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수 시인의 별세 소식이 인터넷에 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이리저리 걸리는 연이 있고 이름은 알고 있는 시인이었다. 내가 시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예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높은 음자리’의 ‘저 바다에 누워’가사를 ‘높은
음자리’의 남자 멤버가 시인의 시를 변형해 인용했으면서도 자기 작사라고 해서 사과하러 시인을 찾았다는 기사를
보고서였다. 그 때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시인은 ‘대중금속공고’에 재직하고 있지 않았나 한다.
그리고 2009년 내가 첫사랑의 추억을 찾아 지천역을 찾았을 때 역
앞에서 시인의 시가 새겨진 시비를 보았다. 대구 MBC 간이역
시비 건립추진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쓴 것이니 주문형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지천역은 내게 첫사랑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이다. 나는 중학교 때 경부선
상행을 오르내리는 통학을 했다. 그 때 나보다 국민학교 한 해 선배인 소녀와 늘 같은 기차 칸을 타고
다니며 가깝게 지냈다. 그게 내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은 너무 짧았고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난 대구로 이사를 오고 만남이 끊어졌다. 그리고 난 그 때로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만 대학이 아닌 고등학교 입시에서 재수를 했다. 마음의 상처가 컸다. 역시 재수를 하며 같은 학원에 다니던 국민학교 동기가 그 소녀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대구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한 날, 나는 나가지 않았다. 당시그녀는 경북여고에 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자격지심이 아니었을까? 난 이후 학원을 나가지 않았으며 그리고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어느 날 통학열차가 지천역에서 오랜 시간 멈춰 섰다. 기관차의 고장으로
기관차를 교체하게 되어 1시간 넘게 지체되었다. 저녁시간이
되어 배가 고팠다. 그 때 그 소녀는 나를 데리고 객차에서 내려 지천역을 빠져 나와 역 앞 식당에서
가락국수를 사주었다. 그 때의 식사는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맛있는 멋있는 식사였을 것이다.
40년도 더 지나 그 장소를 찾았다.
역 앞에는 식당 몇이 모여 있었다. 그 때 그 소녀와 같이 찾았던 식당이 아직 남아있을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어둠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캄캄한
어둠을 뚫고 나의 손을 잡고 가던 소녀의 모습과 설레는 마음으로 이끌려 가던 내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그러나 첫사랑은 추억 속에 있어야 한다. 40년이 넘어 다시 찾은
그 장소는 내게 별다른 감명을 주지 못했다. 그저 한적한 시골 풍경에 불과했다. 간간히 추억 속에서 되새겨지던 그 진한 설레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첫사랑의
추억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첫댓글 장마비가 내리는 금요일 오후
대구엔 MERS환자가 없다는 뉴스를 듣고,
TAPAS 선생님의 아름다운 추억을 읽으니,
휴일이 당겨진듯 넉넉한 오후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지중닭 선생님
제 글을 읽고 댓글을 써주시니 제 추억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박해수 시인은 저랑 범어동에서 국선도 수련을 같이 하신 도우님이기도 하시지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다른 도우님의 잔치에서 웃으시는 모습 뵈었는데.. 늘 조용하신 분이셨습니다. 여기서 그분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