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소(夫蘇)의 구려(句麗), 부우(夫虞)의 진번(眞番), 부여(夫餘)의 부여(夫餘)
부여가 가장 서쪽이고, 그래서 오르도스 고원으로부터 알유인들의 침범을 자주 받는다. 부여는 극시극등기(케스케덴,克什克騰旗) 의 용두산, 황룡산, 옹고특기(甕古特旗), 파림우기(巴林右旗) 지역으로 추정된다 진번은 신시가 있던 아로과이심기 천산(天山) 지역으로 추정되며, 거란 수도였던 파림좌기(巴林左旗)를 포함한다. 부루가 태자로서 임검성에 가게 되니 부우는 장당경으로 옮긴다.
부소의 구려는 구려하(九黎河) 지역이다. 북으로 시라무렌강, 서쪽으로는 교래하(敎來河)와 유하(柳河)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부소에게는 낙랑홀까지 다스리도록 하였다. 낙랑홀은 살수 이북 개원 남쪽으로 고려된다.
여기서 단군시대 청동 문화를 살펴보면 신민시 고대산문화를 볼 수 있다.
심양시 서쪽 신민시 고대자향 고대자촌(新民 高台子乡高台子村 东约海拔89米的山丘上) 유적지가 있다. 고대자 유적지는 시기적으로 4기로 나누는데 그중 3기부터가 고대산 문화다. 1기는 신락하층문화(新乐下层文化) 2기는 편보자문화 (偏堡子文化) 3기는 고대산문화 유형(高台山文化类型)이고, 채도문이 아니라 회색, 갈색, 홍색등 무문 도기 형으로 가며, 이는 미송리형과 같다. 용산문화처럼 세 발이 달린 질그릇과 질그릇에 네 귀가 달린 것들이 나타난다. 4기는 청동기시대에 진입한 고대산 만기 유형(高台山晚期类型)이다. 여기서 청동 귀걸이, 청동 도자 등이 보인다.
신민시 공주둔 유지, 신민시 법고현 부신시 창무현 평안보 유지, 부신시 자도대향 평정산유지에 퍼져있다.
고대산문화 평안보유지, 골기와 청동기. 둘째줄 네 번째가 구리 귀걸이다. 마지막 물건은 구리칼이다. |
고대산 문화 조기 유적의 연대는 4355년 전후로서 단군 왕검 조선의 시작 시대와 일치하며,직복(直腹) 형식의 세발 솥을 만들어서 적봉 등지의 홍산문화 속으로 퍼뜨렸다.
즉 이 지역은 홍산문화로부터 채도문 문화를 받다가 거꾸로 무문토기 등의 문화를 퍼뜨린 중심이 된 것이다.고대산문화(高臺山文化)는 창무시(彰武市) 평안보유지(平安堡遺址)에서 더 특징적인데 삼족기(三足器)와 골제(骨製) 무기, 석제 무기, 그리고 철치형 동도(凸齒銅刀)와 구리 귀걸이 등이 발굴되었다.
구리 귀걸이가 나온 유적지 시기는 평안보 제3기로서 bc. 1700년 정도로 분석되었고, 삼족기가 출현한 시기는 평안보 제2기로서 bc. 2355년 경이었다.
삼족기와 삼일신고, 즉 삼위일체를 생각할 수 있다. 삼성사를 세워서 추앙하는 삼성이라 하면 환인, 환웅, 치우인데 이 셋의 기운이 왕검 하나로 합쳐진다? |
수수영자의 청동과(靑銅戈) |
북경 동쪽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무기는 자도대 정남쪽 소릉하 하류 서안인 금주시(錦州市) 수수영자(秀手營子)의 토갱묘에서 발굴된 청동과(靑銅戈)다.
이는 bc 18세기 상(商)나라 초기 양식의 검날인데, 상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한 검날만 발굴되었고, 수수영자의 청동과는 자루까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검날부는 27cm이고 자루부는 80cm이다.
이제까지 북방 청동기의 연대를 상나라 뒤로 잡아오던 그릇된 관행에서 벗어나서, 북방 청동기가 상나라로 전해졌던 실제 사실적 관점으로 보면, 이 청동과는 bc 20세기 이전에 단군 조선 국가가 사용하던 것이다. 또한 이 청동과는 돌도끼(單孔石斧)와 함께 출토되었다. 미처 청동도끼가 개발되지 않았던 시대의 유물이다. |
2. 웅백다 마한(馬韓)과 치두남의 번한(番韓)
마한세가에서 백아강(白牙岡)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고 마한산(馬韓山)에 제사지냈다. 마한산은 묘향산일 것으로 고려된다. 달지국은 영변(寧邊)으로 고려된다. 이궁을 모란봉에 세웠다고 했다. 즉 마한 수도에서 남궁이 대동강에 있었다.
번한세가 수도는 험독성인데 부신시 자도대(紫都臺) 북쪽에 평정산(平頂山) 석성(石城) 유적지다. [한단고기]에서 [통지씨족략]을 들어서 치우씨(蚩尤氏)의 고향이 대극성(大棘城)이라고 하였다. 대극성은 서기 290년대에 전연국의 모용외가 세운 왕성으로서 고전에 의하면 황제 헌원의 손자 제전욱(황제가 됨)의 고향이라고도 하였다. 대극성은 도하 청산으로서 금주시 의현 북전성자(義縣 北塼城子)로 학계에서 인정되었다. 치두남이 번한을 세운 험독성은 대극성의 북쪽 자도대(紫都臺)다.
요녕성 대릉하(大凌河) 동북부 부신시(阜新市) 자도대(紫都臺) 서쪽에 호두구유지(胡頭溝遺地)와 남량 석성(南梁石城)이 있다. 또한 자도대 북쪽에 평정산(平頂山) 석성(石城) 유적지가 있다. 자도대(紫都臺) 문화가 바로 치우의 후손 치두남의 번한을 개국한 곳이다. 예문화 사해문화지는 부신시 동쪽 마을이며 부신시 서쪽인 호두구유지와는 40km 거리다. 또한 자도대 서북쪽에는 역시 예문화인 내몽고 흥륭와문화지가 있다. |
자도대(紫都臺) 북쪽에 평정산(平頂山) 석성(石城) 유적지는 석성을 발굴한 결과 3기 시기로 나누어진다. 이중 최상층은 하가점하층문화로서 3기 유적지인데 청동도(靑銅刀) 하나가 발굴되었고 상말주초(商末周初)로 분류된다. 이때 도기는 소면(素面)의 홍갈색토기를 위주로 하는데 이는 압록강의 미송리 토기와 관련되며 bc. 12세기 서우여 기자조선 시대다. 중간층은 2기 유적지로서 역시 하가점하층문화로서 토갱수혈(土坑竪穴)묘제였다.
최하층은 1기 유적지로서 토갱수혈묘제이고 창무시 평안보에서도 나타난 나팔형 구리 귀걸이가 묻혀 있었고 흑도(黑陶)가 남아 있다. 삼족기(三足器)도 출현한다. 토갱수혈 묘장제로 보아서 평정산 문화는 예의 흔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세 단군 가륵조의 두지주(豆只州) 예읍(穢邑)으로 고려된다.
자도대 서북쪽 내몽고 흥륭와 유지 가까운 곳인, 내몽고 오한기(敖漢旗) 석양석호산(石羊石虎山)에 소하연 문화(小河沿文化)가 생겨났었다. 특징은 하가점 문화와 다르게 채도적 기하문토기가 도입되고, 특히 부호글자가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타난 두 글자는 田, 卍자 등의 갑골문과 비슷한 고체다. 그해석은 치우편에서 설명했다.
호두구유지 남쪽에는 남량(南梁) 석성(石城)이 남아있는데 건축 연대는 알수 없다. 대개 청동기 시대로 추정한다. 성곽은 치우의 용산문화 시대에서 등장한다. 따라서 석성으로는 최초 시기의 것중의 하나이다. 당시 부신시 동쪽 물은 동량, 서쪽 물은 남량이라 불렀던 흔적이 지명에서 확인된다. 두 물 모두 대릉하로 들어가는데 대릉하는 전한시대 백랑수, 요나라 때에 대령하(大靈河)라고 부르다가 원나라 이후 오늘날의 대릉하로 굳어졌는데 어느 중간에는 양하(梁河)라고도 했던 것이다. 량(梁)은 낙랑의 랑(浪)과 같이 라(羅)와 같은 뜻이다. 자도대 남쪽 의현(義縣)에서는 비파형 청동단검이 6개가 발굴되었는데 그 위치는 고대자(高臺鄕), 두대향(頭臺鄕) 2건, 초로영(稍盧營), 화아루(花兒樓) 등이다. 그외 청동검파 1건, 석 검파두 4건이 있었고 조양 12대영자 청동검과 비슷하다. 금서시 오금당(烏金塘) 유적지의 3개묘에서는 비파형 청동단검 4건, 청동과1건, 청동부 3건, 청동착(鑿 끌) 3건, 청동도 1건, 투구1건, 검파부 1건, 기타 동장식 수십건이 발굴되었다.
단군 왕검은 예 땅에 도래한 환씨와 웅씨의 후예로서 400여년간 만주에 정착해온 세력이다. 따라서 해양, 농경 민족을 땅으로 하고 환웅의 목축 민족이 결합된 것이다. 태양을 숭상하고 각종 새를 숭상하며 또한 배달문화의 전통가치인 용과 거북 등을 숭상했다. 태양에 사는 새인 삼족오(三足烏; 흑점의 형상)와 부엉이나 매 등 여러 새를 숭상했는데 새를 영혼의 전령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제 용으로 대표되는 토착적 물의 문화와, 새로 유입되었던 태양의 문화, 불의 문화가 융화되어지는 것이다.
3. 단군 천년 수도, 진한의 백악산 아사달
b.c.2083년 우가 달문이 6세 단군으로 즉위하여, 상춘 구월산(常春 九月山)에서 모든 부족장들을 모으고 소밀랑(蘇密浪) 천도를 자축하였다. 신지비사(神誌秘史)에서는 이를 부소량(夫蘇樑)이라고 하였다.
[소도경전본훈]에서 부소량(夫蘇樑)이 진한(辰韓)의 수도이고 백악산 아사달이다. 부소는 처음에 구려를 다스렸는데 다시 낙랑을 다스렸다고 했다. 소밀랑, 또는 부소량, 낙랑은 구려의 중심물이어야 한다.
[후한서]에 소수맥구려(小水貊句驪)라고 했는데 이 소수(小水)가 바로 소물(蘇密), 소량(蘇樑)이다. 한편 요동 서안평의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다고도 기록했다. (서안평은 마자수 압록강도 나간다.)
류하(柳河)는 거류하(巨流河)라고도 하는데 본래는 구려하(句麗河)다. 류하의 남쪽 신민시 대홍기진(大紅旗鎭)에서 [안평(安平)]이라는 글이 새겨진 유물이 발굴되었다. 즉 요동 서안평의 위치를 나타낸다. 한편 고구려 요동성은 요나라의 요빈탑(遼濱塔)이 설치된 요주로서 신민시 공주둔(新民市 公主屯)인데, 이는 유하의 북쪽이다.
따라서 소밀수는 지금의 법고현(法庫縣) 수수하(秀水河)가 된다. 진한(辰韓)의 천년 수도 백악산 아사달은 수수하변에 있었다. 수수하 하류 서쪽 엽무대(葉茂臺)는 무엽산(無葉山)에서 온 말이고, [삼국유사]에서는 무엽산이 단군 수도이니 백악산과 같은 말이다.
<삼한관경본기>에서 진한의 남쪽이 살수(薩水)며 당시 남해안이었다. 이 살수는 살쑤수(薩爾滸水)가 남아있는 혼하(渾河)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진한(辰韓)은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을 거쳐서 발해의 진주(辰州)가 되었다.
[신당서]<도리기>에 발해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모성(古蓋牟城)과 신성(新城)은 당시 안동도호부 동북쪽에 있었다. 당태종 침략 때에 함락된 개모성에서는, 밤중에 신성의 전투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가깝다.
안동도호부는 영주(조양시 朝陽市)에서 180리의 연군성(대릉하 의현 義縣 북쪽 북전성자다.)을 지나서, 다시 요수를 건너 500리였다. 당시 요수는 오늘날의 류하(柳河)다. 지금의 요수는 당시 압록하였다. <도리기>를 기록하던 시대에 3차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어 있던 요동 신성(遼東 新城)은 고구려 요동성이 있던 신민시 공주둔 부근으로 고려된다. (2차 안동도호부가 있던 요동 고성은 수나라, 당나라의 요동성 터로 신민시 대홍기진 부근이었을 것이다.)
법고현에서 가장 큰 성터가 법고현(法庫縣) 사가자향(四家子鄕) 팔호산성(八虎山城)으로 환인현의 오녀산성과 비슷하게 생겼고 성둘레는 3430m다. 이는 개모성과 요동성의 배후성이던 고구려 신성(新城)으로 비정된다. 개모성은 신성과 요동성 사이이므로 정가방(丁家房) 아래 고성자로 추정된다.
단군 조선의 중심 아사달 문화는 법고시 정가방(丁家方) 만류가(灣柳家) 문화로 발전된다.
정가방 만류가(灣柳家)의 유적은 부채형 동월(銅鉞), 동척(銅戚), 동부(銅斧) 2건, 단뉴동경 등이 있고, 하북성 초도구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영수동도(鈴首銅刀), 녹수동도 (鹿首銅刀), 환수동도(環首銅刀),그외 두 건의 동도가 있다.
정가방 만류가 출토 은말의 청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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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방 만류가 청동 도끼 등
4. 장당경과 건청궁, 평양성
b.c.2182년 3세 단군 가륵(嘉勒)이 즉위하고, 서울을 구월산 당장경으로 옮겼다. b.c.2131년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가 살수(薩水)에 조선소를 세웠다. 살수는 진한(辰韓)의 남쪽이다. 오사구 단군은 기십년 걸려서 건청궁과 평양성을 세웠는데 진한 지방일 것이다. 천도한 것이다.
b.c.2099년 5세 단군 구을이 즉위하여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했다. [단기고사]에서는 고력산(古歷山)이다. 또 남쪽으로 순수하여 풍류강(風流江)을 건너 송양(松壤)에서 돌아가시니 대박산(大博山)에 묻혔다. 북한의 하나뿐인 단군릉이 바로 이 5세 구을 단군릉이다.
상춘(常春)의 구월산(九月山, 古歷山) 장당경(藏唐京)은 뒤에 44세 단군 구물에 의해 대부여조선의 수도가 된다. 고력산은 고대 역사가 있는 곳이고 장당경은 고대 역사를 돌에 기록하여 보관하던 곳으로 고려된다. 대변경(大辯經)에서는 44세 단군 구물의 장당경(藏唐京)은 개원(開原)이고, 평양으로도 불렀다고 했다.
개원시(開原市) 북쪽 창도현(昌圖縣) 노사평(老四平)의 일면성(一面城)이 요나라 통주(通州)로서 옛 부여국왕성(夫餘國王城)이있었다고 [요사지리지]에 전한다.
창도(昌圖)의 옛이름은 몽고어로 상달(常達 額勒克 - 녹색 초원의 의미)이었다. 고대의 [상춘]이 [상(춘)달]로 변했을 수도 있다. 중국발음으로는 창(昌), 장(長), 상(常)이 모두 "chang" 이다.
에리케(額勒克)는 아리목성(哀里木城)이었던 이수현(梨樹縣) 편검성(偏臉城)을 보면 고대 아리물과 관련된다. 그런데 이수현을 지나는 물은 명나라 때에 대창홀아하(大創忽兒河)라고도 했고, 그 아래에는 소창홀아하(小創忽兒河)도 있었으니 그 사이에 고구려 창홀(創忽)이 있었다. 창홀은 고구려식 이름이다. 아리물, 대창홀하는 현재 초소태하(招蘇太河)라고 부른다. 이는 몽왕(蒙王)의 태자가 죽은 것을 기리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여진의 동원에서 자살한 고구려 해명 왕자의 창원(槍原)도 가능하다. 또 소소하(昭蘇河), 소소성(昭蘇城)이라고도 했다.
대창홀아하와 소창홀아하와의 사이에는 팔면성(八面城 650M x 680 M)이 있다. 따라서 팔면성이 창홀의 뿌리로 고려된다. 팔면성의 어원은 글을 판독할 수 없는 팔면능형(八面稜形)의 갈석(碣石, =石經幢이라고도 한다)의 발굴에 의한 것인데 수성왕 천도 갈석, 동천왕, 중천왕 교서 갈석 등과 같이 고구려 유물로 추정된다.
팔면성은 금나라 한주(韓州) 치소였다가 유하현(柳河縣)이 되었다. 금나라 한주자사(韓州刺史), 동경과 유하현(柳河縣) 기물이 발굴되었었다. 금나라 한주는 이수현(梨樹縣)의 구백해영(九百亥營)에 다시 옮겨 세워졌다. 단, 한주라는 지명은 원래 고리국(藁離國) 고지였던 요하 서쪽 과이심좌익후기(科爾沁左翼後旗) 구릉지대 호단(浩壇)에서 옮겨온 이름이다. 호단으로부터 요나라 때부터 세번 옮겨서 한주는 이수현으로 갔다.
금나라때 [요동행부지]에서 1190년에 이 팔면성의 단금상(檀金像)이 있어서 제사(妙香供旃 檀金像)을 드렸다. 단금상은 당연히 단검상(檀檢像)이다.
따라서 팔면성이 장당경이었고, 대창홀아하와 소창홀아하가 발원하는 동쪽 탑자산(塔子山, 400M)이 구월산이었을 것이다.탑자산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고대 탑이 있었다. 상춘 구월산 장당경 대부여 도성은 팔면성이다.
단군 구물은 해성(海城)에 이궁을 지어 평양이라고 불렀는데 보을 단군 때에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요동지]에서 요해(遼海)가 개원성 서북쪽 250리에 있었다. 동요하와 서요하가 만나는 곳이 요해였다. 명나라는 요해위(遼海衛)를 개원(開原)에 두었었는데 창도진(昌圖鎭)에서 [요해위비(遼海衛碑)]가 발굴되었다.
팔면성의 남쪽 사면성(四面城)은 과거 편성구(偏城溝)로 불리었으며 사각형의 4000M의 성둘레를 가졌는데 이 규모는 범하 남쪽 청룡산성과 똑같다. 이 사면성이 단군 시대 해성 평양이고, 환도성과 같은 크기로서 고국원왕이 세운 국내성으로 고려된다. 전연국 침공 때에는 북도(北都)라고 했다.
동남쪽 하이대자향(下二臺子鄕)의 광정자산(光頂子山)에는 삼선묘(三仙墓)가 있다고 했는데 삼성사(三聖祠; 환인, 환웅, 치우)일수 있다. 광정자산도 궐(闕)산의 표기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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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 평양으로 추정되는 사면성의 동쪽 하이대자(下二臺子) 고성과, 사면성 서쪽 보력진(寶力鎭) 장발향(長發鄕)에서 청동기시대, 전국시대 고묘 등의 유적지가 발굴된다.
서쪽 장발향에서 나온 3자루의 청동검은 여러 형식이다. 하나는 비파형 청동검에서 보는 T자형 청동손잡이를 달았지만 검날이 비파형이 아닌 북방식 세형동검이다. 이는 중군, 즉 서요하 상류 식이다.
또 하나는 공병식 청동검으로서 가운데에 나무 자루를 박아 넣는 원형 구멍이 있다. 이것도 중군 형식으로서 긴 창이 된다. 또하나는 검날이 육릉형이며 타격석을 끼우는 것이었다. 청동화살도 삼릉식다.
삼릉식 청동화살은 임호(林胡)의 근거였던 양성현(凉城縣), 포두시(包頭市) 등에서도 나왔다. 그외 철제 기구가 많이 발굴되는데 바로 대부여 개국자인 단군 구물의 왕능일 것이다.
이 장발향 청동검과 비교되는 것이 심양시(瀋陽市) 정가와자(鄭家窪子)의 세 곳에서 발굴된 청동검인데, 청동제 가중기는 비슷하나 세 자루의 검날이 모두 비파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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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군의 강역
[규원사화]에서는 단군 조선은 치우씨 후손에게는 남서쪽 남국(藍國)을 주고 신지씨 후손에게는 동북쪽 숙신(肅愼)을 주고 고시씨후손에게는 동남쪽 청구(靑邱)를 주고 주인씨에게는 개마(蓋馬)국을 주고 여수기는 두지주(斗只州)의 예(濊)읍을 평정하여 군장이 되었는데 우수국(牛首國)이다.
남국은 난하에서 시작하여 그 서남이다. 산서성과 하북성 산동성에 돌아다녔다. 숙신은 장춘, 길림이다. 청구는 본래 산동반도인데 여기서는 고시의 동생 고수의 땅인 요양 지방이다. 두지주 예읍은 능원의 우하량으로 고려된다.
기원전 2240년, 2세 부루 단군이 즉위하고 유주(幽洲)와 영주(營洲)를 복속시켰다.
이때 유주는 북경시 부근, 영주는 산동반도 청주시 부근이다. 따라서 치두남의 아들 낭사왕자가 산동반도 낭사에 낭사성(狼斯城)을 세운다. 이후 번한은 6세 단군 달문 때에 탕지산 안덕향(湯地山 安德鄕)으로 옮겨간다. 초기 청동기 구리 유적이 발굴된 당산시(唐山市)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서우여의 번한 때에는 조양시(朝陽市) 건평(建平)현, 객좌(客左)현 부근으로 고려된다.
[규원사화]에서 단군의 영역을 북으로 대황, 서로는 알유, 동으로 창해, 남으로 해대(海岱)라고 했다. 대황은 몽고이고, 알유는 중국 고대 수도 서안의 북쪽, 황하의 남쪽인 오르도스 고원이다. 남으로 해대(海岱)는 양자강 하구에 있는 섬인 대산을 가리킨다.
주1. 단군 도읍 백악산 아사달은 이제까지 한반도 평양설(신증동국여지승람), 하얼빈설(신채호 등), 본계설(과거 북한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청동시대 청동 문물의 부재로 셋 다 부정된다. 본계의 청동기는 bc. 12세기에 뚜렷하지만 우리가 찾는 단군 도읍과 10세기 이상 차이진다. 대동강 평양은 무려 18세기 정도 차이진다. 주2. 단군 달문 때에 <서효사>에서 진한(眞韓)이 길을 다스린다고 하였는데 길의 고어가 질이므로 진한은 질한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말 질에 해당하는 발음을 가진 중국 한자는 없다. 번한(番韓)은 불한으로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자 말에는 불이나 벌에 해당하는 발음이 없다. 우리가 쓰는 한자어 불(佛) 등은 모두 fu로, 우리가 쓴 한자어 벌(伐) 등은 모두 fa로 발음된다. 진한(辰韓)은 고대에 신한으로 불렀을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