽃빛이었다. 등 뒤에서 그녀가 “오늘 밤만이라도 하늘 물속을 헤엄쳐, 저 샛별까지 갈 수 없냐”고 내 허리를 꽉 깍지로 껴안았지만, 나는 두 자식이 있어 진짜, 안 된다고 뿌리쳤다.
돌아보지 말걸, 꿈속 그녀는 알몸으로 초승달 위에 웅크려 울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밤부터 꿈만 꾸면, 구름 위로 떠오르는 달에게 올라타는 연습을 한다. 제멋대로 엉켜버린 두 인연이 천년의 허공 속에 헛돌지라도, 미친 듯 미친 듯 그녀를 위해, 나는 밤마다 꿈속에서 달을 타는 연습을 한다.
오십천
김동원
어릴 적 난 홀어머니와 함께, 강가 백로 외발로 선 오십천 천변에 핀 복사꽃 꽃구경을 갔다 봄 버들 아래 은어 떼 흰 배를 뒤집고, 물결이 흔들려 뒤척이면 붉은 꽃개울이 생기던, 그 화사한 복사꽃을 처음 보았다 젊은 내 어머니처럼 향기도 곱던 그 복사꽃이 어찌나 좋던지, 그만 깜박 홀려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갓 서른이 넘은 어머닌 울고 계셨다 내 작은 손을 꼭 쥔 채, 부르르 부르르 떨고 계셨다 그 한낮의 막막한 꽃빛의 어지러움, 난 그 후로 꽃을 만지면 손에 확 불길이 붙는 착각이 왔다
어느새 몸은 바뀌고, 그 옛날 쪽빛 하늘 위엔 흰구름덩이만 서서, 과수원 언덕을 내려다본다 새로 벙근 꽃가지 사이로 한껏 신나 뛰어다니는 저 애들과 아내를, 마치 꿈꾸듯 내려다본다
처녀와 바다
―시간의 저편 너머에 묻힌 h에게
김동원
내 마음속엔 언제나 해당화 꽃처럼 붉게 멈춰 버린
처녀의 무덤이 산답니다
저 바닷가 물밑에 가라앉아
진주가 돼버린 처녀랍니다
처녀는 곱고 수줍고 아름다운 머릿결이 물풀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운명처럼 만나
아침마다 해가 뜨기 전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바닷물 위 걸어서
해를 만지러 가곤 했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우리의 운명 같아
잡힐 듯 잡힐 듯 손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처녀는 그 겨울 바다 속 生이 잠기고
영원히 바닥에 잠겨서 물풀에 가려졌습니다
그 후 난, 문득문득 깊은 밤 혼자 잠에서 깨어나 웁니다
그토록 그리운 처녀는, 내 바다 위 어디에도 없고
백사장 흰 모래알 속에나 등대 불빛 밑으로
찾고 또 찾아 헤맸지만,
잃어버린 바닷길은 그대로 천 길 물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따금 처녀는 그 처녀는, 저 먼 시간의 저편 너머 수평선에서
붉은 해를 타고 올라와,
그 새벽 깨어나 우는 내 서러운 등을 두 손길로 따뜻이 어루만져 줍니다
무중력
―오너라, 내 가슴 속에, 매정하고 귀먹은 사람아
(「망각의 강」중에서―보들레르)
김동원
끝내 저렇게 내린 흰 눈 위에 길이 지워지겠구나
아들이 올 텐데
어둠은 자꾸 병원 격자창에 차갑게 들러붙는데
입술로 흘러든 망각은 물이 찼는데
아들은 꼭 온다고 했는데…,
쉴 새 없이 웅얼거리다 졸아 붙은 치매 입술
수북 빠진 머리칼 곁에 헝클어진 늙은 의자 한 개
아들이 올 텐데, 아들은 꼭 온다고 했는데
함몰된 기억 뒤쪽엔
뼈만 앙상한 등 받침만 남은 채
복도 계단 밑 웅크린 여자의 눈 풀린 동공 속엔
밤새 녹아내린 흰 눈이 또 길을 지우겠구나
보름달
―시선 이백의「월하독작月下獨酌」에 답하여
김동원
여자 엉덩이만한 둥근 보름달이 떴다
내 오늘, 법이산 위에서 그 엉덩이 밟고 올라
쑤-욱 구름장 위로 고개를 내밀면,
껄껄껄 시선 이백이
하늘 위에서 손을 뻗는다
이렇게 우리는 초저녁 북극성에 걸터앉아
술상이 나오기 전
한 수 시를 짓고,
지구로 떨어지는 별똥을 바라보며
눈앞에 귀찮게 아른거리는 우주선 파리채로 후리고,
참 고운 몸매의 샛별이
웃는 듯 床(상)을 받쳐들고 나오면, 안주론
별자리 황소를 굽고
술은 북두칠성 국자로 알콜 성단에서 뜨고,
어린것들은 조랑말자리 별에 태워
성도를 한바퀴 천천히
돌게 한다
그렇게 한밤중 거나하게 취하면,
우리 둘은 어깨를 끼고
은하수 강가에 배를 띄우는데,
이백은, 뱃머리서 월하독작을 읊고
난, 취흥에 겨워, 저 이쁜 달 엉덩이를 힘껏
'철썩' 때린다
그러면, "으응" 하고 잠 덜 깬
웬 여자 볼멘소리가
방 한구석에 자늑자늑하다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일 때
김동원
흰 눈이 내린 겨울 숲이 여자로 보이거나, 하나 둘 켜지는 저녁 도시 불빛이 그 여자들의 어깨 둘레로 보일 때, 붉게 물든 저녁놀 부드럽게 산정에 입맞출 때, 난 으레히 습관처럼 지녀 온 버릇이 있다. 그것은 한 편의 시를 펼쳐 보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속 깊이 움직이게 한 한 줄의 아름다운 시구를 찾아내, 방안을 서성대며 조용히 혼자 소리내어 읊조리는 기분은―참 묘한 것이다. 이 소리들은 나직이 방안 귀를 따라 돌며 천장으로 올라갔다 내려온다. 마치, 누군가 이 시어들에 맞춰 피아노의 선율을 소리내어 들려주는 것처럼. 그러면 놀란 사방의 벽들만이 이 우스운 짓을 왜 하는지 몰라, 킥킥킥 돌아서서 비웃고 있는 것이다. 아무러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제 스스로 힘껏 움직이다 가는 것. 저 창 밖 빈 겨울 나무처럼, 추운 모퉁이 한켠에 비켜서 있다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 푸른 잎사귀의 물관을 타고 올라서, 하늘 위 흐르는 흰구름의 가슴을 뭉클 만져 보면 된다.
시인
김동원
남 다 가는 길 시인은 그런 길로 가는 게
아니야,
처음 보는 길 캄캄한 길 되돌아올 수 없는 길
누군 뭐 다 알고 가나, 가다 보면 알겠지
그렇게 가다 보면 달빛도 나오겠지,
안 나와도 못 갈 것 없지
길 없으면,
길 보일 때까지 눌러앉아 쉬면 되거든,
무작정 쉬는 재미 세상사
깜박 다 잊고
구름에 기대 쉬는 재미
여자 꽁무니도 한 번 따라가 보는 거야
모든 게 그 계곡서 흘렀으니,
혹, 그 길 보일지 누가
아나,
올라도 타 보는 거야, 그 상상력의 快美 속에, 그러다 안 되면
산도 들이받아 보고, 그 아래
처박혀도 보고
한밤중 술병을 들고 神 앞에 나서
버둥거려도 보고,
그래도그래도 풀리지 않거든,
그 이른 첫새벽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꺼이꺼이 해를 안고
다 타도록 울면 되지, 이제 알겠지
남 다 가는 길 시인은,
그런 길로 가는 게 아니야
시를 사랑하는 이는 다 그렇듯
김동원
시를 사랑하는 이는 다 그렇듯, 늦가을 어스름이 깔리는 뒷산의 산책로를 걸어 내려오며 홀로 생각에 잠기는 것은, 저 붉은 저녁놀과 나란히 짝이 되어 꼭 어울리는 것으로 이 세상 '시밖에 없다'는 그 무례한 느낌뿐이다
아마도 이 시를 읽어 가는 많은 분들이 위쪽의 글귀 속에 들어앉은 좁은 예술의 자기 중심 사고를 책망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 '깊이 물들어 가는 늦가을 단풍 속에 온몸과 마음이 몽땅 고독의 병으로 색깔이 바래어들었구나' 하고 이해해 준다면, 이 또한 시를 사랑하는 행복한 변명의 한 가지 이유는 될는지……
시를 사랑하는 이는 다 그렇듯, 나 또한 이 가을 어둠이 깃든 참나무 잎새 속에서, 아주 작은 영혼들의 목소리로 나직이 둘러앉아 속삭이는, 저 사라져 간 시인들의 시 읽는 소리를 듣는다 머뭇거리며 돌아서서 읽는, 미처 알아채지도 못한 그 이상한 가을 밤바람 소리를 듣는다
거지와 無爲
김동원
그 여름 우리는 법이산 숲속에서 만났다 매미 소린 구름 위에 걸어 두고 소나무 둥치를 베고 잠든 그 녀석은 참 편해 보였다 아무렇게나 웃자란 콧수염과 흙 묻은 배추 뿌리 얼굴을 한 그 거지 녀석은, 세상 걱정 같은 건 아예, 터진 양말 속에 꿰매 놓고 있었다
난 딱따구리와 함께 한동안 녀석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거지는 無爲가 아닐까' 얼토당토아니한 데까지 생각이 뻗쳤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세상에서 만난 그 어떤 인간 부류보다 善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녀석의 잠든 모양은, 산을 닮았다.
그래서일까, 아침마다 매일 그 녀석은 숲속에서 자고 일어나 수성못 여름 못둑 위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온다 해가 의자를 따뜻이 덥혀 놓으면, 무슨 신선처럼 지그시 눈을 감고 그 곳에 드러눕는다 호수 위 물오리와 백로가 싸악 그림처럼 날아올라도 본 둥 만 둥 하고, 道通이나 한 듯, 하늘을 제 육신 쪽에 끌어당겨 덮고는, 또 한 번 그 무위의 두벌잠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든다.
*법이산法伊山(200m)은 대구 수성못을 품고 있는 뒷산으로 아침저녁 산책하기엔 참으로 좋은 곳이다
구계항
김동원
빈 가슴 구멍 난 가슴 별로 꿰매려 거던
누님요, 밤바다 보름 달빛이 기막힌
구계항 한 번 놀러 오이소
한마음 탁 접고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이 세상 잘 난 놈 어디 이꼬
못 난 놈 어디 있을 라꼬
누님요, 세상만사 다 이자 뿌고
아침 햇덩이 한 번 품고 싶거 던
저 고래 떼 파도 위 타고 넘는
동해로 마카 오이소
미주구리 초고추장 듬뿍 찍어
소주 한 잔 허허 호호
소주 두 잔 우하하 호호홋
수평선 끌어안고 쭉쭉 들이키다 보면,
안 풀리는 거 어디 인능교
누님요, 천 년 만 년 사능교
이 한밤 불콰하니 백사장 취해 누워
밀물도 좋고 썰물도 좋은 항구가 되입시더
눈 감으면 저승 눈 뜨면 이승 아잉교
묻지 마소, 묻지 마소
하늘 길 어디로 가는 지 묻지 마이소
빈 가슴 구멍 난 가슴 밤바다 별로 꿰매려 거던,
시끌벅적 갈매기 울음 요란한
구계항 밤 등대 보러 마카마카 오이소, 누님요!
*경북 영덕군 남정면 구계항은 나의 고향이다.
첫댓글 한여름 시하늘 시낭송회 생생 굿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