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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하 시집 해설>
그리움과 사랑의 시학
이 태 수 <시인>
ⅰ) 이재하의 시는 다양한 빛깔과 무늬들을 거느리고 있다. 바라보는 방향과 그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극명하게 대비되는 정서와 문체文體들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지난날로 거슬러 오르며 정신적 본향本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고향이나 자연을 노래하는 일련의 시편들에는 향토적 서정과 순탄한 구문構文이 두드러지지만, 현실 속에서 시선을 안팎으로 교차시키면서 자기성찰自己省察에 무게중심을 둔 경우 은유나 상징, 초현실주의 기법까지 다채롭게 구사돼 난해성이 동반되기도 한다. 의미망도 전자의 경우 그리움과 연민憐憫, 회귀回歸의 정서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면, 후자에는 그보다 훨씬 복잡다단한 감정의 움직임과 그에 상응하는 내면세계가 표출되고 있으며, ‘재현되는 이미지’보다는 ‘그려지는 이미지’에 무게를 싣고 있다.
특히 복고성향復古性向을 벗어난 대부분의 시편에는 거의 모든 사물에 활유법活喩法이 끌어들여지고, 분방한 상상력이나 연상聯想에 의해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이 빈번하게 끼어드는가 하면, 원초적原初的이고 관능적官能的인 생명력이 투사되거나 투영되고 있는 점도 뚜렷한 특징을 이룬다. 또한 유장한 서술체 문장과 빈발하는 연상과 비약飛躍은 장단점을 함께 나눠 갖는 개성을 강화해 보이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름다운 사랑 꿈꾸기와 그 기다림이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지향하는 세계로 보이며, 그 길 나서기에는 갈등을 넘어 겸허하게 마음을 낮추고 비우면서 주어진 길에 순응順應하고 화해和解하면서도 새롭게 모색하고 도전하는 정신과 다짐이 담보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
ⅱ) 시인에게 고향은 그리움을 불러오는 추억의 공간이며, 정한情恨의 정서가 번져 흐르면서도 언제나 되돌아가고 싶은 정신적 본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회귀의 정서는 과거 지향적이거나 복고성향에 무게가 실리기보다는 더 나은 삶을 향한 내일에의 꿈꾸기에 주어지고, 그 세계로 나아가려는 길 찾기의 일환으로 보이게 한다. 옛 고향은 정신적 본향의 품안과도 같은 데 푸근하게 안기게 해 주는 곳이다. 그 품안에는 자애慈愛로운 어머니와 듬직하고 은근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기억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세월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형제애와 애틋한 연민, 잊히지 않는 기억들도 충만해 있다.
밤중 고향집
마당에 내려선다
동구 밖 묏등에서 본
보름달이 따라와
아직 자지 않고 뭐해? 한다
보름의 보름 동안, 어머니는
여기서 너 기다렸지!
하신다
―「어머니」 전문
아련한 향토적 서정과 정감이 돋보이는 이 시는 밤중의 고향집 마당에서 떠올린 사모곡思母曲이요, 몽매에도 잊히지 않는 모성애母性愛의 반추다. 밤중에 어머니 생각에 잠 못 이뤄 동구 밖 무덤을 찾고 옛집에 돌아와서도 달 밝은 마당에서 서성이는 심경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묏등에서 본 보름달이 마당까지 따라와 ‘나’(화자)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든가 “보름의 보름 동안” 그 마당에서 ‘나’를 기다렸다고 어머니의 사랑을 더듬어 되새김질하는 시인의 마음이 아리도록 아름답다.
그러나 시인이 기리는 그 어머니는 일가(큰집)에도 넉넉한 사랑을 베풀던 아버지와 다르게 오로지 자식 사랑이 유난했던 모습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다. 「노을에 묻다」에서 시인은 위수강가의 고향에 이르러 아버지가 “노름빚에 도망간 장조카 살려야 한다며 / 안계장터 쇠전으로 몰고나간 큰 누렁이”(팔려고 간 사실)를 회상回想하면서
"내 새끼는 다 죽일 작정이냐"
코뚜레에 매달리던 어머니
울음 팽팽하게 버팅기던 그곳
―「노을에 묻다」 부분
이라고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맞서던 장면 묘사를 통해 황소가 가산의 큰 비중을 차지하던 그 시절의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애환哀歡의 단면을 부각시켜 놓는다. 그렇다고 이 문맥文脈을 곧이곧대로 어머니가 아버지처럼 오지랖이 넓지 않았다기보다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역설하는 뉘앙스로 읽어야 할 것 같다.
이 같은 어머니의 사랑은 「어머니별」에서 “어떤 친구는 죽어서 / 천당 가겠다 하고 / 다른 한 친구는 극락 가겠다 하지만” 자신은 죽어서 그런 곳이 아니라 “고초당초 빛나는 / 은하수 치마폭 찾아가리라”는 다짐을 하고, 어머니의 사랑 못잖은 시인의 어머니 사랑을 낳게도 했을 것이다. 내세에 가장 좋은 세계에 가려 하지 않고 이 세상을 고초당초와 같이 매운 고난으로 살다간 어머니의 그 ‘치마폭’으로 가겠다는 애틋한 마음과 그 결기는 어머니 생애에 대한 지극한 효심孝心과 연민의 발로 때문이리라.
어무이―
저, 이제 돌아왔심더 시린 발끝 동동
울먹임이 당기는 문고리
가장 글썽이는
그별
―「어머니별」 부분
이 시의 끝부분인 “가장 글썽이는 / 그별”이라는 구절에서 느끼게 되듯, 밤하늘의 별 가운데 저승의 어머니별이 가장 글썽이는 별이며,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 역시 그렇다는 등식等式까지 내비친다. 게다가 어린 시절에 쓰던 사투리를 그대로 쓴다든가 “시린 발끝 동동 / 울먹임이 당기는 문고리”라는 표현과 ‘글썽임’, ‘울먹임’ 등의 어휘들도 절절한 호소력을 증폭시켜 준다.
시인의 기억이 가부장사회家父長社會의 아버지 모습에 다다르면 어머니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은근하게 그려지고 있으며, 우리의 전통적인 아버지의 내리사랑이 전통적인 정서의 빛깔로 예찬되기도 한다. 사라져버린 풍경이지만, 농촌 소년들은 방학 때 소를 키우는 일로 가사를 돕곤 했다. 이 일은 부자간의 유대감은 물론 상호 믿음과 사랑을 돈독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농촌 출신인 시인도 한여름(방학 때)에는 “마을 앞 방천 둑에서 / 늙은 황소 종일 풀 뜯기고 / 벌렁벌렁 시냇물 먹어 출렁거리는 / 잔등에 올라 집에 오”(「황소」)던 착한 소년이었고, 아버지도 그런 아들의 모습을 흐뭇하고 장하게 여겼을 것이다. 소가 야생野生의 풀을 뜯어먹도록 돌보고 그 등에 타고 귀가할 때의 장면 묘사는 토속적土俗的인 정취와 멀어져간 농경사회農耕社會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을 그림처럼 재현해 보인다.
마당에서 코뚜레 잡고
번쩍 내려주시던 아버지
우리 집 황소처럼
빙그레 웃으셨다
나는 소털 묻은 손으로
흰 옷 입은 늙은 황소를
왈칵 껴안았고
―「황소」 부분
부자간의 은근한 정을 떠올리기도 하는 이 시에서는 아버지와 ‘나’가 황소와도 친화력親和力이 두드러지는 공동체를 이루고, 황소의 속성이 아버지와 ‘나’에게, 아버지와 ‘나’의 성품이 황소에게 전이되거나 투사돼 하나로 아우러지는 모습이 연출된다. 더구나 아버지는 흰 옷 입은 황소가 되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속 깊은 사랑을 끼얹는 그 황소(아버지)를 왈칵 껴안는 정황은 황소를 매개로 이 삼자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친화와 유대紐帶를 극대화해 떠올리는 경우에 다름 아니다.
시인의 이 같은 휴머니티는 가족을 향해서도 매한가지 빛깔로 착색된다. 특히 한쪽 다리를 잃은 아우를 향한 연민과 형제애는 각별해 보인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아버지가 사준 자전거 타고오기에 비유하고 있는 「형제-아우에게」는 아우를 향해 “너를 내려놓아 가벼워진 나는 / 너무 멀리 앞바퀴만 굴러왔구나”라는 미안한 심정을 앞세우면서
나 떠난 뒤 너는
절뚝이며 걸었을 수많은 골목길과
철대문 빗장 불빛 아래 혼자 서성이며
녹슨 네 갈비뼈를 살대로 끼워, 몸으로
온 몸으로 굴렀겠구나
"난 괜찮아"
"우리 집안 앞바퀴만 잘 구르면"
네 목소리 짐칸에 싣고
요령소리만 요란히 달려왔구나
―「형제-아우에게」 부분
라는 회한悔恨에 젖는가 하면, “저물녘 강물처럼 아버지는 / 손잡고 앞뒤로 흐르라 했는데 / 일렁이는 바람모서리도 맞잡으라 했는데”라며 아버지의 당부(교훈)를 그대로 지키지 못한 자책감自責感에 빠져들게도 된다. 이 겸허한 자책감이 거느리는 휴머니티는 특히 “녹슨 네 갈비뼈를 살대로 끼워, 몸으로 / 온몸으로 굴렀겠구나”라는 구절에 농도 짙게 드러나 있으며, 마지막 연에서 형이 잘되기를 바라는 아우의 형 사랑 마음이 더욱 가슴 아픈 회한과 돈독한 형제애를 안겨 주었을 거라는 짐작도 해 보게 한다.
ⅲ) 시인의 고향과 고향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 역시 가족을 향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개복숭나무’가 그늘진 삶의 여인에 비유되고 다시 그 반대로 보이게도 하는 「개복숭나무」에서는 밭고랑 끝에 늘 홀로 서 있는 복숭나무와 “자기 이름 언문(한글을 비하한 말)으로 쓸 즈음 / 제 애비를 원망하며 마을사람들을 떠”난 여인을 겹쳐 바라보면서 그 애환을 다소 선정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 비애悲哀에 짙은 연민을 끼얹는다. “그녀의 삶 반경이란, 둥치에 묶여진 고리의 개”라는 표현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시대에 소외된 여인의 숙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아닐 수 없다.
한 여자 울며 가는
흰 신작로에
강아지 꼬리가 촐랑촐랑 따라간다
햇빛은 허겁지겁
그 뒤를 따르고
―「가을」 전문
조락凋落하는 가을의 시골 신작로 풍경에 착안한 듯한 「가을」은 그 길 위의 여자와 강아지, 햇빛의 함수관계를 미묘微妙하게 떠올린다. 한 행이 한 연을 이룬 간결한 문맥에 극도의 비애를 다져넣어 탱탱한 언어감각과 감성이 돋보이는 이 시는 흰 신작로가 환기하는 덧없는 숙명의 길과 그 길을 울면서 가야 하는 여인의 한 많은 삶을 극대화極大化한다. 까닭 모르고 여인을 따라가는 강아지와 허겁지겁 그 뒤를 따르는 햇빛은 그 숙명宿命의 길을 가는 여인의 비애를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도 한다. 고향의 자연이나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도 그런 비애와 연민이 번져 흐르는 건 거의 마찬가지다.
철골 멈칫한 하늘에
보름달이 떠올랐다
한 달 치 깊이가 더 푸르니
너도 추운 모양이다
저 푸른 들판에 온돌방 하나쯤 들어야겠다
닳은 난간을 한 계단 한 계단 뒷걸음으로 오르면
달의 발자국도 보이겠지
오늘은 저 달방에
언 몸 뉘고 싶다
―「여인숙」 전문
시인은 왜 하필 고향 밤하늘의 보름달을 푸른빛이 가득 찬 것으로 느끼고, 그 한 달 치의 푸른빛을 추위가 깊이 쌓인 들판으로 바라보며, 그 푸른 들판에 온돌방 하나쯤 들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더구나 달방(온돌방)이 마련된 보름달(푸른 들판)을 스스로의 발자국이 보이는 낡은 여인숙쯤으로 보고, 그 달방(여인숙 방)에 언 몸을 뉘고 싶다고도 하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현실적인 삶이 언 몸이 될 지경으로 춥고, 그 추위 때문에 고향 하늘의 보름달마저 자신과 같이 추워 보이게 하며, 그 고향의 보름달(푸른 들판)에 따뜻한 방을 만들어 나그네처럼 여인숙에 들듯 편안히 깃들고 싶다고 여기게 된 건 아닐는지……. “오늘은 저 달방에 / 언 몸 뉘고 싶다”라는 대목은 옛 고향을 잃어버린 나그네로서라도 고향의 품안에 깃들어 하루치의 안식安息이라도 얻고 싶다는 뉘앙스로 읽어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타향에서 삭막해진 마음에 낯설게 비친 고향과는 아주 다르게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고향의 정서는 푸근하고 따스하다. 자연 친화와 토속적인 서정이 번져 흐르는 기억 속의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회귀하고 싶은 본향으로 여겨지는 건 순전히 그 때문일 것이다.
새벽 바람소리가
양철지붕 흔들다 돌아눕는다
봉창에 비친 뒷산 부엉이 울음
내려선 마당
부엌 아궁이에 홀로 타는 청솔가지
밤새 찍힌 오소리 발자국 위
소복소복 덮는 감꽃
밤비에 씻긴 장독대 위에도
흩어지는 저 순백의 침묵
피어오른 물안개를 가른 여명에
후득, 후두득 얇아지는 잠결
이슬 녹아 섞인 차가운 시냇물 같은
초여름 새벽 어머니 물동이에 떨어지다
출렁이며 가슴까지 환하게
밀려왔던 고통, 오래되어 빛바랜
그래서 언제나 흰,
―「감꽃」 전문
어린 시절 산골 고향집에서의 비 그친 뒤 초여름 새벽 풍경을 재현한 이 시는 시인이 왜 현실 너머의 잃어버린 날들을 그리워하며 회귀하고 싶어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문명文明의 이기利己에 물들기 이전의 자연과 그 속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였으며, 어둠 속의 비가 갠 여명의 싱그러운 생명력 역시 자연 그대로의 화해와 평화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게다. 떨어지는 감꽃은 물론 부엉이 울음도 마당으로 내려오는 하강 이미지가 주조를 이루고 있음에도 상승 이미지가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점도 자연과의 친화와 화해의 분위기 탓일 것으로 보인다.
이 시에서 또 다르게 눈길을 끄는 구절은 “밤비에 씻긴 장독대 위에도 / 흩어지는 저 순백의 침묵”과 “물안개를 가른 여명”, “이슬 녹아 섞인 차가운 시냇물”이 환기하는 이미지이며, “가슴까지 환하게 / 밀려왔던 고통”이라든가 빛바래서 언제나 희다는 역설 또는 반어법反語法 또한 그런 대목에 다름 아닌 것 같다.
자연은 고향의 그것이 아니더라도 시인에게는 거의 마찬가지의 안식과 깨달음의 대상이 된다. 「호미곶」에 묘사되는 바와 같이, 침묵沈黙으로 일관하는 자연(바다)은 “말들의 파고에 지치고 밀”리는 현실적 삶의 흔들림을 잡아 준다고 본다. 그 느낌은 현실적인 삶에 대해 마음 흔들리며 회의하다가도 눈을 감은 채 ‘소이부답’하는 바다가 삶은 “하늘 향해 손바닥 하나 밀어 올리는 일”이라는 깨달음도 안겨 주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ⅳ) 그렇다면 시인에게 삶의 현장인 일상적인 현실과 그 속에서의 삶의 모습은 어떤 빛깔로 물들어지고, 가장 절실한 아픔과 고뇌苦惱가 어떤 결과 무늬들을 빚고 있는지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현실 속에서 “산다는 것은 피었다 지는 꽃이 되어 / 모두 가벼워지는 순간”(「간이역」)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사는 일은 / 울음으로 삭풍 앞에 늘 두 발 세우는 것”(「송골매 1」)이라고 토로한다. “해가 뜰 때마다 / 생각의 무덤을 지나서 // 건너온 다리마저 부셔 버”(「숙명」)린다는, 어쩌면 시지포스의 바위 굴리기와도 같은, 도로徒勞에 다름 아니라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네게로 가는 다리를 건너고 / 또 하늘의 무지개 건너”(「숙명」)가야 하며, 「껍질」에서도 묘사되는 바와 같이, 그런 와중에 며칠 몸살까지 앓고 난 뒤에는 두릅나무 같은 등 뒤에 부스럼이 생기고, 염소 뿔 같은 각질이 더럭더럭 붙는 극도의 비감悲感에서 자유롭지 못해진다. 게다가
삭풍의 칼날에도 굴한 적 없이
몸뚱이는 상처의 각질이 밀어낸 가시로
우듬지를 부풀리기도 했는데
쪼아 대는 햇살에 틈을 열어두어도
새들은 날아들지 않았다
―「껍질」 부분
는 비애나, 밤이면 “별을 세며 새벽까지 몸을 비틀” 수밖에 없고, 자신의 허상虛像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의 바깥을 언제나 서성거릴 뿐인 ‘껍질’이라는 절망감에도 빠져든다.
해파리가 떠다니는 거리
느림이 이동시키던 내 꿈의 행보,
먼지들 청소기에 빨려들 듯
조개는 복개된 구멍으로 흘러든다
<중략>
기억 속 갯벌 구멍에 들고 싶은 나,
먹구름 도시 하늘에서 물빛 구멍을 찿다니!
매일 구름 구멍을 나와 벌름거리는 아가미로
벌건 수초 앞에서 서성였다니!
동반한 속 쓰라림은 어쩌면 당연한 것
떠밀려 흘러드는 지하도 입구에서도
조개는 늘 두리번거려야 했던 것
혹, 저 내려가는 계단에 그물은 없는지
혀 적셔주던 파도자락이
매일매일 그립다
―「매일매일 구멍들」 부분
이 시에서 시인의 현실적 삶은 바닷가의 갯벌이 아닌 복개覆蓋된 구멍 속에서 사는 조개나 물고기에 비유되며, 그 상황은 먼지가 청소기에 빨려들 듯하고, 복개된 구멍이 도시의 지하도로 환치換置(구체화)되면서는 그 내려가는 계단에 덫이 있을지 우려하는(불안한) 정황으로 바뀐다. 시인이 살아가는 도시(현실)는 먹구름 드리우고 해파리들이 떠다니는 바다 같으며, 그 바다의 벌건 수초水草 앞에서 서성거리거나 떠밀려 복개된 구멍(지하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 두리번거려야 하는 곳이다. 이런 정황 속에서 속이 쓰리고 파도자락과 갯벌이 언제나 그립지만, 그런 꿈의 행보는 느릴 뿐 늘 어두운(불안한) 구멍으로 떠밀릴(흘러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 않은가.
산길처럼 구불구불한 내 삶
검버섯 손등이 가꾸어낸 햇살에
거울로 들여다본 들녘은 황량하다
골짜기 건너 뛰어온 새벽마다
상 위 놋그릇은 무거운 날개
안개둥지 속 모시나비 퍼덕인다
―「놋그릇 밥상」 부분
그래서 밥상 앞에 앉아 다소 안도할 때마저 삶은 굴곡진 산길 같고, 황량한 들녘 같으며, 새날이 밝을 때마다 마주하는 밥그릇(놋그릇)이 퍼덕이는 안개둥지 속 모시나비 같다고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나뭇가지의 자벌레를 보면서는 “하루를 재어 머무를 때와 떠나야 할 때를 / 정확히 알고 있는 너를 보면 / 오늘을 허투로 살아온 내가 부끄럽다”(「자벌레」)는 자괴감自愧感에도 젖게 된다. 그렇다고 시인이 이런 현실에 좌초되거나 좌절하지 만은 않는다. “삭풍의 칼날에도 굴한 적 없”다는 진술은 그 적극성을 말해 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은밀하게나마
겨우내 언 땅 밑 한 톨 보리알이
오뉴월 푸른 하늘을 꿈꾸듯
바위 틈 한 촉 돌미역이
태풍 속 수부의 손길 기다리듯
―「파문」 부분
보잘것없이 작지만 설렘과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는다. 더구나 뒤돌아보지 않겠다면서도 “이 세상 그 어떤 뜨거움도 / 처음에는 다 미지근하였을 테니까”라고 미지근한 설렘(희망)이 뜨거움을 잉태한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그 뜨거움을 기다리는 꿈에 불을 지피는 초극超克 의지를 완곡하게 드러내 보인다. 「매일매일 구멍들」은 은유나 상징 기법 때문에 다소 애매모호한 의미망을 거느리기도 하지만, 그런 심경도 완만하게 내비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ⅳ) 다분히 자의적으로 그의 시가 거느리는 몇몇 단면斷面들을 들여다보았지만, 그의 시편들은 대부분 현실 속의 파토스나 고향과 자연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쉬운 구문으로 형상화하기보다는 그보다 훨씬 복잡다단한 감정의 움직임과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데 주어지고 있다. 부언하면, 그의 대다수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시에 뿌리를 두면서도 그 길을 따라가기보다 나름의 새로운 길을 트고 닦으려는 모색과 도전의 빛깔을 띠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현실적, 내면적 삶의 밝음과 어둠들을 그에 상응하는 복잡다단한 언어들로 길어 올리는 데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복합적인 의미망 때문에 난해하기도 한 일련의 시편들에는 활유법(의인화) 구사와 그 반전, 상징과 초현실주의 기법 구사 등으로 언어의 굴절과 비약이 빈발하는가 하면, 연상에 의해 내면세계(심리상태)가 예기치 못할 방향으로 치닫는 장면들도 빈번하게 연출된다. 또한 그 의식의 근저에는 거의 어김없이 ‘리비도’라고 불러도 좋을 원초적이고 관능적인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으며, 유장한 서술체 문장과 비시적인 분위기로 경사짐에도 불구하고 그런 요인들이 되레 개성을 강화해 보이는 양상을 띠고 있다.
목련꽃 필 무렵의 봄비와 그때의 정황을 그린 「목련제祭 1」에는 원초적이고 관능적인 생명력이 두드러져 있다. 봄비가 내리는 모습을 “아파트 정원 미꾸라지 떼 가득하다”고 빗줄기를 미꾸라지로 바꿔 바라보고 있으며, 그 부드러운 빗줄기에 “이 미꾸라지들은 지난 겨우내 눈과 찬바람을 먹고 / 초승달 문지른 기러기 날개깃도 삼켰는지 / 살이 부드럽고 뼈가 무르다”고 육감적인 상상력을 분방하게 투사해 놓기도 한다.
시인이 이 같은 관능적 상상력은 다채롭고 분방하게 퍼져나간다. 비가 내리는 장면을 미꾸라지가 구름과 놀면서 밤낮 사랑에 등이 젖어 푸른 바다처럼 불어난 새끼들을 구름 아래로 쏟아낸다든가, 그 미꾸라지들에 햇빛이 맑게 씻어 주는 비누가 되기도 하고 찬란한 빛깔의 양복을 입혀 준다는 비약에도 그치지 않고 있어 그야말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미꾸라지들은 옥상에 머리 처박고 떨어져
서로 아우성치다가 다시 뛰어내려
겨우 턱걸이하는 꽃망울
반만 벌린 꽃술로 정액처럼 흘러든다
왕성한 성욕이다, 봄비는
꿈틀꿈틀 기어가는 미꾸라지
푸르스름한 꽃의 자궁 속에
검은 알 무수히 슬어놓는다
―「목련제祭 1」 부분
인용한 부분은 옥상에 떨어진 빗물들이 목련꽃 봉오리의 꽃술에 흘러든 정액精液(정자)이고 그 꽃봉오리의 자궁에 검은 알들을 슬어 놓는다는 얘기로 요약될 수 있지만, 이 같은 발상이 어디 예사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내린 봄비를 꿈틀꿈틀 기어가는 미꾸라지로 보고 왕성한 성욕性慾으로 읽는 발상은 그만의 몫이 아닐 수 없다.
사과가 열리고 익어가는 과정을 “벌 나비의 푸른 욕정을 / 햇빛표 캐시미론 이불이 둘둘 / 이때, 바람은 미쳐 버려 / 온 동네 분홍치마 속을 들쑤셔 놓았다나요”(「사과가 익어가는 것」)라든가, 사과가 익어 떨어지는 모습도 “나무가 문을 열어졎히자 / 울컥! 피 토하며 떨어지는 / 욕망 하나”(같은 시)로 보는 상상력도 같은 맥락脈絡으로 읽힌다.
원초적이고 관능적인 이미지 구사는 어떤 사물이나 여성, 심지어는 아내와 어머니에게도 예외가 없다. “도로변 쇼윈도 벗겨진 마네킹을 창문 너머 훔쳐보다가 / 팔등신 기억을 도둑맞는 느티나무 / 갓등 아래 말라가고 있는 새순 자리 / 그녀의 비틀린 유두가 물오르던 상상까지 훔쳐내고 말았다”거나 “가슴 털 숭숭한 가을 느티나무는 / 난로가 달구어 들썩이는 주전자 뚜껑 같다”(「마네킹, 기억을 도둑맞다」)는 표현, 느티나무와 아내를 겹쳐 바라보면서 “튼 뱃살 덮은 푸른 잎 느티나무에서 / 옷 벗은 아내의 터진 옆구리를 엿본다”(같은 시)는 표현은 그중 약과다. 「전등 켜는 장독대」에서는 장독을 어머니로, 감나무를 홀아비로 의인화하면서 주변의 모든 사물들까지 관능의 도가니로 끌어들인다.
옆집 홀아비 감나무는
안방까지 불쑥불쑥 주먹손
들이민다
그때마다 굴곡진 어머니 젖가슴은
항아리처럼 부풀었다
속 엿보는 늙은 가지 아래
동여매고 살아온 장독 어머니
발효의 제 몸 안이 궁금했는지
오늘도 반질거린다
<중략>
팬티 고무줄 탱! 끊기 위해 매달려 있는
까치밥 홍시에게 부끄러워진 항아리
쭈글쭈글 맨가슴이다
어머니 첫날밤 오 촉 전등인 양
매달린 홍시는, 삭혀온 청상의 뚜껑
흰 치마폭 찢을 황홀경에
눈빛 붉다
오래 참아온 흙담도 더는
버틸 수 없어 무릎을 접는 하오
망사치마 속살이 노랗게 익어가는 항아리 곁
쇠파리 교성에
응달 꽈리 아랫도리도 탱탱해진다
―「전등 켜는 장독대」 부분
감나무와 그 옆(아래)에 놓인 장독은 성감대性感帶를 활짝 열어놓은 관계다. 감나무(홀아비)가 도발적挑發的이지만 수동적인 장독(어머니)도 내숭이 안으로 달아올라 뜨겁기는 한가지다. 그 내숭이 오래 발효돼 그 바깥으로도 윤기가 번져나며, 오래된 장독이 감나무에 마지막으로 매달려 있는 감에게 부끄러운 건 첫날밤 희미한 전등 같고, 그때처럼 치마폭 같은 뚜껑에 들이닥칠 때가 올 것이므로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이런 표현에다 이 시에서의 관능미는 홍시가 팬티 고무줄을 끊을 때(떨어질 때) 흰 치마폭(장독 뚜껑)을 찢을 그 황홀경, 그 기다림과 설렘, 흙담도 더 못 참는 가운데 쇠파리가 교성을 지르고 응달의 꽈리도 아랫도리도 팽팽해진다고 그려져 절정에 다다른다. 시인은 이같이 모든 사물을 활유법으로 의인화해서 원초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관능적인 시적 묘미를 탱탱하게 극대화한다.
하루살이 소복한 알전구 아래 어머니는
부엌 무쇠솥 열고 아버지 불알보다 더 큰 감자를
굵은 젓가락으로 푹푹 찔러보며
찌든 얼굴에도 찌르르 전류가 흘렀다
―「우리 집 전기 처음 들어오던 날」 부분
불 켜진 알전구, 무쇠솥에서 익는 감자와 전류電流의 함수관계를 관능적으로 묘사한 이 시에서도 아버지 불알보다 더 큰 감자를 굵은 젓가락으로 푹푹 찌르는 어머니 얼굴에 전류가 흐른다는 표현은 발칙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감춰져 있는 원초적인 생명력마저 진솔하고 걸쭉하게 들춰내 보이는 경우에 다름 아니다. 하루살이 소복한 알전구와 불 지펴진 무쇠솥이 환기하는 관능미도 이 시의 지나쳐 버릴 수 없게 하는 시적 장치들이다.
때로는 성과 속을 넘나들며 성聖스러운 것들을 속俗된 것으로, 속된 것들을 성스러운 것으로 뒤집어가며 그 이면裏面을 들춰내기도 한다. 속세俗世의 대중목욕탕 풍경을 성스러운 고해소告解所에 대입시켜 “아버지도 아들도 소문 접한 변 씨 아저씨도 / 꽃대 같은 거시기 흔들거리며, 다시 / 고해소 창틀을 넘어선다”(「고해소 목욕탕」)고 묘사하는 경우나 「은퇴한 숲」에서 숲이 승려로 둔갑해 “파계한 스님은 아랫도리 젖은 / 달빛과 밀애를 나눈다”며, “언제쯤 저 스님은, / 팔부능선 서성거리는 눈보라 딛고 / 참회의 맨발로 산정에 설까”라고 그리는 경우는 그 부분적인 예에 지나지 않는다.
“허리 잘록한 처녀들이 / 배밭 한 가운데에서 / 아랫도리 벗겨진 채로 당했다는 소문이 / 불국사 아래 파다하게 번졌다”로 시작되는 「배꽃의 변명」은 소문대로 스무 해 전 정관 수술한 늙은 농부가 야밤에 “처녀막 사이사이 삽이며 곡괭이 짓으로 / 달의 씨앗을 밤새 심어 놓았는지 / 아무도 모른다”며, 남산골의 흰 배꽃들을 “이차돈이 흘린 순교의 흰 핏빛”과 연계시키면서
저 놈들은 모두 늙은 농부의 씨앗인지
순교자의 환생인지
흰 핏물 가득 출렁이는 봄의 가랑이 사이로
달의 애기들이 내미는 콩알 얼굴들
씨앗 출생을 다 아는 듯 서쪽으로 고개 돌리는
아랫도리 잘린 남산 미륵불
눈빛이 붉다
―「배꽃의 변명」 부분
고 비약을 거듭한다. 하지만 기실은 남산골 배밭에 만개한 흰 배꽃들이 정관수술精管手術 효과가 없는 농부 소생蘇生인지, 이차돈의 환생還生인지 알 수 없다는 회의懷疑는 그리 중요한 문제로 아니라 흰 배꽃들의 생명력을 강조해 보이기 위한 너스레쯤으로 보면 잘못 짚는 걸까. “흰 핏물 가득 출렁이는 봄의 가랑이”라는 대목은 봄의 생명력을 관능적으로 극대화한 경우에 다름 아니며, 배꽃을 ‘달의 애기’로 보는 데서도 그런 느낌이 든다. 아무튼 그 누구의 힘으로든 야밤에 생성된 그 비밀스러운 신비가 빚은 조화는 그만큼 경이로울 수밖에 없고, 아랫도리가 잘렸지만 ‘눈빛이 붉은’(역시 관능적이지만) 남산 미륵불彌勒佛은 그 신비를 알고 있을 거라는 대목에서도 암시되고 있듯. 배꽃은 스스로 변명할 여지가 없이 대자연의 봄이 빚은 야밤의 관능의 절정絶頂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시인이 「면벽수행」에서 “앞에 놓인 칼국수 그릇에서 / 가야산 성철 스님을 본다”며, 칼국수 그릇의 면발을 보면서 벽과 마주앉아 묵언수행黙言修行하는 고승高僧을 떠올린다든가, 먹으면서 남은 면발에도 죽비竹篦를 내리치고 싶다는 대목에서는 속(속세)에서 성(높은 경지)을 희구하는 마음자리가 가까이 집힌다. 이 점은 이 시인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내 보이는 경우이며, 궁극적인 지향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ⅵ) 시인은 겸허하게 자기성찰을 하면서 지난날과 지금․여기를 교차시키면서 바라보고 들여다본다. 궁극적으로는 지나온 숙명의 길을 거스르려 하기보다 마음을 낮추고 비워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그 꿈에 불을 지피려 한다. 하지만 그 꿈은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운명에 순응하면서 최선의 길을 가려는데 주어지고 있다.
시인은 어린 시절 송아지가 자라 코뚜레를 채울 때를 떠올리면서는 “어미 따라다니며 망나니로 살아오다 / 오늘 처음 씌워진 멍에가 평생 멍에가 된다 / 목덜미 피고름이 딱지로 겹쳐 / 굳은살 돋을 때까지 벗지 못하는 걸 아는지 / 머리 쳐들고 발버둥 쳐도 코뚜레를 잡은 / 내 손바닥에도 물집이 생기고 또 터진다”(「멍에」)고 회상한다. 송아지도 코뚜레가 채워지면 그 코뚜레가 평생 멍에가 된다는 걸 아는지 발버둥 치던 모습을 상기하면서 그 발버둥 때문에 손바닥에 생기고 터지던 기억이 선연할 뿐 아니라 지금도 “내 손바닥에 생긴 작은 생채기에서 / 부푼 송아지 목덜미를 본다”고 할 정도로 송아지의 멍에와 자신의 멍에를 함께 들여다기도 한다.
그 멍에를 숙명처럼 쓰고 오는 길 위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 가장 소중한 덕목德目이었을 것이지만, 그 밝음과 어둠은 피할 수 없이 엇갈릴 수밖에 없었고, 언제나 목마르게 했을 것으로도 보인다. 달빛에 빗대 아름다운 사랑을 추구하는 「달빛 사랑」과 산불에 탄 갈참나무를 끌어들여 그 좌절감을 떠올리는 「산불」은 대조적인 시각으로 ‘사랑’을 노래한 시다.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을
이슬에 씻은 대소쿠리에 차곡차곡 쌓아
내 창가에 걸어 둔다
<중략>
아직은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음에 기뻐하는 그대여
명주실타래처럼 긴긴
달빛 풀어내어 조금씩
더 조금씩 먼 방패연 당기듯
네 방문 열고 내게 깃들어 주기를
―「달빛 사랑」 부분
사랑이 아름답다는 말은 시뻘건 거짓말
내 생각에, 타버린 네 가슴은
그 잿빛 하늘 광풍 속에 애써 죽지 않으려고
타지 않고 살아남으려
마지막 푸른 핏빛 다 토하는
―「산불」 부분
「달빛 사랑」은 형언形言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랑하는 마음을 곡진하게 그리면서 그 성취를 향한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으며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밝음’에 주어지고 있다면, 「산불」은 무화될 수밖에 없는 사랑에 안간힘을 쏟는 ‘어둠(그늘)’에 무게가 실려 있다. 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빛깔의 사랑은 ‘나’와 ‘너’ 사이에 상존常存하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주목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전자의 사랑을 갈구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임은 두말 할 나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시인은 과메기의 고장인 구룡포로 무대를 옮겨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 / 절망조차 함께 꿰는 것”(「구룡포 연가」)이라고 역설하는 데까지 아나간다. 더 나아간 「사랑의 인사」에 이르면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며 품안에 끌어안고 끊임없이 반추한다.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1957~1934)와 그의 아내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의 사랑 이야기를 우리나라의 당시 정황까지 삽입해 길게 서술하면서 그들의 지극한 사랑을 흠모하고, 명곡 ‘사랑의 인사’를 애청하는 심경을 펼쳐내 보인다.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이 시의 주제가 되고 있는 ‘사랑의 인사’는 엘가가 1988년 피아노곡으로 작곡했다가 그 이듬해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이래 다양하게 편곡되면서 널리 사랑받고 있는 명곡이다. 귀족 출신인 앨리스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분이 낮은 엘가와 결혼해 훗날 엘가가 유명한 작곡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헌신적獻身的으로 도왔으며, ‘사랑의 인사’는 약혼 당시 앨리스에 대한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작곡한 것으로 전한다.
애절한 선율이 밀어 올리는
꽃마차 바퀴소리가 오늘을 길게 흔들어 놓는다
내 첫사랑의 울림인 양
귓속 달팽이관 터널에 흘러드는 아침햇살,
엘가와 엘리스는 오늘의 우리 집 꽃밭에서도
식지 않는 사랑의 인사를 한다
―「사랑의 인사」 부분
이 시집에서 가장 긴 이 시의 마지막 연聯에서 시인은 이같이 ‘사랑의 인사’가 자신의 첫사랑의 울림으로 승화昇華시키며 듣는가 하면, 귓속으로 흘러드는 그 애절한 선율을 아침햇살과 포개어 그들의 식지 않고 아름다운 사랑이 자기 집 꽃밭에서도 인사를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엘가와 앨리스의 사랑에 대한 헌사이면서 자신의 사랑으로 끌어당기는 사랑 노래라 할 수 있다.
시인의 이 같은 사랑의 마음은 겸허하게 마음 비우고 자연과 화해하고 교감하면서 너와지붕 산막山幕과도 같은 집짓기로서의 시의 길을 가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어떤 길」의 뒷부분을 인용하면서 그의 시가 거듭 진화하고 널리 사랑 받을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부리 짧은 뱁새의 울음조차 나뭇가지 사이로
몽땅몽땅한 시구를 마구 뿌려
햇빛과 뒹구는 푸른 길을 맨발로 걷고 싶었다
흘러내린 말들이 가지 끝에 풍경으로 매달려
이제는 돌아누운 저 노구
마을 앞 이백년 노송 검은 둥치 속
내 등뼈가 굽은 서까래로
매주인 양 주렁주렁 삭고 있는,
길 위에서 길을 다 잃어 버리는
너와지붕 산막 한 채쯤 갖고 싶다
―「어떤 길」 부분
첫댓글 목련제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옮겼네요... 잘 읽었습니다..이재하선생님, 축하드립니다