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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란치스코와 우리들 원문보기 글쓴이: franciscopaik
Berliner Philharmoniker
페트렌코가 베를린 필을 맡은 지도 벌써 5번째 시즌이 되었다. 2015년 베를린 필이 지명한 페트렌코에 당시 필자는 많은
우려를 했었다. 이후 실제 공연을 찾아보기도 했고, 베를린 필 Digital Concert Hall을 통해 관찰하였다. 우려는 현실이 됐고
클래식 음악의 종주국인 독일이 자랑하는 베를린 필이 정작 클래식 음악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클래식 음악은 질서를 존중한다. 바흐의 음악은 바흐의 언어로, 모짜르트의 음악은 모짜르트의 언어로, 베토벤의 음악은
베토벤의 언어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슈트라우스의 언어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스트라빈스키의 언어를
기초로 연주자나 지휘자는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을 첨가하여 결과물로 평가받는다. 피아니스트 키신과 랑랑의 차이는
정통과 정통에서 벗어난 연주로 미세하게 볼 수 있으나 예술과 아크로바틱으로 나뉠 수 있는 매우 큰 간극을 보인다.
일반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열광적 환호를 받고 있는 랑랑의 실체를 참음악의 잣대로 볼 때 클래식 음악 정체성에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은 크리틱커의 냉정한 분석에 의하지 않으면 전문 피아니스트들 정도만이 인지하고 있을
정도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고, 일반 청중들의 성원에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들도 그를 최정상급 솔리스트로 초청하는
참담한 현실이 발생하고 있다. 크리틱커조차도 말도 안 되는 미사여구를 남발하여 그의 좋은 점만을 부각시키고 일반 대중을
현옥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페트렌코의 음악은 한마디로 극한의 템포, 극단의 오케스트라 음량의 변화를 통해 말초적
감각만을 자극하는(음식으로 표현한다면 msg를 잔뜩넣서 만든 음식같은) 정통성에 의심을 받을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모짜르트나 베토벤, 브라함스, 차이콥스키가 모두 동질의 언어로, 동질의 앙상블로 오직 극단의 절정을
보여주기 위한, 랑랑의 클래식 음악에서 허용할 수 없는 아크로바틱한 현란한 기교를 뽐내며 연주하는 것과 같은 일관성을
보인다. 조금더, 조금더를 위해 그는 수도 없이 어퍼컷을 포디움에서 날린다. 베를린 필은 그와 연주할 때 모든 파트가 마치
전쟁에 나간 병정으로 변하여 현악기들은 현에 붙어있어야 할 보우가 마치 사무라이 칼 쓰듯 날뛰고, 이에 뒤질세라 목관
파트는 rpm을 최대치로 올려 가속을 올리고 금관 파트 역시 광란에 동참하여 함성으로 답한다. 클래식 음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인간미 넘치는 따뜻함과 여유로운 우아함, 깊이 있는 감성, 모든 것이 결여되어 오로지 시작, 극과 극, 절정을 위한
준비 작업과 절정 또 준비 작업과 절정, 숨을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그의 음악을 베를린 필은 감내하고 오히려 즐기고 있는
느낌을 받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단원 협의체에 진영 싸움에서 선택한 패트렌코와의 여정은 오케스트라 앙상블에는
치명상을 입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31, Jänner, 2024. Calais, franciscopaik.
단원 구성: 1.Vn. 2Vn. Viola. Cello. K.Bass.
악장3, 22명 19명 17명. 14명. 10명.
.............................................................................................................
Fl. Ob. Cla. Bn. Hr. Tp. Tb. Tu. Tim. Pe. Hf. 총인원.
4명. 5명. 5명. 5명. 7명 5명. 4명. 1명. 2명. 4명. 1명. - 125명. (2024년 1월 현재)
(한국인 단원으로는 2018년 입단한 비올라 박경민이 유일하다.)
fl.
Sébastian Jacot, Solo (스위스) * 2022 1st, ard
Emmanuel Pahud - Solo (스위스) *1993 & 2002 Aurèle Nicolet, Munich Philharmonic
Jelka Weber *1994 Berliner Philharmoniker’s Orchestra Academy (1994-96)
Egor Egorkin - Piccoloflöte (러시아) *2013 St. Petersburg Conservatory, Karajan Akademie
"Mathieu Dufour - Solo (프랑스) *2014 Maxence Larrieu, CNSM de Lyon Chicago Symphony 2021년 퇴사.
"Prof. Michael Hasel *1984 Aurèle Nicolet, Freiburg Musikhochschule 2022년 은퇴.
2024년 현재, 파트 평균 재직 기간; 20.17년
ob.
Jonathan Kelly - Solo(영국) *2003 principal, Birmingham Symphony Orch
Albrecht Mayer - Solo *1992 principal, Bamberger Symphoniker, Ingo Goritzki
Christoph Hartmann *1992 Günther Passin, Munich Musikhochschule
Andreas Wittmann *1984 Hansjörg Schellenberger, Berlin University
Dominik Wollenweber, Englischhorn *1993 Academy Berliner Philharmoniker.
파트 평균 재직 기간; 32년
cla.
Wenzel Fuchs - Solo-Klarinettist (오스트리아) *1993 Radio (ORF) Symphony Orchestra
Andreas Ottensamer - Solo (오스트리아) *2011 Academy Berliner Philharmoniker.
Alexander Bader *2006 Deutsche Kammerphil. Bremen
Matic Kuder *2021, (슬로베니아) Graz bei Gerald Pachinger
Andraž Golob, Bassklarinette *2021 (슬로베니아) Graz bei Gerald Pachinger
"Manfred Preis - Bassklarinette *1982 Karajan Akademie 2021년 은퇴.
"Walter Seyfarth *1985 Karl Leister Orchestra Academy Berliner Phil. 2021년 은퇴.
파트 평균 재직 기간; 20.43년
bn.
Daniele Damiano - Solo-Fagottist (이태리) *1987 Verdi Conservatory of Turin
Stefan Schweigert - Solo-Fagottist *1985 Klaus Thunemann, Hanover Musikhoch.
Barbara Kehrig *2022 Karajan-Akademie, Klaus Thunemann
Markus Weidmann *1997 Klaus Thunemann, Hanover Musikhoch. Karajan Akademie
Václav Vonášek - Kontrafagott (체코) *2016 2008, 3.Preis Musikwettbewerbs ARD
" Mor Biron (이스라엘) *2007 Klaus Thunemann, Hanns Eisler Berlin, Karajan Akademie 2021 퇴사.
파트 평균 재직 기간; 22.6년
목관 파트 평균 재직 기간; 23.34년
Principal conductors
Ludwig von Brenner (1882–1887)
Hans von Bulow (1887–1892)
Arthur Nikisch (1895–1922)
Wilhelm Furtwangler (1922–1945)
Leo Borchard (Mai – August 1945)
Sergiu Celibidache (1945–1952)
Wilhelm Furtwangler (1952–1954)
Herbert von Karajan (1954–1989)
Claudio Abbado (1989–2002)
Simon Rattle (2002 - 2018)
Kirill Petrenko (2019–present)
- p.s. 과거 필자가 올린 글 "베를린 필 추락의 끝은 보이는가"를 첨가 한다. - (시간적 요소에서 약간의 수정)
카라얀 시절 베를린 필은 세계 어떠한 오케스트라가 범접할 수 없는 앙상블과 음악적 결과물, 막강한 조직력, 거대한 자본을
자랑한 오케스트라였다. 이런 베를린 필 추락의 시작은 많은 사람이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클라리넷 솔로 지명으로 인하여
카라얀과 단원들의 충돌한 시점부터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카라얀은 젊은 여성 클라리넷 연주자 사바네 마이어를 솔로
클라리넷으로 낙점하자 우선 베를린 필 클라리넷 수석 칼 라이스터를 비롯하여 클라리넷 파트에서 반발을 하고 이는 단원
전체의 단합된 카라얀에 비토로 이어진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카라얀은 베를린 필에서 멀어진다. 이후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
결별을 선언하고 1989년 작고하자 아바도를 지명하여 악단의 발전을 꾀하지만 때맞춰 불어닥친 음반 시장의 불황과 연결되어
경제적 활황에서 벗어나자 단원들도 교수직 등으로 이직이 일어나고 연로한 단원들은 은퇴하기도 하여 화려하고 견고함을
자랑하는 베를린 필의 앙상블은 목관파트 부터 탈이 나기 시작한다. 1992년 당대 신예 플륫 주자로 각광을 받은 스위스 출신
엠마누엘 파위와 1993년 칼 라이스터 후임으로 뽑은 오스트리아 출신 벤젤 훅스로 시작된 잘못된 세대교체는 목관 앙상블의
치명적 상처를 입힌다.
파후드는 솔리스트 기질이 너무 강하고 훅스는 음악적 정체성이 맞지 않아 이 두 수석은 과도한 루바토와 오케스트라
앙상블 안에서 소리를 만들지 못한 물과 기름같이 오케스트라와 동떨어진 앙상블로 베를린 필 목관파트 앙상블은 서서히
무너진다. 거기에 아바도는 전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단원 협의체와 인텐단트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인다. 구심점을 못
찾는 지휘자를 둔 오케스트라의 모습에서 오케스트라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아바도가 암에 걸려 투병을 하는 동안
오케스트라는 더욱 氣 빠진 오케스트라로 변모하고 새대교체로 뽑은 신입단원들이 많아질수록 앙상블의 밀도는 떨어져
2,000년대 들어서는 그간 전 세계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신망받던 첫 번째 자리를 RCO에게 내어주는 수모를 당한다.
목관파트를 필두로 그동안 굳건 했던 스트링파트는 목관파트보다도 더욱 참담한 상태로 변해 버린다. 스트링 곳곳에 자리
잡은 여성 연주자들은 베를린 필 앙상블에 녹아들지 못하고 주눅이 든 연주자세로 실망을 안기고 금관파트 역시 막강한
화력을 잃어버리고 단단함까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2002년 병마와 싸우는 아바도가 퇴임하자 한참 떠오르는 영국
출신 지휘자 사이먼 레틀을 지명하여 변화된 베를린 필을 세계 음악인들이 기대하면서 지켜본다. 그러나 레틀과 함께한
16년간 긍정적인 면도 없지는 않았지만 음악적으로나 오케스트라 앙상블 밀도면에서 발전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케스트라 칼라를 책임지는 목관파트 조직은 가장 중요하고 복잡한 계산을 필요로 한다. 베를린 필의 목관은 RCO나
BRSO,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에 비하여 조직의 일관성, 앙상블의 완성도, 칼라의 질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오케스트라 칼라에 가장 정점에 있는 오보에를 살펴보면 1992년부터 수석으로 있는 알브레흐트 마이어는
근래에 들어 편차가 큰 연주력으로 극심한 피로도를 보이고 2003년 사이먼 레틀이 버밍햄 심포니에서 데려온 영국 출신
조나탄 케리 역시 칼라의 질이나 음악 해석에서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의 정점을 책임지기에는 많은 부족함을 보인다.
BRSO의 오보에 수석 Ramon Ortega Quero와 라디오 프랑스 오케의 Hélène Devilleneuve에 환상적인 목가적 칼라
소리와 깊이 있는 음악 해석은 베를린 필 오보에와 가장 큰 편차로 비교된다. RCO의 오보에 파트 역시 건실한 내실있는
조직을 보인다. 수석인 Alexei Ogrintchouk와 Ivan Podyomov는 러시아 출신으로 Alexei Ogrintchouk는 교수직과 지휘
등 오케스트라 외적 과도한 활동으로 피로도를 보이지만 새로이 임명된 Ivan Podyomov의 건강한 소리와 음악적 사고로
차세대를 이끌 좋은 연주자이고, 20세의 나이로 베를린 필 수석 플륫으로 입단하여 46년간 베를린 필과 함께한 안드레아스
블라우가 은퇴하고 그 자리에 시카고 심포니 플륫 수석으로 있던 프랑스 출신 Mathieu Dufour가 베를린 필 플륫 수석으로
옮겨와 파후드와 플륫파트를 책임졌었는데 무슨 연유에서 인지 Dufour가 2022년 퇴사하고 스위스 출신으로 ard 콩쿨에서
우승한 Sébastian Jacot를 2022년 수석으로 받아드리지만 블라우의 공백을 충분히 소화해낼 인재인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근자에 목관파트중의 가장 바람직한 세대교체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클라리넷 수석 벤젤 훅스는 가장 최악의 목관수석으로 음악적 정체성이나 소리의 칼라 등 베를린 필 목관 앙상블에 치명적
상처를 주고 있고 또 다른 수석인 안드레아스 오텐잠머는 아직은 설익은 미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들은 BRSO의
Stefan Schilling과 Christopher Corbett, RCO의 Calogero Palermo와 Olivier Patey의 클라리넷 조직과 소리의 질적인
면에서나 음악적인 건실함에서 심한 편차를 보인다. 1987년부터 파곳수석을 맡은 이태리출신 다니엘레 다미아노는 최근
급격한 퇴보의 모습을 보여주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고 그나마 다른 수석인 스테판 슈바이겔트가 아직까지는 건강한 소리로
목관파트를 받쳐주고 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이들 오케스트라는 2015년을 전후하여 똑같이 베토벤 교향곡 전곡 사이클 연주를 기획하여 공연하고
아시아, 유럽 등지로 투어연주도 함께 하였다. 그중 마리스 얀손스와 BRSO가 함께 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 공연은 음악사에
남을만한 발군의 공연이었다. BRSO의 목관파트는 어떤 조합을 하더라도 최상의 환상적 칼라와 밀도 있는 앙상블, 깊이 있는
음악해석으로 베토벤 교향곡 연주의 참 음악을 제시한다. RCO 또한 마리스 얀손스, 이반 피셔와 조명한 연주에서 건강하고
빈틈없고 짜임세 있는 앙상블과 오케스트라 전 파트가 홀을 지배하는 파워를 갖춘 공명된 소리로 베토벤의 에너지를
대변한다. 그리고 파보 예르비와 함께한 도이체 캄머필 브레멘은 다른 오케스트라들이 보여준 기존의 베토벤 교향곡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현대감각을 가미한, 소규모 악단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하고 세밀한 부문까지 일치를 이루어내는
앙상블로 베토벤 교향곡을 제시하여 신선함과 현대 오케스트라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에 비해 베를린 필과 사이먼 레틀의 베토벤은 카라얀 시절의 절도 있고 에너지 넘치는 한결같은 앙상블, 아바도 시절
인간미가 넘치는 따뜻한 앙상블의 정체성이 사라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레틀이 이를 악물고 쥐어짜서 만들어낸 에너지의
힘만을 내세운 앙상블로 진정성 있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건조하고 인간미가 사라져 버린, 쓸데없는 에너지만 넘치는
오케스트라로 변모하고 만다. 베를린 필 목관파트는 그동안 그나마 중심을 잡아 주었던 플륫 수석 블라우가 은퇴하여 더
참담한 앙상블로 빠져들어, 빠위와 클라리넷의 훅스는 정통적 베토벤 심포니와는 거리가 있는 음악 해석과 과도한
루바토, 과한 솔로적 기질을 들어냄으로 오케스트라 앙상블과는 괴리를 보인다. 스트링파트는 세대교체에 완벽하게
실패하여 각자 개인들의 보우가 날뛰는 광란의 앙상블로 변해버린다. 금관파트 역시 세대 교체에 완벽하게 실패해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의 면모로는 개개인의 자질 부족과 전체적인 앙상블 힘의 부족으로 과거 베를린 필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없는 나약한 파트로 전락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심각한 파트는 팀파니로 1986년부터 팀파니 수석으로 있는
라이너 제거스의 노쇠화는 정말 심각하다 못해 그가 팀파니를 맡은 근자의 연주는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가는 팀파니가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흐름을 방해하는 참담함을 보여준다. 이들이 2015년 보여준 베토벤 교향곡 전곡 사이클 연주는
베를린 필 역사상 수차례 있었던 연주 중 가장 암담한 앙상블, 정체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앙상블 상태를 그대로
드러낸 연주였다.
야심 차게 출발한 레틀과 베를린 필의 출발은 모든 음악인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고 기대를 한껏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대는 우려로, 그리고 14년이 지난 오늘날 참담함으로 베를린 필을 주시한다. 레틀은 젊음과
함께 폭발적인 에너지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영국 버밍햄 시절 가장 주목받는 차세대 지휘자로 자리를 잡고 베를린 필에
낙점을 받는다. 영국다운 새로운 음악에, 젊음의 에너지에 빠져 흠뻑 취해버린 베를린 필은 자신들의 정체성은 사라져
버려도 인지하지 못하고 깊은 파국의 나락에 빠져든다. 오케스트라 앙상블 발전은 정밀하고 계획된 계산과 정해진 세밀한
과정의 기획에 의해서만이 성공을 이루어내지 지휘자의 카리스마와 에너지에 의존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휘자는 자신이 맡은 오케스트라를 어떤 방향으로 조직하느냐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젊은 음악도들의 발전 가능성과 성향 등을 끊임없이 체크해야 하고 각 파트에 꼭 필요한 인재를
찾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세대교체를 등한시한 오케스트라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하다는 사실은 오케스트라
역사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고 있다.
베를린 필이 추구하는 세대교체는 타 오케스트라들 보다도 많은 신경을 쓰고 엄청난 노력을 쏟고 있다. 아카데미에서 배출한
신예들을 공연에 직접 참여시켜 필요한 인원을 보충하고 독일 전역이나 세계 각국의 타 오케스트라에서 검증받은 단원들을
초대하여 같이 연주해 보고 단원들의 평가하는 등 좋은 단원 확보에 정성을 쏟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베를린 필의 경우
단원들의 협의체와 인텐단트의 입김이 지휘자보다 우위에 있어 단원선발 과정에서 또 다른 폐단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이는 오케스트라의 구심점과 책임이 지휘자로 일치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와 지휘자가 추구하는 통일된 조직에 부합하지
못하는 딜레마를 항상 안고 있다. 이는 앞서 밝혔듯이 천하의 카라얀도 제 뜻을 관철하지 못한 오케스트라 구심점을 분산
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일치되고 합치된 오케스트라의 모습을 이룰 수 없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16년이 지난 레틀과 베를린 필이 그려낸 결과물들은 알맹이 없는, 레틀의 쓸모없이 남발된 폭발적 에너지에만 의존한,
이성적이지 못하고 지성적 과는 거리를 둔 앙상블로 만들어진 것뿐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정밀한 분석없이는 간과하지
못할 수 있는 애매한 지점에 있어 지금까지도 크릭티커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같은 동시대
오케스트라인 RCO나 BRSO와의 비교분석을 통해서는 확연하고 극명하게 인지할 수 있다. 또한, 지난 몇 년간 객원지휘를
통해 마리스 얀손스와 안드리스 넬손스 지휘 공연에서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의 베를린 필 앙상블을 볼 때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가 차지하는 비중의 심각성을 더욱 인지하게 해준다. 특히 지난 3월에 있었던 마리스 얀손스 지휘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연주는 베를린 필 스트링이 이렇게 조직적이고 단합과 일치의 앙상블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앞으로
어떤 지휘자를 선택하느냐가 베를린 필 발전에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지명한 키릴
페트렌코 역시 디테일에 집착하고 힘에 의존한 지휘자라는 점이 베를린 필 앞날에 의문점을 갖게 한다.
우리가 지휘자의 모습에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적이고 지성을 갖춘 여백 있는, 진정성과 진실함이 우러나는
지휘자만이 오케스트라를 발전시키고 정체성 있는 앙상블을 이루어 낸다는 사실이다.
2016年 7月 末日 베를린에서 franciscopaik.
역사.
1878년에 리그니츠(현 폴란드 레그니차) 시립 관현악단 출신 지휘자인 벤야민 빌제가 베를린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빌제 관현악단(Bilse-Kapelle)' 을 창단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악단은 당시 독일에서 보기 드문 연주회
전문 악단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점차 유명세를 타면서 빌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연주 횟수를 무리하게
늘리는 등으로 단원들의 불만이 점차 높아졌다. 결국 1882년에 악단 내부에서 심각한 분열이 발생했으며, 이때
탈퇴한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악단을 결성했다. 이것이 베를린 필의 본격적인 창단 시점으로 굳어졌으며,
그 해 10월 23일에 첫 번째 정기 연주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새로 출발한 악단도 특별한 재정 후원이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대중 음악회와 성악가 공연의 반주, 지방 공연을 하면서 혹사당했다. 창단 초기에는 이러한 재정난으로 지휘자도
객원 초빙 방식에 의지해야 했으나, 1887년에 수완 좋은 공연 기획자였던 헤르만 볼프가 재정 지원을 결정하고 근대
지휘법의 기초를 닦은 한스 폰 뷜로를 초대 상임 지휘자로 발탁하면서 악단 운영에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 뷜로는
주로 고전 레퍼토리와 브람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공개 리허설을 도입하는 등 적극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뷜로가 1892년에 건강 악화를 이유로 물러난 뒤에는 구스타프 말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객원 지휘로
연주회가 열렸으며, 1895년에 아르투르 니키슈가 제2대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니키슈는 뷜로가 다루기 꺼려
하던 브루크너의 교향곡이나 차이콥스키 등 러시아/동구권 작품들을 레퍼토리에 추가시켰으며,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창단 이래 최초의 해외 순회 공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니키슈는 1922년에 타계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으며, 타계 후에는
헤르만 볼프의 뒤를 이은 딸 루이제 볼프에 의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30대의 나이로 제3대 상임 지휘자에 취임해
화제가 되었다. 푸르트벵글러는 니키슈의 레퍼토리를 거의 모두 계승했으나, 스트라빈스키나 라벨, 쇤베르크, 버르토크,
힌데미트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들도 적극적으로 소개해 보수적인 음악계 인사들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1차대전 패전과 그에 이은 인플레이션, 그리고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기존의 자주 운영 방식을 고수하기 힘들어
졌고, 결국 베를린 시와 독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고 그 대가로 일정 횟수의 연주회를 의무 개최하는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새로 들어선 나치스 정권 치하에서는 사실상 국립 관현악단화 되었고,
나치스가 개최하는 각종 행사나 군수공장 등의 위문 공연 등을 수행했다. 푸르트벵글러는 1934년에 힌데미트에 대한
나치스의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고 상임 지휘자 직책을 사임했으나, 이듬해 복귀해 전쟁 말기까지
사실상의 상임 지휘자 직책을 계속 수행했다.
2차대전 중에는 괴벨스의 총력전 소집 계획에서도 제외되는 특권을 부여받았으나, 전황의 악화로 인해 공연장들이
폭격을 받아 전소되거나 파손되는 등의 상황으로 활동이 점차 축소되었다. 전쟁 말기인 1945년 1월에는 푸르트벵글러가
스위스로 망명했고, 악단 전체가 괴벨스의 계획으로 베를린 공방전에 투입될 국민군 중대로 편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 계획을 무효화 시켰고, 악단원 대부분은 베를린을 탈출해 바덴-바덴 등 남서독일
방면으로 피신했다. 종전 직후 생존 단원들이 베를린 필의 연주회를 재개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지휘자 섭외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하여 뵘, 크나퍼츠부쉬, 카라얀 등 독일 내에서 활동하던 중견 지휘자들의 대다수의 연주
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어려운 경제 여건 때문에 매우 낮은 개런티로 해외의 몇몇 지휘자들에게 지휘를 요청
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레오 보르하르트의 지휘로 영화관이었던 티타니아 팔라스트에서 공연을 가지면서 활동을
재개했으나, 보르하르트는 임시직 상임 지휘자였고 몇 차례의 연주회 후 영국군 병사의 총기 오발 사고로 사망했다.
보르하르트의 뒤를 이어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임시직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어 활동을 재개했으며, 나치스 시절 연주
금지 곡목이었던 유태인 작곡가들의 작품과 미국/러시아 등 적성국 작품의 부활 공연을 활발히 진행했다.
1947년 5월 25일에 연합군에 의해 연주활동이 해금된 푸르트벵글러가 2차대전 후 첫 콘서트를 개최했다. 푸르트벵글러는
1952년에 정식으로 상임 지휘자로 재취임했으나, 작곡 활동을 이유로 베를린 필과의 콘서트는 최소한으로 제한하였다.
푸르트벵글러와 보다 많은 연주 활동을 원했던 베를린 필 단원들은 푸르트벵글러에게 보다 많은 연주활동을 가져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1954년에 푸르트벵글러가 타계한 뒤 이듬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대타로 전후
최초의 미국 공연을 이끌었으며, 1956년 정식으로 종신 상임 지휘자에 취임하였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의 설치로
동베를린에 거주하던 일부 단원들이 더 이상 오케스트라에 합류할 수 없게 되어 자연스레 단원들의 세대 교체로 이어졌다.
1963년에는 한스 샤로운이 설계한 새 베를린 필하모닉 홀을 개관하였다. 개관공연으로 카라얀의 지휘하에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이 연주되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구 베를린 필하모닉 홀이 파괴된 이래 전용 공연장이 없었던
악단의 숙원 과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1967년 카라얀이 주도하여 창설된 '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에 참여함으로써
악단의 미답 분야였던 오페라의 공연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1969년에는 전후 최초로 소련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작곡자인
쇼스타코비치의 참석 하에 그의 10번 교향곡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카라얀 재임시절 도이체 그라모폰과 EMI 등지에 바로크에서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작품들의 녹음들을 남겨 악단의 명성
확립에도 크게 공헌했다. 영상물 제작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유니텔'을 통해 많은 영상물을 남겼으며, 이후 카라얀이
설립한 '텔레몬디알'에 참여기도 하였다. 해외에서는 유럽과 미국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공연했으며, 특히 일본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카라얀 임기 말기인 1983년에는 여성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의 입단을 놓고 단원들과 심한 불화를
빚었으며, 공연 수익 분배 문제로 인한 갈등도 심화되었다. 1984년 카라얀이 하반기의 모든 음반녹음을 취소함으로써
베를린 필과의 갈등이 극에 달하였다. 이듬해에 단원측과의 카라얀의 첨예한 대립은 다소 가라앉아 음반 녹음 활동은
재개하였으나, 근본적인 갈등은 봉합되지 못했다. 카라얀은 1989년 4월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
직을 사임했다. 이후 그해 7월 카라얀이 서거하였다. 카라얀 사후 새 상임지휘자로 로린 마젤과 다니엘 바렌보임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언급되었으나, 두 후보 모두 각각 반대하는 단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절충안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새
상임 지휘자로 선출되었다. 아바도는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거론되지 않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언론과 음악
애호가들은 물론, 아바도 본인도 크게 놀라움을 표했다. 임기가 종신이었던 전임자들과 달리 아바도는 7년마다 재계약을
하는 조건이었으며, 전임자에 비해 권한에 많은 제한이 있었다. 아바도는 각종 이색 기획 공연이나 현대 작품의 적극적인
공연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나 이는 보수적인 베를린 청중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아바도 취임 이후 음반 판매량이
매우 부진하자 베를린 필 단원들의 수입이 급감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상당수의 단원들이 오케스트라를 떠나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를 통해 자연스레 단원들의 새대교체가 진행되었다. 단원들과의 불화도 점점 심해졌다. 결국 아바도는
2002년 이후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아바도의 후임으로는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이 같은 해 취임
하였고, 2018년 여름까지 재직할 예정이다. 2015년 5월 11일에 있었던 1차 투표가 무산된 이후 6월 22일, 2018년으로
임기가 종료되는 래틀의 후임으로 키릴 페트렌코가 임명된다. 참조; 위키페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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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란치스코와 우리들 원문보기 글쓴이: franciscopa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