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고종 31)∼1961. 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화영(華永)이며 아호는 단주(旦洲). 경상북도 안동 출생. 아버지는 이흠(李欽)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다.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한문공부를 하였으며, 1906년에 고성 이씨(固城李氏)와 혼인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4자 혈서를 써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고, 그 뒤 안동에서 부흥회(復興會), 대구에서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장에서 앞장섰으며, 그 뒤 무력항쟁의 실력을 준비할 목적으로 만주로 탈출하여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군정서(軍政署)에 참여하였다.
1921년 북경(北京)으로 가서 신채호(申采浩)·김창숙(金昌淑)·김정묵(金正默)·남형우(南亨雨) 등과 함께 순 한문지 ≪천고 天鼓≫를 발간하여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중국에 선양하였다.
상해(上海)로 가서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의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여 활동을 하다가 1922년 대만 청두대학(成都大學) 사범부 문과에 입학한 뒤 아나키스트로 사상전향을 하였다.
1925년 이 대학을 졸업한 뒤 광둥(廣東)·상해·우한(武漢)을 내왕하면서 중국 국민당내 좌파를 이루는 아나키스트원로들과 사귀었고, 천두슈(陳獨秀)·진형명(陳炯明) 등 사회주의 세력과도 접촉을 하면서 광둥의거(廣東義擧)·우창폭동(武昌暴動)에도 참가하였다.
한편, 김두봉(金枓奉)·신채호 등과 ≪한글말본≫·≪깊더조선말본≫ 등을 저술하였다. 다시 만주로 되돌아가서 북만주일대의 민족세력을 규합하여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한족총연맹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군의 통합, 강화에 힘썼다.
1931년 일본군의 만주 강점에 따라 일본경찰에 잡혀 본국으로 압송, 징역 5년의 언도를 받고 복역을 끝낸 뒤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동북으로부터 충칭(重慶)으로 가서 ‘일개민족·일개정부·일개이념·일개집단’의 구호 밑에 임시정부 중심의 단결을 호소하였으며, 이듬해에 임시의정원 경상북도 대의원이 되고,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다.
8·15광복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환국하여 1946년 임시정부의 법통기관인 비상국민회의부의장이 되었으며,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을 결성하여 당수에 취임하는 한편, ≪노농신문≫을 발간하여 자유·평등이라는 평생의 이념선양에 힘썼다.
1947년 전국혁명자총연맹을 창립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대한국민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국민의회의 기능상실로 다시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대표간사가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그 뒤 10여 년 동안 조국의 비운과 함께 울분 속에서 지냈다. 서울특별시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獨立運動史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참고문헌≫ 정치·외교투쟁(민족문화협회, 1980)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獨立文化社,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