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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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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들마을[1] 스크랩 재령이씨 석계종택 이야기
바람산 추천 0 조회 201 14.09.22 14:18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석계고택 및 석계종택(石溪古宅 및 石溪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 2리 323번지
건 축 주 :  이숭일(李崇逸), 재령이씨 석계파 문중
건축시기 :  1674년(석계고택). 1800년대(석계종택)
소 유 자 :  이원근, 이돈
문 화 재 :  석계고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 1990. 8. 7 지정


건축 이야기
석계고택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 1676년(숙종2) 안동 도솔천에서 세상을 떠나고, 장례를 마친 뒤에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1631∼1698)이 석보 원리리의 유지로 돌아와서 지은 집으로, 당시에는 ‘항재(恒齋)’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는 이숭일의 모친인 장계향이 살았던 집으로, 장계향이 세상을 떠나는 1680년(숙종6)까지 5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석계종택은 석계고택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문중에서 1800년대에 지은 것이다. 석계종택 뒷마당에는 석계 이시명과 첫 부인인 광산김씨(光山金氏) 김해의 딸 김사안(金思安)을 한 위패에, 후처인 장계향을 따로 위패를 만들어 모신 불천위 사당이 있다. 석계종택의 불천위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8월 20일에 제사를 지낸다.


건축 구성
석계고택은 4칸 규모의 1자형 맞배기와집인 사랑채와 5칸 규모의 1자형 맞배기와집인 안채가 이(二)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전면에는 최근에 신축한 3칸 규모의 평대문을 세웠으며, 주우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다.
사랑채는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마구와 고방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배치하였는데, 사랑마루 주위에는 판벽으로 둘러 마루방으로 꾸몄으며 후면에는 감실을 설치하였다. 안채는 좌측으로부터 부엌, 안방, 대청, 상방이 이어져 있는데, 안방 옆의 마루 후면에는 판벽을 둘러 고방을 설치하였다. 상방의 우측벽에는 상, 하방 사이에 문꼴을 내어 문을 달았는데 밖으로는 세살문을 안쪽으로는 판장문을 설치하였으며, 안방에는 코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안채 역시 가구는 삼량가의 간결한 구조이다.
석계종택은 평대문과 정침,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전면에 위치한 평대문은 4칸 규모이다.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정침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건물이다.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서편에는 온돌방 1개, 동편에는 온돌방 2개를 배치하였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으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켰다. 안채의 동북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평면은 3칸을 통칸으로 처리하였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문중 이야기
- 칠현자의 출현 그리고 퇴계학의 계승.
장계향은 19살에 이시명에게 시집을 왔다. 당시 이시명은 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첫째부인인 김씨부인을 잃고,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었다. 장계향은 석계 이시명과의 사이에 6남 1녀를 두어 전처의 소생까지 10명의 자식을 길렀다. 그 가운데 일곱 아들은 모두 사마에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행실도 반듯해 주위에서 ‘칠현자(七賢者)’로 불렀다.
김씨부인의 소생인 이상일(李尙逸, 1611~1678)은 자는 익세(翼世)이고, 호는 정묵재(靜默齋)이며, 163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참봉(參奉)을 지냈다.
이휘일(李徽逸, 1619∼1672)은 이시명의 아우인 이시성(李時成)에게 입양되었는데, 자는 익문(翼文)이고, 호는 존재(存齋)이다. 13세 때부터 외할아버지인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문하에서 배웠다. 어릴 적부터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궁구하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리학 공부를 중단하고 병서를 읽어 효종의 북벌계획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다 효종이 죽은 뒤에는 병서가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성리대전(性理大全)』·『역학계몽(易學啓蒙)』·『주자절요(朱子節要)』·『퇴계집(退溪集)』 등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 『존재집(存齋集)』과 『구인략(求仁略)』, 편서로는 『홍범연의(洪範衍義)』 가 있다.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자는 익승(翼昇)이고, 호는 갈암(葛庵)이다. 형인 이휘일과 함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주요한 인물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여, 이이(李珥)학파의 설을 비판했다. 저서로는 『갈암집(葛庵集)』과 편서로 『홍범연의』가 있다.
이숭일(李嵩逸, 1631∼1698)은 자는 응중(應中)이고, 호는 항재(恒齋)이다. 그는 아버지와 형 이휘일·이현일을 비롯하여 부덕이 출중하였던 어머니를 둔 훌륭한 교육적 환경에서 성장하여 뒤에 학자로 대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모든 행정을 백성을 위하는 방편으로 수립하고, 민폐를 혁신시켜 고을사람들에게 ‘이불자(李佛子)’라 불렸다. 저서로는 『항재집(恒齋集)』이 있다.
이정일(李靖逸, 1635~1704)은 자는 경희(景羲)이고, 호는 정우재(定于齋)이다. 경학(經學)과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서(醫書)를 비롯하여 음악이론(音樂理論)에 조예가 깊었다. 시정에 대한 상소(上疏)와 나라의 인재 선발에 있어서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 실시할 것을 지극히 간하였다.
이융일(李隆逸, 1636~1698)은 자는 자약(子躍)이고, 호는 평재(平齋)이다. 그는 평생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산림처사로 자적하면서, 자제들을 가르쳤다. 저서로 『평재집(平齋集)』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둘째 이휘일과 셋째 이현일은 퇴계 문하의 3대 제자인 정구(鄭逑), 김성일(金誠一), 류성룡(柳成龍)에게서 두루 사사한 장흥효(張興孝)의 외손자이다. 장흥효는 자신의 학문을 사위인 이시명에게 전해주었고, 이시명은 학통을 아들인 이휘일과 이현일에게 물려주었으니, 영남학맥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학맥은 특히 이현일의 셋째 아들인 밀암(密庵) 이재(李栽)에게 전해졌다. 이재는 퇴계학을 계승한 데서 그치지 않고 외손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게 한 공로자이기도 하다.


관련유물
- 관련유물
장계향 부인과 항재 이숭일의 유물은 정부인 장씨 예절관의 유물전시관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전가보첩(傳家寶帖)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가 지은 『성인음(聖人吟)』·『소소음(蕭蕭吟)』 2편의 시를 부인의 남편인 석계 이시명이 비단 위에 쓰고, 존재 이휘일의 부인인 의인(宜人) 박씨부인(朴氏夫人)이 그 글자 위에 수를 놓은 수첩이다.

학발첩(鶴髮帖)
정부인 장씨(1598~1680)가 10세 전,후에 지은 학발시첩. 글씨도 정부인의 친필이다. 아들을 군에 보내는 80세의 노모가 기절했다는 말을 듣고 가련하게 여겨 지은 사언시 3장이다. 학발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을 뜻한다.

정부인 장씨 관련 책자들
『정부인 장씨의 삶과 학예』,『정부인 장씨 유적』,『정부인 장씨 추모 여성휘호대회』 등 7권의 책이 전시되어 있다.

교지(敎旨)
1687년에 의인(宜人) 장씨를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한다는 내용의 교지이다.

선조비 정부인 장씨 유묵(先祖妃貞夫人張氏遺墨)
정부인 안동장씨의 글씨로 1건은 사언고시이고, 1건은 칠언율시이다.

정부인 장씨상(貞夫人安東張氏像)
1998년 이호신(李鎬信)씨가 그린 것이다.

-『정부인 안동장씨 국문실기(貞夫人 安東張氏 國文實記)』

『음식디미방』
정부인 장씨가 저술한 동양 최초의 음식 조리서이다. 원명은 『음식디미방』이지만 책 표지에는 『규곤시의방(閨?是議方)』이라고 쓰여 있다. 이는 석계 이시명이 책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음식디미방과 관련된 현대 서적 3권

항재집(恒齋集)
항재 이숭일의 문집이다. 목판본이다.

 

관련인물
- 장계향(張桂香, 1598~1680)
장계향은 실명보다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로 더욱 알려져 있다. 장계향은 1598년(선조31) 안동 서후면 금계리에서 아버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와 권사온(權士溫)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영해 인량리에 살고 있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운악 이함의 셋째 아들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의 계실로 출가하였다. 당시 이시명에게는 전실 김씨부인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고, 장계향과의 사이에서 6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이현일이 쓴 『광지(壙誌)』와 『장씨부인실기(張氏夫人實記)』에 장계향에 대한 여러 행적이 실려 있다.
장계향은 서화와 문장에 뛰어나 훌륭한 필적(筆跡)을 남기고 있다. 흉년이 들어 기근으로 백성들이 고초를 겪자,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두들 마을의 서남쪽에 서있는 울창한 도토리나무들은 당시 장계향이 가족은 물론 고을 사람들을 위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또한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을 돌보고,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고 기르는 등 인덕과 명망이 자자하였다.
장계향은 회임했을 때는 물론이고, 83세에 이르기까지 7남 3녀의 자녀들을 훈도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때부터 재령이씨 가문은 더욱 크게 일어나 훌륭한 학자와 명망 있는 인재들이 대대로 배출되었다. 특히 1687년(숙종13) 셋째 아들 이현일이 조정에서 대학자이자 산림(山林)으로 초청되어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이에 법전에 따라 세상을 떠난 장계향에게 의인(宜人)에서 정부인(貞夫人)의 품계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정부인 장씨’로 불리게 되었다.
장계향은 이시명을 따라서 1640~1653년까지 영양의 석보(石保)에서 살다가, 1653년(효종4)에는 영양의 수비(首比), 1672년에는 안동의 도솔원(兜率院)으로 옮겨살았다. 1676년(숙종2) 이시명의 상을 끝낸 뒤에 셋째 아들 이현일, 넷째 아들 이숭일과 함께 다시 석보로 돌아와서 현 석계고택의 자리에서 5년 동안 살다가 1680년(숙종6)에 세상을 떠났다.
장계향의 시문 및 저서 가운데에는 『음식디미방』은 우리나라 17세기의 음식 조리법을 알려주는 귀중한 한글 최고의 조리 관련 문헌이다. 이 책은 장계향의 만년인 1670~8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책의 표지에는 『규곤시의방(閨?是議方)』이라고 붓으로 씌어져 있는데, 권두서명은 『음식디미방』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전체 30장으로 된 1권 1책의 필사본으로, 가루 음식과 떡 종류의 조리법을 설명한 ‘면병류(麵餠類)’를 시작으로 모두 146가지의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다.
뛰어나 신사임당(申師任堂)과 쌍벽을 이루는 ‘여중군자(女中君子)’로서 문화관광부에서는 1999년 11월에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 이숭일(李嵩逸, 1631~1698)
자는 응중(應中)이고, 호는 항재(恒齋)이며,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영양(英陽) 석보(石保)에서 이시명(李時明)과 장흥효의 딸인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경학 연구와 심성 수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1692년(숙종18) 의령현감(義寧縣監)에 제수되자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는 길이라 여기고 흔쾌히 부임하여 모든 행정을 백성을 위하는 방편으로 수립하고 민폐를 혁신시켜 ‘이불자(李佛子)’라 불렸다. 그 후 고향인 석보로 돌아와 부친의 뜻을 이어 후진 양성과 저술로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 『항재집(恒齋集)』이 있다.

 

영양 > 석보입암권 > 석보면 원리리
- 광제원(廣濟院)이 있었던 마을 ‘원리리’.
원리리는 동쪽으로 주남리와 답곡리가 있고, 남쪽으로는 지품면 토구리와 북쪽으로 영양의 양구를 잇고 있는 고을이다. 이곳은 면소재지가 있는 마을로 파출소, 초등학교와 중학교, 우체국 등의 기관들이 밀집해 있다. 이곳은 본래 영양현 석보 부곡의 땅으로 1500년대에 광제원이라는 역원이 있어서 원리(院里)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리리는 강변(혹은 갱빈), 아래강변(또는 바람내기), 새장터, 두들, 맛들(혹은 마웃들), 솔밑(또는 송하), 가두들[가구(佳邱)], 옛터 등의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제원이 있었던 마을인 두들마을은 두들[언덕]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석보(石保)로 부르고 있었던 이곳은 석계 이시명이 병자호란을 피해 들어와 살면서 유명해진 곳인데, 이시명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터전을 지키며 살면서 재령이씨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이 마을 옆 두들에는 석계 선생의 서당인 석천서당이 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주남천 가에 있는 암석에는 이시명의 아들인 이숭일 선생이 새겼다는 동대,서대,낙기대,세심대 등의 글씨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곳에는 석천서당(石川書堂), 석계고택(石溪古宅), 유우당(惟宇堂), 주곡고택(做谷古宅) 등 문화재와 정부인 장씨유적비 등이 많아 1994년 문화체육부로부터 두들문화마을로 지정받았다.
두들마을의 주차장과 전통한옥 체험관 사이로 난 길로 진입하면 4개의 마을길을 만난다.
첫 번째 가장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주곡고택과 만석꾼집이 나온다. 주곡고택의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원리리의 쉼터이자 두들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두들광장이 나온다.
두 번째 만석꾼집에서 동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가면, 이문열씨가 세운 광산문학연구소(광산문우)가 보이고, 그 옆에는 정부인 장씨예절관이 자리 잡고 있다. 두 건물은 두들광장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다.
세 번째 전통한옥체험관 동쪽으로 가는 길인데, 이 길에는 석계고택과 석계종택이 바로 옆에 붙어 있고, 50m정도 더 걸어가면 석간정사, 유우당과 정침을 둘러볼 수 있다.
네 번째로 석계고택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원리쉼터를 지나 정부인 안동장씨 유적비를 볼 수 있다. 유적비 맞은편에는 노계고택이 있다. 노계고택과는 밭을 사이에 두고 두들문화마을 유물전시관이 있고, 그 옆에는 석천서당이 나타난다.
원리쉼터에는 정부인이 가난한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심었다는 도토리나무가 큰 키를 자랑하고 있다. 정부인 기념비가 위치한 대 아래 바위에 ‘낙기대’라고 새긴 글자를 볼 수 있다. 낙기대에서 광록정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면 계단 끝에 ‘세심대’라고 세긴 바위를 볼 수 있다. ‘동대’는 석천서당이 위치한 대의 동쪽에, 세심대는 낙기대에서 광록정으로 올라가는 계단 끝 서편에 새겨져 있다. 서대는 광록정 아래 살림집의 서쪽 대에 새겨져 있다.
두들마을을 세로로 보면 광산문학연구소(광산문우)와 석계고택, 석계종택, 이우호가옥이 같은 축에 있고, 정부인 장씨예절관과 유우당 석천서당이 동쪽 축에 있다. 마을 안에는 각 건물마다 사방으로 통하는 골목이 있기 때문에 어느 길을 들어서든지 마을의 모든 건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

 

항재 이숭일선생

성명 : 이숭일(李嵩逸) , 1631년 ~ 1698년
본관 : 재령(載寧)
: 응중(應中)
: 항재(恒齋)
출생지 : 영해(寧海) 인량리(仁良里)
출신지 : 영양(英陽) 석보리(石保里)
분묘지 : 진보(眞寶) 민곡(敏谷)
내관직 : 장악원 주부, 의령 현감
초야(草野)의 미천한 선비, 상소를 올리다
이숭일(李嵩逸)은 선비로서 포부가 매우 컸다. 그는 “군신의 큰 윤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피할 수 없다. 비록 초야에 사는 미천한 선비라도 국가의 안위에 있어서는 관직에 있지 않다고 해도 간언(諫言)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 임금이 가뭄을 만나 재야의 어진 선비들에게서 간언을 구하자, 그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군덕(輔君德:임금의 덕을 돕다.)·급현재(急賢才:어질고 재주 있는 이를 구하는 것에 급히 하다.)·중책임(重責任:중책을 무겁게 여긴다.)·제민산(制民産:백성의 생업을 제정한다.)·수학교(修學校:학교를 수리한다.)·숭공도(崇公道:유학의 도를 숭상한다.) 등의 여섯 가지 조목을 당시의 급선무로 여겼다. 끝으로 구차하게 잠시의 편안함은 반듯이 경계해야만 한다. 옛날의 성대한 시절에 행한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는 반듯이 실시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는 임금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이숭일은 세상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덕을 기르고 도를 닦는데 힘썼다.
백성을 사랑한 목민관(牧民官)
1692년(숙종18)에 이숭일은 의령현감(宜寧縣監)에 임명되었다. 그는 본래 세상을 구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 임명되면서 “조정의 여러 관직은 문서와 씨름하기 때문에 의미 있는 일을 하기에는 진실로 어렵다. 오직 지방고을의 일은 백성을 위하는 것이니, 어떻게 온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해서는 먼저 민생의 이해를 따져서 기구를 없애거나 남겨두었으며, 아전들 가운데 자기 멋대로 일하는 자는 모두 파면하였다. 그는 고을 일을 행하면서 백성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보호하는 데 힘과 마음을 다하였다. 이에 의령 지역이 평화롭고 조용하였다. 사람들은 ‘이불자(李佛子)’라고 칭송하였다. 이 말은 ‘부처님 같은 이 사또’라는 말이다.
이숭일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 언제나 교화로써 근본을 삼았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풍교와 헌장의 약정을 두고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었다. 그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고을에 시행하여 자제로 하여금 배우고 익히게 하여서 점차 고을의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었다. 또한, 고을에 우수한 청년들을 교육하니, 인근의 젊은이가 구름처럼 모였다. 그는 의령 지역의 풍토가 맞지 않아서 고생하다가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족이야기

: 이함(李涵)
생부 : 이시명(李時明, 1590~1674)
: 안동 장씨(安東張氏)
형제 : 이상일(李尙逸), 이휘일(李徽逸, 1619∼1672), 이현일(李玄逸, 1627~1704)
집안 이력
시조는 알평(謁平)이니 신라태조 혁거세(赫居世)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고려 때 이우칭(李禹?)은 벼슬이 시중(侍中)이었고, 재령(載寧)에 봉해졌기에 그 이후 후손들이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이맹현(李孟賢)이 맑은 덕행으로써 명성이 자자하여 성종 때 홍문관 부제학과 해서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니, 5세조이다. 고조부는 이애(李?)이니, 통정대부 울진현령을 역임 하였고, 비로소 영해부로 옮겨 살았다. 증조부는 이은보(李殷輔)이니, 충무위부사직으로서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이함(李涵)이니, 의령현감으로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이니, 능서랑(陵署郞)으로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와 서예에 능한 장씨부인
장씨부인은 아버지 장흥효(張興孝, 1564~1633)에게 『소학(小學)』과 『사략(史略)』을 배웠다. 그녀는 이때부터 이미 문장에 능숙하였다. 19세에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거주하는 이시명에게 출가하였다. 그녀는 시부모 봉양에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남편을 섬김에 어진 부인의 도리를 다하였다.
장씨부인은 이상일(李尙逸)·이휘일(李徽逸)·이현일(李玄逸)·이숭일 등의 7형제를 낳아 지혜와 도덕과 학문으로 가르치고 기른 어진 어머니이다. 그녀는 시작(詩作)과 서예에 천재적 재질을 가졌으며, 꽃과 나비, 그리고 낙화(落花)에 능하였다. 지금 학발시(鶴髮詩)를 초서로 쓴 책 한 권과 한시 몇 편이 남아있어 그의 뛰어난 시작과 서예 작품을 알 수 있다.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권두기(權斗紀, 1659∼1722), 권개옥(權皆玉), 송지식(宋之?)
『논어』를 탐독하다
이숭일은 어려서 잡서를 많이 읽어서 학문에 방향을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그가 이현일(李玄逸)을 따라서 며칠 동안 강론하였는데, 간혹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에 이현일이 부당하다고 하고 ‘성현의 말에 절실한 것을 반복하고, 또한 『논어』를 입문서로 하라’고 하였다. 이숭일은 『논어』를 익숙히 익히고 나서 다른 서적을 보니 의미가 점차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숭일은 매양 학자들과 이야기를 하면, 먼저 『논어』를 익숙히 읽어서 최종의미를 발명(發明)하라고 권하였다.
『주역』을 배워야 하는 이유
이숭일이 의령(宜寧)에서 돌아오니, 오직 『주역』 한 부가 책상에 있었다. 그는 “역경(易經)을 배우는 중요한 이유는 진실을 위해서 허위를 대하여 384효(爻)를 모두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평범한 글에 불과하니, 비록 많이 읽은들 무엇 할까?”라고 하였다. 그가 독서하고 궁리하여 깊이 탐구하는 것은 모두 이와 같다. 그래서 장구(章句)의 훈고(訓?)를 하는데 힘쓰지 않고, 홀로 말 밖의 뜻을 얻으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역대의 역사서를 보는 데는 반드시 나라가 다스려지거나 어지럽고 편안하거나 위태로운 까닭을 탐구하였으니, 이숭일은 학문에서 중대한 것을 알았다고 할 만하다.

『항재선생문집』
『항재집』은 6권 3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두에 1808년에 이우(李?)가 쓴 서문이 있고 이어서 전체 목록이 있다. 권1은 오언고시 7편, 오언소시 4편, 오언근체 6편, 칠언소시 25편, 칠언근체 15편, 소(疏)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2~3은 서이다. 권2에는 김시임(金時任), 권해(權?), 권태시(權泰時), 권세구(權世矩), 정만양(鄭萬陽) 형제, 김상정(金尙鼎), 김수연(金粹然) 등에게 보낸 편지 16편이 실려 있다. 권3에는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 및 조카 이의(李?), 이재(李栽)에게 보낸 편지 22편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태극도설』과 『중용』 등에 대한 이재의 질문에 답한 편지가 들어 있다.
권4는 잠(箴) 1편, 명(銘) 1, 잡저 8편이다. 잠은 「자경잠(自警箴)」으로 1683년 입춘에 쓴 것이고, 명은 「극기명(克己銘)」이다. 잡저에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의 가장 뒤에다 특이한 행적을 덧붙인 「서홍공가장후(書洪公家狀後)」, 사단칠정에 대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론을 비판한 「서율곡이씨론사단칠정서후(書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後)」, 외조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를 고친 「일원소장도개본(一元消長圖改本)」과 그에 대해 변설한 「일원소장도개본후서(一元消長圖改本後敍)」가 있다. 또 의령현에 향약을 시행할 것을 고유하는 「의령현방유문(宜寧縣榜諭文)」과 향약에 대한 구체적인 시행 조목인 「향약정규(鄕約定規)」가 실려 있다.
권5는 서 2편, 기 1편, 제문 3편, 봉안문 1편, 상량문 1편, 행장 1편, 묘지(墓誌) 1편이다. 권6은 부록으로, 조카 이재가 지은 행장, 이현일이 지은 묘지명, 권두인(權斗寅)이 지은 묘갈명 및 문인 사우들이 지은 제문 9편과 만사 13편, 우곡(愚谷) 박신윤(朴身潤)이 쓴 일기이다. 묘갈명 뒤에는 1788년(정조 12)에 종증손 이주원(李周遠)이 묘갈 입석(立石) 때 쓴 추기(追記)가 실려 있는데, 저자의 아들 이식(李植)으로부터 현손 이우일(李宇一)까지의 가계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끝에는 유묵 4판이 첨부되어 있다.

 

정부인 안동장씨

성명 : 장씨부인(張氏夫人) , 1598년 ~ 1680년
본관 : 안동(安東)
출생지 : 안동부(安東府) 금계리(金溪里)
효녀, 효부 장씨 부인
어머니인 권씨 부인이 중년에 질병이 나서 여러 해 동안 낫지 않고서 고통하고 있으니, 장씨부인(張氏夫人, 1598~1680)이 울면서 밤낮으로 모시고 있었으며, 음식을 공양할 때에는 몸소 친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이 19세 때에 계실로서 이시명(李時明)에게 시집갔는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김에도 효도하고 근신하는 절차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남편을 받들어 섬기면서 근 60년 동안을 서로가 손님을 대접하듯이 공경하였으며, 모든 일을 반드시 남편에게 먼저 아뢰어 명령을 받은 뒤에 실행하였다.
계실임에도 전부인의 아들을 어루만져 주고 사랑하기를 자기가 낳은 아들과 차별이 없었으며, 아들을 가르치고 일과를 매겨 독려하기를 또한 지극하게 하였다. 전부인의 아들과 딸이 장가가고 시집갈 때에 이르러서는 혼수와 물건을 주는 것도 자기의 낳은 자녀들보다 많이 주었다.
누구에게나 은덕을 베푼 장씨부인
어린 여종을 돌보아 주기를 마치 자기의 딸처럼 하여, 그들에게 질병이 발생하게 되면 반드시 그들을 위하여 음식을 먹여 주고 간호하여 온전히 편안함을 얻도록 하였으며, 그들이 과실과 나쁜 일을 저지르게 되면 조용히 가르치고 타일러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가 감화하여 복종하도록 했으므로, 남의 집 종들도 이런 일을 듣고서는, 모두가 종이 되어 심부름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부인이 가는 곳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와 늙어서 자녀가 없는 사람과 늙어서 아내가 없는 사람과 늙어서 남편이 없는 사람과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불쌍히 여겨 구휼하고 도와주기를, 마치 남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근심처럼 여기고는 자신의 가난하고 곤궁한 이유로써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혹시 몰래 남에게 음식물을 보내주고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니, 이웃의 늙은이와 마을의 할미들이 모두가 그의 은덕에 감동하여 오래 살고 복 받기를 빌고서, 죽어서도 반드시 은덕을 보답하겠다고 축원하는 사람까지 있게 되었다.

 

가족이야기

생부 : 장흥효(張興孝)
집안 이력
장의(張儀)의 춘파(春坡) 정착 한 때 안동을 떠나 타지로 흩어져 갔던 안동장씨가 다시 안동에 들어와 살게 되고, 안동장씨 ‘춘파파’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은 20대 장의(張儀)가 안동 춘파(春坡)에 정착하게 되면서 부터라고 하겠다.
『대동보(大同譜)』에 의하면 장의는 초명은 유의(由義)로써 후릉참봉(厚陵參奉)의 직첩을 받았고, 벼슬에 뜻이 없어서 서울로부터 낙향하여 금계(金溪)의 위쪽 춘파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 시조인 장정필이 가문의 역사를 시작하였던 곳으로 돌아와 다시 안동에서의 안동장씨의 역사를 열어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20대 장의 때에 안동에 다시 정착한 안동장씨의 역사 속에서는 그 6대 후에 장흥효가 배출됨으로써 이 가문을 영남 유학사 속에 편입시켜 준다.
안동장씨 춘파파
안동장씨는 장정필(張貞弼, 888~?)을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장정필은 ‘3태사’ 중의 하나인 장길(張吉)과 동일 인물이다. 『대동보』의 「태사공 행적」에 의하면 장정필은 후에 벼슬이 진현전(進賢殿) 직제학(直提學), 예문관(藝文?)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고창군(古昌君)으로 봉하여졌으며,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태사(三重大匡保社壁上功臣太師)로 불리어졌다고 하며, 고려 태조는 그를 아부(亞父)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장정필은 만년에 중앙의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안동에서 타계하였다고 한다. 임종 시의 나이가 91세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의 호는 포음(圃陰)이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장정필로부터 시작된 ‘안동장씨’의 역사는 처음부터 화려하게 전개되어 나간다. 『대동보』에 의하면 2대 보천(寶千)이 이부상서(吏部尙書), 3대 금선(錦善)이 상장군(上將軍), 4대 광현(光賢)이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을 역임하는 등, 대를 이어 가면서 중앙의 높은 벼슬을 역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왕조의 전 기간 동안에 ‘안동장씨’는 중앙의 크고 작은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5대 장사길(張思吉)의 대에 이르러 또 한 번 중흥의 기회를 맞이한다. 15대 장사길은 13대 장수명(張壽命)의 셋째 아들 장려(張儷)의 자식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
『대동보』의 「희양공묘갈명(僖襄公墓碣銘)」에는 이 인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공의 이름은 장사길이고, 자는 창만(昌萬)이며 고려 태사 충헌공의 14대손 우정승 화령백(花寧伯)의 장자이다. …… 목은 이색(李穡)이 복제(復齊)라는 호를 붙여 주었다.” 장성진은 집안에 손이 귀하다고 한다.
그 점은 『경당집』에도 나온다. 경당 장흥효도 제대로 친손자를 보지 못하여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몇 대를 양자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경당 선생 이후 11대이지요. 지손들은 2백여 호 되지요. 안동하고 춘파 근처에 그 중 반 정도가 살고, 서울에 많고 …… 손이 귀하니,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였던 셈이지요. 재령이씨는 같은 대수인데 천 호가 넘었지요.”
장성진은 굳이 재령이씨와 비교하여 말하였다. 그만큼 재령이씨를 가깝게 느끼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이문열의 소설 『선택』
장흥효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그의 큰 딸은 이시명(李時明)에게 출가하여 6남 2녀를 낳았는데, 이현일 등의 자제들을 다 훌륭하게 교육시켜 냈으므로, 조선 역사가 배출한 모범적 여성상으로 칭송되곤 한다. 안동장씨의 자랑인 정부인 장씨는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학문이야기

학파 : 기타 학파
아버지를 스승으로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는 딸만 한 명 두었는데 기특하게 여기고 매우 사랑하여 『소학(小學)』과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가르쳤더니, 애를 쓰지 않는데도 글 뜻을 통달하게 되었다. 경당이 일찍이 문인 제자들과 원회 운세(元會運世)의 운수를 말하게 되자, 이 학설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 뒤, 돌아와 안방에 들어와서 부인을 불러서 그 학설을 물으니, 부인은 나이가 겨우 열 살 남짓한데도, 잠시 동안 말없이 잠잠히 앉아 있다가 그 수를 낱낱이 세어서 대답하므로, 장흥효가 아주 기특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아침, 저녁의 여가에 면전에서 가르치고 말로서 전하여 주니, 이것이 모두 성현의 격언이 아닌 것이 없었다. 부인도 아버지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믿고 공경히 지켜서 반드시 이것을 일용의 행사에서 증험하려고 노력 하였다. 그리하여 시를 짓거나 글씨를 쓰는데 있어서도 또한 배워 익히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잘하게 되었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1571~1629)이 일찍이 부인이 쓴 적벽부(赤壁賦)의 필체를 보고서는 놀라면서 말하기를 “필세가 굳세고 강하므로 동방 사람의 글쓰는 법과는 같지 않으니 중국 사람이 손수 쓴 필적(筆跡)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음식디미방』
음식디미방은 경북 북부의 안동과 영양 일대에서 살았던 정부인 안동 장씨가 말년에 저술한 음식 조리서로서, 17세기 중엽에 우리 조상들이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먹었는지 식생활의 실상을 잘 알려 주는 문헌이다.
경북대학교 도서관 고서실에 소장되어 있는 이 책은 한국의 음식사와 조선 시대의 음식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그 어떤 자료보다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
또한 이 책은 146개 항에 달하는 음식 조리법을 한글로 서술한 최초의 한글 조리서로 일찍부터 관계 전문가들에 의해 이용되어 왔다.
이 책은 앞뒤 표지 2장을 포함하여 전체가 30장으로 된 필사본인데 장씨부인이 직접 쓴 친필본이라 알려져 있다. 혹자는 이 책에 장씨 부인이 직접 쓴 서명이 없다는 이유로 장씨 부인의 저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존재 종가에서 장씨 부인의 저술로 전해지면서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되어 온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러한 의심은 쉽게 해소된다.
권말에 기록된 필사기의 내용과 장씨 부인의 생애가 잘 연결되며, 책의 상태와 외형적 특징은 이 책이 17세기의 것임을 보여 준다. 음식미디방에 저술자의 서명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은 이 책을 바깥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저술한 것이 아니라, 집안에 간직해 두고 집안의 부녀들에게 전해 주려는 목적에서 지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집안사람들이 보는 책에 굳이 글쓴이의 성을 밝혀 적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덧붙여 조선 시대의 여성들에게는 책을 저술하여 남기는 일이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것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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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9.22 15:50

    첫댓글 석계고택입니다. 석계종택은 아닙니다. 석계 선생 넷째 아들 항재 선생이 지은 집으로 항재 선생 후손의 소유입니다.

  • 작성자 14.09.22 17:50

    엄밀하게하면 석계고택도 아니고 항재고택입니다.항재 주손은 아니고 항재지하인 후손이 현재 소유하고 있습니다.

  • 14.09.22 19:02

    맞습니다. 항재고택입니다. 그런데 영양군청에서 문화재 지정을 석계고택으로 하였고 주로 칼럼 글 쓰는 분들은
    역사 고증없이 들은대로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고 있어서 역사 왜곡이 될까 우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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